|
25:1-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잠4:23 눅5:27-39
새해부터 우리나라는 대통령탄핵이라는 악재를 만나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탄핵반대 집회에는 수십만명이상이 집결해도 언론에서는 이것조차 보도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나라의 언론이 심히 좌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중파TV조차 어느 한 쪽만 보도하는 것이 정말 화를 내게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무관심했던 20-30대들이 깨어나면서 한남동 대통령관저앞에는 칼추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고 무대위에서 외치는 자들도 대부분 전국에서 올라온 청년들 위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 새롭게 변한 모습이다. 나라가 존재해야 젊은이들도 안정된 사회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전국 각지로부터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갈 것인지는 우리 국민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지금이야 말로 건국이후로 가장 어려운 난관에 닥쳐 있지만 그래도 믿는 자들이 국가와 나라를 위해 불의한 자가 권력을 탈취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선하심만 구하여야 할 때이다. 분명한 사실은 올해야 말로 지난해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셨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새해가 없고 매일 똑 같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세상일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 꿈과 소원을 기대하지만 성경은 해아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들에게 새해를 맞이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새것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떴던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왔던 계절이 올해에도 다시 오리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새것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거듭나는 것만이 새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올 한해에도 우리들을 보호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한 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024년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탄핵건수가 8건으로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로 입법내란에 의한 탄핵정국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야당의 줄탄핵으로 인해 국민피로도는 말로 다할 수 없으며 반미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그들이 한 줄탄핵은 과거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였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이 반드시 이 거대야당에 응하리라고 봅니다. 한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파멸케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2025년에는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보시면서 우리들은 정치불안을 통해 이 나라를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새해에도 우리를 변함없이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1) 삶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으로부터 고난받는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배반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아세라) 같은 신들을 섬겼기 때문인데 바알은 농사의 풍요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남신이며 아스다롯 즉 아세라는 다산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여신이다. 주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농사풍요도 자녀의 생산도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족속들이 믿던 신을 믿어야 잘 살게될 것이라고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이와 같은 우상들을 섬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삶에서 우상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전히 우리로부터 영광을 홀로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므로 믿는 사람들은 우상에게 일혹의 눈길도 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우상을 얼마나 숭배할까요? 새해 첫날 산마다 일출보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수백만명도 넘는데 그들 자신들은 태양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태양신 섬기는 자들이 새해 새벽에 일출보러 나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아니 교회다니면서 우상을 숭배한다고? 네 교회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우상은 섬기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정말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일2:15).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쾌락이든 돈이든 자식이든 아내든 남편이든 그 무엇이라도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속에 위와 같은 우상들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나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들은 결국 “나”인 셈이다. 즉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기쁘게 하면 결국 내가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알고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어도 이런 “나”라는 우상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우상숭배자들은 천국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6:19-20). 우리 몸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셨으므로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지금 한국교회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란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교회들 마다 가득차서 불신자들조차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였는가 할 정도이다(빌3:19).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살리고자 하늘나라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멸시천대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런 망극한 은혜를 잊고서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히 멸망 받을 불신자들처럼 산다면 우리들은 배은망덕한 자로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인이 아닐 수 없다.
