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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융의 정체
아래 글은 고 지도에 나타난 산 융(山戎)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권태원 교수의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발해해협의 장도에 나타난 산 융 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지도는 세 연 님께서 올려주신 화이도의 산융부인데 출처는 미상입니다.
[ 고대 만주지방의 동이족과 韓民族]
1) 역사지리상 민족분포와 문화
근간 중국 측(대만을 포함) 역사지도집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하·상·주(夏·商·周) 3 대도에 만주평원 한복
판에는 예맥(濊貊)족의 분포를 표시하고 있다.
한편 郭末若을 비롯한 譚其양 등이 펴낸 중국대륙 측 역사지도집에는 전국시대를 전후한 시기에 역시
제2송화강을 중심으로 요동지방에 걸친 만주평원지역에 예맥(濊貊)의 분포를 명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 와 같은 중국의 역사지도책에는 한결같이 상·주(商·周)시대 이후 전국시대에 걸쳐 난하( 河)하류
노령(盧龍)과 천안(遷安)지방 일원에는 고죽(孤竹)을 비롯하여 산융(山戎)·영지(令支)·무종(無終) 등이
요하(遼河) 서쪽에서 하북(河北) 북방일원의 소위 기북(冀北)지방에 걸쳐 보이고 있다.
또한 목단강(牡丹江)과 우수리강(ussuri R.)을 이은 동편에서 연해주 일대에는 숙신(시대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데 춘추전국시대 이전 肅愼, 한대 相婁, 남북조시대 勿吉, 수·당시대 靺鞨, 송대 女眞, 청대에 滿洲族
이라고 함)이 있으며 전국시대를 전후하여 대싱안링지방 일대에는 후일 중원으로 진출하여 남북조시대
북조의 중심을 이룬 선비(鮮卑)의 전신인 동호(東胡)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만 상·주시대 이후 한반도에는 조선(朝鮮)의 칭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으로 중국의 상고대인 상·주시대 이후 전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대륙에는 전국
말기로 추정되는 시대 압록강 중류지방인 남만주에 보이는 고이(高夷·고구려 전신 추정)를 제외하면 만주
대륙 중심부에는 예맥족 이외의 종족명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예맥 이외의 종족은 이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 검토된 바 있는 요하 동쪽의 요동땅과 한반도에 걸쳐 다른 지역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석묘를 바탕으로 한 석총과 북방초원계 청동단검 문화권의 형성으로 비록 국경이 분명치 않았던 고대
사회이기는 하나 이 지역은 고조선(古朝鮮) 문화권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이 예맥 및 고조선을 중심으로 중국대륙의 한(漢)족과는 다른 고대 한민족에 의하여 신석기 말기
이른 시기에 만주대륙 중심부인 동북평원을 차지하여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후일 만주족
으로 알려진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과 동호(東胡)계 선비(鮮卑)족의 발흥이 있기 전에 이 지역에는
고대 한민족이며 후일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가 발생한 예맥족과 삼한의 발흥과 관계 있는 고조선
이외의 다른 민족문화에 대하여는 학계에서 아직 확인 된 바가 없다.
이 글 역시 권태원 교수의 "부여사회와 문화권"이란 논문의 한 대목입니다.
[당시 연산을 넘어 동방으로 진출한 연(燕)에 의하여 산융은 따링강(大凌河)지방에서 물러났고 대신 이
지역에 진출한 동호는 그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으며 아직도 미개한 사회에 머물고 있었던 읍루는
한나라 때 부여에 복속되고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흉노 등 유목계 여러족이 있었으나 그들 세력은 부여의 선세문화권으로 알려진 쑹넌평원
에까지도 미치지를 못하였다.
그후 동호계 선비족이나 읍루계 물길족의 강세와 그들의 진출로 부여가 점차 위협을 받기 시작한 삼국
시대에서 진(晋)대에 이르기 이전까지는 고대 한민족에 속하는 고조선과 예맥에 의하여 중국 동북지방
중심부 태반을 차지한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홍산문화를 통하여 발견되는것은 조기의 옥제품 문화입니다.
