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1. 문제의 제기
I - 1 - 1 20세기말 우리의 조국은 국제 무대로부터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 "기술, 자본, 문화"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선진 열강들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하는 처지이다. 또 다른 한편, 국내의 실정은 국제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응할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들의 사유방식은 여전히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경향이 있다. 사회의 연대의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기에 충분한 자본주의적 경제제도등도 큰 장애요소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이라는 주제는 가장 적절한 주제라 생각된다.
I - 1 - 2 오늘 우리 시대와 또 이에 상응하는 개혁이라는 주제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신명기 개혁 운동"과 비견할 만하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외부로부터 적이 침입해 오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내의 개혁을 전영역에서 시행한 운동이다. 신명기 개혁 운동의 정신은 신약시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원시 기독공동체의 교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 공동체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I - 2 신명기 개혁 운동의 예비적 설명
이제까지의 선행연구에서는 신명기 개혁운동 ( Die deuteronomische Reformbewe- gung )이라는 용어보다는 요시아 < 종교 > 개혁 ( Die < religi se > Reform Josias ) 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여 왔다. 이에 운동 ( Bewegung )이라는 표현을 덧붙인 이는 Perlitt이다. 초기의 순수 종교적 성격의 운동이 점차 정치적으로 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점차 후퇴되고, 문헌의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차원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신명기 개혁 운동의 성격에 두 가지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첫째 신명기 개혁 운동은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총체적 개혁이다. 따라서 종래의 요시아의 종교개혁 혹은 신명기 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개혁 운동을 지나치게 협소화시켜 지칭한 표현으로, 적절치 못하다.
둘째, 신명기 개혁 운동은 기원전 714년부터 609년까지 100년 이상이나 지속된 개혁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신명기 개혁운동의 한 요소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II 신명기 개혁 운동의 태동
II - 1 앗시리아의 부흥
기원전 800년에서 750년에 이르는 두 세대 동안 이스라엘 ( 북조 )과 유다 ( 남조 )는 상당히 평온한 시대를 가졌다. 그 후 745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칼라흐( Kalach )에서 왕이 되었다. 그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원정하였다.
그 후 722/721년에는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 북조 )는 분열된 이후 약 200년 쯤 계속되다가 영원히 끝났다 ( 933 - 722 = 211 ).
앗시리아의 정권이 불안정할 때 - 예, 왕이 바뀔 때 - 마다 저항운동을 펼쳤다. 733년에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저항운동을 폈다. 이 저항운동은 사마리아가 몰락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 참조 II - 2 / II - 3 )
II - 2 시리아 - 에브라임 전쟁과 유다의 앗시리아 예속
시리아와 이스라에 ( 북조 )은 기원전 733년에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어, 유다로 하여금 이에 가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왕하 15, 37; 16, 5 ). 유다 왕 아하스는 자진하여 앗시리아에 굴복하였고, 자비를 빌기 위해 조공을 바쳐 ( 왕하 16, 8 ), 예속상태에 빠져들어갔다 ( 왕하 16, 7 - 9 ).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최고 통치권과 앗시리아 민족의 최고의 신을 인정한다는 표시로서 야웨 제단 외에 또 다른 제단을 만들었다 ( 왕하 16, 10 - 18 ). 따라서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호감을 사고자 했다. 다른 한편 민족주의적이며, 야웨 종교에 충실한 자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여전히 야웨 제단에도 충실했다 ( 왕하 16, 15 ). 왕하 16, 10 - 18 은 두 개의 상호대립적인 집단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한 집단은 아하스 왕과 그의 궁정 신하들로서 친앗시리아 정책과 앗시리아 종교형태를 수용한 집단이며, 또 다른 집단은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종교적 혼합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면, 그 책임이 궁중의 무리들에게 있다고 느끼는 집단이다. 이 집단이 후에 신명기 개혁집단으로 발전한다.
