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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7)】 ‘하늘나라 가도 아무것도 없다."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7
하나 되는 나라에 가자는 거 목적
이렇게 말하는 난데도, 어느 면은 어떤 사람은 거기에도 가는 게 안가는 것보다 난 사람도 있다. 자꾸 너무 이렇게 곁 가로 딴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도 생각이 나니까 하지.
간디가 말년에 저 누구지? 아이고 이름도 잊어버렸다, 비하드, 큰 실업가, 그 사람 기업가니까 돈 버는 사람이지요. 그 사람이 집을 내놔서 거기서 돌아갈 때, 매일 거기서 예배보고 그렇고 지내고 그러다가, 저녁시간에 와서, 이제 쏴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거예요. 뭐 할라고 기업적인 놈, 자본가들 뭐 그 놈의 집에 뭐 아무리 와 있으라고 그러기로써, 거기 뭐 할라고 그러느냐? 간디도 그 점 모르는 거 아니지요. 그렇지만 간디는 어째 그러냐하면 말 그대로 내가 지금 옮길 수가 없습니다만, 간디의 심정을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꼭 같지를 않아, 꼭 같지를 않은 거니까, 그 사람은 그 사람만큼 이렇게 대해주는 거지.
그 사람으로써는 그게 돈 버는 사람이고 뭐 그렇긴 그렇지만, 그래도 그만큼이래도 뭘 자기한테 와서 접해보고 이래보자고 하는 데가, 그래도 그게 안 그러는 것보다 좋은 거고, 그 사람은 고만한 거로 그렇게 해서 또 나아가는 데가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대하는 거지. 모든 사람이 아주 정말 완전히 딱 요구를 해서 그렇게는 아니한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대단히 필요한 말입니다. 서로 믿는 게 다르다 해서 너무 서로 이렇게, 종교야 말로 하나 만드는, 믿음은 하나라 그랬습니다만, 하나님 앞에 하나 되는 자리에, 하나 되는 나라에 가자는 거 목적인데, 분명히 종교야 말로 잡고 있지 않아요?
난 요새 퀘이커 역사를 읽다가 그 참 그렇다, 거 마찬가진데, 그래 가지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퀘이커도 내려내려 분열이 돼요. 분열이 되는데, 어떻게 분열이 그거 다 옮길 수는 없습니다만, 이게 이렇게 처음으로 이렇게 갈라지고 갈라진 데서, 한쪽은 가만있는데 이쪽은 또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그럼 누가 그렇게 갈라졌냐? 그러면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자꾸 분열이 돼요. 근데 그러면 그 왜 그러냐? 좋지, 좋은 점이 있거든,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게 좋은 점이 있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확실히 또 결점이 있어, 자꾸 분열 되는 건 분명히 그 결점이요. 그런데 어째 그러냐? 그러면, 그렇게 남이 잘못하는 이런 점만 봐. 근데 살려보려고, 다른 면에 있어서, 다른 면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면을 동정해 보면 살려 볼 수는 있는데, 살려볼 점을 보려고, 그래서 이 사람 살리자는 종교인데, 종교가 사람을 제일 많이 죽여요. 자꾸 분파가 생겨가지고는 구교하고 신교하고 싸우고, 신교에서도 루터파하고, 뭐하고 싸우고 그래.
퀘이커 역사를 이제 얘기했습니다만, 퀘이커들이 전도하는데 핍박을 누구한테 제일 많이 받았냐? 그러면, 도리어 저 마호메트교도 한 테 보내, 지중해에 가서 전도대회데, 그때 핍박을 누구한테 많이 받았냐? 그러면 마호메트교도 외국이방인보다는 기독교인한테 더 지독한 박해를 받았다는 거야. 기독교인 중에서도 누구한테? 신교사람한테 제일 많이 받았다는 거야. 가톨릭보다도. 그런 점이 우리가 다 참 반성해 볼 점이예요. 그런데 그 얘긴 곁가지로 나온 거니까 그만두고, 인제 예수님 이럴 때 마음을 더듬어 보라고, 더듬어 본 댓 자 형편이 없어요. 어린애가 성인의 마음을 더듬어 보는 것 같아서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언제 그랬을까? 그럭하므로 인해서 직접 그 자리에까지 못가도 이거 자라가는, 우리 마음이 자라가는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런데 다만 거기서 주의할 거는 뭐냐? 곧 내가 생각해서 뭘 그렇게 얻어지는 그 마음을, 난 사실 나는 내가 지나봤고, 그런 유혹을 많이 느껴봤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실례가 많다고 난 설명해석을 하는데, 이렇게 해석을 해 갈라면 우리가 심리적으로 이렇게 투입을 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이런 경우에 어찌해서 그러셨을까? 그때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심정을 헤아려본, 이런 것 없이 어디 깊이 해석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아주 크게 잘못을 할 수 있다고 그러는, 그게 아주 제일 쉽게 말한다면 그를 소위 세상에 문예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예수의 생애 그런 걸 자기 딴으로, 제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주관을 투입을 해서 헤아려가지곤 예수가 이런 땐 이랬지? 유다하고 충돌이 된 건 이래 그랬을 것이다, 뭐 이렇게 대표적인 말이 그런 것도 있으니까, 내가 예를 듭니다만, 유다하고 왜 충돌이 됐겠나?
