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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도 9월.
가을 날씨가 완연한 어느 주말이었다.
집에서 이삿짐을 싸고 있는데 긴급한 연락이 왔다.
회사 차량이 '동작대교'에서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서둘러 '동작대교' 북단의 고수부지로 달려갔다.
사고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한강은 잔잔해 보이지만 강 속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딴판이었다.
유속이 빠르고 물이 혼탁해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다리 아래 교각 부근엔 각종 철근, 파이프, 시멘트 덩어리, 날카로운 폐기물 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어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아무나 들어가서도 안 되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절친했던 직장 동료 두 명은 그 '추락사고'로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추락지점 다리 위로 대형 크레인을 불렀다.
사고 몇 시간 만에 처참하게 찌그러진 봉고차를 끌어올렸다.
차를 인양했으나 동료들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실낱 같은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승합차가 난간을 들이받고 강물로 추락하는 순간, 그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육신이 유리창을 뚫고 튕겨져 나갔으리라.
처음엔 '스쿠바 장비'로 수중을 수색했으나 유속이 빠른 데다가 시계도 안좋아 '인양작업'이 쉽지 않았다.
물 밑을 샅샅이 훑었으나 스쿠바 장비로는 계속 허탕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역시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었다.
'전문 머구리'를 불렀다.
극한 직업에 속하는 '머구리'도 두 구의 시신을 찾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통상 차는 무게 때문에 추락지점 바로 아래에 위치하지만 시신은 빠른 유속 탓에 하류 쪽으로 휩쓸려 가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강은 호수와 달랐다.
그래서 시신이 멀어져 가는 건 상식이었다.
얼마나 떠내려갔을 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수중수색에 어려움이 많았다.
더 넓게, 더 멀리 수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병대 특수수색대'에서 강도 높은 '수중훈련'을 받았었다.
또한 전역 후에 '라이프 가드' 자격증도 취득했으며 한 때는 그 자격증 취득을 위한 인텐시브 코스의 강사로도 활동했었다.
남들에 비해 비교적 물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전역 후엔 한강에서 수영도 가끔 했었고, 한동안 그곳에서 윈드서핑도 했었기에 그 강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전문 머구리 팀과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추락지점으로 이동하여 캄캄한 야간에 '수중수색'을 계속했다.
이미 어두워진 9월의 가을밤.
한낮에도 희뿌연 시야 때문에 물체를 분간하기 힘든데 밤이라면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부연할 필요도 없었다.
물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야말로 촉감에 의지한 채 수색을 전개했다.
사람이 죽으면 신체가 딱딱하게 굳는다.
이것을 '시강현상'이라고 한다.
굳어버린 신체와 물의 밀도 차이로 인해 시신은 강이나 호수의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2-3일 후 미생물로 인해 사체가 부패되면 몸속에 가스가 차고 시신이 팅팅 불어 비대해지면서 부력이 발생한다.
그 이후엔 대부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곤 대개 그렇게 진행되었다.
칠흑 같은 심야, 아마도 새벽 2-3시쯤으로 기억한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두 형제가 순차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는 작은 고무보트 위에서 맨 처음으로 형제들의 주검을 마주했다.
'머구리'가 찾아낸 시신을 내가 보트 위로 끌어올렸다.
엄청난 무게였다.
자신의 원래 몸무게에 물을 머금은 육신이라 각각 100킬로가 넘는 듯했다.
처음엔 옷을 잡아 끌어 올렸으나 계속 옷이 찢어졌다.
할 수 없이 막대기처럼 굳어버린 팔과 다리를 붙잡아 힘겹게 끌어올렸다.
보트 위로 올라온 동료 사체 두 구.
영혼이 떠난 육신은 유혈이 낭자한 상태였다.
한강 한가운데 그 비좁은 고무보트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두 형제를 부여잡고 얼마나 오열했는지 모른다.
형제들은 '시강현상'으로 이미 온몸이 돌처럼 굳어진 상태였다.
낡은 봉고차가 동작대교 난간을 부수고 추락했을 때, 그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큰 공포와 충격을 받았겠는가?
