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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일제의❰청산리 백운평 대학살❱의 진상
백두산과 내두산, 이도백하에 가려면 화룡시를 지나 청산리를 통과하게 된다. 청산리에 오르면 차도 헉헉거리지만 청산리전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참새 방앗간처럼 하차하여 전망대에서 일대를 둘러보게 된다. 2018년 답사 때, 일행 중에 지리를 잘 아는 분이 베개봉이니 어랑촌이니 천리봉이니 하면서 청산리전투전적지에 대하여 곧잘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지형지물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없는 나에게 산은 다 같은 첩첩 산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현재의 청산리마을이 1932년에 건립된 마을1)로 청산리전투와는 무관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 때부터 청산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사라지고 청산리쉼터에서 연봉을 바라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 때문에 거듭 일대를 답사하며 <청산리 백운평 대학살>를 알게 되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무장독립투쟁의 백미로 일컫는 ⌜청산리전투⌟를 자랑한다. 그러나 청산리전투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북간도 조선인대학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중국 땅에서 125년 전에 일어난 일에 귀를 기울이는 자도 없거니와 아직도 사건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임시정부의 기록, 중국의 기록, 일제의 기록이 다 다르며 연변 사가들마다 연구 기록이 미비하여 진상의 규모를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다는 말을 사족처럼 덧붙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가들이 대학살을 ⌜참변⌟또는 ⌜참안⌟이라고 기록하여 일제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를 보통 역사의 한 사건처럼 느끼게 만든다.
일제의 간도대학살은 철저하게 준비되었으며 1920년 10월 2일에 시작되어 1921년 5월 9일까지 약 8개월간 지속되었다. 1단계는 10월 14일에 시작되어 11월 20일, 주력부대가 철거하기 전까지 항일단체들과 항일기지로 지목되는 마을과 학교, 교회당에 대한 대규모의 소탕을 감행하였다. 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 주력부대가 잔당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마을과 인근 산림에 대한 반복적인 수색과 비행대 및 국경수비대를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감행하였으며 한국인들에게 귀순을 강요하였다. 3단계는 12월 17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본군이 완전철수를 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는 간도파견대를 기반으로 경찰 분서의 증설과 총독부 경찰력 증가, 한국인 친일세력 육성 및 확대를 꾀하였다.2) 결과적으로 민회와 밀정들의 입지가 강화되며 간도 조선인 마을에 친일 세력이 깊게 뿌리 내리게 되었다.
간도 대학살은 주로 1단계인 10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일제가 저지른 조선민간인 대학살의 만행을 의미한다.
상해임정의 통계는 살해당한 사람이 3,664명이고, 체포된 사람이 155명이며, 방화로 소실된 집이 3,520채, 학교는 59개, 교회당은 19개소였으며 곡물은 59,970섬이었다. 박은식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서간도를 포함하여 살해당한 사람이 3,106명, 체포자가 238명, 불에 탄 가옥이 2,500호라고 하였다. 중국 측은 1920년 11월 7일 ⌜길장일보⌟는 최근 연변에서 살해된 조선인이 2,000명이라고 하였다. 1920년 12월 18일자 ⌜독립신문⌟에 의하면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2,626명이고 체포된 수는 46명이며, 방화로 소실된 가옥은 3,208채이며 불에 탄 학교는 39개소이며 불에 탄 교회는 11개소이며 약탈당한 물건이 5만3천 265섬이다. 일본 측은 피살 494명, 체포 707명, 소각 민가 531동, 학교 25개교, 교회 1개소라고 집계하였다.3)
황룡국이 편집한 ⌜조선족투쟁혁명사⌟에 의하면 조선인 3,500여 명이 학살되었고 5천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2,500여 채의 가옥과 사립학교가 불에 탔으며 4,500여 석의 식량이 불에 탔다.4)
그러나 훈춘현사, 용정현사 등의 연변 각 현의 지방사를 보면 학살당한 사람, 체포당한 사람, 불에 탄 가옥과 학교, 교회 수가 더 높게 나타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현재 알려진 어떤 통계도 완전하다고 볼 수 없겠다. 이것은 일제가 모든 사실을 은폐하며 간도토벌을 감행하였고 외부 발표와 실지 종군을 제약하였기 때문에 학살사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의 국지적인 상황 진술과 당시 비교적 행동의 자유가 있었던 선교사들의 기록 외에는 자료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가 토벌의 현장을 취재하러 왔다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당시 북간도가 일본군의 비상계엄령 속에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 글을 쓰고 있는 저자는 일본의 대토벌로 불에 탄 교회 개수 차이가 너무 다른 것을 보고 자료를 조사한 일이 있다. 연변에서 출판 된 1920년 대학살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와 서적들 그리고 연변의 지방사, 연변 종교사 그리고 예수교장로회사기를 참고하여 추론을 해본 결과 최대로 계산하면 52개가 불에 탔고 최소로는 40여 개가 불에 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교회 겸 학교 건물로 사용되던 건물은 교회 숫자에서 빠졌고 개척 단계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 교회 또한 빠져있었다. 일제는 ⌜간도출병사⌟이런 교회를 풀집(草屋)이라고 얕잡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에 관심을 가진 후학들이 1920년과 1921년의 8개월에 걸친 일본군의 조선인 대학살의 진상을 종합적으로 밝혀 그들의 학살이 제노사이드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길 바란다.
