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수목원)은 뭔가 특별한게 있어서 일제 때부터 의외로 인기 많았습니다.
그 특별한 건 다름 아니라 '숲이 우거져서'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아래는 1960년 여름 광릉을 담은 추억의 사진 5장입니다.
*클릭하면 사진은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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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주인공은 경남 거창군과 연고가 있고, 50년대 말 연세대를 다녔습니다.
이 신작로길은 주변에 숲이 우거진걸 보면, 축석령에서 내려 광릉 입구로 가능 중인듯.
영어로 Slow ㅁㅁㅁing Road라고 적혀 있습니다.
직감적으로 당시 헐벗은 조선반도에서,
서울과 서울 근교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주요한 휴식처로 자리매김했지 않았을거라 봅니다.
세명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937년생인 정건식 선생은
단기4288(서기 1955)학년도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에
고등학교 동기생 7명과 광능으로 며칠간의 캠핑을 갔었다.
회비를 걷어서 동대문 시장에서 많은 것을 샀는데, 그 중에는 소주, 백알 등 술도 처음으로 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신나게 놀 재료인 소주, 빼갈 등 독주들이기 쉽겠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광릉을 갔을까요?
1957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아래와 적고 있습니다.
"광릉을 지나가는 장거리 버스는 약간 불편한 점도 있으나, 그것을 이용할 수 밖에 없고,
일요일이면 전세 버스 편도 있다. ......
서울서 포천행 버스를 타고 축석령 정류장에서 하차. 오른쪽으로 가면 길은 냇가를 끼고 동쪽으로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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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광릉 모습입니다. 그때도 광릉은 이례적으로 숲이 좋아 여름에 많아 찾았습니다.( 여기를)
의정부역까지 가서 포천행 자동차를 타는 게 일반적이었고, 1939년 개통된 퇴계원 역도 출발지가 됩니다.
광릉행 교통편의 변화상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으시려면 --> 여기를
이기섭 박사는 일제 때 광릉에 대해 회고하면서,
'광릉에 가려면 의정부 역에서 내려 왕복하였으며, 귀로에는 식당에 들러 유명한 암소갈비로 요기를 하였다. '
고 하고 있습니다.
음, 암소갈비라...숯불에 굽는 '야키니쿠'를 말할텐데, 중상류층은 그렇게 호사를 부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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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아직 따지 않은 술병을 들고 호젓한 전나무(?)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고 손경석 선생님은 매년 광릉 수리봉을 찾는 걸 의식 치루듯 했습니다.
특히 그의 명저 '회상의 산들' 중 '광릉숲 이야기'이라는 에세이에서
올해도 크리스마스는 광릉 숲에서 지낼 셈치고 집을 떠났지만, 북향 산기슭엗 눈이 없는 연말은 그냥 무미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전나무 숲길을 따라 소리봉 사이의 계곡을 가면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이 쌓인 채로 있어, 그 사이 발자국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는데, 가까운 벗과 륙색을 지고 시간의 구애없이 지나다닌 산길에는 고요만이 흐란다. 그 고요의 밤을 지내고 싶다...
얼마 있다가 여기 숲 사이 캠프를 찾아올 여러 벗들을 위해 산악인의 성찬을 마련해야겠다. 아직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기 전의 한 때, 먼산 골짜기에 덩져 주는 산의 사영(斜影) 속엔 한없는 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현대문학 1963년 3월호)
라고 1960년대 광릉이 품고 있는 고요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1960년대 저렇게 미문으로 씌여진 산행 에세이는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
글의 스타일에서 초창기 일본 등산계의 고명한 지식인 등산가들의 산악 에세이풍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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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시절 왜 저렇게 한국인들은 흰 색의 티를 좋아했을까요.
김영도 선생님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에서 6.25 전쟁 전 등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평양에는 산이 없습니다.
일요일에는 멀리 북한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무렵 북한산에 가려면 지금은 없어진 성동역에서 열차편으로 창동까지 가서 우이동으로 한참 걸어갔다.
등산차림은 38선을 넘어며 지고온 이름뿐인 배낭에 자취용 냄비와 됫병을 수통대신 가지고 갔다.
당시 북한산엔 사람이 없었고 인수봉도 텅 비어 있었다.