'시강현상'이 진행되고 있던 시신은 그 처참했던 공포와 충격을 여과 없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진정으로 비통하고 애절한 밤이었다.
추락의 충격으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붓고, 터지고 일그러진 상태였다.
몸 천체가 피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운전했던 '기수'는 운전대를 잡았던 모습으로, 동승석에 타고 있던 '화식이'는 우측 머리 위에 있는 안전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영혼이 떠나버린 싸늘한 몸뚱아리.
황망하게 떠나간 두 형제의 시신을 부여잡고 고무보트와 한강 둔치에서 우리는 목놓아 울었다.
'기수'는 미혼이었으나 '화식이'는 이제 갓 돌을 넘긴 핏덩어리 아이가 하나 있었다.
수중 '추락사'와 물놀이 때의 '익사'는 확연히 달랐다.
많은 사람들은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자는 충격으로 인한 사망이었고 후자는 그야말로 익사였다.
익사한 시신은 비교적 깨끗하고 멀쩡하지만 수중 추락사는 정말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절대로 보지 말 것을 추천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1993년 7월 26일.
'남성연대'의 대표 성모 씨가 '마포대교'에서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어려운 '남성연대'의 형편을 세상에 알리고 '모금운동'을 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신문에서 보았을 뿐이다.
그가 한강 '투신 퍼포먼스'를 계획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는 수영을 조금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물'의 무서움과 실체를 세세하게 알지 못했다.
한강은 '사이판'이나 '몰디브'가 아니었다.
맑고 깨끗한 물도 아니었다.
본디 한강의 수면은 잔잔해 보이나 수중은 유속이 빠른 데다가 7월은 장마철이라 수량도 엄청났다.
한강 다리의 상판과 수면과의 거리는 통상 12-15미터쯤 된다.
그렇게 높은 고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수교처럼 높은 다리에서 투신해 익사한 사체들을 검시해 보면 물에 닿는 순간의 엄청난 충격을 목도할 수 있다.
그 충격으로 인해 갈비뼈가 부러져 장기를 찌르기도 하고 목뼈, 척추가 부러진 사체들이 의외로 많았다.
골절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실신해 버리기도 했다.
물속에서의 기절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극히 짧은 찰나의 시간, 혼절 상태로 숨을 거두거나 정신이 조금 살아 있어도 단말마적인 극한의 발버둥을 치다가 그대로 죽었다.
물은 알면 알수록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시계가 나쁜 것도 그렇지만 빠른 유속과 극심한 온도차도 매우 위험한 요소였다.
수중에 '냉수대'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강의 형태가 직선인지 곡선인지에 따라,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류 중류 하류인지에 따라 유속차가 매우 심했다.
또한 도도하게 휘감기며 흐르는 대류는 전문 '머구리들'도 몹시 두려워했다.
수중에서의 갑작스런 '심장마비'는 거론할 여지도 없었다.
오랫동안 단련된 특수부대 요원들도 구축함에서의 이함훈련(직립 다이빙)은 두려움의 대상인데 하물며 물의 공포를 잘 모르는 민간인들이야 그 엄청난 두려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끝내 '남성연대' 대표는 '입수 퍼포먼스' 4일 뒤에 투신 지점으로부터 1.4킬로 하류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부패로 인한 부력 때문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다이빙 지점으로부터 400미터도 아니고 무려 1.4킬로 하류라니.
그나마 한강이어서 이 정도였지 심해 같았으면 높은 수압이나 도도한 대류 때문에 시신도 영영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바다에서는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모르는 그 남자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에서는 늘 '겸손'과 '주의'가 핵심임을 얘기하고 싶어서 쓴다.
살면서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떤 상황에 처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물이든 산이든 사막이든 툰드라든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개인적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부단히 연마해야 한다.
수영을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건 정말로 바보 같은 행동이며 어처구니없는 처신이다.
물에 자신 있는 사람이 물에서 죽고 산을 조금 아는 사람이 산에서 죽는다.