진리를 깨닫는데 급한 생각은 안 돼
그런 생각 중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를 중 가운데 놓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사랑에, 유다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다가 삼각관계로 인해서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닌가? 그런 게 인간의 썩어질 이따위 인간들의 놀음대로 그럴듯한, 거 뭣이라고 그러겠습니까만, 문예가니까 자기 마음대로 뭘 아무걸해도 괜찮아요. 지옥에 가고 싶으면 가도 괜찮아요. 내가 가지 말라고 그럴 수 없어요. 하지만 거기 위험성에 마음의 정도가 이런 점도 있고, 이런 점도 있고, 내 따위 마음의 정도를 가지고 예수도 그때 이 얘기를 했다, 그거는 속단이야. 그렇게 안 돼. 당이 다르다고 할 만큼 굉장히 다른 내가 있다고 하는 거. 여러 번은 모르고 적어도 사람이 한 번은 굉장한 관문을 통과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지냈다든지, 예수께서 세례 받고 올라올 때, 뭐 예수님은 한번만이 아닙니다만, 몇 단계 몇 단계 그렇게 돼서 올라간 그 단계를 말이야. 여기 있어서 아무리 상상을 해도 어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일반성이지. 보편성이지. 그 보편성이 없이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 이해할 수도 없고, 구원의 길이 도무지 반응이 없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양소설을 읽어도 재미가 있고, 옛날소설을 읽어도 재미가 있는 것은, 시간 공간을 말할 것 없이 우리에게 인간의 보편성이 있어.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성립이 되는 거야. 예수님도 예수로써의 가능성이 있습니다마는, 그렇지만 보편성이 있으면서도 거기 또 굉장한 차이가 있다 하는 거. 왜 그런가하니, 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 자라는 것인데, 거기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 성경 읽을 때, 성경 해석할 때, 늘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러니까 나는 나로써의 그걸 더듬어 보아서 어째 그러셨을까? 뭐 하나로 고정 할라고 하지 말고, 그런 건 두고두고 속으로 음미하는 겁니다. 입에다 이렇게 넣고 이렇게 음음 이렇게 맛을 봐요.
시라는 건 말로 하는 지금은, 하여간 다 그런 거지. 요렇게 쪽 짜개 분석을 해서, 고렇게 말 못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개 경우는 나는 모르겠습니다만, 난 내가 그렇게 돼 뭐하는지 모르지만, 성경해석을 하는데 제일 조건은 이러고, 둘째 뜻은 이러고, 셋째 뜻은 이건 요렇게 해놓으면, 알아듣기는 쉬운데 생명은 죽어버린다, 그럭하는 거, 하는 거 아냐? 그럴 수가 없어. 뭔지 막연한 것 같아도 역시 두고두고 한번만 보는 것 아니라 일생을 두고 날마다, 날마다 보는 가운데, 뭔지 언제인지 모르게 저절로 이렇게,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급한 생각을 해선 안 돼. 진리를 깨닫는데 급한 생각을 절대 해선 안 돼. 참고, 그런 줄 알고 왜 그러셨을까? 될수록 이면 내가 접근하고 싶은 마음, 예수님의 그 자리에 나도 가봤으면, 그러고 마음에 그렇게 그 생각하면은, 또 인간의 생명 원리가 접근이 돼 가는 법입니다.