(2) 매일 86400원을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매일 하루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 24시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1시간은 3600초이므로 86400초인데 돈으로 환산하면 86400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돈이 매일 통장계좌로 입금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쁠까? 그러나 그 돈은 저축할 수 없으며 그날 밤 자정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소멸된다고 생각하자.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든지 그날 선물로 받은 그 하루를 함부로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고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시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present)이므로 현재(present)를 선물로 보는 것이지만 이 시간의 소중함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재수하는 학생에게 물어본다면 일년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미숙아를 낳았던 산모에게 물어보면 한달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선데이 주간지 편집자에게 물어보면 한주간의 소중함을 말하여 알려줄 것이다. 일용근로자에게 물어보면 하루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이별을 하는 연인들에게 물어보면 한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방금 기차를 놓친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면 1분의 소중함을 알 수 있고 스피드스케이트에서 은메달 딴 선수에게 물어보면 1초의 소중함을 알 수 있듯이 이처럼 사람마다 시간의 소중함이 다 다를 것이다.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처럼 시간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지난 한해도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금년 한해에도 해와 달이 우리들을 상치 못하게 할 것이고 우리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잠4:23).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거짓없이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가리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세리 마태가 주님을 따르고자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을 때 참석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지금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기는 날들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양가죽 부대에 담아둔 새 포도주는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내뿜어 팽창하기 때문에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게 되고 술도 쏟아지게 되는 것을 비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새 술은 새부대에 넣으라는 의미
양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면 술을 보관하는 용기로 사용되었는데 그런데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중에 가스가 발생되기 때문에 새 부대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팽창하는 가스를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발생하는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이 말씀의 핵심은 나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속에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술'이란 예수님의 복음과 새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낡은 부대'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은 세 가지 측면에서 형식주의로 빠져들었다.
첫째는 자신들만 '율법'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둘째는 자신들만 '할례의식'을 한다는 자부심.
셋째는 자신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
이런 선민의식이라는 자부심이 바로 낡은 부대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외적인 형식주의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인 중에 주님을 메시야로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몬과 84년 동안 과부로 살아오던 안나뿐이라는 사실은 전통에 사로잡힌 낡은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저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면서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눅5:32).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의사로서 병자인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라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야 들여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신 새로운 교훈은 바로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새 술의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터지는 것처럼, 유대교의 율법적 신앙은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 준수나 도덕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를 자복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잠언 4장 23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인데 새 부대는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낡은 부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곧 새 언약이요 새 포도주이니 그분을 믿는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임을 의미합니다. 2025년에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자기 갱신의 노력을 끊임없이 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해를 토대로 새로움을 개척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를 성장시키며 윤택하게 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한 짧은 세월도 이미 반은 써버린 상태라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부와 명예는 왔다가도 사라지는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정력을 거기에 쏟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정말 예수님안에서 새 부대인 새 마음이 되었으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범사에 감사해야합니다. 내 부모형제들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또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감사하고, 이웃과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오늘도 내가 일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늘 이웃을 사랑하면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엔돌핀도 솟아나서 건강과 젊음도 유지할 수 있고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내 주변에 나에게 말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것처럼 큰 힘이 되어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의 취약점들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내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오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동안 내가 남에게 짐이 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나를 위해 남을 얼마나 속여왔는가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는 우리 의식들을 바꾸었을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정말이지 마음만 바꾸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2025년엔 우리들이 변하여만 예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이며 그 마음은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는 공간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꾸며 나가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새해에는 영육간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몇년전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 폐가 약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평소 폐가 건강하다면 코로나병균은 몸에 들어오더라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몸은 영과 혼과 육이 한 몸으로 되어 있으므로 육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외형이고 실은 영혼이 우리 몸의 실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선 신앙생활이 필수요건이며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통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현대인에게 건강을 해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온다고 해도 찬송과 기도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예배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육을 위해서는 식사도 거르지 말고 운동도 꾸준히 하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말씀의 양식을 먹고 기도로 호흡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류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 속에는 ‘죄악의 쓴물’이 들어온 이후 죄악의 쓴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으로 죽을 뿐만 아니라 이 독이 가득하게 되며 나아가서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죄악도 해결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1) 예수님만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다
