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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거제군 주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청원한 소장(訴狀) 3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고문서 <대한제국기 거제군 주민들이 올린 소장(訴狀) 3건>은 3건 모두 내장원경(宮內府 內藏院卿, 경리원경)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발장, 즉 소장(訴狀)이다.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屯民)들과 감옥에 갇힌 거제도 어민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거제 유력 인사들, 그리고 거제 목장(牧場) 주민들이 청원한 대한제국기 고문서들이다. 결국 대한제국기 백성들의 소장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억울함이 누적되었던 배경에는, 근대적 제도의 미비와 외세의 주권 침탈이 맞물린 국가적 총체 한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허울뿐인 사법 개혁과 관료들의 부패, 일본의 사법권 침탈과 식민지화, 그리고 국가 재정의 파탄과 통치력 상실해 갔기 때문에, 나라는 파탄에 이르렀고 망할 수밖에 없었다.
○ [대한제국기(1897~1910년)의 소장(訴狀)] 당시 소장(訴狀)은 전통적인 법률 문화와 서구식 근대 사법 제도가 급격하게 융합되던 과도기의 법정 문서를 말한다. 기존 조선 시대의 소송 방식인 '소지(所志)' 문화에서 탈피하여, 근대적인 재판 제도가 도입되면서 소장의 성격과 서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주요 특징을 보면, 먼저 ①명칭이 소지(所志)에서 소장(訴狀)으로 변경되면서 성격의 변화도 일어났다. 조선 시대의 소장(訴狀)은 전통적으로 백성들이 관아에 올리는 청원서, 진정서, 고소장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재판관(사또)의 처분을 바라는 민원 성격이 짙었다. 반면 대한제국기의 소장(訴狀)은 갑오개혁(1894년)과 근대적 사법 개혁을 거치며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장은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독립된 재판소(법원)에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근대적 소송 문서로 정립되었다.
② 이어 소장의 형식과 기재 사항을 살펴보면, 대한제국기 재판소구성법(1895년 제정)과 이후 개정된 법령에 따라 소장의 양식이 규격화되었다. 소를 제기하는 사람(원고)과 상대방(피고)의 이름, 주소, 신분을 명확히 적어야 했다. 또 무엇을 요구하는지(예: 토지 반환, 채무 변제), 그리고 왜 요구하는지 그 이유와 사실관계를 구분하여 서술하기 시작했다. 덧붙여 과거 이두나 까다로운 초서(풀어쓰기 한자) 중심에서 벗어나, 관공서 문서 규칙에 따라 점차 알아보기 쉬운 국한문혼용체(한글과 한자 혼용)로 작성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③ 또한 변호사 제도와 소장 대행이 등장했다. 1905년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법'이 공포되면서 근대적인 변호사 제도가 출범했다. 이에 따라 개인이 직접 소장을 쓰기 어려울 때, 전문 변호사가 소장을 대리 작성하고 재판을 대리하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변호사 제도 정착 전에는 '외지부'나 '대송인' 같은 이들의 돈을 받고 소장을 대신 써주기도 했으나, 제국 말기로 갈수록 법률 자격자(代訴業者) 중심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④ 제국 말기에는 일본의 개입으로 사법권 침탈과 소장의 한계에 직면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른바 '법부고문' 등 일본인 관리들이 대한제국의 사법 행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1907년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재판 체계가 일본식 3심제(대심원, 공소원 등)로 강제 개편되면서, 백성들이 제출하는 소장의 접수나 판결 과정 전반에 일본인 판·검사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비극적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대한제국기의 소장은 '억울함을 고하는 전통적 탄원서'에서 '법리적 권리를 주장하는 근대적 소송 서류'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었던 유물이자 역사적 기록이다.