그래 그러니 뭐 좋은날 보듯 차례 두고 해서, 하나님에 대해 기도를 하면, 그건 거 뭐야? 인도 바가바드기타에 있는 말이에요. 크리슈나에 대해 기도를 하면 크리슈나의 나라에 가 낳지. 또 무슨 이 조상의 영에다 제사를 하면 조상의 영이 거기를 갈 거지. 자기 기도한대로 가는 거야. 이거 우리 생명이 그 법칙이 있어요. 뭔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아보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데, 그런 마음으로 그럼 한 며칠 알려주면 갈 수 있을 거예요. 감히 지금 저기 이 자리에서 뭐 나도 거기에 갔다, 그렇게 말 할 수 없지만, 그럴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고 이제 여길 보면,
“여기 예수께서 마리아도 울고 따라온 유대사람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충격을 받으시고 안타깝게 여기셔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또 그대로 내려가다가도 38절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충격을 받으시고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11;38)
그러면 뭐라 그건 말 할 수 없지. 눈물이 나오고 말로 할 수 없는데, 그런 지경에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거지만, 그런 걸 이제 더듬어 보면서 우리가 하나 알거는, 이건 곧 그대로가 아닌, 그대로가 예수님의 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 못하더라도 거길 목표로 가는 동안에 알려지는 것이 있어요. 알려지는 것이 있어. 마치 산에 오르는 것 같아요. 백운대에 가자, 백운대에 가자면 백운대에 가자한다고 당장에 백운대 가지는 거 아니 예요. 하지만 백운대엘 가노라면 그 중간에서 승가사도 보고 뭐도, 문수암도 보고, 뭣도 보게 되고, 그리고 사실 백운대라는 건 뭐냐 하면, 백운대가 백운대 꼭다리만이 백운대가 아니 예요. 그 가운데 이게 다 들어있는 게 백운대지 말이야. 중 가운데 것 다 쏙 빼고 말이야, 나 있는 거 홀짝 들어다 백운대 꼭대기에 놓기만 하면 내가 백운대에 간 거냐? 그건 모르는 거, 백운대에 백운대라 하는 그 속에 내가 여기서 갈라 하는 생각과, 점심을 준비 하는 것과, 동무는 누굴 가자고? 그게 다 백운대야요. 어느 길과, 가는 길과, 뭘 본 것과, 그날 어쨌다는 것과, 그래 그렇게 생각을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때 마음이 어드러셔서 그러셨을까? 그때 고 마음을 도저히 나도 알 수도 없고, 또 그때 고 마음을 고대로 사진 찍었다고 하듯이, 고대로 본다고 해도, 또 그게 뭐 그런다고 별 갑자기 신통한 것도 아닌데, 그러는 동안에 우리 마음에, 저번 시간에도 그랬습니다만, 그럭하는 동안에 우리 마음이 뭐 보이는 것이 있어. 내게 직접 그 점이 뵈는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 볼 수 있는지 압니다만, 직접 그거 안보여도, 어디 그거를 바라고 있노라면 내 마음에 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은 이제 명상을 해본 사람은 압니다.
기도도 하지만 명상을 해야 한다
신앙살림 하는 데는 명상을 안해선 안 돼. 그건 절대 필요한, 오늘 우리 퀘이커 모임에서 내가 반대말을 하려고 합니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내가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명상도 하지만 기도 없어서는 안 된다, 명상과 기도가 다르다, 기도해야 된다, 그리고 해서 우치무라 선생이 젊어서 회원들을 보고 “우리모임에 오려면 반드시 소리를 내서 읽어라” 그걸 아주 조건으로 붙였다,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는 걸 조건으로 붙였다하는 게 아주 좋은 거라, 내가 얘기했습니다.
거기서는 그랬습니다만, 여기서는 퀘이커 사람이 아니고 교회 있는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내가 반대말을 할 겁니다. 기도도 하지만 명상을 반드시 해야 된다, 아마 교회 열심 있는, 이제 교회신자들은 기도는 많이 하는 줄 알아요. 하지만 명상은 별로지, 그러나 안 돼. 명상 있어야 돼. 명상을 한다면, 꼭 명상하는 것이 뭣과 같은가 하니 산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산보한다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산보 나간 댓 자 별신통한 거 없어요. 날마다, 날마다 갔던 곳을 뭘 산보 안 나가는 사람은 필시 그래. 날마다 가는 데도 싱거워. 뭐하러가나? 그래 그건 산보안하는 사람들, 산보하는 사람은 날마다 가는 데지만, 날마다 새로운, 새로운 법입니다.