곡옥과 닮은 물건이 있는가 하면 돼지를 닮은 용도 보이고 하네요.
이런것들은 죽은 망자의 환생을 빌기 위해서 무덤방에 시신과 같이 묻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것들과 유사한 문화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때 까지 흘러 옴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B, C 770~ B, C 403 년 까지 태원 선우씨들의 선우국은 난하의 서쪽에서 활동하다가 그 규모가
축소되어 중산국으로 줄어 들었지만 청동기 문화나 옥을 다루는 기술과 나전칠기 기술은 대륙전체의
최고였습니다.
당시의 선우국 지도를 보면 난하의 북쪽에 위치한 집단을 산융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기의 주장대로 삼조선 시대라면 산융은 번조선에 해당하고 선우국은 예맥조선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들은 기원전 221년에 동반하여 폐퇴하였습니다. 연 나라와 진 나라에게 말입니다.
이 들은 전란을 맞아 그들이 향유하던 찬란했던 보물들을 대동하고 추격군이 쉽게 추격할 수 없는 발해안의
장도에 있던 그 들의 큰집으로 피란하였다고 보면 무리한 추측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서의 기록은 이 때의 피란민 행렬을 수 없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를 눈여겨 봐 두시기를 권합니다. "산융"(山戎)이라는 위치를 거리상 으로는 천리 이상 떨어진
위치인 등주(登州). 내주. 빈주(濱州) .채주 등의 해변 지역에서 거의 같은 시각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이 위치는 <고려도경>이란 책에서 너무도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다시 한번 다루어야 될 문제 이기에 상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선우국 지도 산융의 정체
선우국 지도입니다. 지정학적으로 은나라의 은허와도 같은 동일권으로 연결이 되고 난하의 서쪽으로 산융과 접하고 있습니다. 이 루트를 통하여 홍산문화의 진수는 은나라로 들어 갔다가 다시 기자의 세력들에 의해서 고조선으로 돌아 온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김성재 저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
이렇게 분석하고 보면 많은 청동기 문화와 옥제문화를 창출했던 주인공들은 중산국을 중심으로 하여 생산에
종사하던 조선의 유민 기술 집단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이 좋은 큰 그림이 되겠죠. 다웬고우(大文口) 문화, 용산, 은허는 동(東)을 말합니다.
이 3 문화의 조상은 지아지아디안((下家店)이라고 보죠. 복박사님도 아마 동의할 것이라 봐요.
지아지아디안의 선조는 홍산이죠.
넬슨 교수가 요약 정리 평가한 것을 한글로 번역해봤어요. 원래 다전공연구 게시판에 올렸는데.
한민족 기원과 관련해서 참고하시라고 여기도
올립니다.
지아지아디안(下家店) 아래층 문화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하가점 하층) 문화는 한 때 치팽 2기라고 불렀던 서쪽
리아오닝(요녕)에서 발굴된
유적들의 무리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다. 노출된 집 바닥, 여러 종류의 벽들, 특히한 색깔, 모양 그리고
디자인을 한
채색 토기, 그리고 독특한 보석들이 함께 있는 정교한 무덤들은 이 문화의 특징들이다.
이 논문에서 구오는 먼저 이 유적들의 분포와
연대를 서술하는데, 이 유적들은 얀 산맥의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발견된다.
이 문화의 연대는 지금 후기 롱산(용산)문화와 초기 상나라 문화에 해당한다고 보는데, 즉 기원전 2000-
1500년 사이로 보며, 3개 기간으로 세분한다.
대부분 토기는 아주 평범하다. 하지만 황화강 지역의 일상적인 토기와는 다르다.
그릇 모양은 침통들, 불룩한 다리를 가진 ‘리’ 삼발이들, 단단한 다리를 한 삼발이들, 그리고 항아리들을
포함한다. 제례용으로 쓰였던 토기는 ‘구이’ 삼발이 물주전자들과 ‘주에’ 라고 하는 삼발이를 가지고 튀어
나온 모양을 한 술잔들인데, 매장 장소와 연관이 있는 곳에서 발견된다.