○ 지금부터는 이번에 소개하는 <대한제국기 소장(訴狀) 3건>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첫 번째 1) 「대한제국기 1899년 12월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보민)들이 올린 소장(訴狀)」은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屯民)들이 국가가 관리하는 둔토(屯土)의 세금 급증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기존에 약속받았던 세액을 유지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장원경의 처분[행정명령 제음]은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사된 대로 정해진 세금을 지체없이 내고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관청의 기각으로 끝이 났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이 재정 확충을 위해 지방 백성들의 사유지 성격의 둔토를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두 번째 2) 「대한제국기 1906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은 당시 궁방(궁궐)이나 관청에서 어민들의 사유 어장(民私條)을 강탈하고 세금을 이중으로 거두려 하자, 이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진주 감옥에 구금된 거제 어민들의 석방을 위해, 거제도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어민들의 정당성과 억울함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소장을 접수한 경리원(經理院, 내장원)의 최종 판결(지령)은 “조사하라”고 하여 거제 어민들의 절박한 호소와 이에 대한 조정의 조치 결과가 담겨 있다. 세 번째 3) 「대한제국기 1907년 6월과 8월 거제군 목장(牧場) 주민들이 올린 소장(訴狀)」은 대한제국기 토지 제도 개혁(갑오개혁 등) 이후에도 옛 국유지(목장)에 살던 백성들에게 관습적인 이중 과세 일토양세(一土兩稅)가 이어지자, 거제군 목장(牧場) 주민들이 이를 시정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으나 결국 거부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국가(경리원)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국가의 소중한 땅(攸重公土)을 공짜로 먹거나 사유화하려 핑계를 대고 있다(專事圖頉)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청원을 기각했다. 결국 이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황실이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국유지(목장지)에 살던 농민들의 토지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중 과세를 강행하여 수탈을 이어갔던 과거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1) 「대한제국기 1899년 12월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보민)들이 올린 소장(訴狀)」
이 고문서는 대한제국기인 1899년(광무 3년) 12월,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屯民, 保民)들이 내장원경(宮內府 內藏院卿)에게 올린 소장(訴狀)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둔토(屯土)의 세금 급증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며, 기존에 약속받았던 세액을 유지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다.
○ 내용인즉, 이 소장은 대한제국기 왕실 재정을 총괄하던 궁내부 내장원(內藏院)과 기지(基地, 터전) 백성들 간의 전형적인 세금 갈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참고로, ‘훈둔(訓屯)과 장목둔’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訓局)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거제도 장목 지역에 설정한 군둔전(軍屯田)이다. 백성들은 원래 군포를 대신해 면포를 내다가 301냥 9전의 돈(代錢)으로 내왔다. 그리고 ‘승총(陞摠)과 을·병·정 3년의 침탈’이란? 1894년 갑오개혁 전후로 조세 제도가 급변하면서 관청에서는 세금 총액을 올려 잡았다(승총). 특히 1895~1897년 사이에 관리들이 내려와 기존의 가벼운 본세 외에 추가로 가혹한 소작료(賭稅)를 징수하자 백성들이 서울로 올라가 상경 투쟁(奔訴)을 벌였다.
이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실 중심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둔토와 역토를 황실 재정 기관인 궁내부 내장사(후에 내장원)로 이관시켰다. 이 과정에서 장목둔도 황실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1898년(무술년)에 황실은 이들의 조세를 600냥으로 깎아서 고정(完定)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주로부터 소작권을 위임 받아 관리하는 마름(舍音, 이두어) 박무일이 세금을 침탈했다. 왕실 재정 기관인 내장원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방의 '마름(지방 대리인)'을 통해 세금을 다시 강하게 거두기 시작했다. 박무일이라는 인물이 내려와 기존 약속(600냥)을 깨고 1,000여 냥을 강제 징수하려 하자, 백성들이 다시 단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원래 사패지나 공토가 아니다" 이 말이 백성들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였다. 이 땅은 국가가 준 땅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스스로 개간한 사유지(私墾)"이므로, 국가나 황실이 지주 행세를 하며 과도한 소작료(賭稅)를 뜯어 가서는 안 된다는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처분의 결과(제음 해석)]*
마지막에 적힌 광무 4년 1월 12일 자, 내장원경의 처분은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조사된 대로 정해진 세금을 지체없이 내고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말라"는 차가운 관청의 명령(기각)으로 끝이 났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이 재정 확충을 위해 지방 백성들의 사유지 성격의 둔토를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씁쓸한 결말이다.
* 덧붙여 이번 「1899년 12월 소장(訴狀)」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강내숙(姜乃淑), 김극원(金極元), 윤성로(尹性魯) 등(等)이고 수신자는 내장원경(內藏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三年己亥十二月 日]
**「대한제국기 1899년 12월 거제군 장목면의 둔민(보민)들이 올린 소장(訴狀)」**
<광무 3년(1899년) 기해 12월 일. 소장(訴狀)>
경상도 거제군 장목둔(長木屯) 백성, 강내숙, 김극원, 윤성로, 윤태원, 옥성서, 정기언, 황이안 등.