광릉에 대한 기억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와 멀리 광릉 숲속에서 천막을 치고 하루 지낸 일도 있었는데, 먼 훗날 그의 여동생은 내가 일선에서 만난 중학 후배 김창원과 결혼했다. 물론 내가 가운데 서서 이러한 인연까지 맺어졌다.
그가 광릉에 갈 때도 아마 '이름뿐인 배낭에 자취용 냄비와 됫병을 수통 대신' 가지고 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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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숲속에서는 또다른 팀이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서울 근교에 제일 이채로운 곳이 광릉 숲입니다.
일제 때에도 숲이 우거진 탓에 찾는 이들이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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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숙명여대 국문학과의 1학년 소풍장면 으로 역시 광릉에서의 한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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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치며 신나게 노는군요. 덩달아 저도 흥이 오릅니다.
무슨 노래일까요. 춤추는 스타일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외설적(^^)인 춤은 아닌 듯 하고요.
1960년 인기가요로는
남원의 애수 - 김용만 님이라 부르리까 - 이미자 그러긴가요 - 최숙자 그리워라 부산항 - 최갑석
마도로스 부기 - 백야성 사랑의 맹세 - 패티김 애수의 트럼펫 - 남상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 최희준 이별의 부산항 - 손인호 이별의 종착역 - 손시향 장희빈 - 황금심 카츄샤의 노래 - 송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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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먹거리와 안주꺼리를 파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아마 술도 떨어졌을테고요...~
그동안 등산 관광 관련해서 수백장의 사진들을 모아 왔는데,
이렇게 행상을 하는 이들이 들어가는 장면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유령인간인 셈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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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젊은 청춘들 중에는 술에 익숙하지 않아,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여 이런 현상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청춘이었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이상 1960년 전후, 아련한 꿈결같은 시절 광릉 수목원을 복원해 보았습니다.
첫댓글 추억을 담은 자료입니다. 잘 감상합니다. 띄어쓰기. 북향 산기슭(0), 북향산 기슭(X)
항상 격려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눈에 걸려 들었습니다. 감사를,...
북향산 기슭(X) ->북향 산기슭(0)으로 교정했습니다...
영어 푯말은 'slow walking road'이지 싶습니다. 60년대 영어 푯말이라...궁금하네요.
글에서도 적었듯이, 광릉은 미군들에게 좋은 휴양지 노릇을 했을거라 봅니다.
당시에도 운전이 거칠은 이들이 많아서일일까요?
@모자이크-등산박물관 지금도 광릉 수목원하면 '천천히 걷기'가 마치 로하스, 슬로우 푸드 처럼 뜨네요.
농대 산악회 선배님중에 그적에서 정년하신 선배가 몇분 계신데... 이방면으로는 전혀 관심없으시니...앞으로 수목원 연혁에 기록될 수 있길 바라면 연락은 드려볼겠습니다. (그들은 수목 개발이 주 목적인지라....)
산악문학의 객관적인 순서(문학적 성취도와 가치 기준) 1. 한시 2. 시조 3. 자유시 4. 산행수필(운문)과 수상록 5. 산행소설 6. 체험적 등반기 7. 산행 보고서류 8. 기타(콩트, 가쉽 등)가 될 것입니다.
산행 보고서류가 말미로 가는 것은 저도 공감합니다...~~~
산행보고서에 완전한 결정체는 농연 후예들의 유산기인데... 일정과 동행자는 물론 감흥을 읊은 한시... 등등이 다들어있지요. 이런걸 주창한 삼연은 자신의 스승이자 큰 아버지인 운곡의 문집을 편집할때 다 빼버렸을 정도....(인왕산이나 삼각산, 설악산 등에 이 기록이 남았으면 참 좋았을텐데... )
@여름날 옛날 유산기는 보고서라기 보다는, 산행수상록에 가까운 종합기록물입니다. 역사, 지리를 포괄해,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
@半山 韓相哲 유산기는 말씀대로 지금식 보고서라기보다는 산행수상록을 표방한 종합기록물이라고 해야겠네요...~
고 손경석 선생은 일본풍을 많이 받아 문체도 거의 닮았습니다.(현대문학 1963년 3월호). ㅋㅋ
당시도 미려한 문체인데, 지금은 그렇게 쓸 사림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일본풍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어로 씌여진 예전 글들을 읽다보면 글자만 한글과 가나로 다르지 전혀 이물감이 없습니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책을 많이 번역한 김성진 선생님의 에세이도 비슷한 문체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