이 두 가지 모양 모두 상나라 유적에서도 발견되나, 상나라의 경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릇들이다.
이 지아지아디안-상나라 연관을 생각했을 때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 그릇들이 리벳을 닮은 일련의
튀어나온 부분을 가진 것은 흥미롭다.
채색 패턴중에서는 ‘타오티에’ 디자인 (괴물 가면)이 나타난다. 구름, 천둥 모양의 패턴, 거북이나 용도
역시 발견되는데, 상나라 청동과 유사하다.
그러나, 연대를 따지면 상나라 문화는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보다 뒤로 보인다.
많은 수의 돼지뼈가 주거지와 매장지 모두에서 발견되었다. 소, 양, 그리고 사슴 뼈도 역시
발굴되었다.
청동은 장식, 도구, 무기를 포함하는 작은 물체들을 만드는데 쓰였다. 부채 모양의 끝을 가진 청동 귀거리는
이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청동을 뜨기 위한 도자기 주형도 역시 발견되었다.
집들은 크기나 복잡함이 대단히
다양하다. 초기 주거지들은 둥근 구덩이 집들로 계단진 입구를 가진다.
후기 집들은 이보다 더 크며, 벽돌(adobe)로 된 벽과 평평한 바닥으로 되어 있다.
일부 집들은 벽돌 바깥에 돌로 된 벽을 가지기도 한다. 종종 한 쪽면에 벽돌들이 튀어나온 단(壇)이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흙과 돌로 만든 벽들은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지만 모두 방어 목적으로 만든 듯
하다.
발굴된 무덤 수는 아주 적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묘지들은 유물들이 풍부하다. 잘 보존된 주거지 동북쪽에
있는 '다디안지'가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매장지들은 서로 아주 가깝게 분포하고 있다.
묘들은 흙으로 된 구덩이며 대개 나무로 된 관들이 함께 있다.
머리는 서북쪽으로 향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면에 놓여 있다. 묘는 8.9 미터 깊이까지 이를 수 있다.
그림이 그려진 토기 세트, 돼지나 개 뼈들, 그리고 옻칠을 한 도자기와 같은 부장품은 발쪽에 있는 흙으로
된 벽감(壁龕) 들을 채운다. 관에는 옥과 청동 장식품들이 발견되었으며, 일부 남자들은 돌로 된 전쟁용
도끼도 가지기도
한다.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는 종유안의 이리토우(이리두) 유적과 같은 시대의 것이다.
거주자들은 농업을 활발히 했으며, 돼지와 개를 사육했다. 분화된 장인(匠人)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독특히
구별되는 스타일의 일터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구오의 의견이다.
매장지의 깊이는 부장품과 이 부장품들의 복잡성 정도와 관련이 있다.
가장 큰 무덤에서는 두 마리의 돼지와 네 마리의 개도 함께 나왔다. 가장 깊은 무덤들에서 나온 그릇들은
더 크고 더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때때로 여러 세트의 도자기들이 있기도 하다. 부장품을 간직하기 위한 벽감이 없을 수도 있으며 1개에서 3개
까지 있기도 하다. 관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들로부터 2 미터 높이의 나무로 된 관까지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큰
무덤에서만 ‘구이’와 ‘주에’ 도자기가 매장되어 있다.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는 홍산 문화에서 나온 지역적인 발전이라는 것이
구오의 견해이다.
가령 이 두 문화를 연결하는 과도기적인 형태의 도자기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자오바오구오는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의 앞 단계로 간주된다.
삼발이 그릇이 이 지역 이 전 문화에서 발견된 적은 없다.