원고(原告)의 사실은 이렇습니다. 저희들이 농사짓는 둔토는 섬 가운데에 있어 땅이 척박하고 세금 부과가 무거우며, 바람과 비로 인한 재해가 때때로 치우치게 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해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돈을 마련해 공전(公錢)을 납부하고, 다른 지역에서 곡식을 사 와야 했기에 생활이 극도로 곤궁했습니다.
지나간 임진왜란(壬燹) 이후로 이곳을 '훈둔(訓屯)'이라 이름하고 훈련도감(訓局)에 소속시켰습니다. 처음에는 현목(玄木, 검은 면포) 5동을 상납하다가, 폐단이 생기고 퇴짜를 맞는 일이 잦아져 이를 대신해 돈 301냥 9전으로 세금을 바꾸어 상납해 온 지가 몇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승총(陞摠, 총액을 올려 잡음)을 한 뒤로 매 결(結)당 30냥씩 본세를 당연히 납부해야 했는데도, 을미·병신·정유(1895~1897년) 3년 동안 도세(賭稅, 소작료 성격의 세금)를 매겨 관리(파원)들이 가혹하게 침탈하므로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한양의 중앙 조정(京部)에 달려가 호소한 결과, 다행히도 무술년(1898년)부터 시작하여 "600냥으로 세금을 고정하라"는 궁내부의 훈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상납한 뒤 내장사(內藏司)의 척문(尺文, 영수증)과 출첩(出帖, 증서)을 받아 증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마름(舍音, 지주의 대리인) 박무일(朴茂一)이 와서 "1,000여 냥을 강제로 책정하겠다"며 백성들을 독촉하고 침탈하기를 또다시 수년 전처럼 하고 있으니, 둔민들의 사정이 참으로 어떠하겠습니까?
당초 이 둔토는 왕실에서 내려준 사패지(賜牌地)나 공토(公土)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여(私墾) 스스로 경작하고 스스로 매매해 왔으며, 단지 대전(代錢, 면포 대신 내는 돈)만을 상납했을 뿐 본곡(本穀, 알곡)으로 세금을 거두는 일은 원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마름이 이처럼 독촉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견뎌내겠습니까?
하물며 흉년을 만나 다른 곳에서 곡식을 통용할 길도 없어 아침에 저녁 일을 걱정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에 상부(궁내부)에서 600냥으로 완정(完定)해 준 경위를 억울하게 아뢰고자, 천 리 길을 버선발로 달려와 이전에 올렸던 문서를 첨부하여 우러러 호소합니다. 부디 만 번이나 깊이 살펴주셔서(洞燭), 백성을 편안하게 보호하는 성덕(盛德)을 민간에 내려주시어, 죄 없는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며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시고, 사방으로 흩어져 구렁창에 굴러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천만 번 엎드려 바랍니다. 〈광무 3년〉 기해 12월 일. 내장원경 합하.
*[관청의 처분(제음, 題音)]*
"한결같이 조사하고 검토하여 정해진 도세(賭稅)를 마련하여 납부하게 하고, 시일이 지체되거나 다시 번거롭게 호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광무 4년(1900년) 1월 12일.
[光武三年己亥十二月 日. 訴狀. 慶尙道巨濟郡長木屯民等 姜乃淑, 金極元, 尹性魯, 尹泰元, 玉性瑞, 鄭己彦, 黃以安, 等.
