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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니다(마 5장33-37)
성경본문: 마태복음 5:33-37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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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성경에서는 오늘 본문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없는 말은 아예 하지 마라. 이 권고는 우리 전통에 깊숙이 박혀 있다.
‘기도해 주겠다.’라고 말하고는 기도하지 않거나 마음에도 없으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빈다.’라고 하며 경건한 말로 연막을 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다.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라고만 하여라.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말을 조작하다가는 잘못된 길로 빠진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저에게 깨닫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헛맹세’라고 표현되어 있죠.
☞다른 하나는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라는 것이죠.
한때 우리는 참 어이없는 기준에 의해 규제를 받고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기준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말입니다.
권석 PD의 책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유연성 없는 규제는 무리수를 낳는다. MBC 레코드 실에 가서 옛날 LP판을 찾다 보면 군데군데 빨간 줄이 가 있는 노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내용이 불량하다며 금지곡으로 낙인찍힌 노래들이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왜 이루어질 수 없느냐고 따지며 못 부르게 했고, 배호의 ‘0시의 이별’은 0시부터 통금인데 그 시각에 이별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금지곡이 됐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로 시작하는 신중현의 ‘미인은 퇴폐적“이라고 (어디가?) 금지.
심수봉의 ’순자의 가을’은 대통령의 부인 이름을 썼다고 금지.
송창식의 ‘왜 불러’는 경찰의 장발 단속에 저항한다고 금지시켰다.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일은 요즘도 일어난다.
지난 9월 여성가족부는 ‘술’ ‘담배’ ‘클럽’ 등의 단어가 들어간 곡 대부분을 앞뒤 문맥에 상관없이 청소년 유해 곡으로 판정 내렸다.
결과적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이 금지곡에서 풀린 지 20년 만에 다시 ‘19금’ 빨간딱지를 받은 셈이다.
심의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PD로서 나만의 잣대가 있다.
‘내가 부모님과 같이 보기에 또는 자식과 같이 보기에 부끄럼 없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된다.
맘에 없는 말을 하지 말아라!
본문 33~35절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먼저 첫 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는 역시 습관적인 신앙과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본질적인 신앙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냥 말해도 되는데, “왜 맹세를 하나요?”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이 신용이 없어서 그냥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그 말에 신뢰성을 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신용이 없는 사람이죠.
또 다른 경우는 정말로 중요하고, 하나님께 맹세할 만큼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듣는 사람에게 확신과 신뢰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율법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지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죠.
민수기 30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그런데 이 맹세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왜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어떤 의지로 맹세를 했던 간에 우리에게는 이런 맹세를 지킬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맹세는 본의 아니게 우리를 하여금 사기꾼을 만들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용납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한 수 더 떠서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죠.
그러자 베드로가 발끈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모든 제자는 도망갔고, 장담하던 베드로는 재판정에서 동정을 살피다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약속할 때와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있을 때, 부인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혹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가운데 자신이 큰소리쳤던 맹세를 까맣게 잊고 만 것이죠.
이것은 의지적인 차원 혹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약함에 기인한다는 것이죠. 결국, 맹세가 진실을 담보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아주 실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없는 말은 아예 하지 마라. 이 권고는 우리 전통에 깊숙이 박혀 있다.
‘기도해 주겠다.’라고 말하고는 기도하지 않거나 마음에도 없으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빈다.’라고 하며 경건한 말로 연막을 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다.
사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아주 습관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하지만 잘 지키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14장 28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쓸데없이 우리가 하는 말, 거짓 맹세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 말입니다.
이제 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대상을 찾습니다.
“하늘에 맹세코”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곳은 하나님의 발등상이 있는 곳입니다.
“땅의 이름을 걸고” 그런데 그곳은 이 땅을 다스리는 임금의 권력, 즉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위임한 곳입니다.
이 말은 결국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신 있게 맹세를 해도 지킬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정치에 대해서 무척 냉소적입니다.
저 역시 교단에서 일어나는 정치에 대하여 냉소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안 한다고 하지만 정치를 안 하는 것 역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저에게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어떤 정치하는 분이 “어떻게 사람들이 말한 대로 지킵니까? 상황이 달라졌는데.”
결국, 정치하는 사람들의 약속은 늘 깰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약속과 맹세는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맹세를 하면서 우리를 가장 신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과장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신의를 저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인정하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말한 것은 지킨다!”
“처음 한 약속이 가장 중요한 약속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결정을 흔드는 것은 우리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 찾아오고, 그 약속을 지키면 우리가 손해 볼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우리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필요한 곳에 사용하시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살 수 있습니다.
조작하지 마라!
본문 36절 말씀을 윗부분의 거짓 맹세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지, 아니면 37절 말씀과 같이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책략은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아주 재미있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라고만 하여라.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말을 조작하다가는 잘못된 길로 빠진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말을 조작한다는 단어를 ‘manipulate’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 저 사람 말하는 거 봐. manipulate 하는 것 아냐?”라고 할 때, 진실하지 못하게 자신을 포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뭔가 남을 속이려는 의도가 습관적으로 속에 베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잘난 척하고 자신의 삶을 과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로 아무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머리로 머리카락 하나 검게, 희게 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참 많이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가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손에 장 지지는 사람 한 명도 못 봤습니다.
