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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엄청난 쌀에 대한 탐식
밥심으로 산다'고 말하는 민족답게 우리 조상은 밥을 많이 먹었다. 조선후기 기록을 보면 당시 한 끼 식사로 성인 남자 7홉, 여자 5홉, 아동 3홉, 어린아이 2홉을 먹었다. 1홉이 약 180mL니까 남자 어른의 한 끼 밥양이 무려 1260mL, 즉 1.2L나 된다. 콜라나 사이다 따위 탄산음료를 담는 대형 페트병을 가득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물론 당시에는 하루 두 끼가 보통인 데다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이 2홉쯤 먹었다. 그러니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밥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냐'고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 짓는 기술이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났다.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이라는 학자가 쓴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이란 글이 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열두 가지 조건'을 소개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밥을 맛보고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 뺨쳤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일단 밥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밥그릇은 점점 작아져서 요새 식당이나 가정에서 흔히 쓰는 밥공기 용량이 290mL다. 성인 밥 한 그릇이 조선 후기 갓난아기의 그것보다 작다. 최근에는 '반공기 밥그릇'도 나왔다. 이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면 190mL니까 1홉 정도 밥이 담기는 셈이다.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작은 밥공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많이 먹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두 배, 고려시대에는 세 배를 먹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양의 밥을 먹은 셈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가 운영하는 토지박물관이 21일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공기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에 있는 토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이날 막을 연 ‘땅에서 찾아낸 역사’ 특별전에서 이 밥그릇들을 비교전시하고 있다.(031)738-7382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 끼 식사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게 평상시의 식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두 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말이 하루 두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세넷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0~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대식에 관한 이야기는 옛 문헌에도 잘 나와있다.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라는 책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술을 마신다' 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또한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이 외에 임진왜란 때 기록된 '쇄미록'이란 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한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먹는 한공기의 5배는 되는 양의 밥이 된다. 선조들의 특출난 대식에 대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점거한 성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걸 판단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가 너무 오래 견디길래 돌격을 했는데 성에서 발견한 김치 종지 만한 밥그릇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를 보면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선인들의 식사량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66. 3. 7 ~ 3. 30, 안돈이, France)주교
1841년 12월 18일 서품. 1845년 10월 조선 입국.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Daveluy의 기록
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위장에 탄력을 주려고 하는 짓 같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보다 꽉 찼을 때에 비로서 밥 먹이는 것을 중지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공놀이 선수들이 손가락이 안 들어갈 때까지 공을 팽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날고기는 고추장이나 겨자를 곁들여 먹는데 그냥 그대로 먹기도 한다. 한가로운 양반들이 고추장 단지와 낚시도구를 들고 강가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작은 고기를 잡아서 준비해온 고추장에 담갔다가 그대로 먹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맛있다고 말한다. 미각이나 기호에 대해서는 논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양반의 일상과 기호 : 담배와 음식
출처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쓴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밥상에 놓인 음식을 보니,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다. 마침 사진을 찍으면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다.
유기로 만든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국 대접 옆에 놓였다.
사진을 얼핏 보면 요사이 한국인이 밥을 먹는 모습과는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밥과 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이 올려진 밥상은 보통 개다리소반이라고 불린다.
밥상의 다리가 마치 개의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밥상의 크기도 무척 작다. 너비는 32센티미터 정도, 높이는 24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을 때 적당한 크기의 밥상이다.
밥상 위에는 모두 여덟 개의 그릇이 놓여 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가까운 그릇이 제일 크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남자의 왼쪽에는 밥그릇, 오른쪽에는 국그릇이 놓였다. 밥그릇 앞에 김치를 담은 보시기, 간장을 담은 종지, 그리고 장아찌를 담은 보시기가 보인다. 가장 바깥에는 콩자반을 담은 접시, 찌개를 담은 대접, 그리고 나물을 담은 접시 따위가 놓였다.
그런데 여덟 개의 그릇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보통 주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요사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밥그릇과는 완전히 다르다. 높이가 거의 9센티미터, 입의 지름이 거의 13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밥을 담으면 요사이 한국인이 거의 세 끼니에 걸쳐서 먹을 수 있는 밥이 담길 듯하다. 밥그릇보다 더 큰 것이 국그릇이다. 높이는 밥그릇과 비슷하여 거의 9센티미터에 가깝다. 입의 지름은 15센티미터가 넘을 듯하다.
그야말로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당시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피난을 다니면서 쓴 일기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에서는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당시 일부 계층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제목으로 하여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도 들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대개 그들은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식은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 앞의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 역시 당시 조선 사람을 두고 ‘아시아의 대식가’라고 불렀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다식했을까? 사실 그 이유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유구 사람들이 언급한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에 가난하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다. 『조선교회사』를 출간한 가톨릭 신부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조선 사람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오희문의 기록처럼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그로 인해서 쌀 생산에만 온 정성을 다 들이다 보니, 다른 먹을거리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아서 가난하다는 말은 유구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드러난다.
오로지 쌀을 비롯한 곡물로 지은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여겼던 조선 사람들의 습관은 조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 1762~?)이 한글로 지은 중국 기행문집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4권에도 나온다. 월사 이 상공이 명국에 사신으로 들어왔을 때에 한 재상이 날을 기약하여 집으로 찾아오라 하였더니, 기약한 날 그 재상이 공무가 있어 궐내에 들어가고 집안 식구에게 이 상공을 모셔서 그 재상이 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월사가 식전에 그 집에 가니 집안사람들이 그 재상의 말을 전하고 술과 안주로 대접하더니, 날이 늦으니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 고자 하거늘, 또 떡과 과일로 대접하되, 밥을 아직 먹지 못한지라 굳이 가기를 청하니, 집안사람들이 그가 시장할까 하여 오전에 네다섯 번을 음식을 먹이되, 끝내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니, 그 재상이 돌아와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뉘우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하더라.
그림 2 《무오연행록》 제4권 해당부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이 글에 나오는 월사는 바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를 가리킨다. 이 일화는 밥을 먹을거리 중에서 가장 으뜸에 두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준다. 다른 음식이 많더라도 곡물로 된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상 제사를 지낼 때 밥을 으뜸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지는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하지만 송나라 때 중국의 한족들은 곡물로 지은 밥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면(麵)도 먹었다. 당연히 주자의 《가례》에서도 조상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밀은 여름 기후가 20도 이상이 되면 자라지
않는다. 품종개량을 하지 않았던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쌀에대한 절대적 믿음은 급여나 세금으로 쌀이 쓰이도록 만들었다. 곧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천도굿인 지노귀굿이나 새남굿에서도 조상 혼령에게는 반드시 쌀밥을 올린다.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신령에게도 햅쌀이 나오면 그것으로 신체(神體)를 만들어서 대들보에 매달아둔다. 쌀은 조상이면서 동시에 산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림2. 『시의전서․음식방문』에 담긴 양반의 반상차림
조선시대 부자 양반들은 많은 양의 쌀밥을 중심에 두고 국을 함께 먹으면서 반찬은 적게 먹었다. 하지만 어떤 규칙으로 밥상을 차렸는지에 대해서 적은 오래된 문헌은 많지 않다. 현재까지는 한글로 직접 쓴 『시의전서(是議全書)․음식방문(飮食方文)』이라는 책이 최초로 밥상 차림을 적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1919년에 심환진(沈晥鎭)이란 사람이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양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조리서를 빌려서 필사를 해 둔 것이었다. 후에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 여사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고인이 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되어 1970년대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은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를 했던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이 1915년에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요리서 하나를 빌려서 괘지에 필사해둔 것이다.