原告事實은 矣等所耕屯土가 島中의 有야 土瘠卜重고 風損雨災가 間多偏甚키로 雖在豊年이라도 採濱辦錢야 以納公錢고 貿穀他境니 生活이 極艱이라。粵自壬燹後로 名之曰訓屯고 屬之訓局야 玄木五同上納이다가 生弊點退야 代錢三百一兩九戔征稅上納이 未知幾百年久矣. 伊今陞摠後로 每結三十兩式本稅當納옵고 乙丙丁三年賭稅派員虐侵을 堪當할슈업셔 奔訴京部야 何幸自戊戌爲始, 六百兩定稅라신 宮內府訓令을 承와 仍卽上納後예 內藏司尺文出帖憑準옵던니 今又舍音朴茂一來到야 千有餘兩을 强定한다고 屯民侵督을 又復年前오니 屯民情景이 倘復何如릿가? 當初此屯이 原非賜牌公土요 民自私墾야 自耕自賣야 代錢兺上納고 本穀收稅은 原無옵난 今此舍音之如是侵督이 民安得支保乎잇가? 況値歉年고 貿遷이 無路야 朝不慮夕야 上府六百兩完定한 由을 冤呈고 千里裹足야 前呈粘連仰訴오니 萬加洞燭옵셔 安民保護온 盛德을 民間의 下及와 無辜한 屯民으로 樂業安堵옵고 渙散顚壑無케시물 千萬伏望홈。〈光武三年〉己亥十二月 日. 內藏院卿閤下. 一依査檢定賭備納, 毋至遲緩更煩向事. 光武四年一月十二日]
2) 「대한제국기 1906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
이 고문서는 대한제국기 광무 10년(1906년) 6월에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들이 궁내부(宮內府) 등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발장)이다. 당시 궁방(궁궐)이나 관청에서 어민들의 사유 어장(民私條)을 강탈하고 세금을 이중으로 거두려 하자, 이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거제 어민들이 자신들의 정당성과 억울함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소장을 접수한 경리원(經理院)의 최종 판결(지령) 내용이다. 거제 어민들의 절박한 호소와 이에 대한 조정의 조치 결과가 담겨 있다.
○ 내용인즉, 대한제국기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궁내부가 연안 어장을 조사하면서, 백성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사유 어장(민사조)을 강제로 황실 재산이나 관청 재산으로 편입하려 했다. 이에 거제도 어민들은 세종 때나 통제영 시절부터 이것이 백성들의 사유지였다는 '완문(공식 문서)'을 근거로 격렬히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관과 협잡꾼들의 수탈이 이어졌다. 궁내부에서는 어민들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황실 진상용 외에는 백성들에게 돌려주라"고 판결(완문 발급)을 내렸다. 그러나 현지에 파견된 대리인(이유형), 지방 관청(창원감리서, 관찰부), 심지어 군대(진남대)까지 결탁하여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순검(경찰)을 동원해 어민들의 어장과 미역바위(藿巖)를 강탈하고 사사로이 팔아넘겼다.
그러나 수탈에 저항하며 궁내부에 자꾸 상소를 올리는 거제도 어민 대표와 아전들을 향해, 주동자(김봉수 등)들은 "국가 세금 공무를 방해했다(國稅沮戲)"는 유언비어를 씌워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본 소장은 당시 거제군수가 공석(空官)인 틈을 타 진주(晉府, 당시 경남도찰부 소재지) 감옥에 억울하게 갇힌 어민들이 마지막으로 구제를 요청하며 올린 글이다. 절박한 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법령의 무엇을 믿으리요" 하였다. 어민들은 이미 황제의 뜻과 궁내부의 판결문(완문)을 받아 쥐고 있었다. 그런데도 현지 관리들과 파견원들이 이를 무시하고 자신들을 체포하자, "조정의 최고 기관이 내린 법과 문서를 믿지 못하면 백성은 누굴 믿어야 하느냐"라며 매우 논리적이고도 절박하게 항변하고 있다. 소장 뒤에 이름을 올린 거제 어민 대표들의 성씨를 보면 원(元)씨, 옥(玉)씨, 신(辛)씨, 윤(尹)씨 등, 거제도 유력 가문이 다수 등장한다. 이는 당시 거제도 지역의 토착 성씨이자 어업권을 주도하던 핵심 인물들이 연명하여 목숨을 걸고 집단 소송을 제기했음을 보여준다. 최종 수신처는 '경리원(經理院)'이었다. 앞서 김봉수라는 협잡꾼이 어장을 '경리원'에 이속시켰다고 사칭했기 때문에, 어민들은 아예 국가 재산과 세정을 총괄하던 최고 기관의 수장인 경리원경(經理院卿, 장관급)에게 직접 소장을 올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조정의 판결(지령)이 내려졌다. 소장을 접수한 경리원은 광무 10년 7월 27일에 "마땅히 사실을 조사하여 조치하겠다(第當有査實措處 事)"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원천 기각하지 않고, 현지 관리들에게 실제로 강탈과 무고가 있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어민들의 손을 어느 정도 들어준 긍정적인 처분이었다. 이번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외세의 침탈과 관료들의 부패 속에서도 자신들의 사유 재산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문서와 법령을 무기로 저항했던 거제도 백성들의 강인한 역사가 완결되는 귀한 문서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6월 소장(訴狀)」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인민(民人) 원석희(元錫禧), 신주희(辛周逸), 옥상화(玉相華)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十年六月 日]
**「대한제국기 1906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상부 기관에 제출한 소장(訴狀)」**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소장.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 소장.