특히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참 놀라는 것은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 중의 대부분이 “절대 그 일을 했다는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의 일도 밝혀지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좀 과장되게 말을 하자면, “거짓말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죄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참 무안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리적인 현상인데, 특히 여자들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방귀 뀌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죠.
그래서 헛기침을 하면서 혹은 살짝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냄새를 어떻게 합니까?”
어린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자기 눈을 가리고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가 보지 않으면 안 보이리라 생각하지만, 빛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결국,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맹세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선서를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모든 맹세와 선서를 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반사회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혹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함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지 않도록 ‘정직하라!’라는 것입니다.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simple life’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단순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힘들고, 그것 때문에 제한을 받을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순간부터 그 인격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점점 그의 자유는 제한받기 시작합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실험입니다.
‘울타리가 있는 운동장’과 ‘울타리가 없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놀게 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가 없는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은 중앙에서만 놀지만, 울타리가 있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를 쓰면서 놀았습니다.
이처럼 울타리는 삶의 폭과 인격 그리고 관계의 폭을 오히려 넓혀주고 점점 더 큰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약속을 깨는 순간 누군가 상처를 받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때, 잠시의 곤란함을 모면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좀 더 강력하게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오직 너희 말은”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 중의 몹시 나쁘고 비열한 습관이 있습니다. 꼭 “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자기의 옳고 그름을 담대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장 깨끗하고 떳떳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격이 무엇입니까?
책임질 행동을 하는 것이죠. 자기 입에서 자기의 말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의 예를 들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국민이 이렇게 원합니다.”라는 상투적인 말을 쓰는데, 저한테 물어보고 이야기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남의 이름을 빌려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아주 비열한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떳떳해라!”라는 것입니다.
너의 소원을, 그리고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저 산 위에서 모두 듣도록 선포할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그것이 떳떳함입니다.
말은 인격의 표현입니다. 맹세가 없어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며 말한 대로 사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예 서약을 요구할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진실하게 살라!”
에세네파의 한 성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맹세하지 않고는 믿음을 줄 수 없는 자는 이미 한참 잘못된 자이다.”
신앙인을 신앙인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모호한 태도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바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심사숙고하고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올바른 기준 가운데서 단호한 결단을 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잘못된 결정으로 말미암은 고통도 경험해야 합니다.
어떻게 실수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월터 크론카이트가 쓴 [나를 키워 준 한마디 말]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손목시계를 꼭 하나 갖고 싶었다. 실은 이미 동네 상점에 진열된 잉거솔 상표의 시계를 꼽아놓고 있던 참이다.
일 달러짜리 시계였는데 가진 돈은 없고 돈을 쉽게 벌 전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상점 주인에게 시계를 먼저 가져가고 돈을 조금씩 할부로 갚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상점 주인은 승낙을 해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나의 어머니가 우연히 그 상점에 들르게 되었을 때 상점 주인은 무심코 그와 내가 약속한 것을 어머니에게 말해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걸 용납할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빈틈없이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러한 상점 주인에게 시계값을 내고 나를 만나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네 의도는 정직했다 할지라도 시계 살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넌 아직 모르잖니?
딱히 부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넌 지금 내기를 하는 거야. 월터야,
그런 건 위험한 회색 지대 중의 하나란다.
회색을 주의해라. 회색은 곧 검은색으로 변하기에 십상이니까, 알겠니? 월터야.”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시계를 되찾을 만큼 돈을 벌 때까지 그것을 당신이 보관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은 정직하고, 또 정직해지기를 원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정직성은 다른 모든 미덕처럼 늘 경각심을 지니고 있어야 얻어질 수 있다.
나의 어머니는 이러한 속성을 알고 계셨다. 나를 모호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도와줬을 당시 나의 어머니는 이런 점에 유념하고 있었다. 더러워졌는지를 알 수 없는 회색 지대의 모호함에 대해서 말이다.
순교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다.”라는 한마디의 거짓말을 못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이 어려운 결단은 쉽게 핑계를 대고 살았던 사람, 예수 이름으로 말은 하지만 늘 그 이름으로 이득을 취하려 했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가 살아서 역사함을 믿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서원기도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급하면 서원기도를 하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원’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 이 기도를 들어주시면 평생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극단적으로 서원합니다.
조건적인 서원은 상황이 달라지면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 하나요?
우리가 늘 변명처럼 달고 사는 말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비겁함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약속을 잘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벼운 약속은 우리의 삶을 질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은 신중히 하되 한번 한 약속은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고 작은 약속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 작은 약속을 지키면 큰 약속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주면서 신용을 얻습니다.
그 신용이 인생의 큰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