그림 3 『시의전서․음식방문』 상권 목차
이 필사본 괘지에는 ‘대구인쇄합자주식회인행((大邱印刷合資會社印行)’이란 글자와 ‘상주군청(尙州郡廳)’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구인쇄합자주식회사는 1911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대구에서 설립된 회사로 알려진다. 이로 미루어 이 필사본은 대략 1911년 이후부터 심환진이 상주군수에서 칠곡군수로 임지를 옮기는 192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환진은 필사된 『시의전서․음식방문』을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에게 주었다. 홍정은 탐구당 설립자 고 홍석우(洪錫禹, 1919~2007)의 고모로 고 이성우 교수는 홍사장에게서 이 책을 소개받아 세상에 알렸다. 최근에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어느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시의전서․음식방문』의 말미에는 ‘반상식도’가 나온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 칠첩반상․ 오첩반상․ 곁상․ 술상․ 신선로상․ 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서 첩이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을 가리킨다. 그런데 5첩 밥상이라고 하면 밥․국․김치․젓갈․ 초장․간장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이들 음식만 차려도 밥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기본 밥상 차림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 기본 음식 외에 세 가지의 반찬을 올렸으면 3첩, 다섯 가지를 올렸으면 5첩, 일곱 가지를 올렸으면 7첩, 아홉 가지를 올렸으면 9첩이 된다.
『시의전서』에 나와 있는 5첩 밥상에 올랐던 음식을 한 번 살펴보자. 밥․국이 가장 안쪽에 놓였다. 가운데는 조치․간장․초장이 놓였다. 그 바깥으로는 왼쪽에서부터 젓갈․자반․김치․나물․육숙․구이가 차려졌다. 당시에 즐겨먹었던 젓갈로는 조개젓과 명란젓이 있었다. 자반은 생선 혹은 콩․미역․김․쇠고기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든 반찬을 가리킨다. 김치는 매우와 무를 간장에 절인 장김치가 올랐을 가능성이 많다. 나물은 호박나물이나 고사리나물 따위가 인기였다. 육숙은 육고기나 생선을 삶거나 찐 음식이다. 아마도 족편이나 붕어찜이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구이는 생선을 석쇠에 구운 음식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게구이․청어구이․조기구이 따위를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러한 밥상 차림의 격식은 고대 중국인들의 식사방식을 도입한 데서 유래한다. 주나라 때의 천자는 아홉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천자 아래의 대부(大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일곱 개, 그 아래의 경(卿)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다섯 개, 그리고 가장 아래에 있던 사(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세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학에서 계층마다 음식을 차리는 데도 등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19세기 이후 조선의 밥상 차림으로 자리를 잡았던 3․5․7․9첩 밥상차림도 유학의 예법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만큼 조선후기의 일상식사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그림 5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1
-구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전유어, 숙육, 김치, 회, 나물, 쌈, 생선구이,
육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양조치, 생선조치, 맑은조치)
-칠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회, 김치, 숙육, 나물, 쌈, 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토장조치, 맑은조치)
그림 6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2
3. 양반의 식사, 엄숙한 시간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을 때 반찬을 옮기는 도구로는 젓가락이 편리하다. 일본인의 경우, 밥을 먹기 전에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가서 그릇째 마신 다음에 다시 밥그릇을 손에 들고 밥을 먹는다. 그러니 그들은 굳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하다. 이에 비해 국이나 찌개와 같은 국물음식을 밥과 함께 입에 넣고서 먹는 한국인에게는 숟가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까지 일본의 쌀밥처럼 차진 성분이 적고, 쌀밥과 함께 각종 거친 잡곡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숟가락을 이용하여 밥을 떠먹어야 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 한국인에게 숟가락은 밥과 국을 입으로 옮기는데 매우 유용한 식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식기나 숟가락*젓가락에 비해서 한국의 것은 매우 무겁다. 지금이야 식기의 재료가 대부분 도자기이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숟가락과 젓가락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 놋쇠는 구리에 아연을 10~45퍼센트 넣어 만든 것이다. 5,000년 전인 중국의 주(周)나라 때 사람들이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기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한 전통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놋쇠로 된 식기를 가장 고급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놋쇠로 된 식기와 수저를 사용하면 매우 고급스러운 밥상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놋쇠로 만든 식기는 그 값이 비싸서 대신에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많이 사용했다.
놋쇠나 사기로 만든 식기는 각각의 기능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다르다. 밥을 담는 그릇은 보통 주발이라고 부른다. 주발은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을 갖춘 그릇으로, 밥을 많이 담는 데 좋다. 국이나 물을 담는 그릇으로는 대접이 있다. 위가 넓고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뚜껑이 없다. 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장이나 고추장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종지라는 것이 있다. 작은 종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치를 담는 그릇인 보시기는 모양은 대접과 닮았지만,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다.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으로
접시가 있다. 일반적인 반찬을 닮을 때 사용한다.
기와집이나 초가에서나 조선후기 사람들은 보통 겨울에 온돌이 깔린 방에서 밥을 먹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남자 어른들은 소반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 위치는 온돌이 가장 따뜻한 아랫목이었다. 만약 소반에서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경우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겸상할 수 있었다. 교자상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었다. 보통 아랫목은 아버지의 자리이며, 그 옆으로 아들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와 딸들은 별도로 부엌에서 식사를 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 여자들은 숟가락 하나만으로 밥을 먹었다. 식기가 부족했던 당시에 여자들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도 먹으면서 숟가락 손잡이로 김치나
나물 등을 떠서 먹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식사할 때 매우 엄격하게 예법을 지켰다. 당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였던 『소학(小學)』에는 밥을 먹을 때의 예절을 성현들의 교훈을 통해 가르쳤다. 즉 “입에 맛있는 것과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마셔서 배만 채우면 인욕(人慾)에 머물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절도 있게 먹고 마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天理)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은 성욕(性慾)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검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왕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반찬 수를 줄였다. 선비들은 자연과 일치된 삶을 위해서 가능한 적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반가의 식사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문화
출처 : 정연식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 가운데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하루도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먹기 위한 욕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먹는 것을 중시한 듯하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현 오끼나와)에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한말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여러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다. 그 원인을 전통사회의 가난에서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에는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가난한데 어떻게 '늘'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예전의 가난이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유달리 빈곤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의 조선견문기와 러일전쟁 종군 기자였던 맥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그다지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현재로서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체구가 크고 강건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식생활을 당시 사람들로서는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엉성하나마 조각난 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 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 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 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 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 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서울여대 교수)
조선시대 쌀 소비량에 대한 다른 의견
- 조선시대 초기 도량형은 한되가 540ml 정도여서
한끼 7홉은 (540*0.7= 378 ml) 에 불과하다 (1되=1800ml는 일본 도량형입니다.) 조선시대 : 엄청난 쌀에 대한 탐식
쌀
- 쌀 : 우리의 로망이었다
- 쌀소비량 해마다 감소
- 현미가 모든 영양을 갖춘 것은 아니다
밥심으로 산다'고 말하는 민족답게 우리 조상은 밥을 많이 먹었다. 조선후기 기록을 보면 당시 한 끼 식사로 성인 남자 7홉, 여자 5홉, 아동 3홉, 어린아이 2홉을 먹었다. 1홉이 약 180mL니까 남자 어른의 한 끼 밥양이 무려 1260mL, 즉 1.2L나 된다. 콜라나 사이다 따위 탄산음료를 담는 대형 페트병을 가득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물론 당시에는 하루 두 끼가 보통인 데다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이 2홉쯤 먹었다. 그러니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밥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냐'고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 짓는 기술이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났다.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이라는 학자가 쓴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이란 글이 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열두 가지 조건'을 소개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밥을 맛보고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 뺨쳤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일단 밥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밥그릇은 점점 작아져서 요새 식당이나 가정에서 흔히 쓰는 밥공기 용량이 290mL다. 성인 밥 한 그릇이 조선 후기 갓난아기의 그것보다 작다. 최근에는 '반공기 밥그릇'도 나왔다. 이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면 190mL니까 1홉 정도 밥이 담기는 셈이다.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작은 밥공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많이 먹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두 배, 고려시대에는 세 배를 먹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양의 밥을 먹은 셈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가 운영하는 토지박물관이 21일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공기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에 있는 토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이날 막을 연 ‘땅에서 찾아낸 역사’ 특별전에서 이 밥그릇들을 비교전시하고 있다.(031)738-7382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 끼 식사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게 평상시의 식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두 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말이 하루 두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세넷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0~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대식에 관한 이야기는 옛 문헌에도 잘 나와있다.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라는 책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술을 마신다' 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또한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이 외에 임진왜란 때 기록된 '쇄미록'이란 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한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먹는 한공기의 5배는 되는 양의 밥이 된다. 선조들의 특출난 대식에 대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점거한 성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걸 판단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가 너무 오래 견디길래 돌격을 했는데 성에서 발견한 김치 종지 만한 밥그릇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를 보면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선인들의 식사량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66. 3. 7 ~ 3. 30, 안돈이, France)주교
1841년 12월 18일 서품. 1845년 10월 조선 입국.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Daveluy의 기록
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위장에 탄력을 주려고 하는 짓 같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보다 꽉 찼을 때에 비로서 밥 먹이는 것을 중지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공놀이 선수들이 손가락이 안 들어갈 때까지 공을 팽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날고기는 고추장이나 겨자를 곁들여 먹는데 그냥 그대로 먹기도 한다. 한가로운 양반들이 고추장 단지와 낚시도구를 들고 강가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작은 고기를 잡아서 준비해온 고추장에 담갔다가 그대로 먹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맛있다고 말한다. 미각이나 기호에 대해서는 논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양반의 일상과 기호 : 담배와 음식
출처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쓴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밥상에 놓인 음식을 보니,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다. 마침 사진을 찍으면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다.