우측(이하)에 소구(訴求, 소송하여 구제를 요청)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지난해(1905년) 6월에 궁내부(宮內府)로부터 황제의 뜻을 받들어 훈령을 내리시기를, "연안 각 군의 어업 기지(어장) 중 공식적인 세금이나 관청의 몫(公條官條)은 폐단을 구제하고 공공에 돌려주는 사이에서 형편을 헤아려 조치하고, 백성들의 사유 재산인 몫(民私條)은 다시 민간에게 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해당 조사 파견원인 정형기(鄭亨基)의 대리인인 창원 마항에 사는 이유형(李裕馨)은 본래 이름난 협잡꾼 무리입니다. 그는 섬 백성들을 멸시하고 백성들의 몫을 압탈(압수하여 빼앗음)하여 사사로이 어장 면허(帖)를 팔아넘겼습니다.
이에 본 군의 백성들이 서울로 올라와 궁내부에 우러러 호소(仰訴)하자, 지령(지시 사항)을 내리시기를 "사유 재산이라는 문서(文蹟)와 예전 통제영(前統營) 시절에 돌려주었다는 완문(完文) 파일이 엄연히 존재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몫(민사조) 임이 명백하다. 황실에 올리는 진상조(進上條) 외에는 어민들의 소원대로 일일이 돌려주어 원통하게 부르짖는 일이 없게 하라"고 파견원에게 엄하게 지칙(명령)하셨습니다.
이토록 엄중하거늘, 동 대리 파견원 이유형은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와 부동(짜고 치는 짓)하여 순검(경찰)을 많이 풀어 연일 침탈하고 어업을 방해했습니다. 이에 군민들이 또다시 궁내부에 소송을 제기하자, "백성들의 사유 몫은 일일이 조사하여 돌려주고 강제로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이미 훈칙을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른바 파견원 무리들이 오로지 자기 배를 불리는 데만 전념하여 번거롭게 소송하는 폐단을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엄히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기에 새로이 훈령을 발하니, (훈령이) 도착하는 즉시 각 포구에 엄히 단속하여 진상조 외에 백성들의 사유 몫은 조목조목 찾아주고 혹시라도 횡포하게 침탈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즉시 해당 파견원에게 통지(知照)하여 다시는 감히 간섭하지 못하게 하라고 창원감리에 훈칙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파견원은 잡스러운 마음을 고치지 않고, 또 진남대(鎭南隊, 군대)에 부탁하여 민정을 어지럽히는 짓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올봄에 또다시 궁내부에 호소하니, "영원히 이 법을 준수하여 바꿈이 없게 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안착하게 하라"며 이번 3월달에 완문(完文)을 성급(발급)해 주셨습니다. 이에 쇠잔한 섬 백성들은 기뻐서 춤추며 생업에 안착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김봉수(金鳳洙)라는 자가 몰래 간사한 계책을 내어, 본 군 백성들의 사유 어장 및 해모(海毛, 가사리류), 곽암(藿巖, 미역바위)을 탁지부 경리원(經理院)에 이속(이관)되었다고 사칭하면서 억지로 빼앗아 팔아넘기려 하였습니다.
