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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유경(聞道有慶 : 도리를 알고 살아가니 福이 있다는 뜻) 10:23:23
2001년 5월 김학문 문경시장님이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선생을 초청하여 「聞道有慶」, 「뭉우리고개」, 「讚詩」, 「禮鄕籠巖」의 친필을 香石 全洪圭씨가 「禮鄕籠巖」을 제외한 세 개 글을 새겼다. 「禮鄕籠巖」은 함창석재 고용수(高墉秀)씨가 2본을 새겨 하나는 공원 내에 세우고, 하나는 쌍용계곡의 병천정사 앞에 세웠다. 2001. 8. 농암 면민 일동
松崗님의 수고로 두곡2리 마을 회관에 주차... 09:22:30
尙州 杜谷里 銀杏나무(상주 두곡리 은행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75호,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640. 수령은 약 500년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높이 15m, 둘레 8.3m에 가지가 사방으로 우람하게 뻗어 있어서 쇠막대기로 받쳐 놓았다. 가을날 이 나무의 잎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떨어지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몇 날을 두고 떨어지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의 해를 입지 않았는데, 두곡리 은행나무가 지켜준 덕분이라 믿기도 한다. 이렇듯 상주 두곡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은 나무로 민속적, 생물한적 자료로 가치가 크다.
팔순의 주민은, 태반이 빈집으로 마을의 사정을 들려 주며 시설은 좋아지는데 사람이 없어 걱정하였다.
車道를 피하여 舊道路로 이동 중에 한우 농가의 짚덩어리가 길가에 쌓여 있다.
지름길로 가는 도중에 단정한 산소가 있다. 상석의 내용은
學生晋州柳公諱海鳳之墓 配驪州李氏 附合 酉坐 (학생진주유공휘해봉지묘 배여주이씨 부합 유좌)
西紀一九八一年 辛酉 九月 日 孫 承旭 承烈 承鎭
※ 附合(부합 : 서로 맞대어 붙임) ※ 酉坐(유좌 :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로 앉음)
지도상의 길이 끈켜서 밭으로 이동하여, 도랑을 건너서 논을 지나 건너편 포장 농로로 올라 갔다.
농로 옆을 따라 산소가 잘 조성되어 이었다. 위로 올라 가며 차례로 곳의 산소의 상석과 비석의 내용은
상석
(左)學生坡平尹公諱夏有字德夏之墓 配孺人昌寧曺氏合窆 壬坐
(右)學生坡平尹公諱鳳五字明云之墓 配孺人旌善全氏合窆 壬坐
※ 諱(휘 : 돌아간 어른은의 生前의 이름) ※ 字(자 : 흔히 장가 든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부름)
※ 壬坐(임좌 : 서북 방향을 등진 자리)
비석
(左)處士仁川蔡公鴻漸之墓 配孺人南陽洪氏
(右)處士仁川蔡公河鎭之墓 配孺人安東權氏
비석
處士仁川蔡公畢基之墓 配孺人晋州姜氏
갓비석
국가유공자
處士仁川蔡公熙烈之墓 配孺人宜寧南氏珠分 雙墳
갓비석의 주인공은 96세에 별세한 분으로 4남 1녀를 둔 가장으로 효성이 지극하며 마을일에 앞서는 어버이셨다.