유기로 만든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국 대접 옆에 놓였다.
사진을 얼핏 보면 요사이 한국인이 밥을 먹는 모습과는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밥과 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이 올려진 밥상은 보통 개다리소반이라고 불린다.
밥상의 다리가 마치 개의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밥상의 크기도 무척 작다. 너비는 32센티미터 정도, 높이는 24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을 때 적당한 크기의 밥상이다.
밥상 위에는 모두 여덟 개의 그릇이 놓여 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가까운 그릇이 제일 크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남자의 왼쪽에는 밥그릇, 오른쪽에는 국그릇이 놓였다. 밥그릇 앞에 김치를 담은 보시기, 간장을 담은 종지, 그리고 장아찌를 담은 보시기가 보인다. 가장 바깥에는 콩자반을 담은 접시, 찌개를 담은 대접, 그리고 나물을 담은 접시 따위가 놓였다.
그런데 여덟 개의 그릇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보통 주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요사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밥그릇과는 완전히 다르다. 높이가 거의 9센티미터, 입의 지름이 거의 13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밥을 담으면 요사이 한국인이 거의 세 끼니에 걸쳐서 먹을 수 있는 밥이 담길 듯하다. 밥그릇보다 더 큰 것이 국그릇이다. 높이는 밥그릇과 비슷하여 거의 9센티미터에 가깝다. 입의 지름은 15센티미터가 넘을 듯하다.
그야말로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당시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피난을 다니면서 쓴 일기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에서는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당시 일부 계층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제목으로 하여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도 들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대개 그들은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식은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 앞의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 역시 당시 조선 사람을 두고 ‘아시아의 대식가’라고 불렀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다식했을까? 사실 그 이유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유구 사람들이 언급한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에 가난하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다. 『조선교회사』를 출간한 가톨릭 신부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조선 사람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오희문의 기록처럼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그로 인해서 쌀 생산에만 온 정성을 다 들이다 보니, 다른 먹을거리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아서 가난하다는 말은 유구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드러난다.
오로지 쌀을 비롯한 곡물로 지은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여겼던 조선 사람들의 습관은 조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 1762~?)이 한글로 지은 중국 기행문집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4권에도 나온다. 월사 이 상공이 명국에 사신으로 들어왔을 때에 한 재상이 날을 기약하여 집으로 찾아오라 하였더니, 기약한 날 그 재상이 공무가 있어 궐내에 들어가고 집안 식구에게 이 상공을 모셔서 그 재상이 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월사가 식전에 그 집에 가니 집안사람들이 그 재상의 말을 전하고 술과 안주로 대접하더니, 날이 늦으니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 고자 하거늘, 또 떡과 과일로 대접하되, 밥을 아직 먹지 못한지라 굳이 가기를 청하니, 집안사람들이 그가 시장할까 하여 오전에 네다섯 번을 음식을 먹이되, 끝내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니, 그 재상이 돌아와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뉘우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하더라.
그림 2 《무오연행록》 제4권 해당부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이 글에 나오는 월사는 바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를 가리킨다. 이 일화는 밥을 먹을거리 중에서 가장 으뜸에 두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준다. 다른 음식이 많더라도 곡물로 된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상 제사를 지낼 때 밥을 으뜸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지는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하지만 송나라 때 중국의 한족들은 곡물로 지은 밥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면(麵)도 먹었다. 당연히 주자의 《가례》에서도 조상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밀은 여름 기후가 20도 이상이 되면 자라지
않는다. 품종개량을 하지 않았던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쌀에대한 절대적 믿음은 급여나 세금으로 쌀이 쓰이도록 만들었다. 곧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천도굿인 지노귀굿이나 새남굿에서도 조상 혼령에게는 반드시 쌀밥을 올린다.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신령에게도 햅쌀이 나오면 그것으로 신체(神體)를 만들어서 대들보에 매달아둔다. 쌀은 조상이면서 동시에 산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림2. 『시의전서․음식방문』에 담긴 양반의 반상차림
조선시대 부자 양반들은 많은 양의 쌀밥을 중심에 두고 국을 함께 먹으면서 반찬은 적게 먹었다. 하지만 어떤 규칙으로 밥상을 차렸는지에 대해서 적은 오래된 문헌은 많지 않다. 현재까지는 한글로 직접 쓴 『시의전서(是議全書)․음식방문(飮食方文)』이라는 책이 최초로 밥상 차림을 적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1919년에 심환진(沈晥鎭)이란 사람이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양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조리서를 빌려서 필사를 해 둔 것이었다. 후에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 여사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고인이 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되어 1970년대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은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를 했던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이 1915년에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요리서 하나를 빌려서 괘지에 필사해둔 것이다.
그림 3 『시의전서․음식방문』 상권 목차
이 필사본 괘지에는 ‘대구인쇄합자주식회인행((大邱印刷合資會社印行)’이란 글자와 ‘상주군청(尙州郡廳)’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구인쇄합자주식회사는 1911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대구에서 설립된 회사로 알려진다. 이로 미루어 이 필사본은 대략 1911년 이후부터 심환진이 상주군수에서 칠곡군수로 임지를 옮기는 192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환진은 필사된 『시의전서․음식방문』을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에게 주었다. 홍정은 탐구당 설립자 고 홍석우(洪錫禹, 1919~2007)의 고모로 고 이성우 교수는 홍사장에게서 이 책을 소개받아 세상에 알렸다. 최근에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어느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시의전서․음식방문』의 말미에는 ‘반상식도’가 나온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 칠첩반상․ 오첩반상․ 곁상․ 술상․ 신선로상․ 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서 첩이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을 가리킨다. 그런데 5첩 밥상이라고 하면 밥․국․김치․젓갈․ 초장․간장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이들 음식만 차려도 밥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기본 밥상 차림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 기본 음식 외에 세 가지의 반찬을 올렸으면 3첩, 다섯 가지를 올렸으면 5첩, 일곱 가지를 올렸으면 7첩, 아홉 가지를 올렸으면 9첩이 된다.