산보하는데 사람이 아무리 주의하느라고 그래도 당하는 법이 있어. 여기를, 지금 여기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 다음 순간에 보면 또 못 보았던 거 있는 법입니다. 어느 점, 일점을 보아도 그런데, 거기가 이 생명의 신비입니다. 물질은 유한한 거지만, 이 속에 있는 정신이라는 게 무한한 거기 때문에 원인이 있을 겁니다만, 같은 코스, 요렇게 돌아오는 산본데 날마다 그래가지고 그러면, 날마다 그건 꼭 같은걸 가지고 이렇게 오면서, 슬슬 걸으면서 생각한 건, 아주 그 자유로운 생각 아니예요? 무슨? 무엇 때문에 뭐 강연준비를 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말할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로 그러기 때문에, 그 시간이 제일, 제일 좋은 거예요.
그래서 외국에 보면 산보라고 뭐 손테리아, 헨리 소로에 그저 월든이라는데 나오는 말이야. 손테리아, ‘손테리아’라는 말이 뭔고 하니 ‘정신의 세탁’이라, ‘정신의 소생’이라 그런 의미래요. 난 그저 산보하면 걸음 걸어 그런데, 명상이 꼭 그러하거든, 아침에 일어나자 가만히 앉아, 명상이 뭔고 하니,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대심판할 때까지, 매일매일 아침마다 늘 산보를 하거든, 빙빙 돌아요. 무슨 생각이 안 나와도, 천지창조 할 때 얘기가 나와. 범죄 하던 것도 나오고, 무슨 드보라가 어드런가도 나오고, 보리떡 세 개가 군것 같은, 전부 그건 날마다 보는 거지만, 그걸 이렇게 보고 하는 동안에, 그 동안에 새 의미가 나와요. 새 의미를 깨달은 동안에 뭐하는가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힘이 생겨. 영에, 영에 살이 쪄. 이게 필요한 거 같아요. 그게 중요한 거라고. 그게 중요한 거라고 그래. 저 일본사람의 말은 아주, ‘락교나 가라무끼’라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은 뭔가 하니 여기서 우리가 비유를 든다면, 캐비지 뜯어 들여가더니 양파 벗겨야 돼. 벗긴댔자 마지막에 뭐 있는가? 하나 벗기면 뭐 나와? 뭣이 나와, 뭣이 나와, 하나 둘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해가지고, 마지막에 뭣이 없어. ‘락교나 가라무끼’라는 거야. 이건 ‘락교’ 라는 건데 벗기면 뭣이 속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까지 껍데기지 별거 없어. 그러니 속이 뭔가? 속이 그 벗겨 들어가는 그게 속이야. 그게 속이야. 다 들어갔어, 때문에 있는 거 아냐. 하늘나라 가서도 뭣이 있다는 게, 아무것도 없 구만! 그건 낙제자야. 그러니까 하늘나라라 하는 곳이 맨 날 이걸 다하고, 내가 무척 아이고, 이거 참 기대했구나! 그런 어떤 곳이 있을 거라. 그런 아무것도 없어요.
하늘나라 가도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뭐 잘못하면, 옛날식으로 말하면 잘못말해서 벌을 받아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라도, 그건 잘라말 할 수 있어요. 가도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에요. 가도 무엇이라고 할 게 아무리, 가령 좋다면 얼마나 쯤 좋다고 그럴 거예요. 옛날 사람들도 썩 잘 형용해서 녹보석으로 짓고, 홍보석으로 짓고 그랬는데, 오늘날 보면 그다지 무슨 좋을 거 없지. 그거 뭐라 할 거예요? 곳이란 다면, 무엇이 어디 있다고 그런다면, 아무리 형용을 해도 금새가 빤해. 그런 어느 곳으로, 어디라 할 수가 없는데 아니예요? 그런 거니까 우리 지금 이걸로 한다면, 말하자면 벗기는 거, 벗기는 거, 배추 벗기는 거, 벗겨도, 벗겨도, 벗겨도, 벗기는, 그러는 거기가 한없이, 이건 배추를 아무리 큰 배추라도, 각 마지막에는 다 끝나는 데가 있습니다만, 이건 끝이 안 나는 거예요. 또 벗기고, 또 벗기고, 또 벗기고, 해도 벗기는 거기가, 생명이란 자꾸 그러는 거 아니 예요? 벗어 들어가고, 벗어 들어가고, 벗어 들어가고 그러니까, 자꾸 딴 말이 길어졌습니다.