그는 관청의 아전(吏鄕)들과 궁내부에 소송을 제기했던 백성들을 향해 "국세 징수를 저지하고 방해(沮戲)했다"고 무고(誣告)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감리서에 주촉(嗾囑, 사주하고 부탁)하여 순검을 풀어 추적해 체포하게 하였으며, 본도 관찰부(觀察府)에 거짓으로 고하여 하인을 풀어 추적해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외딴섬의 쇠잔한 백성들로서, 하물며 수령(사또)이 공석인 기회를 만나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지금 진주 백성부(晉府, 경남도청 소재지)에 체포되어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황제의 칙명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이미 궁내부에서 처결한 먹 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파견원이라는 명색들이 권력을 속이고 이치를 빼앗는 짓(勒權奪理)을 거듭 방자하게 일삼으니, 가련하고 쇠잔한 백성들이 장차 법령의 무엇을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그러한 사유로 일제히 목소리를 모아 우러러 호소하오니, 특별히 머나먼 외딴섬 백성들의 사정(민정)을 생각하시어, 본도 관찰사(경상남도 관찰부)와 감리서(창원감리서)에 새로이 엄한 훈령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살아있는 우리 백성들이 의지할 곳 없이 억울하게 죽는 지경(無告之地)에 이르지 않도록, 선을 쌓는 처분(자비로운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비옵니다.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뒤에 연명한 자(後)]
원석희(元錫禧), 신주일(辛周逸), 옥상화(玉相華), 윤택근(尹宅根), 신석운(辛錫雲), 옥선환(玉宣煥), 윤영우(尹永禹), 박남기(朴南基), 조석근(曺錫瑾), 김두영(金斗英), 원세응(元世應), 옥영환(玉英煥), 윤영엽(尹永曄) 등.
*[경리원경(經理院卿) 각하]
거제군 백성 등이 본 군의 어업 기지(어장) 중 백성들의 사유 몫(민사조)에 대하여, 이미 궁내부(宮內府)의 처결을 거쳤음에도 파견원이라는 명색을 가진 자들이 억지로 빼앗아 팔아넘기려 하는 일에 대하여 (올리는 소장입니다).
*[지령(指令, 관청의 판결)] 마땅히 사실을 조사하여 처치(조치)할 일이다. 광무 10년(1906년) 7월 27일
[光武十年六月 日. 訴狀. 慶尙南道巨濟郡漁民訴狀.
右訴求은 伏以, 昨年六月日에 自宮內府로 奉承旨意시와 發訓하옵시기을 沿海各郡漁基中, 公條官條 救弊與付公間, 量宜施措고 民私條난 還出給民間이옵난듸 該調査派員鄭亨基代人昌原馬港居李裕馨, 本以有名挾雜之類라 蔑視島民고 壓奪民條야 私行帖賣故, 本郡民人等, 裹足仰訴于宮內府즉, 指令內에 私條文蹟與前統營還給完文案件自在, 則其爲民條也明矣. 進上條外에 依民願一一還給하야 俾無呼冤事로 題飭派員, 若是嚴重커늘 同代派員李裕馨이 符同於昌原監理署하야 多發巡檢, 而一向侵漁故로 郡民等이 又訴於宮〈內〉府즉 民私條난 一一調査出給하야 俾無勒奪之意로 業經訓飭이 不啻申複이거늘 所謂派員輩가 專事肥己야 致煩訴之弊이 究厥所習에 寧不痛歎이리요? 不容不嚴査歸正이기 另玆發訓이 到卽嚴飭各浦하야 進上條外에 民私條난 這這推給고 毋或橫侵케며 亦卽知照該派員하야 更無敢干涉事, 訓飭於昌原監理이오나 所謂派員이 不改雜心하고 又爲囑付於鎭南隊中야 擾亂民情이 無所不到키로 今春에 又訴宮〈內〉府즉 永遵無替고 以爲安業하라고 今三月分에 成給完文故, 殘島民情, 蹈舞安業矣러니, 不意金鳳洙云者가 暗生奸計야 本郡民私漁條及海毛藿巖을 移屬於經理院이다고 勒欲奪賣하야 吏鄕與訴求宮府之民을 構誣以國稅沮戲라고 嗾囑於昌原監理署而發巡推捉며 捏告於本道觀察府而發傭推捉오니, 以若遐島殘民으로 況値空官之際야 不敢拒逆와 方今被捉於晉府이오니 莫尊皇勅之下에 已經宮府處決之, 墨蹟未乾에 派員名色, 勒權奪理가 荐復恣肆즉 哀此殘氓이 將安所恃以法令이오며 緣由齊聲仰籲허오니, 特念遐遠殘島之民情시와 另行嚴訓於本道觀察及監理署허시여 俾此含生之類로 毋歸無告之地케, 積善處分하시물 千萬伏乞홈. 光武十年六月 日
[後]
元錫禧, 辛周逸, 玉相華, 尹宅根, 辛錫雲, 玉宣煥, 尹永禹, 朴南基, 曺錫瑾, 金斗英, 元世應, 玉英煥, 尹永曄等. 經理院卿閣下
巨濟郡民人等, 本郡漁基中民私條, 已經宮內府處決之地, 派員名色, 勒欲奪賣事.