전면 : 국가유공자 處士仁川蔡公熙烈之墓 配孺人宜寧南氏珠分 雙墳
측면 후면 : 仁川蔡公國家有功者熙烈墓碣銘
옛날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 맹자의 마을)인 교남(嶠南:영남) 땅 상주목의 함창(咸昌) 고을에는 조선 초기부터 명문세가인 仁川蔡門이 세거하였으니, 명현으로는 인천군(仁川郡) 수(壽)선생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쾌재정(快哉亭: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되어 만족스럽게 여긴 정자)을 지어서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의 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이 정자에서 지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그의 후손들이 은척면 두곡리로 이거하여 대를 이어와 향토 선비로서 초야에서 살아 온 휘 희열(熙烈)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호는 운계(雲溪)이다. 시조는 선무(先茂)이며 13세 신보(申保)의 호는 만계(灣溪)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판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죽은 뒤 품계를 높여 줌)되고, 소성군(邵城君)에 봉해진다. 14세 수(壽)는 호가 난재(嬾齋)이며 시호(諡號: 죽은 뒤 임금이 追贈하던 이름)는 양정(襄靖)이다. 1468년(세조13) 생원(生員: 小科終場에 합격한 사람)과 進士(小科에 급제한 사람)에 그리고 文科에 각각 壯元及第하여, 조선조에 배출된 삼장원급제(三壯元及第)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호당(湖堂:독서당)에 선발되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충청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 좌참찬(左參贊:정2품, 장관급),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종2품)을 역임하고 좌찬성(左贊成:종1품, 부총리)에 추증되었으며 함창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15세 소권(紹權)은 호가 졸재(拙齋)이며 1504년(연산10) 진사시에 입격하고 1506년(연산12)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 한성부좌윤,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 후대를 내려와 증조의 휘는 태진(台鎭)이며, 조부의 휘는 홍면(鴻冕)이며 부의 휘는 민식(敏植)이며 다들 향토에서 규범을 지키면서 살았다.
蔡公은 두곡리 띄실에서 1923년 9월 6일에 태어나서 農者之天下大本을 근본으로 하면서 농업을 天職으로 여기었으며 순박하고 부지런한 建國實踐院養成所를 1948년 12월에 제5기로 수료하였다. 또 경상북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된 600년의 수령을 지닌 은행나무기 있어 마을을 수호하고 영험하기에 은행나무기념비추진위원장과 보존회장도 역임하고 마을노인회장도 20년을 하였다. 두곡리 경지정리와 운현 저수지 건설에 앞장을 섰다. 그리고 명문가의 후예로서 효를 숭상하여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보살펴 드리는 일을 한 번도 예법에 어긋나게 한 적이 없었고 부모를 편안하게 하여 드려야함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학문을 열심히 하여 시골선비로 2000년도에는 단군의 건국이념과 개천사상을 선양하고 배달민족의 고유한 문화, 예술, 종교, 철학 및 국사를 연구 및 계발하여 국민정신 함양에 이바지하고자 (사)단국정신선양회 상주시지부 은척면지회장을 역임하고 군 복무는 6·25전쟁에 참여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여 참전용사로서 2002년에 김대중 대통령으로 부터 참전 용사 증명서를 받았으며, 2008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으로 부터 일본강제징용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은 훌륭한 선각자였다. 蔡公은 부인보다 16년 뒤인 2019년 향년96세로 졸하니 천복을 누렸다. 配는 의령 남씨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후손으로 계복(啓福)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東益은 공직자로서 문경시청과 구미시청에서 총무과장, 의회사무국장, 경제통상국장을 역임하고 장관 표창2회, 국무총리모범공무원증, 대통령 표창과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재직 중에는 부족한 전문 공부를 하고자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제27회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총학생회장, 총동창회부회장 그리고 국립금오공과대학 겸임 교수
를 역임하였다. 퇴직 후에는 조선 건국의 초석을 이룬 三峯 鄭道傳선생이 추구한 민본정치를 갈망하여 정치가로서 입문하여 제 17대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정책위원, 제18대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후보 직능총괄본부 나눔세상 위원장, 정수진흥회중앙회장, 제19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대통령 후보 조직특보를 역임하고 국회의원, 구미시장에 출마하였으나 아직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행정사, 대통령 자문기구인 민조평화통일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차남 盛基, 삼남 相基는 자영업을 하여 경영인으로 우뚝하며, 막내 仁基는 공직자로서 상주시청 사회복지과장으로 근무한다. 사위는 진주 정씨 國鑽은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내외의 孫은 매우 번성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蔡公의 장남 동익은 나의 벗으로 구미시청에 재직할 때 동료로서 근무한 인연이 있어,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아버님의 家狀을 보이면서 묘소 앞에 墓碣을 세우고 싶다면서 묘비명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난재 선생은 나의 선조인 항(沆) 할아버지와 막역한 친구로서 만재선생의 만사(挽詞: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를 지은분이라고 이야기하고 후손으로서 깊은 인연이므로 천학(淺學)한 후생이지만 간곡한 부탁에 써 주기로 약속하고 채공의 墓碣銘을 지었다.
아! 슬프도다. 고이 잠드십시오. 아래와 같이 銘한다.