현재까지 대학살의 사료로 사용되는 문서들에 의하면 최소한 3,000여 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학살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사진이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남겨 놓은 장암촌과 명동학교 방화 건 등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장암촌의 학살과 명동학교 방화는 간도대학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기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학살과 방화가 있었다. 실로 아무도 당시 현장을 보지 못하였으나 살아남은 몇 사람에 의하여 밝혀진 청산리 백운평 대학살이 그렇다.
먼저 청산리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홍범도장군⌟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당시 청산리는 지금의 화룡현 부흥향소재지에서 서남향으로 12.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간마을이다. 그 때 지금의 화룡시의 시청 소재지인 화룡진을 중국인들은 ❰충신장(忠信場)❱이라 불렀고 조선인들은 ❰삼도구❱라 불렀다. 삼도구에서 서쪽 골짜기로 해란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흥촌 (박달평, 춘일툰으로도 불렀음), 송하평, 라월평, 십리평, 청산리(평양촌으로도 불렀음)등 산간 마을이 1,2리 혹은 3,4리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5)
양소전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199쪽은 청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청산리는 화룡현 현성(1920년에는 충신장이라고 불렀음)에서 서남방향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장장 30킬로미터에 달하는 청산리계곡에는 청산리마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십리평 라월평, 송월평(일명 송림평), 록수평, 대진장, 충신장(화룡현 현성)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평양촌, 중봉리, 백운평마을들이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청산리지역은 무산일대와 인접해있고 또 안도현과 화룡현의 교계지대에 있어서 조선진입작전이거나 일본군 토벌을 피하는데 있어서 알맞춤한 곳이기도 하였다.”6)
간도국민회 관계자였던 홍상표는 ⌜북간도독립운동소사⌟에서 청산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 구세동에서 남서쪽으로 약 30리 가면 충신장(삼도구, 현 화룡시)이 있는데 중국인 약 2백여 호가 살고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약 30리 가면 큰 바위가 있다. 중국인들이 따라즈( 대랍자/大磖子)라고 불렀는데 구세동에 정착한 기독교인중 일부가 이 부근의 황무지를 매수하여 거기에 한인마을을 이루고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 내에서 자녀 교육에 힘썼다. 한학자인 이종식, 이권수 양씨가 사면을 바라보니 고지대로 첩첩산(疊疊山, 하늘에서 내려오다 첫 동리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므로 ❰청산리❱라고 이름을 주었다. …생략…
따라즈(대랍자)에서 서쪽으로 약 15리를 가면 백운평이 있다. 이 두 동리를 통칭 청산리라고 하였다. 1920년 9월 (양력 10월) 당시 따라즈에는 약 20호에 70여 명이 살았는데 대부분 구세동에서 이사 온 빈농들이었다. 백운평에는 12호에 약 25명가량의 교포가 여기저기 산재하여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큰 산봉이 있는데 베개 같이 생겼다고 하여 ❰베개 봉)이라 불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재를 넘으면 안도현 땅이 된다.”7)
홍상표는 1920년 당시에 청산리와 그 인근에 조선인 마을이 네 개가 있었다고 한다.