[指令] 第當有査實措處 事. 光武十年七月廿七日]
3) 「대한제국기 1907년 6월과 8월 거제군 목장(牧場) 주민들이 올린 소장(訴狀)」
이 고문서는 대한제국기 1907년(광무 11년/융희 원년) 6월과 8월에 경상남도 거제군 목장(牧場) 주민들이 국가 재정 기관인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소송 문서(訴狀)와 이에 대한 조정의 최종 판결(指令)이다. 대한제국기 토지 제도 개혁(갑오개혁 등) 이후에도 옛 국유지(목장)에 살던 백성들에게 관습적인 이중 과세가 이어지자, 이를 시정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으나 결국 거부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 내용인즉, 이 문서는 구한말 국유지(궁방전, 역둔토, 목장지 등)의 소유권과 세금 문제를 둘러싸고 국가 관료와 일반 백성들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형적인 사례다.
① 거제도의 일토양세(一土兩稅) 원인으로, 과거 조선 시대 거제도 목장은 군마를 기르던 나라 땅(국유지)이었다. 백성들은 나라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국가에 국가 토지 이용료인 '도세(賭稅, 소작료)'를 냈다. 그러나 갑오개혁(1894년) 이후부터 조정은 재정을 일원화하면서 전국의 목장지를 탁지부나 경리원으로 귀속시키고 일반 토지처럼 세금(결세, 결전)을 매기는 '승총(陞摠)'을 실시했다.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 나라에서 이 땅을 일반 토지로 등록했으니, 우리는 다른 백성들과 똑같이 '일반 세금(결세)'만 내면 된다(일토일세)." 국가(경리원)의 생각은 이러했다. "이 땅은 원래 국가 소유지(공토)다. 따라서 국가에 내는 일반 세금(결세)도 내고, 국유지 사용료인 소작료(도세)도 따로 내라(일토양세).“
② 이에 백성들의 억울함이 너무 컸다.("말도 없는데 무슨 목장세냐")
주민들은 현재 목장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어 관리도 없고 말도 기르지 않는데, 옛 명목을 붙여 관리들이 중간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중으로 세금을 뜯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척박한 해안가 땅에서 논 1부당 1량, 밭 5전이라는 금액은 생계를 위협하는 거액이었다.
③ 대한제국 황실(경리원)의 냉혹한 거부가 내려졌다. 백성들은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관청인 경리원의 수장(경리원경)에게 눈물로 호소했지만, 돌아온 판결(지령)은 매우 냉혹했다. 연도가 '융희(隆熙) 원년'으로 바뀐 8월, 조정에서는 "이 문제는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일축하며, 오히려 백성들이 국가의 소중한 땅(攸重公土)을 공짜로 먹거나 사유화하려 핑계를 대고 있다(專事圖頉)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결국 "잔말 말고 세금 다 내라(勿煩准納)"라며 청원을 기각했다.
결국 이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황실이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국유지(목장지)에 살던 농민들의 토지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중 과세를 강행하여 수탈을 이어갔던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6월 소장(訴狀)」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인민(民人)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十一年丁未六月 日]
**「대한제국기 1907년 6월과 8월 거제군 목장(牧場) 주민들이 올린 소장(訴狀)」**
[소장(訴狀) (1907년 6월)] 광무 11년 정미(1907년) 6월 일, 소狀(고발 및 청원서).
경상남도 거제군 목장의 주민 등이 올립니다. 우러러 삼가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백성이 아닌 자가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 백성들이 사는 땅은 이토록 외딴 바닷가에 치우쳐 있고, 산은 많고 들판은 좁아 백성들이 먹고살기 극도로 어려운 와중에, 하나의 토지에 두 번 세금을 매기는 것(一土兩稅)이 더욱 극심하고 억울하옵기에, 발을 싸매고 멀리서 와 우러러 호소하오니 엎드려 빌건대 세세히 살펴주옵소서.