구오는 산동지역에서 삼발이 출현을 추적하여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는 이울루 산맥 동쪽에서 가오
태산 문화를 통해서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는 잠시 공백기를 거친 뒤
지아지아디안 위층 문화 (하가점 상층 문화)로 계승
되는데, 두 문화는 특징들이 아주 다르다. 하지만, 이 두 문화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 구오의
견해이다. 두 문화 모두 삼발이 ‘리’가 그릇들의 대표적인 모양이다.
웨이잉지 문화가 이 두 문화를 연결하는 과도기 문화일 수 있다.
‘리’ 그릇은 북중국 청동기 시대에서 광범위하게 나온다.
마지막으로, 구오는 어떤 문자 기록으로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서술한다. 구오는 4가지 의견을 제시한 다음 마지막 4번째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
4번째 의견은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는 중국 동북부 (동베이) 지역에서 나온 상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다음과 같다. “얀” (연 燕) 이라는 한자는 갑골문에서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는 상과 함께 존재했다.
더욱이 상의 이전 단계 수준의 문화들이 리우리에의 유적지에서 나왔는데, 이곳은 연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타오티에 동물 문양은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에서 상나라까지 나타난다.
따라서 늦게는 전국시대까지 연나라의 이 동물 문양은 연속적이라는 것이 구오의 지적이다.
구오는 또 리우리헤에서 발굴된 옻칠을 한 정교한 그릇 뿐만 아니라 ‘리’ 역시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 보면서 상나라의 ‘리’ 역시 지아지아딘 아래층 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본다.
일부 뼈따귀학 (골학 骨學) 증거들이 이 견해를 지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지아지아디안 아래층 문화의 한 갈래가 연나라가 되었으며 다른 한 갈래는 상나라 문화가 되었다고
구오는 믿는다.
S.M.N.(번역: 바비 2004. 7. 4)
사문도
고 평양(古 平壤) 과 태평만(太 平 灣)의 오늘
고조선 당시로부터 평양으로 불리던 이 곳의 지금의 이름은 태평만 또는 묘 도당( 廟 島 塘)이라고 부릅니다.
묘 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의 길이는 5000m, 동서의 길이는 3000m이고 넓이는15평방km에 이릅
니다. 섬의 구성은 묘도(廟 島). 소 흑산도(小黑山島). 당 랑 도(螳 螂 島). 와 랑 도. 북 장산 도(北 長山 島).
남장산도(南 長山 島)의 주위에 둘러 쌓여 자연히 봉 폐 식 항구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곳 묘도 당이 침수되기 전에는 평양이라고 부르던 평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평양 평원의 넓이는 남북이 5 Km, 동서가 3 Km 이며 총면적은 15 평방 Km로서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만(灣) 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평균 수심은 4~5m.입니다. 모래는 부드러우며 동쪽에는 장 도(長 島)항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서쪽에는 묘 도의 입구가 있으며 북쪽 의 장 산수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입니다.
진주 문(眞 珠 門) 의 바다 길과 보 탑 문(寶 塔 門) 의 바다 길을 연결해 주는 가교가 되었으니 가히 사통
팔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상운송의 정박 지 와 북해. 발해 어업권의 집결지로서 묘도 당은 "해신의 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일명 용궁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에 현재 사 문 채(沙 門 寨)라는 성(城)이 있으며, 이 성은 고래로 마 고성(麻 姑 城),또는 서 왕 모
(西王母) 궁, 이라 부르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천 후궁(天 后 宮)이 라는 해상 운항의 안녕 을 기원
하는 기도처 가 되어 있습니다. [유 문 권 저.< 인간해시 장도> 참 조]
청나라 선 종 때(도 광 31년, 1850년) 묘 도의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북쪽에서 산출되는 사 송. 인삼. 상아. 호랑이 가죽 등이 공급되는 곳이며, 동남 모든성의 수륙에서
생산되는 비단. 죽간. 금석 등이 왕래되는 곳이니 이 곳은 옛 부 터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하략.
