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 14:6~11
제목: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기독교는, 삼위일체 등 근본진리가 신학도들의 지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알고 이해하며 믿어야 하는, 성경 연구의 신앙입니다.
|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공동번역: 파고들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삼위일체를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기초적인 것은 초신자때부터 차근차근 알아가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기초와 교양이 없으면 성경이, 특히 신약성경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데에 한계가 생깁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에서는 신학이 아닌 평신도용 교리와 신앙고백에서조차 삼위일체 문제를 교육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0~11과 마태복음 3:16~17을 함께 종합하여 보면 삼위일체의 근본진리에서 나온 ‘상호침투’와 ‘상호교류’ 하시는 세 위격들 상호간 사랑의 역동성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 요14: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NIV: at least)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 마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공: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14:10~11은 상호침투를 나타내는 대표구절이고, 마태복음 3:16~17은 상호교류를 나타내는 대표구절입니다. 이러한 교리와 성경구절에는 사랑의 역동성이 나타납니다. 많은 분들이 사랑의 역동성이 나타나는 설명에서 ‘관계의 춤’(페리코레시스)을 언급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인 삼위일체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이 신비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바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입니다. 이는 ‘상호내주’ 혹은 ‘서로 안에 거함’을 의미하는데요. 마치 세 위격의 하나님이 완벽한 조화 속에서 끊임없이 추는 ‘관계의 춤(Dance of Love)’과 같아서 붙여진 표현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이자 교회가 오랜 시간 믿음 안에서 고백해 온 신앙 표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은 각각 구별되지만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관계는 정적인 구조가 아니고 사랑 안에서 위격들 간 서로를 향해 나아가며 움직이고 살아있는 역동적 교제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삼위일체와 위격 상호간의 관계가 특히 많이 나옵니다.
| 요16:12.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NIV: the Spirit of truth, comes)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공: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세 위격이 하나로 일하신다는 신앙을 고백하게 됐습니다. 이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 (개신교가 포함된) 서방 교회는 동방교회로부터 한 단어를 빌려왔는데, 그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헬라어로 페리(περί, 주변을)와 코레시스(χώρησις, 움직임 또는 춤)가 결합된 말로, ‘함께 원을 그리며 춤추는 움직임’을 뜻합니다. 마치 손을 맞잡고 서로 안에 머무르며 조화롭게 돌고 도는 춤처럼, 세 위격의 하나님은 서로 안에 계시며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너무나 고상하고 신비하여 인간인 우리 성도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까요?
● 아닙니다! 이 사랑의 춤에 우리 성도들도 초대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각기 다른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는 단지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친교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믿음의 길입니다. 지금도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춤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도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 세상 가운데 세 위격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가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사랑의 연합이 성도에게 확장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I am in my Father, and you are in me, and I am in you)을 너희가 알리라 요15: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내(공동번역: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함이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NIV: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You can do nothing) |
사랑의 연합이 성도에게 확장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상호침투),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 간은 물론이고 성도들 간에 우리가 서로를 비워내며 사랑으로 하나 될 때(상호교류), 우리 교회와 가정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독립적인 개별 인격체로 존재하되 서로의 아픔과 기쁨에 깊이 스며들게 됩니다. 정적인 신앙에 머물지 말고, 사랑의 역동적인 춤에 동참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연합이 우리들의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 감동적이지만 조금 어려운 내용이라서 복습합니다. 상호침투는 본질적인 하나 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침투’하시는 세 위격들입니다. 이는 세 위격이 서로의 안에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요14:10~11).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서로의 위격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서로의 존재 안에 스며들어 계십니다. 이 ‘상호 내주’'가 있기에 우리는 ‘세 위격’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세 위격들 사이에는 ‘상호교류’가 있어서 사랑의 역동성이 나타납니다(마3:16~17). 마3:16~17의 이 장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교류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성부의 음성, 성자의 순종, 성령의 임재가 한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낮아지셔서 성부께 영광을 돌리며, 성령은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증거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사역 속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완벽한 상호침투와 상호교류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흐름은 하나님과 성도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까지 흘러넘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페리코레시스’는 우리 성도들의 삶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여주는 이 상호침투와 상호교류는 관념적인 이론이나 교리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의 이상적 모범입니다. 요한일서는 이 사랑의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이 공유하는 속성이고 일반은총에도 사랑이 자리합니다. 특별은총의 결과인 사랑은 구원받은 형제자매들 간의 상호교류와 사랑을 역사합니다. 이 사랑을 믿고 기념하는 주일예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 )를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런 영적 지식에 부족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란 말은, 이제 멀지 않아 곧 실현될 일, 곧, 그의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부터 시작될 완전한 계시(啓示)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시기, 곧,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됨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장 확신 있는 지식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보았느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의 글에는 이 방면 기록이 적지 않다. 19:35에도 말하기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고 하였고, 요일 1:1-3에도 말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에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은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타산적이다. 그는, 영(靈)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감각적으로 보기 원하였다.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벵겔(Bengel)은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영혼 자체를 볼 수 없으나, 그것이 몸을 도구로 하여 행하는 바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관한 일체의 생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1:15)"라고 하였다(Gnomon 2, Edinburgh, p. 433).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여기 이른 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 분의 도덕적 연합(행위로써 연합)도 의미하였으니, 고데이(Godet)의 말한 바와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 '나는 아버지 안에'란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를 겸허(謙虛) 시킴이고, '아버지는 내 안에'란 말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겸허에 모든 능력과 지혜를 전달하심이다"라고
하였다(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Zondervan, p. 274).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네, 잘 읽고 이해합니다.
