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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1편 1절-5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1절-2절: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보호하시느냐? 1절에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사람을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고 했는데,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복을 받으려면 어떤 사람을 권고해야 하느냐? 빈약한 자다. 어떤 빈약한 자냐? 진리의 말씀에 빈약한 자다. 또한 육신적으로 빈약한 사람도 권고를 해야 하겠는데, 왜 그러냐 하면 사건적으로 제일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제일 가까이 왔을 때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빈약한 자, 돈은 많은데 영적으로 깨닫는 면이 빈약한 자, 이런 사람을 권고하면 복을 받는다는 건데, 무슨 복을 받게 해서 살게 하신다는 거냐? ‘복’이라고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의례히 물질 복을 생각한다. 그 다음에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역시 물질의 복이다. 물질의 복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신을 만들어서 섬긴다. 그러면 세상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복이냐? 역시 물질의 복이다.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많이 받는다’ 라고 한다.
그러면 ‘물질의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 라고 한다면 이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박힌 거냐? 영에서 나오는 거냐, 육에서 나오는 거냐? 육에서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을 표현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눈에 보이는 면에 기준을 두고 이것을 위해서 충성봉사 활동을 열심히 한다. 왜냐?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해서다.
이런 정신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창고가 넘치게 하려면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 그 방편 중에 하나가 십일조를 철저히 드린다. 그러면 이 사람이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는 이유가 뭐냐? 세상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만일 이런 사람이 십일조를 열심히 냈음에도 자기 창고가 안 넘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수 믿는 걸 그만둬야 하느냐? 그러니 스스로 속는 거다.
사람에게 참 복이란 불타고, 썩어지고, 변동되고, 변질되고, 동화되고, 동요되고,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리는 그런 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을 받아서 깨달으며 이 말씀을 붙잡고 세상의 환난과 풍파 속에서도 이룰구원을 잘 이뤄나가는 거다. 환난 풍파가 와도 이것과 관계가 없이 이룰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는 게 큰 복이다. 돈이 많은 복보다 사람이 바로 되는 게 진짜 복이다. 이게 가치가 있다.
복이라고 하면 이런 복을 연상을 해야 되겠는데 세상 속화된 기독자들은 이게 아닌 예수 믿기 전에 절여있던 먹고 마시고 배부른 것을 먼저 생각을 한다. 이런 것은 나중에 뒤따라오기도 하는 건데 아예 이걸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다. 이치적으로 볼 때 일을 부지런히 잘 하면 돈은 따라오는 거냐, 안 따라오는 거냐? 따라온다. 그런데 일은 부지런히 안 하면서 자꾸 ‘돈 돈’ 하고 있다면 이 사람에게 돈이 따라 오겠느냐?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 육적, 세상적, 거짓되고 타락된 옛사람 부패성적인 자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요, 이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거다. 빈약한 자를 늘 권고하고 권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대우를 받는다. 말하자면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다. ‘아, 저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 사람의 좋은 면을 자꾸 소문을 낸다. 어른들의 세계도 보면 이웃집에 참한 아가씨가 있으면 어디에 좋은 신랑감이 있다고 하며 자꾸 소개를 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도 이런 좋은 소문이 나가는 사람이 세상적으로도 복을 받을 사람이다. 그러니까 처녀 총각들은 절대로 돈 많은 총각, 돈 많은 처녀를 찾지 말아라.
어릴 적 입맛이 죽 그대로 가듯이 어릴 때부터 부지런한 사람은 커서도 부지런하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성도 어릴 때부터 잘 되어야 커서도 좋은 사람과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공중 도덕성의 교육이 바로 되어야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바로 되어서 내리 내리 내려가는 집안은 참으로 복 받은 집이다.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신앙정신 면에 빈약한 자를 건진 사람을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한다. 빈약한 자를 권고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한 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슨 원수가 졌다고 그의 원수의 손에 붙이겠느냐?