『시의전서』에 나와 있는 5첩 밥상에 올랐던 음식을 한 번 살펴보자. 밥․국이 가장 안쪽에 놓였다. 가운데는 조치․간장․초장이 놓였다. 그 바깥으로는 왼쪽에서부터 젓갈․자반․김치․나물․육숙․구이가 차려졌다. 당시에 즐겨먹었던 젓갈로는 조개젓과 명란젓이 있었다. 자반은 생선 혹은 콩․미역․김․쇠고기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든 반찬을 가리킨다. 김치는 매우와 무를 간장에 절인 장김치가 올랐을 가능성이 많다. 나물은 호박나물이나 고사리나물 따위가 인기였다. 육숙은 육고기나 생선을 삶거나 찐 음식이다. 아마도 족편이나 붕어찜이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구이는 생선을 석쇠에 구운 음식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게구이․청어구이․조기구이 따위를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러한 밥상 차림의 격식은 고대 중국인들의 식사방식을 도입한 데서 유래한다. 주나라 때의 천자는 아홉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천자 아래의 대부(大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일곱 개, 그 아래의 경(卿)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다섯 개, 그리고 가장 아래에 있던 사(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세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학에서 계층마다 음식을 차리는 데도 등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19세기 이후 조선의 밥상 차림으로 자리를 잡았던 3․5․7․9첩 밥상차림도 유학의 예법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만큼 조선후기의 일상식사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그림 5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1
-구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전유어, 숙육, 김치, 회, 나물, 쌈, 생선구이,
육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양조치, 생선조치, 맑은조치)
-칠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회, 김치, 숙육, 나물, 쌈, 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토장조치, 맑은조치)
그림 6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2
3. 양반의 식사, 엄숙한 시간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을 때 반찬을 옮기는 도구로는 젓가락이 편리하다. 일본인의 경우, 밥을 먹기 전에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가서 그릇째 마신 다음에 다시 밥그릇을 손에 들고 밥을 먹는다. 그러니 그들은 굳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하다. 이에 비해 국이나 찌개와 같은 국물음식을 밥과 함께 입에 넣고서 먹는 한국인에게는 숟가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까지 일본의 쌀밥처럼 차진 성분이 적고, 쌀밥과 함께 각종 거친 잡곡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숟가락을 이용하여 밥을 떠먹어야 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 한국인에게 숟가락은 밥과 국을 입으로 옮기는데 매우 유용한 식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식기나 숟가락*젓가락에 비해서 한국의 것은 매우 무겁다. 지금이야 식기의 재료가 대부분 도자기이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숟가락과 젓가락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 놋쇠는 구리에 아연을 10~45퍼센트 넣어 만든 것이다. 5,000년 전인 중국의 주(周)나라 때 사람들이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기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한 전통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놋쇠로 된 식기를 가장 고급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놋쇠로 된 식기와 수저를 사용하면 매우 고급스러운 밥상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놋쇠로 만든 식기는 그 값이 비싸서 대신에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많이 사용했다.
놋쇠나 사기로 만든 식기는 각각의 기능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다르다. 밥을 담는 그릇은 보통 주발이라고 부른다. 주발은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을 갖춘 그릇으로, 밥을 많이 담는 데 좋다. 국이나 물을 담는 그릇으로는 대접이 있다. 위가 넓고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뚜껑이 없다. 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장이나 고추장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종지라는 것이 있다. 작은 종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치를 담는 그릇인 보시기는 모양은 대접과 닮았지만,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다.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으로
접시가 있다. 일반적인 반찬을 닮을 때 사용한다.
기와집이나 초가에서나 조선후기 사람들은 보통 겨울에 온돌이 깔린 방에서 밥을 먹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남자 어른들은 소반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 위치는 온돌이 가장 따뜻한 아랫목이었다. 만약 소반에서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경우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겸상할 수 있었다. 교자상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었다. 보통 아랫목은 아버지의 자리이며, 그 옆으로 아들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와 딸들은 별도로 부엌에서 식사를 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 여자들은 숟가락 하나만으로 밥을 먹었다. 식기가 부족했던 당시에 여자들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도 먹으면서 숟가락 손잡이로 김치나
나물 등을 떠서 먹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식사할 때 매우 엄격하게 예법을 지켰다. 당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였던 『소학(小學)』에는 밥을 먹을 때의 예절을 성현들의 교훈을 통해 가르쳤다. 즉 “입에 맛있는 것과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마셔서 배만 채우면 인욕(人慾)에 머물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절도 있게 먹고 마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天理)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은 성욕(性慾)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검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왕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반찬 수를 줄였다. 선비들은 자연과 일치된 삶을 위해서 가능한 적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반가의 식사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문화
출처 : 정연식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 가운데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하루도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먹기 위한 욕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먹는 것을 중시한 듯하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현 오끼나와)에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한말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여러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다. 그 원인을 전통사회의 가난에서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에는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가난한데 어떻게 '늘'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예전의 가난이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유달리 빈곤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의 조선견문기와 러일전쟁 종군 기자였던 맥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그다지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현재로서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체구가 크고 강건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식생활을 당시 사람들로서는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엉성하나마 조각난 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 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 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 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 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 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서울여대 교수)
조선시대 쌀 소비량에 대한 다른 의견
- 조선시대 초기 도량형은 한되가 540ml 정도여서
한끼 7홉은 (540*0.7= 378 ml) 에 불과하다 (1되=1800ml는 일본 도량형입니다.) 조선시대 : 엄청난 쌀에 대한 탐식
쌀
- 쌀 : 우리의 로망이었다
- 쌀소비량 해마다 감소
- 현미가 모든 영양을 갖춘 것은 아니다
밥심으로 산다'고 말하는 민족답게 우리 조상은 밥을 많이 먹었다. 조선후기 기록을 보면 당시 한 끼 식사로 성인 남자 7홉, 여자 5홉, 아동 3홉, 어린아이 2홉을 먹었다. 1홉이 약 180mL니까 남자 어른의 한 끼 밥양이 무려 1260mL, 즉 1.2L나 된다. 콜라나 사이다 따위 탄산음료를 담는 대형 페트병을 가득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물론 당시에는 하루 두 끼가 보통인 데다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이 2홉쯤 먹었다. 그러니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밥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냐'고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 짓는 기술이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났다.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이라는 학자가 쓴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이란 글이 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열두 가지 조건'을 소개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밥을 맛보고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 뺨쳤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일단 밥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밥그릇은 점점 작아져서 요새 식당이나 가정에서 흔히 쓰는 밥공기 용량이 290mL다. 성인 밥 한 그릇이 조선 후기 갓난아기의 그것보다 작다. 최근에는 '반공기 밥그릇'도 나왔다. 이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면 190mL니까 1홉 정도 밥이 담기는 셈이다.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작은 밥공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많이 먹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두 배, 고려시대에는 세 배를 먹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양의 밥을 먹은 셈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가 운영하는 토지박물관이 21일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공기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에 있는 토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이날 막을 연 ‘땅에서 찾아낸 역사’ 특별전에서 이 밥그릇들을 비교전시하고 있다.(031)738-7382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 끼 식사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게 평상시의 식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두 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말이 하루 두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세넷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0~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대식에 관한 이야기는 옛 문헌에도 잘 나와있다.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라는 책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술을 마신다' 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또한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이 외에 임진왜란 때 기록된 '쇄미록'이란 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한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먹는 한공기의 5배는 되는 양의 밥이 된다. 선조들의 특출난 대식에 대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점거한 성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걸 판단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가 너무 오래 견디길래 돌격을 했는데 성에서 발견한 김치 종지 만한 밥그릇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를 보면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선인들의 식사량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66. 3. 7 ~ 3. 30, 안돈이, France)주교
1841년 12월 18일 서품. 1845년 10월 조선 입국.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Daveluy의 기록
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위장에 탄력을 주려고 하는 짓 같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보다 꽉 찼을 때에 비로서 밥 먹이는 것을 중지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공놀이 선수들이 손가락이 안 들어갈 때까지 공을 팽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날고기는 고추장이나 겨자를 곁들여 먹는데 그냥 그대로 먹기도 한다. 한가로운 양반들이 고추장 단지와 낚시도구를 들고 강가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작은 고기를 잡아서 준비해온 고추장에 담갔다가 그대로 먹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맛있다고 말한다. 미각이나 기호에 대해서는 논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양반의 일상과 기호 : 담배와 음식
출처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쓴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밥상에 놓인 음식을 보니,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다. 마침 사진을 찍으면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다.