어설픈 '검은띠'가 그래서 위험한 법이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자연을 알면 알수록 더 조심해야 하고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대자연은 신의 선물이지만 진정으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 앞에 서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강조하는 철칙이다.
긴 인생길,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또한 각종 액티비티의 초석이며 인간의 활동의 기본 바탕이다.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하건대 자연 앞에선 늘 사려 깊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자연의 특성과 위험을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잘 알아야 뜨겁게 도전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모함, 무식함이 용기는 아니다.
절제되지 않은 저돌성은 곧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나 자신도 지금까지 거친 자연 속에서 숱하게 훈련을 했었고 수많은 도전과 체험도 해보았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자연은 더 두려운 존재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물의 두려움은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루한 장맛비가 드디어 멎었다.
된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여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물을 찾고 있고 찾을 것이다.
적어도 물 앞에서는 주의 깊게 행동하기를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한다.
모두 행복한 여름 보내시길.
브라보.
(덧붙임)
20년 전에 '동작대교'에서 봉고차 '추락사고'로 황망하게 하늘의 별이 된 사랑하는 두 형제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사진 위 : 생산부 강촌 MT 때, 뒷줄 좌측 2번째가 화식이, 우측 2번째가 기수)
(사진 아래 : 항강에서 '투신 퍼포먼스'를 하기 직전의 남성연대 대표, 멀리 63빌딩과 트윈타워가 보인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2013년 8월 5일.
20년 전의 사고를 반추하며 아픈 마음으로 쓰다.
자연 앞에선 제발 겸손하게 행동하기를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한다.
늘 기도하는 마음 뿐이다.

첫댓글 기수와 화식이가 떠났던 날.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과거엔 주말에도 근무를 했었다.
낡은 봉고차를 기수가 운전했고, 화식이와 경희가 동승하고 있었다.
주말 오전에 성남, 강동구에서 일을 마치고 양평동 사옥으로 귀사하는 시간.
사당역 부근이 엄청 막혔다고 했다.
그래서 핸들을 돌려 사당역 사거리 - 이수역 - 동작대교 - 강변북로 - 양평동으로 가려고 했단다.
오후에 다른 약속이 있어 경희는 이수역에서 내렸고, 그후 불과 7-8분 만에 두 형제는 유명을 달리했다.
깊은 밤, 한강에서 시신을 인양한 뒤 고무보트로 이송했다.
경희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시신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그녀의 공포, 그녀의 충격, 넋이 나간 듯한 영혼, 혼절 직전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경희는 두 형제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바로 사직했다.
평생을 선교사로 봉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120여 명 직원들의 채플과 큐티를 인도했던 화식이와 경희.
경희는 모든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사를 떠났다.,
벌써 33년 전 일이다.
지금도 어느곳에선가 선교, 봉사, 헌신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부디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86년 11월 26일.
오전 10시 경 석모도에서 강화도로 가던 '카페리호'가 화물과적으로 전복됐다.
서해에서 발생한 최악의 참사였다.
당시 나는 해병 2사단(김포)에서 복무 중이었다.
김포와 강화 사이엔 '염하수로'가, 강화와 석모도 사이엔 '석모수로'가 있다.
그 수로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물살이 매우 빨랐다.
밀물과 썰물 때문이었다.
또한 개펄로 인해 물속에선 자신의 손바닥도 보이지 않을 만큼 혼탁했다.
그 사고로 총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12구의 시신은 선실에서 인양했으나 16구는 영영 찾지 못했다.
끝내 실종으로 처리됐다.
"아니 '태평양'도 아니고 '석모수로'에서 16명이 실종돼?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수심 30-40미터, 유속 빠름, 시계 제로.
시신이 몇 킬로미터를 떠밀려 갔을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시야가 좋은 태평양이라면 작업이 훨씬 유리했을 터였다.
우리 대원들이 투입되어 선실 내부의 시신들은 인양했으나 흩어진 사체는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악전고투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슈트 위에 무거운 납벨트를 찼어도 고도로 훈련된 대원들이 낙엽처럼 떠밀렸다.
물 속은 무서웠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