그러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사람의 원수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의 원수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을 말한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뜻은 그에게 복을 주시는 거다. 말세 때에 교회 안에 옳은 권고자의 원수가 대단히 많다. 옳은 권고를 반대로 뒤집는 자가 많다. 즉 영적인 면에 빈약한 자를 인간 자기의 뜻대로 부려먹는 자가 교회 안에 많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면에 빈약한 자에게 옳은 진리이치를 줘서 강하게 만들고자 권고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장차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능의 권세, 영권의 복을 이 땅에 살 동안 마련케 해 주신다는 거다. 이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역시 권면을 받은 사람도 복되게 되는 거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왜 안 받아주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통해서 이런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다. 그런데 거짓 종들의 권고성은 영적인 면에 빈약한 사람을 영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노예를 부리듯이 부려먹는다.
3절: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병의 종류가 많지만 근본적으로 크게 보면 육에 속한 병이 있고, 영에 속한 병이 있다. 육에 속한 병은 몸에 병이 든 것, 또는 정신 면에 병이 든 것. 특히 정신에 병이 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시 뇌를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육신에 병이 드는 것은 태속에서부터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신랑 신부 후보생은 정신과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영에 속한 병이 있는데, 이 영에 속한 병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정신 사상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데, 신앙적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에서 이탈이 된 이방 세상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으로 세상을 목적하며 사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육신이 병에 걸렸을 때 자기의 정신과 신앙노선을 점검해 봐야 한다. 몸에 병이 들도록 무리한 일은 없었는지, 정신상태가 육에 속해있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항상 점검을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헝클어진 실이 똘똘 뭉쳐 있으면 풀지를 못한다.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헝클어진 것을 쫙 펴 놓으면 시작과 끝을 찾기가 쉬워서 빨리 풀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에서 바르지 못하고, 구부러지고, 꺾이고, 비뚤어지고, 앞뒤가 뒤바껴 있고, 이치가 틀린 것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자기의 신앙정신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 육적 인정정실에 매여 있는지, 세상풍속 습관에 매여 있는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 무엇에 푹 빠져 있는지?
육신의 병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드물다. 대부분 매일매일 누적이 되어서 눈에 보이게 나타난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났느냐?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나는 게 있고, 영양이 너무 많은 음식이라서 배탈이 나는 게 있고, 어쨌든 병은 마음에서, 생각에서, 정신에서 일어나는 거니까 지혜를 쓰고 자기를 절제하는 게 있어야 한다.
쇠약한 자가 진리이치의 권고를 받아들이게 되면 주님의 긍휼을 입어 고침을 받는다. 육신의 몸에 병이 드는 것은 주님의 권고일 수도 있는데, 자기가 병상에 있을 때 자신의 신앙정신 사상을 점검하여 바로 잡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이 바로 고쳐지기가 참 어렵다. 어려움을 당할 때 바로 고쳐지지 않는데 풍부할 때 어떻게 고쳐지겠느냐? 상황이 어려움에 처해지는 것은, 몸이 어려움에 처해지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라는 신호다. 이럴 때 자기를 돌아보고 신앙정신과 마음을 바로 잡고 자기를 잘 다듬어 나가야 한다.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주님의 긍휼을 입는 자는 고침을 받는다. 이걸 구태여 육신에 붙여서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육신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 게 사람의 속성인데 육신 쪽으로 자꾸 말을 하게 되면 그만 마음이 육신 쪽으로 쉽게 가버린다.
4절: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육신에 병이 들고 신앙정신 면에서도 병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 때 다윗은 ‘내 육신을 고치소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고치소서’ 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병이 더 중한 거냐? 신앙정신 면의 병이 더 중요하다. 이 병만 바로 고쳐지면 육신이 아무리 병이 들었다고 해도 이겨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일반적으로도 정신 면이 바로 돼 있지 못한데 육신마저 병이 들어놓으면 이 사람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
사람들 대부분을 보면 육신에 병이 든 것은 쉽게 감각을 한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간 병일수록 알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더 힘이 든다. 그리고 다른 병보다도 머릿속에 병이 들면 더 어렵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정신 면에 병이 든 거다. 이건 기계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비뚤어진 영적인 면의 병인데, 이 병은 세상의 의사는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 병은 세상 속화된 정신을 가진 목사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한다.