II - 3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의 반 앗시리아 동맹운동
신명기 개혁 운동의 동기와 출발점을 찾는데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반앗시리아 저항운동 (혹은 독립운동 )에서 찾고자 했다. 따라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반 앗시리아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리아가 함락된 이후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기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계속하여 반 앗시리아 동맹이 일어났다. 기원전 720년에 하맛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가자도 가담하였고, 애굽도 지원했다 ( 왕하 17, 4 ). 이 때 유다는 여기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유다의 궁중이 여전히 친 앗시리아 정책에 충실한 내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713 - 711년 아스돗이 맹주가 되어 반 앗시리아 동맹을 결성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성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앗시리아의 보도 - 처벌국가 목록 - 에는 유다가 가담한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가 이 사건에 소극적으로 가담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히스기야가 왕이 된 이후 1 - 2 년 안에 친 앗시리아 정책에 충실했던 궁중의 내각을 개혁하여, 반 앗시리아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내각으로 바꾸어 반 앗시리아 정책을 강력히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50년에 앗시리아에 왕이 바뀌자 ( 사르곤 2세가 죽고, 산헤립이 왕이 된다 ). 이번에는 유다의 히스기아 왕이 맹주가 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장시간에 걸친 준비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01년의 침공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III 신명기 개혁 운동의 종교개혁
III - 1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III - 1 - 1 예배의 정화 ( Kultreinheit )
앗시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운동 ( 혹은 독립운동 )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영역에도 수행되었다. 앗시리아의 신이나 종교적 성물들이 유다의 궁중에 있다면, 이것은 앗시리아의 권력이 연전히 유다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는 앗시리아의 종교적 상징물들, 신상이나 성물들을 일차적으로 제거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 정화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립운동 ( die Widerstandsbewegung ) 이다. 히스기야의 종교정화에 대해 왕하 18, 4 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
"( 4a )그는 산당 ( )을 헐어버리고 ( Hi. ),
( 4a ) 돌기둥 ( )을 부수었으며 ( ),
( 4a ) 아세라 목상 ( )을 찍어버렸다 ( ).
( 4b ) 그는 또 모세가 만든 구리뱀 ( )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 ). 이스라에 자손이 그 때까지도 느후스탄이라고 부르는 그 구리뱀에게 분향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학계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경향비판 ( Tendenzkritik ) 에 의해 4a절은 신명기 사가 ( Dtr )의 것으로 돌리며, 4b절만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주의할 점은 4b절에서 반 가나안적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4b절이 구체성을 띠고 있지만 역사적 사료로 간주될 수 없다. 신명기 사가의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명기 역사서에는 히스키야의 종교정화에 관한 역사적 보도를 담고 있지않는 샘이다. 역대기서에도 히스기야의 종교적 정화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료로 간주될 만한 새로운 사료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료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권력을 상징할만한 종교적 상징물을 궁중에서 여전히 두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명백히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증거를 담고있기 때문이다.