뛰어난 효성에 꿋꿋한 절도(有孝有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세(有父有子) 묘역 단장하고 묘갈을 세운(有墓有銘) 공의 아들이야말로 후손답나니(有子克嗣) 마음속에 지닌 그 덕(惟其有之) 밖에 그대도 들어났네(是以似之)
2019. 2. 星山后人 李澤容 삼가 짓다.
二千十九年 二月
子 동익 성기 상기 인기
子婦 조임숙 김순매 박종희 권선희
女 기순 壻 정국찬
孫 석윤 종선 윤길 석봉
孫壻 조미현
孫女 관숙 효진 정혜 지은 명숙 정화 민주
孫壻 이경호 박광환
曾孫 규환
※ 雙墳(쌍분 : 같은 뫼자리에 합장하지 않고 나란히 쓴 부부의 두 무덤)
※ 墓碣銘(묘갈명: 무덤 앞에 세우는 위가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에 새김)
도로에 올라서 내려 본 4곳의 유택이 가지런히 잘 보인다...
뭉어리재를 오르는 길은 관리를 잘 하고 있어(길가 잡목 제거) 고마웠으나,
길 아래 양심을 버린 쓰레기가 고개 마루까지 이어져 있어서 안타깝다.
수거를해서 아름다운 고개를 만드는 일에 힘을 모아야겠다.....
발 아래 운현저수지를 보니, 과거 저수지 건설에 앞장 선 채희열 어른(갓비석 주인공)의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암 7km의 이정표가 외롭게 지난날의 영광을 알려준다...
앞쪽의 구석진 곳에 비석이 있어 내용을 보니, 산 위와 중턱에 있는 산소의 제단이었다.
學生順天朴公鼎鉉 配晉州柳氏一秀 雙墳 墓在 上峰 辛坐
學生順天朴公海錫 配宜寧南氏順元 雙墳 墓在 中峰 乾坐 之壇
아래쪽에 포장된 농로를 따라 트럭이 들어 와서 보니 대형 양봉장을 운영 중이었다.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도로를 올라 오니, 문경시 농암면 경계 대형 안내판이 반긴다....
우양 김상묵 시인의 글을 초정 권창륜선생이 讚詩를 썼다.
뭉우리 고개 우양 김상묵
사시 장철 꽃내음 짙은 열두 구비 뭉우리 고개
너랑 나 마음 열치니 한 떼 꽃이 또 버누나
농암 벌 감싸 펼치는 저 햇살도 꽃두름
아무렴 어젯일에사 시름을 마시게나
고비고비 돌고돌아 오르고 내리는 인생
하늘도 속가슴 풀어 눈부신 날 여시나니
안개거나 구름이거나 우리 삶엔 노래가 뜨리
나누고 베풀면서 정 아니면 사랑으로
복되라 여기 섰는이 한 소망 길 홰치는 봄 봄
2011년 신묘년 원단 문경 농암에서
뭉어리 고개에 소방대원들이 산불감시 및 산악 순찰차 내려서 일부는 무운산에 올라 갔다.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선생의 글씨인 「禮鄕籠巖」은 함창석재 고용수(高墉秀)씨가 2본을 새겨 하나는 공원 내에 세우
고, 하나는 쌍용계곡의 병천정사 앞에 세웠다.
뭉어리 고갯마루에서 내리막으로 나아간다....
2018.2.07. 무운봉탐방 후 귀가 길에 오색딱다구리가 거물에 걸려있는 것을 구조해 준 곳이 인삼밭으로 변했고
과수원 자리는 빈터에 야생 식물이 가득하다.
고개를 내려가는 왼쪽 산에는 중장비로 땅을 넓히며 계단식으로 평탄 작업 조성 중이라서 무척 넓어졌다.
사기막골의 전원 풍경이 환하게 빛난다...
아늑한 옛 사기막 승강장에서 쉬면서 간식을하고 담소를 나누는데,
앞집의 젊은이가 나와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 멀리 떨어져서 계속 통화를 했다.
되돌아 오는 길에 통화 중인 젊은이를 봤다... 11:16:06
뭉어리재 고개에서 송강님은 주차한 곳에서 마을회관 마당에 비료를 내려야 한다고
차를 옮겨달라는 전화가 와서 빠른 걸음으로 혼자 먼져 내려 갔다.
