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불만이 尹에서 터졌다, ‘찐명 초선’ 된 민변 맏형과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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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인(in) 여의도, 여의도 법인(人)⑥-민변 맏형과 막내, 국회 입성
[민변 맏형 김남근] “학생운동은 원희룡! 조국?”...86세대 ‘늦깎이 정치인’ 되다
그는 운동권이었다. 동년배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걸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러다가 1986년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당시 그곳은 사신(死神)이 배회하던 음습한 거리였다.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그 거리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고문취조실이 줄지어 있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층의 내부 모습. 그동안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사용돼 온 이 공간은 연내에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개관할 예정이다. 중앙포토
그 시절 거기 끌려간다는 건 잠재적 사형 선고였다. 고문 기술자들의 심기와 손놀림에 따라 누구나 '박종철'이 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수면 박탈과 구타, 고문으로 무너진 그의 육체는 유죄 판결 이후에야 잠깐의 휴식을 허락받았다. 그는 출소 이후 공장으로 자진 하방해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부회장과 민생경제위원장을 역임한 김남근(61·서울 성북을) 의원의 반생(半生)이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4월 30일 국회 소통관에서 이것이 팩트다 팀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때 그 시절 거리에서 그와 ‘팔뚝질’을 함께한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들 중에는 걸출한 이들이 많았다.
이런 내용들이 있어요
📍‘민변 맏형’ 김남근, 늦깎이 정치인 되다
✔대학 동기 원희룡, 그리고 조국
✔“文 정권 개혁은 ‘어정쩡 타협’, 尹 정권은 그마저도 후퇴”
📍‘학사 경고’ 불량 대학생 김동아, 국회의원되다
✔이재명과의 회의가 싫어진 이유?
✔“친명 낙하산? 반명 견제 뚫어낸 것”
✔“학폭 논란?10을 100으로 부풀렸다”
누가 학생운동을 가장 열심히 했느냐고요? 누가 물으면 저는 딱 원희룡(전 국토교통부 장관)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시위에 참여하고 노동운동을 하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학생운동을 말하는 거죠. 그래요, 우리 원희룡군이 가장 열심히 했어요. 조국 대표요? 조 대표는 (전형적인 의미의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기보다는) 주로 학술 운동을 했죠.
김 의원의 발언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인터뷰와도 일맥상통한다.
저는 학생운동 대오의 중간 정도에 서 있었습니다. 사회과학 세미나, 농촌 활동, 도시 빈민 활동 등에 꼬박꼬박 참가했지만, 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진 못했습니다. 제가 ‘투사’형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 제가 주로 맡았던 일은 군사독재의 폐해와 악행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자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국 대표, 『진보집권플랜』 중에서)
김 의원은 옛이야기를 오래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학생 운동하신 분 중에는 징역을 여러 번 사신 분들도 있고 저보다 훨씬 더 심한 고초를 겪은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것처럼 비치는 건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는 전두환 시대였고 직선제 개헌 거부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워낙 커서 모두 들고 일어났던 시대니까 저도 그들처럼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이죠.
그가 법조인이 된 건 1997년 늦깎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였다. 그는 판사가 되라는 사법연수원 교수의 권고를 뿌리치고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20여 년간 민변과 참여연대에서 현실 참여 변호사로서, 사회 운동가로서 입법 개혁 운동에 앞장서면서 사회 변혁과 진보에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