영혼에 관한 병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이다.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 이 병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지 못하면 죽음 저 너머 영원히 가는 병이 돼버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 영혼의 병에 대하여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이 면을 놓고 기도를 한다면 이 사람은 참 복된 사람이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병이 들면 육신의 병부터 고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성도다윗은 자기가 육신에 병이 들었는데 자신의 영혼을 고쳐달라고 하고 있다. 성도다윗은 자기의 육신에 병이 들어있어도 ‘내 영혼을 고쳐 달라. 깨닫게 해 달라. 회개케 해 달라. 구원해 달라’ 라고 기도를 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순서적으로 바른 기도다.
우리교인들이 혹 병원에 눕게 되면 영혼에 병이 든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육신의 병을 허락했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기도를 할 때 그 순서가 병원에서 빨리 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바로 깨닫고 바로 서게 해 주시고 바로 고쳐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자기가 이 병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면 몸이 나아서 빨리 병원에서 나가는 것은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세상 일반법을 거스르면 세상 법이 와서 죄 지은 자를 잡아다가 고통을 겪게 한다. 그런데 일반법으로는 모르는 정신이나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이 사람은 무형적인 옥에 가두어진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어진다. 몸은 자유롭게 다니는데 자기의 영혼, 마음, 정신은 창살 없는 감옥 속에 딱 가두어진다. 이건 죄의 종이 된 거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창살 없는 감옥을 모른다. 자기가 죄의 종이 된 것을 모른다.
벧전3:19에 보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고 했는데,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살 없는 죄의 종으로 갇혀 있었다.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에 노예가 되어있고, 세상 속에 파묻혀서 사는 이게 감옥이다. 그런데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 노아 때에 영으로 오셔서 노아를 붙잡고 노아의 입을 통해서 120년 동안을 세상에 빠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의 감옥에서 풀어내는 일을 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에 매여 있는 데서 풀어지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이 주일날 어디서 만나자고 하면 예배시간도 빠지고 그만 거기로 가는 사람이 많다. 왜 그걸 뿌리치지 못할까?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양심은 ‘교회로 가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도 몸이 그 쪽으로 가지는 것은 이 사람의 마음이 감옥 속에 갇힌 거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거다. 자유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구원건설 쪽으로 나간다. 이 자유가 참 자유다.
우리는 현실만을 보지 말고 이 현실을 주의 뜻대로 다스릴 줄 아는 영능의 실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 자기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에 미달성이고 미성장이다. 불완전하고, 넘어지기 쉽고, 병 들기 쉽다. 그래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영혼이 병이 들지 않게 자기 속에 늘 말씀을 충만히 채우고 깨달으며 바로 잡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혜지식적인 면에, 도덕적인 면에, 능력적인 면에 진리로 인격화 자체화가 되어나가야 한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사람이 주님께 범죄를 할 때 그 순서가 먼저 진리말씀을 버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 사람이 정신적으로 세상 불타질 것을 붙잡은 거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살고 싶은 생각이 희미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아닌 남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 자기의 죄는 안 보이고 남의 죄만 보인다. 그리고 그만 교회에 대하여 원망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예수 믿어 오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지 않느냐? 교회에 안 나오려면 반드시 ‘뭣 때문에, 뭣 때문에’ 하며 원망 불평이 자동적으로 나온다. 그러면 교만해져서 불순종의 마음이 되고, 어떤 일을 핑계로 교회를 휙 떠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떠날 때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하다. 원망 불평을 하며 교회에 안 나오려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자기 몸이 조금 아프거나 하면 ‘옳다구나’ 하면서 이걸 핑계로 당당하게 교회에 안 나온다.
이런 일을 잘 생각해 봐라. 교회에 나가기 싫은데 마침 자기 생각대로 교회에 안 나갈 핑계거리가 생겨서 자기가 교회에 안 나간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주권 면을 봐라. 네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네 생각대로 해 주는 거다. 그러니 네 꾀에 네가 속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면 안 된다. 큰일 난다. 이렇게 해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다른 교회에 나간다고 해도 자기는 이미 영혼에 중병이 든 것이고, 마귀시험에 걸려든 거다. 그런데 이방 불신세상 사람들과 속화된 교회는 이런 상태를 영혼의 병으로 보지 못한다.