그러니까 이 곳이 사문도 이고, 이 곳이 용궁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현재에는 묘 도당 근처에 바다목장을 개설하여 인공 양식업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이미 생산을 하고 있고,
해양 교통 기능의 해역 장소가 되어 있습니다.
매일 수 천 척의 배가 지나 다녀 천해의 태 평 항이 되어 있습니다.
왜 이곳이 무역의 중심지이며 교역시장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는지를 아셨을 줄 압니다.
* 사 문 도라는 지명은 당나라 때부터 불렀고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서나 기타 도교. 신화(산해경.
포 박자. 열 선전. 신 선전)와 <불사의 신화사상> 정재서 편저 및 <중국 신화 연구> 신정규 작 등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서, 역사 왜곡의 현장을 비켜서 있는 기록입니다.
이 사 문 도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 나라의 공격 목표지였던 위만조선의 위치를 실제 지명으로 표시한
중요한 근거지입니다.
* [그러니까 주변으로 고조선. 낙랑 군. 평 양성. 장 안성. 동 황성.기자의 몽 성. 위만의 왕 험 성. 발해 내의
삼신산 등이 있었다고 보는 곳중에서 사 문 도는 묘 도의 또 다른 이름 이라는 것입니다.
현 제 묘 도는, 묘 도 군도의 대표적인 이름입니다].
등주북쪽 바다에 위치한 사문도는 황당한 진실(50)에서 소개드린 산융의 이름만 사문도로 바뀐 자리입 니다. 장도(長島)가 현재의 대표적인 이름인데 당시에는 대사도(大謝島)로 기록되어 있군요. 지금은 지도에 묘도(사문도)는 거의 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에 나타나있는 사문도는 평양이 수몰되기 전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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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도는 명 태종 영락 7년 (1409) 700여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함으로 이 당시까지 고려의 서경이
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의 태종 9년임으로 고려시대를 벗어납니다.
명나라 이전의 원나라시대에는 몇번인가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원나라가 고려에게 돌려 주었으므로
서경은 유지되었습니다. 너무도 새로운 얘기라서 필자도 어리둥절합니다.
요서와 요동계 <산동여도>
<산동여도> 요서계와 요동계
장도 역사박물관의 고조선시대 전차
조선과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장도주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왕험성의 위치
왕험성의 동쪽 성벽
이 사진은 왕험성 추정지의 동쪽에 해당하는 자연 절벽입니다. 그 절벽에는 이런 글이 매달려 있습니다. "비 혼
애(飛 魂 崖), 혼이 나르고 있는 절벽?. 해설한 대목입니다. 해군장군 양복이 군사들을 배에 싣고 움직인 방향을 보시겠습니다. 이어서 구체적인 지명을 기록한
<한서>의 보주도 보십시요. 다고 했으니, 이 구절은 위만조선의 위치를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제가 지금의 산 동성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으므로, 당시의 발해의 위치에 따라 양복군의 항로를 알 수 있게 된다.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사기>> <하 거서 河 渠 書>에는 황하가 발해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전국책>은 전국시대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고, <사기>는 서한의 무제 때에 저술되었는데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지금의 산 동성이었으므로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발해는 지금의 발해와 그 위치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항해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위만조선의 우 거 왕은 이 양복의 군대를 맞아 싸웠으니, 위만조선의 위치가 발해의 북 안 즉 지금의 중국의 하 북 성 동북부로부터 요령성에 이른 지역이었고, 한반도북부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진다. 이것을 밑받침하는 기록이 <산해경>에도 보인다. |
패수의 동쪽에 있는 낙랑의 험독으로 옮겨진 왕험성의 형세에 대한 글입니다. 서북방은 평야요, 남쪽은 수십, 수백 쌍의 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요새로써 그러한 위만의 왕험성이
오늘날의 북지 창려지방이었음은 누술한 바 있다.” |
왕험성의 위치를 기록한 <사기>와 <한서>
첫번째사진의 왼쪽 위쪽에 있는 사진은 오늘의 주 항구인 장도항으로 왕험성 추정지의 북서쪽에 해당하며, 두번째 올려진 사진이 성의 남쪽으로 매우
경사진 지형에 있습니다. 어물정 거리다가 위만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던 장소로 보입니다. 양복은 여기서 패하여 뿔뿔이 헤어진뒤 산속을 헤매다가 10여일 만에야 본진과 합류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십 팔 사략>의 저자로 알려진 증 선지는 남 송 말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라는 것은 주지되어 있거니와, 이 지도는 문헌의 기록이
지니는 모호함을 해결하여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가들은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위치를 한반도가 아닌 발해의 북 안으로 인식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18 <해 내 경>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 논>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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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조선전의도 왕험에 대한 주석
<한서> 권 95 <조 선전> 제 65 |
朝鮮王滿,燕人。自始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障。秦滅燕,屬遼
東外 。漢興,爲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燕王盧
反,入匈
奴,滿亡命,聚黨千餘人,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在者王之,都王險.