유기로 만든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국 대접 옆에 놓였다.
사진을 얼핏 보면 요사이 한국인이 밥을 먹는 모습과는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밥과 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이 올려진 밥상은 보통 개다리소반이라고 불린다.
밥상의 다리가 마치 개의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밥상의 크기도 무척 작다. 너비는 32센티미터 정도, 높이는 24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을 때 적당한 크기의 밥상이다.
밥상 위에는 모두 여덟 개의 그릇이 놓여 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가까운 그릇이 제일 크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남자의 왼쪽에는 밥그릇, 오른쪽에는 국그릇이 놓였다. 밥그릇 앞에 김치를 담은 보시기, 간장을 담은 종지, 그리고 장아찌를 담은 보시기가 보인다. 가장 바깥에는 콩자반을 담은 접시, 찌개를 담은 대접, 그리고 나물을 담은 접시 따위가 놓였다.
그런데 여덟 개의 그릇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보통 주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요사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밥그릇과는 완전히 다르다. 높이가 거의 9센티미터, 입의 지름이 거의 13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밥을 담으면 요사이 한국인이 거의 세 끼니에 걸쳐서 먹을 수 있는 밥이 담길 듯하다. 밥그릇보다 더 큰 것이 국그릇이다. 높이는 밥그릇과 비슷하여 거의 9센티미터에 가깝다. 입의 지름은 15센티미터가 넘을 듯하다.
그야말로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당시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피난을 다니면서 쓴 일기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에서는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당시 일부 계층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제목으로 하여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도 들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대개 그들은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식은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 앞의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 역시 당시 조선 사람을 두고 ‘아시아의 대식가’라고 불렀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다식했을까? 사실 그 이유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유구 사람들이 언급한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에 가난하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다. 『조선교회사』를 출간한 가톨릭 신부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조선 사람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오희문의 기록처럼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그로 인해서 쌀 생산에만 온 정성을 다 들이다 보니, 다른 먹을거리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아서 가난하다는 말은 유구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드러난다.
오로지 쌀을 비롯한 곡물로 지은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여겼던 조선 사람들의 습관은 조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 1762~?)이 한글로 지은 중국 기행문집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4권에도 나온다. 월사 이 상공이 명국에 사신으로 들어왔을 때에 한 재상이 날을 기약하여 집으로 찾아오라 하였더니, 기약한 날 그 재상이 공무가 있어 궐내에 들어가고 집안 식구에게 이 상공을 모셔서 그 재상이 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월사가 식전에 그 집에 가니 집안사람들이 그 재상의 말을 전하고 술과 안주로 대접하더니, 날이 늦으니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 고자 하거늘, 또 떡과 과일로 대접하되, 밥을 아직 먹지 못한지라 굳이 가기를 청하니, 집안사람들이 그가 시장할까 하여 오전에 네다섯 번을 음식을 먹이되, 끝내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니, 그 재상이 돌아와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뉘우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하더라.
그림 2 《무오연행록》 제4권 해당부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이 글에 나오는 월사는 바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를 가리킨다. 이 일화는 밥을 먹을거리 중에서 가장 으뜸에 두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준다. 다른 음식이 많더라도 곡물로 된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상 제사를 지낼 때 밥을 으뜸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지는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하지만 송나라 때 중국의 한족들은 곡물로 지은 밥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면(麵)도 먹었다. 당연히 주자의 《가례》에서도 조상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밀은 여름 기후가 20도 이상이 되면 자라지
않는다. 품종개량을 하지 않았던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쌀에대한 절대적 믿음은 급여나 세금으로 쌀이 쓰이도록 만들었다. 곧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천도굿인 지노귀굿이나 새남굿에서도 조상 혼령에게는 반드시 쌀밥을 올린다.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신령에게도 햅쌀이 나오면 그것으로 신체(神體)를 만들어서 대들보에 매달아둔다. 쌀은 조상이면서 동시에 산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림2. 『시의전서․음식방문』에 담긴 양반의 반상차림
조선시대 부자 양반들은 많은 양의 쌀밥을 중심에 두고 국을 함께 먹으면서 반찬은 적게 먹었다. 하지만 어떤 규칙으로 밥상을 차렸는지에 대해서 적은 오래된 문헌은 많지 않다. 현재까지는 한글로 직접 쓴 『시의전서(是議全書)․음식방문(飮食方文)』이라는 책이 최초로 밥상 차림을 적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1919년에 심환진(沈晥鎭)이란 사람이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양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조리서를 빌려서 필사를 해 둔 것이었다. 후에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 여사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고인이 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되어 1970년대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은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를 했던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이 1915년에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요리서 하나를 빌려서 괘지에 필사해둔 것이다.
그림 3 『시의전서․음식방문』 상권 목차
이 필사본 괘지에는 ‘대구인쇄합자주식회인행((大邱印刷合資會社印行)’이란 글자와 ‘상주군청(尙州郡廳)’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구인쇄합자주식회사는 1911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대구에서 설립된 회사로 알려진다. 이로 미루어 이 필사본은 대략 1911년 이후부터 심환진이 상주군수에서 칠곡군수로 임지를 옮기는 192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환진은 필사된 『시의전서․음식방문』을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에게 주었다. 홍정은 탐구당 설립자 고 홍석우(洪錫禹, 1919~2007)의 고모로 고 이성우 교수는 홍사장에게서 이 책을 소개받아 세상에 알렸다. 최근에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어느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시의전서․음식방문』의 말미에는 ‘반상식도’가 나온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 칠첩반상․ 오첩반상․ 곁상․ 술상․ 신선로상․ 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서 첩이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을 가리킨다. 그런데 5첩 밥상이라고 하면 밥․국․김치․젓갈․ 초장․간장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이들 음식만 차려도 밥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기본 밥상 차림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 기본 음식 외에 세 가지의 반찬을 올렸으면 3첩, 다섯 가지를 올렸으면 5첩, 일곱 가지를 올렸으면 7첩, 아홉 가지를 올렸으면 9첩이 된다.