III - 1 - 2 예배의 중앙 통일화 ( Kulteinheit )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다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따라서 유다왕 히스기야는 총력을 기울여 앗시리아의 공격을 철저히 준비했다. 이를 위해 국민의 대다수 - 아마도 전체 - 가 동원되어야 했다. 이중 일부는 성벽 보수 공사와 수로 공사에 동참했고, 또 다른 일부는 군사적 준비에 동원되었다. 이와 같은 준비와 노동은 전체 국민의 동참과 연대의식을 전제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 물리적인 강제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전국민이 진정한 연대의식을 가질 때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를 위해 왕과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보하고, 기층 민중들과 함께 할 때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포기케하고 국민전체의 진정한 총화를 이룩하는데 종교 계층에서도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지방의 모든 성소를 중지하고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통일시킨 점이다. 왕하 18장 4 - 8 절에는 종교 계층이 히스기야의 개혁에 동참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왕하 18장 22절에는 예배의 중앙 통일화에 대해 증거하며, 종교 계층도 앗시리아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노력에 동참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지방의 모든 사제들을 중앙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여,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이룩했다 ( 부록 I과 II를 참조 ). 이에 대하여 계속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부록 I
왕하 18 - 20장 ( = 사 36 - 39장 )의 히스키야 - 이사야 사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곤 했다 : 이 사화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사료를 담고있는가? 왕하 18 - 20장의 히스키야에 관한 역사서술은 4부분의 간단한 연대기적 보도 ( annalistische Berichte : A1 : 18, 1 - 8; A2 : 18, 9 - 12; A3 : 13 - 16; A4 : 20, 20 - 21 )와 3부분의 긴 사화 ( Erz hlungen : E1 : 18, 17 - 19, 7 und 19, 36 - 37; E2 : 19, 8 - 35; E3 : 20, 1 - 19 )로 이루어져있다. 7부분의 모든 서술은 기원전 701년 앗시리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이 군사적 위협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떻게 구출(원)되었는가하는 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있다.
왕하 18장 7b절 ( A1 )는 히스키야가 앗시리아 왕에게 반기를 들어 그를 섬기기를 거절하였다고 보도한다. E1과 E2 사화는 기원전 701년 사건에서 예루살렘의 해방이 야웨의 도움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왕하 18장 13 - 16절 ( A3 )과 앗시리아 보도에 의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히스키야는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치명타를 입고 앗시리아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도한다.
이제까지의 연구는 성서의 보도와 앗시리아의 보도를 토대로 701년 사건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집중하였다. 역사적 재구성의 시도에서 항상 제기된 질문은 "어떤 부분이 역사적으로 실뢰할만한 정보를 담고있는가"에 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 해야할 점은 어떤 부분은 역사적인 보도로, 어떤 부분은 비역사적인 보도로 간주해서는 않된다. 위에서 언급한 7부분은 모두 각자의 관점을 갖고있고, 각자의 고유한 서술 목적을 갖고있다. 7부분 모두는 701년 사건과 관련되어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701년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있다. 따라서 7부분 모두에서 역사적인 보도나 회상이나 신학적 해석을 기대할 수 있다.
부록 II
랍사케 제일 연설 ( 왕하 18장 19b - 25절 )의 구조를 살펴 볼 때, 이 부분은 두개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 I : 19b - 22; II : 23 - 25 ).
이야기 I ( 19b - 22) 이야기 II ( 23 - 25 )
서 론 19b 23a
제 일 주제 : 군사력 20 23b - 24a
제 이 주제 : 애굽원조건 21 24b
제 삼 주제 : 종교적 - 정치적 22 25
프로파간다
두 이야기의 반복과 문체상의 차이 ( 화자의 변화 ) 등을 고려할 때, 한사람의 작업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랍사케 제 일 연설은 신뢰 라는 신학적 주제하에 구성적 ( kompositionell )으로 결합되었다.
그럼에도 랍사케 제 일 연설속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회상이 담겨져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22절은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회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 저자가 그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 즉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불신앙적인 것으로 혹은 야웨 신앙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2절은 순수 역사적인 전승이다. 즉, 22절은 히스키야 개혁에 대한 랍사케 자신의 판단으로 돌려야한다.
랍사케는 자신의 프로파간다 연설을 통하여 성벽 방어선에 위치한 종교 집단들과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이 점은 랍사케 제 이 연설 ( 왕하 18장 26 - 34절 )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협상을 시도한 것과 같다.