본 군에는 원래 목장이 있어 본래 '창선목관(昌善牧官)'이 관할하던 곳이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성스러운 덕이 지극히 밝으시어, 갑오년(1894년) 승총(陞摠, 국유지를 일반세금 체계로 편입함)한 이후로 만백성에게 균등하게 세금을 매기시어 온 세상이 송덕(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우리 백성들이 사는 목장 땅만은 원래 정해진 세금(元結) 외에, 해마다 추가로 세금을 징수하며 이를 '도세(賭稅, 소작료)'라 부르고 있습니다. 논(畓)은 1부(負)당 엽전 1냥을, 밭(田)은 1부당 엽전 5전을 부과하니, 고할 데 없는 먼 곳의 백성들이 원망을 머금고 억지로 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는 분명 세금을 거두러 파견된 관리 놈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짓일 것입니다.
설령 도세라고 부르는 세금이 있다 하더라도 예전에는 내목(內牧)과 외목(外牧)의 구분이 있었으나, 이를 전부 탕감하고 일반 세금으로 편입(蕩還陞摠)한 뒤로는 하나의 땅에 하나의 세금만 내는 것(一土一稅)이 온 세상에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엎드려 살피건대, 이제는 관할하는 곳도 없고 기르는 말도 없는 유령 목장의 세금을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억지로 거두어가니 더욱 극심하게 원통합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명부(明府: 재판관/경리원) 아래에 다 함께 호소하오니, 살펴 감안하신 후에 온 세상의 백성이 '일토일세'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당 도의 관찰사 및 관할 관청에 특별히 훈령을 내려주시어, 여러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천만번 엎드려 축원하겠습니다.
정미년(丁未, 1907년) 6월 일. [소송 제기자 명단] 박경화(朴敬化), 신치겸(辛致謙), 박성함(朴聖咸), 박정수(朴貞守). 리원경(經理院卿) 각하 처분해 주옵소서.
*[소송 요약 부분]
거제 목장 주민들이 갑오년 승총 이후, 유독 자신들의 거주지에만 원래 세금 외에 도세라는 명목으로 매년 세금을 징수하여 '일토양세(이중 과세)'가 되니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관할 관청에 특별히 훈령을 내려 이중 과세를 면하게 해주십시오.
*[지령 (1907년 8월 8일 국왕/관청의 판결)]
[指令] 이 일은 이미 지시를 내려 타일러(題飭) 왕복 보고가 끝난 일이다. 더욱이 국가의 엄중한 공토(公土, 국유지)를 오로지 책임을 면하고 사유화하려는 짓(圖頉)은 이치상 부당하니, 더 이상 번거롭게 굴지 말고 법대로 세금을 바쳐라(勿煩准納). 융희 원년(1907년) 8월 8일.
[光武十一年丁未六月 日. 訴狀. 慶尙南道巨濟郡牧場居民等.
謹言, 伏以普天之下에 莫非王土요 莫非王民이온바 何哉오? 民等所居之地 卽極漠海濱也요 山多野小야 民食嚴難中에 一土兩稅가 尤極冤枉故로 裹足仰訴오니 伏乞細細垂察焉소셔。本郡이 素有牧場, 而原來昌善牧官之所管이옵던이 聖德이 至明사 自甲午陞摠之後로 萬民均稅고 四海가 頌德中에 惟獨民等所居牧場之地 元結外에 一土兩稅을 年年懲貢者가 稱云賭稅고 畓結은 每負에 葉錢이 一兩이요 田結은 每負에 葉錢이 五戔이온즉 無告遐氓이 含怨懲納이오나 想必捧稅派員輩之中間作奸也라。設使賭稅로 言之라도 有內外牧之分異이오나 蕩還陞摠之後로 一土一稅가 四海均平이거 伏未知無管無牧之稅을 懲捧於蒼生이 尤極冤痛故로 敢冒死齊訴于明府之下오니, 參燭신 後에 率土之氓이 以一土一稅之意로 特下訓令于該道觀察及所管了시와 俾保衆命之地, 千萬伏祝홈. 丁未六月 日.
[後], 朴敬化, 辛致謙, 朴聖咸, 朴貞守. 經理院卿閣下處分.
巨濟牧場民人等, 自甲午陞摠後, 惟獨本人等住居地, 元結外稱賭稅, 逐年懲貢, 一土兩稅, 果難支保, 特訓所管, 俾免兩稅事.
[指令] 以此事로 旣經題飭之申複이어니와 攸重公土를 專事圖頉이 於理不當이니 勿煩准納 事 隆熙元年八月八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