하여간 거기 그 중 가운데 생각이 나는 게 뭐냐 그러면, 이자 오늘은 그 말 하자는 건데, 중 가운데 얘기가, 내 버릇이 그렇게 됐으니 용서하시오. 뭐냐 그러면, 우리라는 이 사람이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뭐야? 이게 인생은 인생이지만 말이야, 말하자면 그런 눈이, 예수님 같은 눈이 이렇게 보신다면, 참 불쌍해. 아마 굉장히 불쌍하게 보이시지 않았나? 그건 노상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니, 누가복음에 있는 말로 하면 “목자 잃은 양 같다”, “목자 잃은 양 같다.” 이런 게 사람들이 갈 바를 몰라. 인생이 어디 그 점은, 이제 석가도 일치하지 않아요? 세상도 대자대비, 불쌍히 봐. 그러니까 대승불교가 되려면 대승불교의 조건이 우선 뭔고 하니, 일체중생을 건지자하는 그 생각 하나는 높습니다. 그건 옳은 말이에요. 아무리 신앙이라도, 그래도 나 나 그러지. 나에만 붙어서 그러는 한, 그것도 가련하긴 하면서도, 역시 그 뭐 가련한 데가 뭐 있어요. 그래 이제 그 점을, 그 점을, 냅다 그것만을 강조하게 되면, 사람이란 건 뭐인지 요 유, 있다는데 붙어서 있기가 쉬우니까, 붙어있으면 그걸 그 진리를 깨기가 어려우니까, 그걸 깨치느라고 해서 불교에서는 공, 없다고. 아무튼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그 마음씨를, 그게 뭐냐? 그걸 체험해 보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런데 기독교 믿는 사람, 기독교에서도 요렇게, 요 아주 복음적인 신앙 가진다고 하는 사람이, 그 무슨 요렇게 좁쌀처럼 깔끔하게, 요렇게 분명한, 또렷또렷 요런 것에 집착이, 요거 기지, 요거 기지. 그러기 때문에 칼빈이 자기 반대자는 목을 잘라 죽인거야. 도저히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칼빈의 생각은 진리를 위해서는 말이야, 반대되는 자는 조금 없어도 좋다, 확신 때문에 그러지 않아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면 뭔가 하니, 칼빈도 불쌍한 인간이에요. 역시 고걸 채 못 봤으니까, 루터도 불쌍한 인간이고, 오늘날 우리가 한다면 적어도 그런 건 안 할 거예요. 아무리 열심히 라고 하더라도 농민이, 그 어리석은 농민이 반항을 하는데, 예수님의 입장을 우리가 배워서 생각한다면, 농민이 반항한다, 루터의 생각에 저것들 그대로 두었다간 도무지 혼란에 빠져 안 될 거라 하는 생각 있으니까, 이건 정치의 힘을 빌어서라도 진압을 해야 된다 해서 진압을 했겠지만, 우리가 오늘날 신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루터가 분명히 잘못됐어요. 그런 점을 우리가 좀 대담하게 비판해도 좋아요. 해야 돼요. 그런 것이 루터를 아는, 루터를 아끼는 거지. 루터는 잘못이 아무것도 없거니, 루터의 잘못, 감히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거니, 그러면 안 돼. 그런데 제일 고 약점이 아주 요렇게 열심이기 때문에, 열심이니만큼 요것에 아주 집착 할라고, 그럭하면 고건 좋은데, 제일 걱정은 자라지를 못해. 또 나는 그래 그걸로 좋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거, 세상이 다 단순하지를 않아요. 나와 마음씨가 반드시 같은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길은 천생 가지가지 길이라는 거, 종교를 단일화해서 한 문만 만들어가지고, 그게 마지막에 예루살렘 보는데 사방으로 세 문 씩, 그러니까, 그 이상 더할 필요 없이 열두 문을 만들었으면 그만이지. 뭐 열두 문이란 말은 결국은 문이 많다, 그런 겁니다. 동으로도 서로도 남으로도 북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 천국이란 예수님도 다른 대목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의 문은 좁은 문이다.”