1910년까지 만해도 현 화룡시 소재지인 삼도구(충신장)도 첩첩 야산으로 무인지경이었다.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함경북도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간도로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하였다.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달리동의 20여 호 150여 명의 사람들이 삼합, 용정, 두도구를 지나 이도구 서성의 명암촌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장은평이라고 불렀다. 1912년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 구서동 사람들 20여 호가 삼도구의 팔가자진 인근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구세동이라고 하였다.8) 장은평에서 동북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북로군정서의 기지인 대종교인들이 세운 장인강 마을도 그 전후에 세워졌다. 대한독립군과 간도국민회의 독립군들이 새로운 기지로 삼은 어랑촌도 비슷한 시기에 개척되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에서 10여 세대가 집단 이주하여 이도구(장은평)에서 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세운 기독교인 마을이 어랑촌 이다. 장은평, 구세동, 장인강이나 어랑촌의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이주하여 청산리의 개척자들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청산리를 화룡현 삼도구라고 불렀으나 조선인들은 청산리로 불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에 보면 청산리 일대 조선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마을은 명암촌(장은평)이며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명암촌에 세워진 장은평교회로 1911년에 설립되었다, 두 번째 마을은 1912년에 세워진 구세동이며 교회는 1913년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1917년에 “간도 청산리 영신동교회”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1918년에 청산리에 “백운평교회”가 세워졌다.9)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청산리 영신동교회, 백운평교회는 캐나다장로회 산하 교회로서❰간도국민회❱서부지구회에 소속되었으며 청산리전투지역권에 속하여 대학살과 토벌의 고난을 겪었다.
사가들이 기록한 1920년 ❰간도대학살❱중에 ❰백운평참안❱처럼 다양한 버전은 없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참안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인종과 민족을 차별하는 노골적인 학살을 보여준다.
김택의 ⌜홍범도장군⌟에 의하면 야마다대좌의 제73연대와 나까무라대대는 패전하고 돌아가는 길에 백운평에 들려 그 보복을 하였다. 그 때 백운평에는 23호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한 집만 길 위에 있고 22호는 개관에 있었다.
1962년, 박경남 노인은 1920년 10월 22일에 있었던 백운평참안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왜놈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로 생긴 건 젖먹이들까지도 떼여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 놓은 후 불을 질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뒤쳐 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꿰뚫어 죽이고 쏴죽이고는 시체는 불속에 집어넣었다. 김응준의 아버지가 응준이를 안고 불무지를 헤치고 뛰어나오는데 총창을 꼬나든 왜놈이 달려들었다. 응준이 아버지는 되돌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응준이를 내려놓아 집 뒤로 도망치게 하고 자기는 집 앞으로 뛰쳐나와 적의 날창을 가슴으로 막아나셨다…”10)
그리하여 백운평마을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김춘선은 백운평참안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21일 백운평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백운평마을의 23세대의 여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는 젖먹이고 뭐고 몽땅 집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마을의 민간 의사 이회보 및 그의 셋째 아들 등 셋이 겨우 살아났다. 본 참안에 대해 친일단체인 조선인거류민회는 보고서에서 “여자를 제외한 남자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나 전부 살해되었다. 심지어 4-5의 유아까지도 불행을 면지 못했다. 화룡현공서의 “조사보고서”에도 “청산자 골짜기에서 조선족 가옥 32채가 불에 탔으며 52명이 불타죽었다. … 이들의 가옥과 양식은 몽땅 불에 타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1)
김춘선은 10월의 북간도에서 한 마을의 전체의 가옥과 양식이 불에 탔고 남자들 52명이 죽고 세 명만 살아남은 ❰백운평참안❱이 제노사이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장암동 이중 학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을 자체가 없어진 천인공노할 학살이요, 만행이다.
2부로 계속 됨
2026년 2월 21일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1) 김철수 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479쪽, 연변인민출판사, 2001
2)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 형성과 민족운동⌟, 500쪽,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3) 위의 책 515. 516쪽
4) 용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91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5) 김택 주필 외 ⌜홍범도장군⌟, 186쪽, 연변인민출판사, 1991
6) 양소전 외 4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207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7) 홍상표 저, ⌜북간도독립운동소사⌟ 61,62쪽, 한광중고등학교(비매품), 1966
8) 위의 책 60쪽
9) 양전백, 함태영 외⌜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367쪽, 604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10) 김택 주필 외 ⌜홍범도장군⌟, 214쪽, 연변인민출판사, 1991
11)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 형성과 민족운동⌟, 509,510쪽,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원, 2016
양소전 외 4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207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참고서적
* 김철수 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1
*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 형성과 민족운동⌟,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 용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 김택 주필 외 ⌜홍범도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 양소전 외 4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홍상표 저, ⌜북간도독립운동소사⌟ 한광중고등학교(비매품), 1966
* 마가렛 마틴 무어 저 ⌜만주의 마틴 폭풍 속의 횃불⌟, 보고사, 2025
* 현규환 저, ⌜한국유이민사 상권⌟, 어문각, 1967
* 서굉일 외 7인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종로서적, 1986
* 일본조선군사령부,⌜간도출병사⌟, 경인문화사, 2019
* 조영진 외 ⌜항일무장 독립투쟁사⌟, 도서출판 일웡,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