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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두 청년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이, “내일을 알 수 있다면, 주식을 사겠니? 로또를 사겠니?”라고 묻자, 곁에 있던 친구가 “주식을 살거야”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곁을 지나며 대화를 듣고는, 혼자 웃으며, “만약, 내일을 알 수 있다면 어찌할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여러분은, 내일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우리나라가 겪는 전쟁의 참상과 고난을 취재하여, 본국에 상세히 보도함으로 플리처상을 수상하였고, 우리나라의 해병대가 경남 통영을 탈환하자,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준 종군 여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거리트 히긴스”입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절망에 빠진 미 해병대원이, 얼어붙은 통조림을 먹는 것을 보고,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내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묻자, 해병대원은, 슬픈 모습으로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내일!” 내일은 미 해병대원에게 희망이었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희망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기에, 해병대원의 이 대답은 훗날, 희망의 의지를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요즘같이, 코로나19로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미래가 보장된다면, 어느 누구도 지금의 상황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사랑으로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자는, 만약 우리가 내일을 안다면, 살아감에 있어서 묘미가 없기에, 인생이 밋밋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일이 닫혀져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내일은 더 좋은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소개해 드리면, “내일이라는 날을 늘 기억하면서 다가오는 내일은 오늘 보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는 이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고 이생 다음의 생을 생각하면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려고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 안다면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겠지만 그것을 알 수 없기에 태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내일이라는 날은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한다면 깜깜한 흑암과 같은 것입니다. 빛을 보는 내일이라는 날은 새로운 선물입니다. 알 수 없는 선물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를 염려하면서 오늘 하루를 다 사용한다면 소중한 선물을 하나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혹시 내일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염려는 내일로 미루세요. 오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는 다면 내일은 더 좋은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영혼에 있는 내일을 바라보세요. 그곳에 있는 확실한 내일을 볼 수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염려는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이 기록될 당시, 유대인들은 사업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술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이 당시,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를 중심하여 신흥 도시들이 발생하였고, 그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은 사업가로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준비하고 기다리는 미래는, 우리에게 언제나, 향기로운 꽃다발을 가득 안겨주지 않습니다. 잠 27: 1을 보시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며, 본문 14절에서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는, 왜? 우리가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지당한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말을 했을까요? 복음성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의 1절을 보시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손 잡아 주소서 내일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내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3 - 14절을 보시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배제시켜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한 1 - 2분 후의 일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주식 시세를 다 알아서 벼락부자가 될텐데”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이기에, “인생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 39: 5절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라며,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다윗은, “한 뼘뿐인 인생이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라며,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직시했기에, 시 39: 5절 중간에서,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 입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허사”라는 말은 “입김, 호흡”이란 뜻으로,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존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을 다시 보시면,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 계획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착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향해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도 야고보는 누구에게 이런 경고를 했을까요? 이 말이 향한 사람들은, 주밀하게 자신의 삶을 계획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그들의 주밀함이 네 가지로 표현됩니다. “도시에 가서”라며, 분명한 체류장소가 나옵니다. 또, “일 년을 머물며”라며, 분명한 기간을 정합니다. 그리고, “장사하여”라며, 사업의 방식도 정했고, “이익을 보리라”고 함으로, 분명한 목적까지 세웁니다. 얼마나 완벽한 계획입니까? 우리 역시, 매일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내일을 대비해서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일을 준비하고 계획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예수님도 눅 14: 28절에서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누구든지 계획없이 일을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렇게 당연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러한 계획을 세운 자들을 향해, 그들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책의 저자인 “케이 아더”는 남편이 죽은 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전도 캠프에서 간호사로 섬기는 가운데, 템플 신학교에 가려는 부부를 만나 대화를 하던 중, 하나님께서 자신도 템플신학교에 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50달러가 있는 통장과 두 아들과 개를 차에 태우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신학교가 있는 채터누가에 도착했는데, 묵을 곳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친구 집으로 가게 됩니다. 이때, 건너편에 있는 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집 앞에 “매물”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주인을 만나서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계약금이 600불이지만, 에어컨 설치가 되어 있지 않기에, 350달러로 깎아주겠다며, 집값을 융자받을 때까지 짐을 차고에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가까운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직장을 통해 융자를 얻어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후에, 부동산 중개인이 깜짝 놀라며,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집을 사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며 어떻게 집을 사게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이 집은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 갈 계획을 세우니,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빠진 계획, 하나님 없이 세운 계획은 모두가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우리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먼저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의 계획을 세우심으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 - 16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허탄한 자랑은 악에서 시작합니다.
본문은, “도리어”로 시작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서라”는 겁니다. 앞의 13절처럼 사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방향전환입니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계획이라도 세우며, 어떤 꿈이라도 주께서 원하신다면, “난 이것을 하리라”는 고백이, 성도로서 올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원하신다면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주님의 뜻을 찾지 않고 허탄한 자랑만 일삼는 것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악”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야고보의 말이 향한 그 사람들은, 계획을 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그 도우심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영접했지만, 골방에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은 온갖 수고와 힘을 다해 커다란 청새치를 잡았지만,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앙상한 뼈대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내일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앙상한 뼈대만 달고 귀항한 이 노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일, 우리가 행하는 일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탄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입니다. 여러분, “자랑”이 무엇입니까? 자랑은 “자기와 관계있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 뽐내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갈 6: 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 세 가지의 질문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겁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으로, 나는 누구이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을 하기 위한 존재인가?를 묻는 겁니다. 둘째는 “나의 때, 나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이 겪는 최대의 한계 상황을,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인생의 궁극성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곧,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성경을 보면, 첫째,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합니다. 둘째, “나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를 못하였기에,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죄 때문에 죽게 됩니다. 셋째,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천국에 이른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3일후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허탄한 자랑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내일,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삶을 펼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합니다. 선을 알고 나면, 행해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들에게 누구에게나 보여 줄 수 없는 국가 비밀장소인 보물창고와 군기고와 창고를 다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이렇게, 자랑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멸망당하고 맙니다. 이렇게, 허탄한 자랑은 자기를 들어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기에, 이를 “악”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의 “선”은, 윤리적인 선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무디는, “기도는 내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조종해 맞추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곳만 보고 운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지까지 무사히 잘 갈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내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은, “지금 주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성도의 지혜이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을 알 수 없지만, 역사와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고, 오늘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충실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우리의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밝은 내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구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심으로 선을 행하는 성도가 되어, 내일을 맞이하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