그러니까 요만한 구멍에서 요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요리로 들어가려면, 이제 우리 아침에도 버스시간에 뭐 야단이 아니예요? 하지만 다른 면으로 말하면, 어떤 거나 하나를 통해도, 세 문, 남으로도 북으로도 좀 문이 뭐 사방에 있는데 걱정 없어. 어디로도 들어온다, 반대로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알아야 돼.
하나만을 보고 딱 그렇게 해서 천국은 들어가기 어렵다, 그럭하면 자기네 독선 하는 것을 합리화해서 이래도 좋다, 우리 믿는 것이 참 이것만이 진리지. 다른 것은 다 거짓말이다, 그러기 쉬워요. 그렇게 되면 바로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그럴 수 없는 감히 인간인데, 아무리 진리를 힘 있게 체험했다고 해도, 내가 처음에 이것이 유일하게 이것이 제일이라고, 이것이 완전하다, 그럴 수 없는 게 인간이야. 인간이 감히 인간인줄을 안다면 내가 체험했다고 하는 진리조차도 어느 면이지. 상대적인 거지 절대화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다면 뭔가 하니,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다. 그러니까 엘리야도 잘못하고, 성경에 엘리야가 있고 요나가 있는 것은 참 좋은데, 예수님조차도 그러니까 엘리야가 그렇게 위대했지만, 모르는 점이 있어. ‘나 하나 남았는데 저놈들이 나마저 죽이려고 한다,’ 하나님이 “얘, 네가 모르는 7천명이 있다,” 요나가 얼마나, 요나가 안 가려고, 요나 안 가려고 그러니까, 예언을 하려면 들어맞아야지 말이야. 저놈의 하나님이 또 이제 중간에 고칠 거야. 그럭하면 예언했다고 하는 소용도, 난 그래 안 갈래!
설교하는 목사도 다 지옥가야 돼
처음부터 다른 사람은 요나서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돼. 왜 까닭을 처음부터 요나가 덮어놓고 안가겠다고 그러잖아? 예언을 주었는데 왜 안가겠다고 그럽니까? 그 다음에 가만히 나오는걸 보면 뭔가 하니, 이 하나님이 이럭하라고 노해서 명령도 하지만, 즉 말하자면 참 이 할아버지가 인심이 좋은 할아버지가 돼서 변명을 곧 잘해. 그러니까, 니느웨 사람이 또 변명하기로 그러면 나만 골탕 먹는 거 아니냐? 아 거기서 모처럼 전도를 해 놨는데, 들어맞지 않았다, 그럼 면목이 뭐야? 그러니까 나 안 가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박 넝쿨 얘기가 그래 나와. “야, 이 자식아 너는 그 너 요 박 넝쿨하나 아껴 하냐? 아, 나는 저기 동서구별 못하는 12만이 있는데, 그 12만이 제각기 아니냐? 같겠냐?”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고 한데, 어떻게 네 생각만 하고 네 말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고 예언대로 예언을 한다면 들어맞아야지. 하나님이 한번 말씀하신 것, 이랬다, 저랬다하면 됩니까? 네 의를 가지고 나를 재려고 하는 그런 생각까지, 성경에 그런 말이 있단 말이 있는데, 그걸 날보고 더듬어 해석을 한다면, 그 점이 낙제한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인고로 낙제해요. 엘리야 식, 엘리야 식, 엘리야 확실히 실패를 하지, 요나도 그렇잖기 쉽지 않아요.
그런 것은 역시 사람인 다음엔 어느 면만 보지 다보는 재주가 없다, 사람 참 복잡해. 오늘 아까 처음에 말했습니다만, 그러지 않고는 이걸 내가 살수도 없고 세상을 살릴 수 없어요. 만일 고대 사람모양으로 지금 중대문제가 있으니까, 데모 하는 것만으로 우리 한국 사람이다! 그런다면 말이야. 다른 사람은 뭐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도 다 지옥가야 돼. 이 자식들은, 넌 나라가 이런데, 쓸데없는 설교만 하고 있어! 그럼 나라가 건져지냐? 할 때, 그런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어요?