III - 2 므낫세 왕 치하의 종교상황
히스기야와 전국민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고, 히스기야 왕 주변의 개혁 집단은 좌초되었다. 신명기 사가는 므낫세 왕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왕하 21, 2 ). 앗시리아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고, 유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을 펼 상황이 전혀 되지 못했다. 봉신국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 감당해야 했다. 므낫세는 앗시리아의 종교를 다시금 받아들여야 했다. 왕하 21장 2 - 9절에는 므낫세의 죄의 목록 ( S ndenregister )을 담고 있다. 이것은 남왕국 유대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종교정책을 총체적으로 담고있다. 따라서 실제 므낫세 시대와 관련된 종교정책은 왕하 21 장 5절, 7a 절에만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또 성전 안팎, 두 뜰에도 하늘의 모든 별을 위한 ( )제단들을 만들었다." ( 왕하 21장 5절 )
"그는 또 그가 만든 아세라 목상 ( )을 세웠다." ( 왕하 21장 7a절 )
예루살렘 성전에서 앗시리아의 종교적 상징물이나 종교관습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고대사회에서 정치적인 예속은 동시에 종교적 예속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류는 므낫세 왕이 앗시리아 종교 상징물 외에 가나안 적인 종교 상징물이나 관습을 함께 조장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 인식과 실제 역사상과의 거리를 분명히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므낫세가 산당들을 다시 재건할 이유가 하등에 없다.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점은 히스기야 왕에 의해 새롭게 도입된 예배의 중앙통일화가 다시금 이전 시대의 형태로 복귀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성서의 증언으로부터 분명하게 추론할 수는 없지만, 왕의 직인 ( k nigliche Siegelabdr cke )를 통해 판단해 볼 때, 예배의 중앙통일화와 새로운 조세제도는 유다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여진다.
므낫세의 죄의 목록에 담겨져 있는 점복적이며, 주술적인 예언활동에 대해 계속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왕하 21장 6a 절 )
"... 점과 마술을 치며, 죽은 영혼이나 귀신을 불러 물어보기도 하였다." ( 왕하 21장 6a 절 )
고전적 예언자들의 활동과 히스기야 시대의 개혁집단의 활동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야웨 신앙은 사회 윤리적인 정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야웨 신앙이 점차 합리적인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배의 중앙통일화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야웨 종교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명기 18장 9절 이하에 나오는 예언자에 대한 규정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술적이며 점복적인 종교관행을 엄격히 금지시키며, 오직 한 분이시며, 이스라엘의 신이신 야웨만을 숭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종교의 합리적인 측면에 대한 반성은 예배의 중앙통일화의 사건 직후에 나타났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는 동안에 결실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므낫세 치하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종교와 함께 앗시리아 종교형태를 받아들여야 했다. 히스기야 치하에서 형성되었던 민족주의적이며 개혁적인 집단은 - 아마도 민중의 지원을 받아 - 므낫세의 친 앗시리아 정책에 저항을 하였음에 틀림 없다. 이에 대해 므낫세는 폭력적으로 탄압했음에 틀림없다 ( 왕하 21장 16절 ).
III - 3 암몬왕 치하의 종교상황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암몬이 왕이 되었다. 불행가게도 그는 궁중 쿠테타에 의해 처단 당했다. 이 궁중 쿠테타는 민중 (암 하아렛쯔 )이 혁명을 일으켜 요시아를 왕으로 세웠다. 암몬 왕 시대의 역사적 정황 ( Konstellation ) 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선행연구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암몬왕과 궁중 쿠테타 무리와 민중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에 대한 질문이다.
사료의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불가능하며, 다만 개연적 추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1953년 A. Malamat가 가설을 제기한 이후로, 대부분 그의 가설을 따르는 실정이다. 그는 왕하 21장 20 - 22절과 ( 특히 ) 역하 33장 22 - 23 절에 근거하여 암몬왕은 친 앗시리아 정책을 부친 므낫세로부터 계승했으며, 궁중 쿠테타 무리들은 반 앗시리아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암몬왕을 제거한 것으로 추론하다. 이러한 추론은 민중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과 혁명 동기를 고려해 볼 때, 잘못된 추론임을 쉽게 알게 된다. 암몬왕의 불행은 반 앗시리아 정책으로 말미암았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짧은 기간 재임했기 때문에 비 정치적 영역, 특히 종교적 영역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므낫세 시대의 종교적 관행이 대부분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민중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졌다. 따라서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친 앗시리아 무리들( 궁중 쿠테타 무리들 )을 제거했다. 이 민중혁명에는 경제적 동기도 관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민중혁명에 의해 요시아는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요시아 왕은 민중이 요구하는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민중들은 왕의 정책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고난 이후에도 민중들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다 ( 왕하 23장 30절 ). 민중들의 종교적 성향은 야웨 신앙에 충실했다.
