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오층석탑 / 강명수
천년의 햇살을 시리게 받아들고
시대의 그림자를 누긋이 끌어안고
오롯이 한 공간에서 등불을 밝힙니다
고요히 사비의 먼 기억 이어오며
옥개석 안으로 쌓여가는 은이끼
바람의 배꼽자리에 낙관을 찍습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목도리 한 장 없이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쓰고 있는 자서전
초록빛 축원을 하며 탑돌이를 합니다.
-2014년 1월 중앙시조 백일장 차상
비애에 갇힐 뻔한 삶, 담담한 시어로 승화
갑오년 첫 달을 여는 작품들을 기대 속에서 읽었다. 겨울은 시인에겐 축복의 계절이다. 살점을 찔러오는 차갑고 팽팽한 빛살, 혹은 언 땅에서 맹렬히 짓쳐오는 봄 전령의 빛깔도 시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손에 든 몇 편의 작품들은 그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작들은 시조에 대한 고정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대책 없는 비애의 정조에 스스로를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꼭 이어가야 할 구절, 내뱉지 않으면 못 견딜 자신만의 시어들을 발현할 때 시의 생명은 살아난다. 시조는 진부한 슬픔이 아니고 빈혈의 상상력은 더더욱 아니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날 것의 냄새도 소중한 한 영역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달의 장원으로 용창선의 ‘겨울 수화(手話)’를 뽑는다. 역 앞에서 바쁜 수화로 말을 건네는 다정한 두 모녀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이 작품은 자칫 비애에 갇힐 위험이 있는 소재를 자신의 방식으로 담담히 시화하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며 ‘실뜨기하듯 길을 여는 겨울 아침’이
꽃송이처럼 화사하다.
차상엔 강명수의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차지했다.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에 선 오층석탑을 돌다 보면 ‘바람의 배꼽자리에 낙관’을 찍는 사람도 만날 수 있나 보다. 안정된 보법으로 장과 구를 잘 갈무리한 솜씨가 좋다. 다만 함께 보낸 작품들을 보면 역사유물 일변도의 소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시각을 다양화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싶다.
차하엔 이종현의 ‘봉동리의 봄’이다. 봉동리는 개성공단이 위치한 마을이란다. 활기찬 재봉틀이 돌던 봉재공장은 녹슨 풍경이 되고 말았다. 생경한 시가 될법한 소재를 안으로 잘 다독여 결을 살려내었다.
심사위원=오승철·이달균(대표집필 이달균)
[출처: 중앙일보] [중앙 시조 백일장] 1월 당선작
겨울, 칸타빌레 /강명수
홍지서림 가판대에 책들이 웃고 있다
두 눈은 즐겁게 눈요기에 바쁘고
손끝의 모세혈관도 설렘으로 넘겨본다
추위가 귓불 켜고 종종걸음 가는데
손에 든 서책들이 얼마나 궁금한지
바람이 노래하듯이 봉지 속을 기웃거린다
-2015년 1월 중앙시조 백일장 차하
이달의 심사평
을미년 새해 첫 달, 그 어느 때보다 응모작이 풍성했다.
신춘문예 응모작인가 싶을 정도로 수준도 높았다.
그런데 3수 이하 작품보다는 4수 이상으로 호흡이 긴 작품이 많았다.
4수 이상의 긴 작품의 경우 시조 형식에 맞춰 잘 다듬어지긴 했지만 시적 감동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시조는 형식적으로 압축이, 내용적으로는 감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3장6구의 작은 몸체지만 내용적으로 엄청난 시적 감동의 폭발력을 지닐 때 좋은 시조가 될 수 있다. 시조 형식에 맞추어 길게 쓴다고 좋은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마저 짧은 시를 지향하며 긴 글을 읽지 않으려는 스마트폰 시대
독자들을 감동시키려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본령이 짧은 시인 시조가 오히려 길어져서야 되겠는가.
러한 관점으로 응모작품을 읽으니 비교적 어깨에 힘을 빼고 쓴 작품들이 우수작의 범주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권경주의 ‘축제’가 윗자리에 놓였다. 시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의 적정성에다 내용 또한 어려운 부분 한 곳 없이 전체가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졌다. 온 가족이 김장을 담그는 체험 속에서 우려낸 장면 장면들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여기저기서 구절들을 떼다 붙인 작위적인 작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상으로 뽑은 이기선의 ‘벽시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언제 멈췄는지 알 수 없는 고향집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에 대한 신선한 발견이 정서를 자극한다. ‘굶어 죽’었다는 종장의 구절에 오면 오늘 이 시대 독거노인의 죽음까지를 연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차하로 뽑은 ‘겨울, 칸타빌레’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감각적인 시편이다.
이런 현대적 감각을 키울 때 독자에게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좋은 시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권갑하·박권숙(대표집필 권갑하)
[출처: 중앙일보] [중앙 시조 백일장] 1월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