또 목사 편에 있어가지고 건 뭐냐? 아무래도 하나님의 성일을 지키고 성경이나 읽었다고 하는, 기라, 또 그게 기란 다면 말이야, 그럼 너희들 떼먹는 거. 그런 생각을 해가지고 되냐? 그런다면 그것도 죽어야 돼. 그럼 어떻게 할 거냐? 이런 점이 살리긴 다 살려야 하는 거지 말이야.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여 가지곤 그것은 이 세상법이지. 진리의 법이 아니예요. 그런데 그런 거를 누가 제일 심하냐 하면, 종교의 확신 있는 사람이, 왜? 이것이 하나님의 확신이라고 이렇게 속아? 일부러 하는 거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 내 이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거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를 빙자를 해가지고 죽여도 좋다고, 다른 건 다 아니라고 해. 그러니까 이것 참 비통한 일입니다. 비통한 일, 이것이 종교의 아주 그 비통한 역사가 나오는, 마냥 그 아주 점잖고 아주 이제 잘못이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도덕적으로 잘못이 없는 사람들이 거기 빠지기가 쉬워요. 그게 시비를 가리는 데만 하기 때문에, 저기 세상이 단순하지를 않아. 복잡해서 저걸 건지려면 말이야.
나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고기가 가지가지 고기야. 고기 그러니까, 고기를 잡아 한 가지 그물만 가지곤 안 잡아져. 작은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코가 배야 하지만, 큰 고기는 걸로 못 잡아. 큰 고기 잡으려면 또 그물코가 커야 되는데, 뵈게 떠가지곤 또 큰 고기가 안 잡혀. 그러니까 작은 고기 잡는 그물 따로 있고, 큰 고기 잡는 그물 따로 있고, 그물로 잡는 고기 따로 있고, 낚시로 잡는 고기 따로 있고. 그물 가지곤 도저히 못 잡는 게 있잖아요? 가지가지 그런 모양으로 그 매양 사람 건지는, 구원 하는걸 고기 잡는데 비기는데도 있긴 있습니다만, 그렇게 방법이 가지가지라고 하는, 여러 가지라 이런 점이, 지금은 좀 우리가 생각할 점 아닐까?
딴 얘기만 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만, 오늘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날까지 사람이 뭐냐? 이 인간들이, 이 인간들이 이제 그렇게 복잡한, 다 다른 점이 있으면서도 또 같은 말, 이 물건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데는 꼼짝 말을 못하고 이렇게 종살이를 하고 있지 않아요? 거기가 이제 모순이라면 참 모순인데, 생명이 있는 성질상 생명은 끝이 없는 게 생명인데, 사람이 죽는 것처럼 알 수 없고, 죽는 것처럼 비통한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거를 가만히 이렇게, 그 생각이 참 깊으신 그 눈으로 보신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소위 선하다는 놈, 악하다는 놈, 죄가 있다는 놈, 어리석다는 놈이 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절대지배자가 있어. 그 밑에서 소위 죽음이 두렵다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 하는 그것 때문에 저도 모르고, 이러고 정치가 그 때문에 이러는 거, 예술도 그 때문에 이러는 거, 일체가 그렇게 한번 설명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다면 근본 문제가 어떡하면 저기서 벗겨 낼 수가 있을까? 아마 제 마음을 가지고 과히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당초 그래서 세상을 불쌍히 보시는 거, 이 세상을 건진다고 그러고 하는 말씀이 그래서 하신 거 아닌가? 생리적인 이 죽음 이건, 우리가 이젠 과학이 그 점에선 그만큼 발달해서 변할 수 없는 철칙인걸 알아요. 개중에 어떻게 돼서 예외로 성경에 있는 뭐 저기 엘리사는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갔다고 그러고, 에녹이가 그대로 갔다고 그러고 그럽니다만, 알 수 없는 일이죠. 어떻게 돼 그랬는지? 그 성경이 얘기하는 그거는 그때 사람들의 그에 대한 종교적인 체험이 된 일이지. 객관적인 이 몸이 엘리야라는 사람의 몸이, 지금 어디 별나라에 가 있나?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근데 지금 우리가 아는 걸로는 이 생이란다 하면 다 끝이 있어요. 이건 그 법칙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은 그렇게 과학의 세계에서 실험된 건 그대로 잘라서 말해도 괜치 않아요. 그럭하면 이제 성경에 있는 그런 말과 충돌이 돼요. 그럼 엘리야는 분명히 불 수레를 타고 죽지 않고 올라갔다는데 어떠하냐? 엘리사는 거 있다가, 에녹은 뭐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 그러고, 그다음에 죽지 않고 갔다는데, 그럼 어떠하냐? 이제 이런 게 문제가 돼요. 그런 얘기는 뭐 오늘 다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만. (녹음17, 3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