『시의전서』에 나와 있는 5첩 밥상에 올랐던 음식을 한 번 살펴보자. 밥․국이 가장 안쪽에 놓였다. 가운데는 조치․간장․초장이 놓였다. 그 바깥으로는 왼쪽에서부터 젓갈․자반․김치․나물․육숙․구이가 차려졌다. 당시에 즐겨먹었던 젓갈로는 조개젓과 명란젓이 있었다. 자반은 생선 혹은 콩․미역․김․쇠고기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든 반찬을 가리킨다. 김치는 매우와 무를 간장에 절인 장김치가 올랐을 가능성이 많다. 나물은 호박나물이나 고사리나물 따위가 인기였다. 육숙은 육고기나 생선을 삶거나 찐 음식이다. 아마도 족편이나 붕어찜이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구이는 생선을 석쇠에 구운 음식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게구이․청어구이․조기구이 따위를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러한 밥상 차림의 격식은 고대 중국인들의 식사방식을 도입한 데서 유래한다. 주나라 때의 천자는 아홉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천자 아래의 대부(大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일곱 개, 그 아래의 경(卿)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다섯 개, 그리고 가장 아래에 있던 사(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세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학에서 계층마다 음식을 차리는 데도 등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19세기 이후 조선의 밥상 차림으로 자리를 잡았던 3․5․7․9첩 밥상차림도 유학의 예법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만큼 조선후기의 일상식사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그림 5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1
-구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전유어, 숙육, 김치, 회, 나물, 쌈, 생선구이,
육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양조치, 생선조치, 맑은조치)
-칠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회, 김치, 숙육, 나물, 쌈, 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토장조치, 맑은조치)
그림 6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2
3. 양반의 식사, 엄숙한 시간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을 때 반찬을 옮기는 도구로는 젓가락이 편리하다. 일본인의 경우, 밥을 먹기 전에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가서 그릇째 마신 다음에 다시 밥그릇을 손에 들고 밥을 먹는다. 그러니 그들은 굳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하다. 이에 비해 국이나 찌개와 같은 국물음식을 밥과 함께 입에 넣고서 먹는 한국인에게는 숟가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까지 일본의 쌀밥처럼 차진 성분이 적고, 쌀밥과 함께 각종 거친 잡곡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숟가락을 이용하여 밥을 떠먹어야 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 한국인에게 숟가락은 밥과 국을 입으로 옮기는데 매우 유용한 식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식기나 숟가락*젓가락에 비해서 한국의 것은 매우 무겁다. 지금이야 식기의 재료가 대부분 도자기이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숟가락과 젓가락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 놋쇠는 구리에 아연을 10~45퍼센트 넣어 만든 것이다. 5,000년 전인 중국의 주(周)나라 때 사람들이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기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한 전통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놋쇠로 된 식기를 가장 고급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놋쇠로 된 식기와 수저를 사용하면 매우 고급스러운 밥상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놋쇠로 만든 식기는 그 값이 비싸서 대신에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많이 사용했다.
놋쇠나 사기로 만든 식기는 각각의 기능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다르다. 밥을 담는 그릇은 보통 주발이라고 부른다. 주발은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을 갖춘 그릇으로, 밥을 많이 담는 데 좋다. 국이나 물을 담는 그릇으로는 대접이 있다. 위가 넓고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뚜껑이 없다. 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장이나 고추장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종지라는 것이 있다. 작은 종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치를 담는 그릇인 보시기는 모양은 대접과 닮았지만,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다.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으로
접시가 있다. 일반적인 반찬을 닮을 때 사용한다.
기와집이나 초가에서나 조선후기 사람들은 보통 겨울에 온돌이 깔린 방에서 밥을 먹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남자 어른들은 소반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 위치는 온돌이 가장 따뜻한 아랫목이었다. 만약 소반에서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경우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겸상할 수 있었다. 교자상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었다. 보통 아랫목은 아버지의 자리이며, 그 옆으로 아들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와 딸들은 별도로 부엌에서 식사를 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 여자들은 숟가락 하나만으로 밥을 먹었다. 식기가 부족했던 당시에 여자들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도 먹으면서 숟가락 손잡이로 김치나
나물 등을 떠서 먹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식사할 때 매우 엄격하게 예법을 지켰다. 당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였던 『소학(小學)』에는 밥을 먹을 때의 예절을 성현들의 교훈을 통해 가르쳤다. 즉 “입에 맛있는 것과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마셔서 배만 채우면 인욕(人慾)에 머물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절도 있게 먹고 마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天理)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은 성욕(性慾)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검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왕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반찬 수를 줄였다. 선비들은 자연과 일치된 삶을 위해서 가능한 적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반가의 식사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문화
출처 : 정연식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 가운데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하루도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먹기 위한 욕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먹는 것을 중시한 듯하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현 오끼나와)에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한말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여러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다. 그 원인을 전통사회의 가난에서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에는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가난한데 어떻게 '늘'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예전의 가난이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유달리 빈곤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의 조선견문기와 러일전쟁 종군 기자였던 맥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그다지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현재로서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체구가 크고 강건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식생활을 당시 사람들로서는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엉성하나마 조각난 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 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 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 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 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 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서울여대 교수)
조선시대 쌀 소비량에 대한 다른 의견
- 조선시대 초기 도량형은 한되가 540ml 정도여서
한끼 7홉은 (540*0.7= 378 ml) 에 불과하다 (1되=1800ml는 일본 도량형이다.)
밥심으로 산다'고 말하는 민족답게 우리 조상은 밥을 많이 먹었다. 조선후기 기록을 보면 당시 한 끼 식사로 성인 남자 7홉, 여자 5홉, 아동 3홉, 어린아이 2홉을 먹었다. 1홉이 약 180mL니까 남자 어른의 한 끼 밥양이 무려 1260mL, 즉 1.2L나 된다. 콜라나 사이다 따위 탄산음료를 담는 대형 페트병을 가득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물론 당시에는 하루 두 끼가 보통인 데다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이 2홉쯤 먹었다. 그러니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밥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냐'고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 짓는 기술이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났다.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이라는 학자가 쓴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이란 글이 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열두 가지 조건'을 소개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밥을 맛보고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 뺨쳤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일단 밥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밥그릇은 점점 작아져서 요새 식당이나 가정에서 흔히 쓰는 밥공기 용량이 290mL다. 성인 밥 한 그릇이 조선 후기 갓난아기의 그것보다 작다. 최근에는 '반공기 밥그릇'도 나왔다. 이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면 190mL니까 1홉 정도 밥이 담기는 셈이다.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작은 밥공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동아시아를 제패한 원동력은 ‘밥심’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밥을 네 배나 더 많이 먹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두 배, 고려시대에는 세 배를 먹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많은 양의 밥을 먹은 셈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가 운영하는 토지박물관이 21일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밥그릇과 요즘 쓰는 밥공기에 각각 쌀을 담아 무게를 비교한 결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흔히 쓰이는 밥공기에는 350g의 쌀이 들어갔다. 그런데 고구려시대 밥그릇을 채우는 데는 1300g이 필요했다. 네 배 가까운 분량이다. 고려시대 밥주발에는 1040g, 조선시대 밥사발에는 690g의 쌀이 들어갔다. 물론 실제로 밥을 지을 때 필요한 쌀은 이보다 적을 것이다.
시대별 밥그릇 크기의 비교는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군사기지 유적인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6∼7세기 토기 밥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시대 밥그릇은 개성에서 출토된 것을 사들인 12∼13세기 청동주발, 조선시대 것은 역시 토지박물관이 최근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하면서 완전한 형태로 찾아낸 19세기 백자 밥사발을 비교에 이용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남자는 한 끼에 7홉을 먹고 여자는 5홉, 아이는 3홉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어른이 한 끼에 420㎣ 정도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이 되는 분량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말기에 찾아온 서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밥의 양을 보고 조선을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에 있는 토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이날 막을 연 ‘땅에서 찾아낸 역사’ 특별전에서 이 밥그릇들을 비교전시하고 있다.(031)738-7382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 끼 식사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식사를 지칭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이 중에 유독 점심만 한자어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는 게 평상시의 식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 이후로부터 보통사람들은 하루 두 끼, 귀족 등의 부유층은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고, 이 식습관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말이 하루 두끼지 선조들은 그 사이에 소량의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를 가거나 농사를 지을 때는 엄청난 참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농부 세넷이서 점심에 잠시 쉴 때 간식거리로 복숭아 20~25개를 껍질째 우적우적 먹곤 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대식에 관한 이야기는 옛 문헌에도 잘 나와있다.