자기의 영혼이 고침을 받으려면 세상의 소원과 목적성을 버리고 진리생명의 말씀을 강하게 붙들어야 하고, 썩어지고 불타질 세상을 발아래 밟아야 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자기 인격으로 잘 입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영혼의 병이 고쳐진다. 가르침을 받는 것과 연관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신실한 종을 만나면 빨리 깨닫고 고쳐질 수 있지만 세상적 비진리적으로 가르치는 종을 만나면 진리생명의 말씀을 못 먹으니까 신앙정신이 힘이 없고, 강하지 못하고, 신앙생명이 죽는 거다. 이러면 점점 약해져서 죽는 거다. 그래서 옳은 종을 만나는 게 큰 복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인들은 이런 것을 모른다.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원망 불평을 하는 사람은 진리이치의 옳은 말이 나오면 자기의 교만한 자존심이 솟아 나와서 옳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을 공격을 하게 된다. 참 이상하지 않느냐? 자기에게 옳은 말을 해 주면 신앙 양심적으로 고개를 숙여야 하겠는데 왜 속에서 뭐가 올라오느냐? 옳은 말을 해 주면 왜 자기가 펄펄 살아나느냐?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몸이 아픈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육신의 병이 물러갔다고 해서 영혼의 병도 고쳐졌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영혼의 병은 따로 있는 거다. 병원에서 육신의 병이 고쳐졌다고 해도 영혼의 병은 그대로 있을 수 있다. 두 가지를 다 고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병원에서는 영혼의 병은 못 고친다. 우리는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을 별개문제로 취급할 줄 알아야 한다.
5절: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진리성도가 죽기를 바라고 멸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단 마귀의 마음이라고 보는 거다. 그런데 자기가 사단 마귀 짓을 하는 것임을 모른 채 사단 마귀 짓을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진리성도에게 거짓된 비진리적 세상적인 요소를 주장을 함으로써 진리성도를 대적하는 셈이 되고, 환난 핍박을 주는 셈이 되어서 결과적으로 자기가 사단 마귀 짓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니까 진리성도를 보고 ‘너희들은 참 이상하게 믿는다’ 라고 하면서 까내리고 무시하는 자를 말한다. 이런 자들은 이방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마음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서로 통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감화된 성도를 붙잡고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이뤄가는 일을 하시는데 성령에 감화된 성도가 죽어 없어져서 이 일을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단 마귀의 마음이다. 그런다고 해서 진리성도가 죽어 없어진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 전서부터 예정 계획하신 성도를 위한 대국적인 구원운동이 없어지겠느냐?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고,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서 합세해서 죽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죽일 수 없는 몸으로 살아나 버렸다.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 다음에는 그들에게 심판이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진리성도 다윗의 이름이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가졌듯이 다윗의 사업은 하나님을 사랑케 하는 사업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사업이다. 쉽게 말하면 복음사업이다. 만일 이 사업이 망한다면 이는 다윗의 이름과 함께 다윗이 망하는 꼴이 되는 거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이 망하면 쉽게 말하면 궁극교인인 나도 망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업이 잘 되면 자기가 잘 되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잘 돼야 하나님의 사업이 잘 되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업이 잘 돼야 나의 사업이 잘 되는 건지를 생각을 해야 한다. 보통 보면 자기 요구조건대로 잘 되는 게 하나님의 사업이 잘 되는 것으로 알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안다. 본질에 입각해서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맞는 거지만 본질이 아닌 것으로 그러고 있으니 이건 이치가 잘못된 거다. 진리사업, 영혼사업, 생명사업, 성령의 운동이 망하는 것은 우리가 망하는 것과 같다. 영운동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붙잡고 하는 거니까 이 영운동이 망했다면 우리도 망하는 거다. 주님이 망하면 우리도 망하는 거고, 주님이 안 살아나면 우리도 못 살아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롭고 선한 일을 하는 다윗을 붙잡고 당신의 일을 이뤄놓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하는 다윗을 붙잡고 다윗이 망하기를 바라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결국은 다윗을 승리자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진리복음의 일을 해서 자타가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가면 3절에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 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에게서 이루어지는 거다. 성경대로 믿어라 그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