두곡2리에 있는 건너편의 기념물인 뽕나무(까치집 있는 나무)를 견학하려 지름길로 회장님이 앞장 선다..
기념물인 뽕나무를 견학하고 ....
상주 은척면의 뽕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1호,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324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 12m, 가지의 길이는 동2.3m, 서 4m, 남 4.6m, 북 4.3m인 뽕나무이다. 줄기는 지상 1.8m에서 분지(分枝)하고 주간(主幹)은 다시 이분(二分)하였으며 수세가 매우 왕성하다. 추정 나이는 약 400년이라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나무 남측에 일제 때 상주군수 최병철(崔秉轍)이 세운 명상기념비(名桑紀念碑)가 있다. 두곡리에는 이 나무 이외에도 가슴 높이 둘레 1.1~1.75m의 그목이 4그루나 있다.
주차한 장소에서 마을회관옆에 거주하는 주민의 주차 이동에 대한 설명과 진주류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내력과
노거수인 은행나무와 뽕나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송강님이 먼저 내려와서 도로 건너편 옛날 두부집 마당에 주차하여 수고에 감사하고 미안했다. 12:43:52
일요일이라서 시내 식당이 쉬는 곳이 많아서 통뼈감자탕식당에서 맛있는 통뼈해장국으로 식사를했다.
첫댓글 뭉어리 고개를 차량으로 무심히 넘어 다녔는데, 걸어서 넘는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다. 두곡2리에 오랜 세월을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던 은행나무와 뽕나무를 보고, 예상 외의 기쁨을 얻었고, 진주 유씨 집성촌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급변하는 세월의 변화에 적응을 못하고 마을의 반 정도는 빈집이고 노인들이 모여 사는 정적만 감도는 것이 안타까웠다. 인천 채씨분들의 유택은 정성을 드려 잘 조성되어 있어 후손들의 자부심이고, 모임을 못하게하는 시기에 인적이 없는 장소를 선택해 주어 감사합니다.
뭉어리재는 魔의 고개였다.50여년전 첨으로 이곳을 넘을땐 비포장 편도 路線으로 굴곡진 모퉁이가 46개나되어 굽이길마다 일단 停車하여 맞은편을 살핀 후 살살 기어 갔으니 하세월이었다.조금이라도 日氣不順이면 決行하기 일수여서 가은으로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지금 그 길을 徒步로 나섰다.터널개통으로 通行이 뜸한 곧게 펴진 2차선을 편안한 마음으로 追憶談을 나누며 뒤돌아본 두곡리의 장대한 田畓이 풍요롭다는 생각을 가진다.그런데 모퉁이마다 생활 쓰레기를 차로 실어다 내다버려 모퉁이는 쓰레기장으로 變貌하였다.시골길 大部分이 이런 沒常識으로 汚染되었지만 이곳은 유독 심하다.頂上에 도착하니 반가운 境界石이 우릴 환영한다.聞道有慶,禮鄕籠巖의 글을 대하니 문득 孫益 어른이 생각난다.그 어른의 해박한 鄕土愛와 犧牲精神에 고개가 숙여진다.이런 좋은 시설하에서 籠巖面誌가 作成되었드라면 더 알찼을 텐데...沙峴里에서 元點回歸하며 끊어지기 직전의 芍藥支脈을 보자니 허망함이 느껴진다.山川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데.... 정상 부근의 열 구비가 거의 直線으로 펴져 시원스런 모습은 좋은데 통행인이 없어 쓸쓸하다.市郡 境界石에서 옛길을 찾았으나 세월에 묻혀 사라졌다.또 하나의 추억이 사라졌다.
晋州柳公과 仁川蔡公의 敬老思想에 저절로 머리숙여지며 그 여린 文狀을 확대하여,사전 찾아가며 낱낱이 소개해준 김기자의 노고에 感泣할 뿐이다.그 어렵고 장구한 글을 갖은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기록으로 남겨주니 공으로 읽기가 면구스럽구려.장구한 역사와 애환과 주민들의 삶 속에 오늘을 이어가는 銀杏,뽕나무 등 走馬看山格으로 넘길 文化財까지 획하나 놓치지 않고 소개해준 정성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