III - 4 요시아의 종교개혁
앗시리아 왕 앗수르바니팔이 죽고 ( 639 ) 난 후, 앗시리아는 급격히 쇠락하여 마침내 기원전 616년에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됐다. 이 무렵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에는 앗시리아를 대체할 만한 세력이 아직 부상되지 않았다. 이러한 세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유다 왕 요시아는 독립을 쟁취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III - 4 - 1 예배의 정화
앗시리아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영역에도 미쳤다. 이방 권력을 상징하는 이방인의 종교와 신상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져야 했다. 태양과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 ( 군대 )을 위해 만들어졌던 종교적 상징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거되어졌으며, 이들을 위한 종교 관습들도 폐지되었다 ( 왕하 23, 5 ). 히스기야 왕의 종교정화가 앗시리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했듯이 ( III - 1 참조 ), 요시아 왕도 므나세 치하에 다시 등장했던 앗시리아적인 종교 상징물을 제거했다. 이것은 정치적 독립운동의 한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왕하 22 - 23 장은 요시아 왕 18년에 성전을 수리하는 도중 법전이 발견되어, 계약을 체결하고, 개혁을 수행한 것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생애 전기간에 걸쳐 개혁을 수행하였다.
신명기 사가는 요시아의 개혁을 주로 종교개혁적인 관점에서만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치, 경제, 군사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없이 종교적 영역에서만이 개혁을 단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민중들은 사회,경제적 개혁없는 종교적 개혁만에 만족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에 대해 왕하 23장 4 - 20, 24절에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 속에는 신명기 사가의 당대의 종교적 문제점과 과거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을 혼합하여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보도의 역사성이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왕하 23장 5절에 따르면 앗시리아 제의를 위해 임명되었던 사제를 폐위시켰다. 고메르 ( , 혹은 그마림 )이라는 칭호는 야웨 사제들과는 구분되었으며, 유다 왕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관리로 활동했다. 그는 아마도 앗시리아 종교와 관련하여 활동한 것 같다. 후에 고메르 ( 혹은 그마림 )의 실체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 이 용어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를 부르는 용어로 바뀌었다.
왕하 23장 6절에는 요시아 왕이 아세라 목상을 야웨의 집에서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들어 내다가 불태워 가루로 만들어 일반 백성의 공동묘지에 뿌렸다고 보도한다. 최근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견)물들에 의해 이스라엘 종교에서 아세라의 기능에 대한 논의는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신명기 개혁 이전까지는 아세라 여신 숭배가 합법적으로 통용되었다. 아세라 여신 숭배에 대한 논쟁은 신명기 개혁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아마도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제의가 예루살렘에서 통일되며, 동시에 한 민족 - 한 예배 처소 - 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이루어지면서, 아세라 여신 숭배는 이스라엘의 공식 종교에서 배제되었다. 그 후 신명기 사가에 의해 아세라 여신 숭배는 바알 숭배와 함께 우상 숭배로 규탄 당했다. 예배의 중앙통일화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얻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기 때문에 아세라 여신상을 단순한 나무로 부르는 비신화화 ( 신 16장 21절 )는 논쟁적 ( polemisch ) 관점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후에 유일 신앙이 발전하면서 아세라 여신 숭배가 예배의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
신명기의 개혁에 나타난 종교개혁이 다른 시대에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되지 않고, 단순히 야웨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왕하 23장 4 - 5절에는 "바알 - 아세라 - 하늘의 별" 등의 신상들이 열거되었다. 이러한 열거 속에는 가나안적 종교와 앗시리아적 종교의 구분이 없다. 이것은 앗시리아의 권력이 실제 정치적 무대에서 완전히 소멸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야웨 숭배외에는 모두 우상숭배로 간주된다.