요5:39
<호크마 주석>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 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의 증인이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가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이 스스로 증거한다고 말씀하실 때 더욱 분명한 설명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그들의 어리석은 자랑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이 성경에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죽은 문자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들을 나무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땅히 그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상고하고 성경을 활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 그 자체가 생명을 공급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에 대해 무지했으며 그 안에 담겨있는 생명의 빛을 끄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 수 있는 분인데, 율법이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어떻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상상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 대신에 그림자와 같은 유령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 목표에서 이탈되는 자는, 그가 학문을 하면서 일생의 정력을 바쳤다 해도, 절대로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구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성경을 통하여 너무나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노역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보되 그저 지나가는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최대한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감추어진 보배를 부지런히 찾으라고 그들을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항상 그들의 손에 붙들고 있으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그들의 게으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모세의 율법에 분명히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건으로 그 광채를 가리기를 원했다. 물론 여기에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난 것은 복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분이 복음에 공개적으로 계시되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 )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세'는 비둘기같이 '내려'(* ,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 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 ,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있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3:17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 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 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 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 )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고난 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 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가옴에 나오는 '기뻐하는'(* ,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익숙하지만 다는 모르는 내용을 잘 배웁니다.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6:12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 , 바스타조)는 문자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옳긴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행 15;10;갈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마 16:6-12, 21-23;17:17;막 16:14).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떤 것이다(18:15-27;막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행 1:8).
=====16:13
진리의 성령 - 혹자는 이 표현에 대해 성령이 진리를 가져와서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그 진리를 심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한다(Bernard). 이와 비슷하게 바렛(Barrett)도 이 말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14:17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진리 가운데로'란 표현이 사본에 따라 두 가지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1) '엔 테 알레데아'(* ):시내산 사본(* )과
베자 사본(* )을 비롯한 몇몇 대문자 사본(L, W, * )과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본 구절을 '진리의 전 영역 안에서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하거나(C.K. Barrett), '모든 진리 안에서 교훈하심'으로 해석한다(Farrar, Fenton). (2) '에이스 텐 알레데미안'(* ):몇몇 대문자 사본 (L, W, * )과 많은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바실(Basil) 그리고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교부들도 이 독법을 지지한다. 이 독법을 지지하는 학자는 헬라 고전 문학에서처럼 '에이스'가 항상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본 구절을 '성령의 활동 하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진리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잘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Dela Potterie). 그리고 모리스(L. Morris)도 이 독법을 지지하면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은 제자들을 점점 더 깊이 진리에 대한 지식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고 본 구절을 해석한다. 여기서 어떤 독법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이 진리와 관련해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포치(Porch)의 진술대로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다(15:26).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한편 '인도하다'(* , 호데게오)는 70인역(LXX)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갈구하는데 사용되었다(시 5:8;27:11;107:14;143:10).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출 13:17;수 24:3). 이처럼 '호데게오'는 '인도하다'는 의미와 '가르치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으므로(Kittel) 본절에서도 '가르치다'란 의미를 취할 수 있으나 이 단어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에이스'와 잘 조화가 되지 않으므로 '인도하다'가 적당하다.