조선왕만,
연인. 자시연시, 상약속진번조선, 위치리축장. 진멸연, 속요동외요 한흥, 위원난수,복수요동고새,
지패수위계, 속연. 연왕노관반, 입 흉노, 만 망명, 취당천여인, 추결만이복이동주출새, 도패수, 거진고공지
상하장, 초역속진번, 조선만이급고연, 제망재자왕지, 도왕험.
[都王險]에 대한 주석 원문
李奇曰, 地名也. [補注] 沈欽韓, 隨書高麗傳, 都於平壤城, 亦왈長安城, 東北六里, 隨山屈谷, 南臨浿水.
[新唐書], 平壤在鴨 水東南.] 朝鮮國志, 平安道治 平壤府, 東南去王京五百餘里. 杜佑云, 平壤, 卽王險城也.
이기왈, 지명야.
[보주] 심흠한, 수서고려전, 도어평양성, 역왈장안성, 동북육리, 수산 굴곡, 남임패수,
[신당서, 평양재압록수동남.] 조선국지, 평안도치 평양부, 동남거왕경오백여리. 두우운, 평양, 즉 왕험성야.
위에 소개한 글 중에 상세한 원문들이 딸려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도 왕 험 성'에 대한 내용만 추출
하였습니다. 주석의 내용은 이렇게
해석하여봅니다.
{이기가 말하기를, 왕 험 은 지명이다. [보 주]에 심 흠 한은 <수서>의 고려전에는 도읍을 평
양성이라
하였고, 또한 장 안성이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패 수에 이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은 성이 동북으로 육리
이다.
<신당서>에는, '평양은 압록수의 동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국지>는 평양부는 평안도 치소이고, 왕경에서 오백 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두우는 말하기를 평양은 즉 왕험성이라고 하였다.}
위의 해설에서 주의 깊게 관찰되는 부분은 물과 성의 위치가 북한의 평양과는 전 연 히 일치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북한의 평양성은 남쪽에만 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과 남쪽에 다 물이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평양성의 전개는 동남이 아니고 남북이며 산의 굴곡을 따라서 쌓은 성이 아닙니다.
<신당서>에는 평양은 압록수의 동남쪽에 있다고 하였지만 북한의 압록강과는 거리와 방향이 전 연 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평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평양과 가까운 대동강이나 청천강을 예로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도 조선의 역사서인 <조선국지>는 평
양부는 평안도의 치 소이고, 왕 경에서 오 백 여 리가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그 왕 경은 서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두 우는
말하기를 평양은 즉 왕 험 성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에 있는 평양부는 평안도의 치 소일 뿐, 왕 험 성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평양성에는 서쪽으로 보통강이 해자역활을 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북한의 평양성은 성곽의 삼면이 강물로 둘려 있다고 봐야 하는것입니다.
<신당서>가 말하는 평양은 압록수의 동남쪽이라는 기록은 결정적으로 북한의 평양이 왕험성이 아니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여 한 사군을 설치하였다는 북한 평양의 낙랑군설은 어불성설인 것인 것입니다.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