III - 4 - 2 예배의 중앙통일화
왕하 23장 8절에서는 ( 게바에서 베엘세바의 ) 유다의 성읍으로부터 모든 사제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음을 상기기킨다. 왕하 23장 9절에서는 산당에서 일보는 사제들은 예루살렘의 제단에서 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의 제물을 얻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지방 사제들이 신명기 개혁에 동참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마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배의 처소를 중앙에 통일화시킨 것은 종교적 동기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 - 종교적 동기에서 기인하였다. 왕하 23장 8 - 9절에서 처음 지방성소 ( = 산당 )을 우상숭배의 근거지로서 보고 폐지되어야 한다는 관점, 즉 예배처소의 정화 ( Kultreinheit )의 관점은 결코 신명기 개혁의 관점이 될 수 없다. 신명기 18장 6 - 8절에서는 왕하 23장 9절과는 달리 지방사제가 예루살렘의 사제와 동일한 권한을 가질 수 있음을 규정한다. 에스겔 44장에서는 지방사제들을 우상을 숭배한 사제들로 규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성전의 잡역부로만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세 본문의 관계를 신명기 18장 6 - 8절에서 왕하 23장 9절을 거쳐 에스겔 44장으로 발전해 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왕하 23장 9절은 지방 사제와 예루살렘 사제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의 한 시점을 묘사해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갈등은 신명기 개혁이 실질적으로 더 이상 발전해가지 못하고, 어떤 심각한 장애로 말미암아 소진되어 갈 때 일어난 내부의 자리다툼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요시아 왕이 죽음으로써 신명기 개혁은 마비되어들어 갔다. 예루살렘의 사제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다시 찾고자 했고, 왕하 23장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화로운 해결은 불가능했다. 아마도 초기에는 지방사제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로기에 접어들면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함으로 우상 숭배자로 몰려 정죄당한다.
IV 신명기 개혁의 종교개혁
위에서 살펴본 역사적 고찰을 종합하여 간략히 요약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신명기 종교개혁 중에서 신명기 역사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예배처소의 정화 ( Kultreinheit )와 중앙통일화 ( Kulteinheit )에 집중된다. 유일신앙 ( 신 6, 4 - 5 )과 예배개혁 ( 신 12장 )에 관해 계속되는 정보를 신명기에서 얻을 수 있다.
IV - 1 예배의 정화
1. 신명기 종교개혁은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명기 개혁은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이며, 종교개혁은 중요한 한 영역이다.
2. 신명기 종교개혁은 종교적 영역에 속하지만, 정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른 나라의 신의 숭배가 여전히 행해진다면, 그것은 다른 나라의 권력이 아직 항존함을 말해주고 있다. 강압적인 수단에 의해 이방 신들의 숭배가 행해질 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방 신상의 제거는 종교 정화의 차원을 넘어서 이방권력의 거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3. 신명기 종교개혁에서는 앗시리아의 종교상징들, 태양, 달, 별들을 위한 신상들과 제단이 제거되었으며, 또 이들 신들에게 바쳐졌던 제사나 종교관습도 중지되었으며, 앗시리아 종교를 위해 임명된 사제들도 폐위되었다.
IV - 2 예배의 중앙 통일화
1. 신명기의 종교개혁 중에서 가장 모호한 점이 예배의 중앙통일화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그 동기와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
2. 모든 예배처소를 예루살렘에 통일시켰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을 모두 예루살렘에 오게하여 활동하게 했다. 이와같은 중앙통일화가 성립되려면, 분명히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즉,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방사제와 동등한 권한만 가질 때 가능하다. 예배처소의 중앙집권화는 권력집중화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회학적 상식은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기득권의 포기는 비단 사제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으며, 이 때에 비로소 국민전체가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가졌다.