인간들이 죄의 쓴물을 먹게 되면서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데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지식이나 수고로 달게 할 수가 없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만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표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하기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후, 그들은 이제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서 사흘 동안 물을 찾지 못하자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마라의 쓴물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하는데 우리도 어려움을 만날 때, 쉽게 불평과 원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의 시작은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시련 속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불만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출15:22-26)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 광야에서 사흘 동안 걸었으나 물을 찾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곳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며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그것을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시며 26 이르시되 너희가 네 주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명령들을 귀담아 듣고 그의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주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을 구하지 못하자 불평을 터트린 것은 출애굽 후 최초로 모세를 향한 불평이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인데, 이것은 향후 광야 생활 40년 동안 지속될 끝없는 불평과 불순종을 암시합니다. 우리도 종종 마라의 쓴 물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 있을 때 원망하는 대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주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말씀의 ‘지시’를 받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변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 나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6). 인생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에게만 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고통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사53:5).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쓴물인 미움과 분노도 사랑과 용서의 단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사람 마음속에 항상 있어 그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토해내며 자신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토해낸 독이 퍼지면서 죽게 만듭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살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이탈리아 출신의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재능으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할 때 어떤 연주자가 실수하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합주 연습을 할 때 한 연주자가 눈에 띄는 실수를 하자 즉시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고 그는 갑자기 지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비싼 시계를 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분노는 자기의 값비싼 시계를 망가뜨리게 하여도 고쳐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은 말하기를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역설했는데 그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 박사를 비난하자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는데도 “화를 내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질문하곤 합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화를 내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므로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인내와 온유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화, 노, 신경질과 같은 감정과 함께 맺힐 수 없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개를 묶어놓고 4시간 동안 마구 때렸더니 개는 바짝 독이 올라가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개를 풀어 놓으면 누구든 죽일 듯이 덤벼들 정도로 약을 올렸을 때 주사기로 피를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보통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라 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도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고 하니까 혈기를 부리고 미움을 품으면 몸에 독이 생겨 일찍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을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속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는 비결이 곧 예수를 믿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하자 두려움 마음이 생겨서 나무 뒤에 숨었듯이 누구든 죄를 범하면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이 발달해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보다 더 많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분석했더니 대부분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기 약점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그것뿐 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을 읽어 보기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의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낸 후, 염려 불안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미국 시민은 백만 명이 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죽은 군인 수보다 그들을 보내놓고 염려와 불안같은 두려움으로 죽은 가족이 세배 반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한 링컨대통령을 보십시오. 워싱톤 DC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는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링컨은 전쟁과 관련된 모든 두려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받았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링컨대통령에게는 수많은 두려움이 몰려왔었지만 이 두려움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지셨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말로 올해에는 하나님만을 굳건히 잘 믿으시면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벧전1:3-4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나 부활생명에 대한 소망만 있다면 어떤 두려움도 다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배경을 잠깐 소개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때, 그가 17세 되던 해, 그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영국 포로수용소에 갇히면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폭격으로 다 무너지고 자기 가족들이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할 생각을 했을 때 어떤 목사가 성경책 한 권을 주어서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 땅에 와서 숱한 은혜를 베풀었건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절망적인 동질감을 느꼈는데 그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던 그 장면이 몰트만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며‘ 아!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다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하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겨서 그는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게 된 후 몰트만의 삶은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새해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깊이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통해서 공급되는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3)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야 영육간이 건강합니다
육신의 건강은 하루 밥 세끼를 잘 먹고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여야 얻게 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적 체력을 위하여 운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보약을 먹더라도 운동부족이면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신앙생활도 내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말씀을 읽고 적용하면서 최고의 감사의 제물인 찬양을 드려야 하는데 찬양은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부를 것인데 한 주에 한곡씩이라도 외워서 부른다면 일년이면 적어도 오십여곡은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암송과 찬양 외우기는 뇌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치매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5년에는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니 각자가 건강관리를 잘하여 하루하루 죄로 만연된 이 세상을 선으로 싸우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서 미지의 2025년을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족속들과 싸워야 가나안에서 살 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들도 이 한해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심정으로 죄악의 가나안 일곱족속을 내마음에서 몰아내야 내가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믿음과 자기 건강관리를 잘하여 하루하루 죄로 만연된 이 세상을 선으로 싸우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이 내 속에 있는 죄악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줄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세가 가까워지면서 거짓미혹에 빠지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