조선시대의 책인 "용재총화"라는 책에서는 그 당시 식습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책 내용에서 '가난뱅이는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어대고, 군사들은 행군시 군량짐이 반을 차지하며, 관료들은 수시로 모여 술을 마신다' 라고 비판한 부분이 있다. 또한 조선 전기 훈구파의 대표주자인 이극돈은 조선 백성들의 식습관에 관련한 상소를 올려 '풍년이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중국 사람이 하루 먹을 분량을 한 번에 먹어치우니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이 외에 임진왜란 때 기록된 '쇄미록'이란 책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식습관에 대해 설명이 나와있다.
쇄미록에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한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먹는 한공기의 5배는 되는 양의 밥이 된다. 선조들의 특출난 대식에 대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점거한 성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걸 판단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가 너무 오래 견디길래 돌격을 했는데 성에서 발견한 김치 종지 만한 밥그릇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쯤에 한국에 머문 다블뤼 주교의 이야기를 보면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선인들의 식사량을 체감할 수 있게 된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소를 잡을 일이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66. 3. 7 ~ 3. 30, 안돈이, France)주교
1841년 12월 18일 서품. 1845년 10월 조선 입국.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Daveluy의 기록
조선인들은 투박한 탐식과 식욕을 가진 대식가이다. 평소 그들의 식사방법이 이를 잘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는 대신이건 평민이건 구별이 없다. 많이 먹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며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조선인들은 식사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사하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수다를 떨지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이의 위장에 탄력을 주려고 하는 짓 같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보다 꽉 찼을 때에 비로서 밥 먹이는 것을 중지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공놀이 선수들이 손가락이 안 들어갈 때까지 공을 팽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식사량은 1리터의 쌀밥으로 이는 아주 큰 사발을 꽉 채운다. 각자가 한 사발씩을 다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으며 계속 먹을 준비가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2,3인분 이상을 쉽게 먹어치운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 가량되는데 그는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이것은 그가 마신 막걸리 사발의 수는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64세에서 65세가 다 된 어떤 사람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5사발을 비웠다. 10사발을 감당할 때 장사라고 말한다.
소를 잡을 일이 있어 쇠고기가 마음껏 제공되면 아무도 고기로 꽉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할 경우, 예를 들어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도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치우기도한다.
누군가를 잘 대접해야 할 때는 닭 한마리를 통째로 내놓는다.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각자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쇠고기나 개고기도 큼직하게 썰어서 양껏 내놓는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었다고 여긴다. 특히 곱창과 생선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이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이 이를 식탁에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보자마자 먹어치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자제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람들의 집에는 비축식량이 없으며 손에 넣는 즉시 먹어치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장이나 식량창고가 없으므로 음식을 보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나라는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음식물이 금방 부패한다.
날고기는 고추장이나 겨자를 곁들여 먹는데 그냥 그대로 먹기도 한다. 한가로운 양반들이 고추장 단지와 낚시도구를 들고 강가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작은 고기를 잡아서 준비해온 고추장에 담갔다가 그대로 먹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맛있다고 말한다. 미각이나 기호에 대해서는 논쟁할 일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대식가이기는 하지만 늘 그렇게 많은 양을 먹지는 못한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이나 영의정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양반의 일상과 기호 : 담배와 음식
출처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속학)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쓴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밥상에 놓인 음식을 보니,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다. 마침 사진을 찍으면서 숟가락에 밥을 담아 오른손으로 쥐고 있다.
유기로 만든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국 대접 옆에 놓였다.
사진을 얼핏 보면 요사이 한국인이 밥을 먹는 모습과는 비슷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밥과 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이 올려진 밥상은 보통 개다리소반이라고 불린다.
밥상의 다리가 마치 개의 다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밥상의 크기도 무척 작다. 너비는 32센티미터 정도, 높이는 24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을 때 적당한 크기의 밥상이다.
밥상 위에는 모두 여덟 개의 그릇이 놓여 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가까운 그릇이 제일 크다.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남자의 왼쪽에는 밥그릇, 오른쪽에는 국그릇이 놓였다. 밥그릇 앞에 김치를 담은 보시기, 간장을 담은 종지, 그리고 장아찌를 담은 보시기가 보인다. 가장 바깥에는 콩자반을 담은 접시, 찌개를 담은 대접, 그리고 나물을 담은 접시 따위가 놓였다.
그런데 여덟 개의 그릇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보통 주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요사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밥그릇과는 완전히 다르다. 높이가 거의 9센티미터, 입의 지름이 거의 13센티미터에 이른다. 여기에 밥을 담으면 요사이 한국인이 거의 세 끼니에 걸쳐서 먹을 수 있는 밥이 담길 듯하다. 밥그릇보다 더 큰 것이 국그릇이다. 높이는 밥그릇과 비슷하여 거의 9센티미터에 가깝다. 입의 지름은 15센티미터가 넘을 듯하다.
그야말로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큰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는 당시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피난을 다니면서 쓴 일기인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에서는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당시 일부 계층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제목으로 하여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도 들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대개 그들은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다식은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 앞의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왔던 프랑스 선교사 역시 당시 조선 사람을 두고 ‘아시아의 대식가’라고 불렀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다식했을까? 사실 그 이유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유구 사람들이 언급한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회가 절대 빈곤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전근대 시기에 가난하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먹었다. 『조선교회사』를 출간한 가톨릭 신부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는 조선 사람들의 대식과 식탐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오희문의 기록처럼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그로 인해서 쌀 생산에만 온 정성을 다 들이다 보니, 다른 먹을거리를 제대로 생산하지 않아서 가난하다는 말은 유구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드러난다.
오로지 쌀을 비롯한 곡물로 지은 밥을 먹어야 식사를 했다고 여겼던 조선 사람들의 습관은 조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 1762~?)이 한글로 지은 중국 기행문집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4권에도 나온다. 월사 이 상공이 명국에 사신으로 들어왔을 때에 한 재상이 날을 기약하여 집으로 찾아오라 하였더니, 기약한 날 그 재상이 공무가 있어 궐내에 들어가고 집안 식구에게 이 상공을 모셔서 그 재상이 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월사가 식전에 그 집에 가니 집안사람들이 그 재상의 말을 전하고 술과 안주로 대접하더니, 날이 늦으니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 고자 하거늘, 또 떡과 과일로 대접하되, 밥을 아직 먹지 못한지라 굳이 가기를 청하니, 집안사람들이 그가 시장할까 하여 오전에 네다섯 번을 음식을 먹이되, 끝내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니, 그 재상이 돌아와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뉘우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하더라.
그림 2 《무오연행록》 제4권 해당부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이 글에 나오는 월사는 바로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정구(李廷龜,1564~1635)를 가리킨다. 이 일화는 밥을 먹을거리 중에서 가장 으뜸에 두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준다. 다른 음식이 많더라도 곡물로 된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상 제사를 지낼 때 밥을 으뜸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지는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하지만 송나라 때 중국의 한족들은 곡물로 지은 밥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면(麵)도 먹었다. 당연히 주자의 《가례》에서도 조상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밀은 여름 기후가 20도 이상이 되면 자라지
않는다. 품종개량을 하지 않았던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쌀에대한 절대적 믿음은 급여나 세금으로 쌀이 쓰이도록 만들었다. 곧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천도굿인 지노귀굿이나 새남굿에서도 조상 혼령에게는 반드시 쌀밥을 올린다.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신령에게도 햅쌀이 나오면 그것으로 신체(神體)를 만들어서 대들보에 매달아둔다. 쌀은 조상이면서 동시에 산 사람의 생명이었다.