3. 예배처소의 통일화는 오직 야웨 한 분만을 섬기기 위함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야웨를 민족의 신으로 예배했다. 한 예배처소에서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야웨만의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민족 전체의 연대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필연적이었다. 오직 야웨에 대한 고백은 앗시리아 신에 대한 거부이며, 동시에 한 민족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앙고백이다.
IV - 3 유일 신앙
신명기 종교개혁 - 특히 예배의 중앙통일화 - 로 인해 나타난 매우 중요한 신학적 특징은 유일신앙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웨만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신명기 6장 4 -5 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4a ) 들어라 이스라엘아, ( 4b )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야웨는 한 분이시다. ( 5b ) 너희의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생명을 다하고, 너희의 모든 것을 다하여, ( 5a ) 너의 하나님 야웨를 ( 5a )사랑하여라"
이 귀절과 관련하여 제기되었던 질문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 형성되었는가하는 질문이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포로 후기에 사제들의 율법 강의의 맥락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한다. 즉, 이와 같은 연대설정은 신명기 개혁의 역사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V - 3 - 1 4a절의 Schema ( 들어라 이스라엘아 )는 먼저 지혜문학적 맥락에서 흔히 사용되어질 수 있다. 가장이 가족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 때, Schema 를 통하여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민족을 청취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족장이 자신의 가족에게 말할 때의 상황과는 구분된다. 민족을 청취자로 설정하여, Schema가 사용된 경우는 예언 선포에서 비로소 볼 수 있다. 물론 청취자가 개인인 경우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언 선포에 나오는 Schema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을 전달할 때 사용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명기의 용례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신명기의 Schema 지혜 문학과 예언선포의 전통에서 전승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IV - 3 - 2 유일 신앙 고백
4b절의 해석에 대해 이제까지의 선행연구에서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왔다.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은 계약 양식의 한 부분이다. "야웨는 한 분이시다"는 유일 신앙에 대한 고백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야웨라는 표현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통적 신앙고백의 반복이다. 오직 야웨에 대한 헌신의 요구는 결코 종교사적,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시대적 요구"로 이해할 때 만이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외부의 적과 대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주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웨이시지, 다른 어떤 신도 아니다. 계속하여 야웨만이 "하나님"임을 주장한다. 외형적으로는 앞의 문장 ( 야웨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전문장은 일신론 ( Monolatrie )를 주장하나 후문장은 유일신 ( Monotheismus )를 주장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문장도 일신론 ( Monolatrie )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즉 전문장과 동일한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나왔다. 즉, 전문장이 민족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후문장은 민족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 분 하나님 야웨를 믿는 이스라엘은 하나된 신앙 공동체이다: 한 예배처소 - 한 하나님 - 하나된 민족 공동체의 고백이다. 이와 같은 고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민족 공동체 내에 어떠한 특권층도 없어야 하며, 소외 계층도 없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고백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목표가 확립된다. 따라서 5절의 헌신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인 것이다.
IV - 4 예배의 개혁
신명기의 종교개혁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은 예배의 개혁이다. 이제까지 예배의 참여는 개별가족의 일이었다. 그러나 예배가 예루살렘 중앙에 통일되면서, 예배의 참여는 이제 개인, 혹은 개별 가족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 되며, 민족 전체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예배 참석자가 확대된다. 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인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를 예루살렘에 통일시킨 것은 예배의 통일을 통해 민족의 통일, 즉 하나됨을 얻고자 했기에, 참석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배의 참석자들 사이에 어떠한 구별이나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는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겨야 한다. 기쁨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축제에 참여하여 먹고 마심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여흥을 갖도록 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