자의로 말하지 않고 - 예수는 자기의 의도대로 말씀하지 않았다(8:26;12:49;14:10) . 이와 같이 성령도 자기 임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씀한다. 비록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해야 할 모든 말씀은 다 드러내셨다(4:25). 성령이 말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하셨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보충이 아니라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자가 선포하고 실행하셨던 전 구속 사역에 관한 말씀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듣는 것 - 여기서 '듣다'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성령이 끊임없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사역하심을 의미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 하심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 - '장래일'(* , 타 에르코메나)은 문자적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뜻하는데, 혹자는 이것을 장래 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Bernard). 그러나 이 용어는 본서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으므로 성령의 사역에만 이 용어를 적용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가 잡혀 가신 날 밤의 시점에서 본다면 '장래일'은 곧 닥칠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의미한다. (2)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 사역의 관점에서(8절)보면 '장래일'은 죄와
의와 심판을 선포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양자를 다 받아들인다 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인 사건은 단지 미래의 역사에서만 기대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복음서 안에서 시작되었으며(눅 7:19)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종말론적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의 견해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모두 아시므로 제자들에게 장래 일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요한의 계시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예언의 기능 역시 예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일'은 전체 구속사 중 남은 부분에 대한 것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성취될 일들이다. 성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므로 그의 사역을 단지 어떤 한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16:14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앞에서 성령의 역할은 세상을 책망하며(8절),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라(13절) 소개되었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의 영광(Glory, NIV)을 나타내는
것이라 덧붙여 소개된다. 넓게 보면 본절의 이 역할은 앞에 언급한 두 역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본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심부터 시작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외관상 초라한 생활을 하셨다(눅 9:58). 특히 영광과 위엄 가운데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제자들과 그들을 위시한 추종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음을 당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에 그 십자가는 수치와 무기력과 절망으로 보였을 뿐이며, 예수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이 고난과 죽음의 관문(關門)을 거친 후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 자체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생생한 목격과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위엄과 영광은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본 구절의 의미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로 연결되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뒷받침된다(15절 주석 참조).
즉 이러한 부활에 대한 증거 사역을 포함하여 성령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예수의 신적 본성과 신분 및 장래 재림주로 임하실 사실 등을 증거함으로써 예수 당시에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명확히 밝혀 예수의 영원하신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셨고 또 앞으로도 드러내실 것이다. 요컨대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의 복음은 영광의 광채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6). 또한 본문은 성령의 사역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임을 나타낸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함으로써 어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완수했듯이 성령의 사역 또한 예수의 사역 위에 기초하며 또 예수의 사역의 결실을 맺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16:15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 예수는 17:10에서 '내 것은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성령이 나타내시는 것은 성자에게 속한 것을 근거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부의 것이다(3:35;5:20). 삼위 하나님은 구속(救贖)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동적이다. (1) 성부는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고(엡 1:3-5;벧전 1:2) (2)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구속을 완성하셨으며(엡 1:7) (3) 성령은 구속 사역의 의미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예수가 완성하신 그 구속을 각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신다(엡 1:8, 9;벧전 1:12).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성령의 역할을 본문에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예수가 소유하신 '내 것'은 자신이 성취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구속사역을 바탕으로한 '장래 일'(13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래 일'은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전개될 것이며 또한 그 일은 성부가 계획하신 것이므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 말씀을 근거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깊은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상호교류라는 깊은 신비를 정성스럽게 갈무리해 주시니, 그 사랑의 무게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교리가 단순히 머리에 머무는 이론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님의 완벽한 사귐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과 교회 공동체로 흘러 들어오는 실제적인 원동력이라는 사실이 무척 귀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페리코레시스'**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서로의 삶에 아름답게 스며들고 사랑을 나누며 주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아멘!
매우 감동적이고 진리가 충만한 묵상입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위 내용을 체득하여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고 목사들도 설교 중에 잘못 건드리다가 이단으로 낙인 찍히기 쉽기 때문에 언급을 잘 안 하려고 하는 주제인데요. 우리 카페에서는 이 주제를 여러 번 반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어서 매우 좋습니다. 오늘 내용은 역대급인 것 같습니다. 특히 성도의 신앙생활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여 거룩한 사랑의 춤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의 제시가 신앙생활의 지향점을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네요. 하나님과 성도 간의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를 페리코레시스로 풀어 주어 매우 흥미롭고 유익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침투(요 14:10-11) 와 상호교류(마 3:16-17)의 신비를 잘 이해해서 가정과 교회에도 이러한 역동적 사랑의 관계가 충만해지게 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요약과 분별의 댓글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페리코레시스를 성도들에게도 확장하여 초대해주셨다는 사실이 더욱 감동적이고 은혜의 요소가 충만하다고 느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초대가 계속 이어지고 이어져서 우리에게까지 도달했군요!!
아멘!
아멘22
삼위일체의 신비가 관념적인 교리에 머물지 않고, 성자 예수님의 세례 현장에서처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사랑의 실재라는 점이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세 위격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상호침투'의 원리는, 오늘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거룩한 '페리코레시스'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역동적인 사랑이 우리의 매일 속에 풍성히 열매 맺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아멘 🙏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교류가 우리 삶의 실질적인 원동력이 된다는 고백이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 거룩한 사랑의 흐름이 교리라는 틀을 넘어 오늘 우리 공동체의 사귐 속에 살아 숨 쉬는 실제가 되기를 함께 마음 모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