그림2. 『시의전서․음식방문』에 담긴 양반의 반상차림
조선시대 부자 양반들은 많은 양의 쌀밥을 중심에 두고 국을 함께 먹으면서 반찬은 적게 먹었다. 하지만 어떤 규칙으로 밥상을 차렸는지에 대해서 적은 오래된 문헌은 많지 않다. 현재까지는 한글로 직접 쓴 『시의전서(是議全書)․음식방문(飮食方文)』이라는 책이 최초로 밥상 차림을 적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1919년에 심환진(沈晥鎭)이란 사람이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양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조리서를 빌려서 필사를 해 둔 것이었다. 후에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 여사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고인이 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되어 1970년대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은 대한제국 때부터 관료를 했던 심환진(沈晥鎭, 1872~1951)이 1915년에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요리서 하나를 빌려서 괘지에 필사해둔 것이다.
그림 3 『시의전서․음식방문』 상권 목차
이 필사본 괘지에는 ‘대구인쇄합자주식회인행((大邱印刷合資會社印行)’이란 글자와 ‘상주군청(尙州郡廳)’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구인쇄합자주식회사는 1911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대구에서 설립된 회사로 알려진다. 이로 미루어 이 필사본은 대략 1911년 이후부터 심환진이 상주군수에서 칠곡군수로 임지를 옮기는 192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심환진은 필사된 『시의전서․음식방문』을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1955)에게 주었다. 홍정은 탐구당 설립자 고 홍석우(洪錫禹, 1919~2007)의 고모로 고 이성우 교수는 홍사장에게서 이 책을 소개받아 세상에 알렸다. 최근에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어느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시의전서․음식방문』의 말미에는 ‘반상식도’가 나온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 칠첩반상․ 오첩반상․ 곁상․ 술상․ 신선로상․ 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서 첩이란 뚜껑이 있는 반찬 그릇을 가리킨다. 그런데 5첩 밥상이라고 하면 밥․국․김치․젓갈․ 초장․간장은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이들 음식만 차려도 밥을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기본 밥상 차림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이 기본 음식 외에 세 가지의 반찬을 올렸으면 3첩, 다섯 가지를 올렸으면 5첩, 일곱 가지를 올렸으면 7첩, 아홉 가지를 올렸으면 9첩이 된다.
『시의전서』에 나와 있는 5첩 밥상에 올랐던 음식을 한 번 살펴보자. 밥․국이 가장 안쪽에 놓였다. 가운데는 조치․간장․초장이 놓였다. 그 바깥으로는 왼쪽에서부터 젓갈․자반․김치․나물․육숙․구이가 차려졌다. 당시에 즐겨먹었던 젓갈로는 조개젓과 명란젓이 있었다. 자반은 생선 혹은 콩․미역․김․쇠고기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기름에 튀겨서 만든 반찬을 가리킨다. 김치는 매우와 무를 간장에 절인 장김치가 올랐을 가능성이 많다. 나물은 호박나물이나 고사리나물 따위가 인기였다. 육숙은 육고기나 생선을 삶거나 찐 음식이다. 아마도 족편이나 붕어찜이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구이는 생선을 석쇠에 구운 음식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게구이․청어구이․조기구이 따위를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러한 밥상 차림의 격식은 고대 중국인들의 식사방식을 도입한 데서 유래한다. 주나라 때의 천자는 아홉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천자 아래의 대부(大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일곱 개, 그 아래의 경(卿)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다섯 개, 그리고 가장 아래에 있던 사(士) 벼슬에 있던 사람들은 세 개의 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학에서 계층마다 음식을 차리는 데도 등급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19세기 이후 조선의 밥상 차림으로 자리를 잡았던 3․5․7․9첩 밥상차림도 유학의 예법에서 개발된 것이다. 그만큼 조선후기의 일상식사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그림 5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1
-구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전유어, 숙육, 김치, 회, 나물, 쌈, 생선구이,
육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양조치, 생선조치, 맑은조치)
-칠첩반상
(바깥 아래에서 왼쪽으로 : 반, 젓갈, 자반, 회, 김치, 숙육, 나물, 쌈, 구이, 갱)
(안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 초장, 겨자, 지렁(간장), 토장조치, 맑은조치)
그림 6 『시의전서․음식방문』 반상식도2
3. 양반의 식사, 엄숙한 시간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을 때 반찬을 옮기는 도구로는 젓가락이 편리하다. 일본인의 경우, 밥을 먹기 전에 국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입으로 가지고 가서 그릇째 마신 다음에 다시 밥그릇을 손에 들고 밥을 먹는다. 그러니 그들은 굳이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하다. 이에 비해 국이나 찌개와 같은 국물음식을 밥과 함께 입에 넣고서 먹는 한국인에게는 숟가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까지 일본의 쌀밥처럼 차진 성분이 적고, 쌀밥과 함께 각종 거친 잡곡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숟가락을 이용하여 밥을 떠먹어야 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지 않는 한국인에게 숟가락은 밥과 국을 입으로 옮기는데 매우 유용한 식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식기나 숟가락*젓가락에 비해서 한국의 것은 매우 무겁다. 지금이야 식기의 재료가 대부분 도자기이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숟가락과 젓가락은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 놋쇠는 구리에 아연을 10~45퍼센트 넣어 만든 것이다. 5,000년 전인 중국의 주(周)나라 때 사람들이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기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한 전통을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놋쇠로 된 식기를 가장 고급으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지금도 놋쇠로 된 식기와 수저를 사용하면 매우 고급스러운 밥상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놋쇠로 만든 식기는 그 값이 비싸서 대신에 도자기로 만든 식기를 많이 사용했다.
놋쇠나 사기로 만든 식기는 각각의 기능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다르다. 밥을 담는 그릇은 보통 주발이라고 부른다. 주발은 위가 약간 벌어지고 뚜껑을 갖춘 그릇으로, 밥을 많이 담는 데 좋다. 국이나 물을 담는 그릇으로는 대접이 있다. 위가 넓고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뚜껑이 없다. 사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장이나 고추장 따위를 담는 그릇으로 종지라는 것이 있다. 작은 종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치를 담는 그릇인 보시기는 모양은 대접과 닮았지만,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다. 밑바닥의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으로
접시가 있다. 일반적인 반찬을 닮을 때 사용한다.
기와집이나 초가에서나 조선후기 사람들은 보통 겨울에 온돌이 깔린 방에서 밥을 먹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경우, 남자 어른들은 소반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 위치는 온돌이 가장 따뜻한 아랫목이었다. 만약 소반에서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경우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겸상할 수 있었다. 교자상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밥을 먹었다. 보통 아랫목은 아버지의 자리이며, 그 옆으로 아들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와 딸들은 별도로 부엌에서 식사를 했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다. 당시 여자들은 숟가락 하나만으로 밥을 먹었다. 식기가 부족했던 당시에 여자들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도 먹으면서 숟가락 손잡이로 김치나
나물 등을 떠서 먹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식사할 때 매우 엄격하게 예법을 지켰다. 당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덕 교과서였던 『소학(小學)』에는 밥을 먹을 때의 예절을 성현들의 교훈을 통해 가르쳤다. 즉 “입에 맛있는 것과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마셔서 배만 채우면 인욕(人慾)에 머물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절도 있게 먹고 마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天理)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은 성욕(性慾)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검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왕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반찬 수를 줄였다. 선비들은 자연과 일치된 삶을 위해서 가능한 적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반가의 식사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문화
출처 : 정연식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 가운데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하루도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먹기 위한 욕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먹는 것을 중시한 듯하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현 오끼나와)에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한말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여러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다. 그 원인을 전통사회의 가난에서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에는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가난한데 어떻게 '늘'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예전의 가난이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유달리 빈곤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의 조선견문기와 러일전쟁 종군 기자였던 맥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그다지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현재로서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체구가 크고 강건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식생활을 당시 사람들로서는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엉성하나마 조각난 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 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 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 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 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 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서울여대 교수)
조선시대 쌀 소비량에 대한 다른 의견
- 조선시대 초기 도량형은 한되가 540ml 정도여서
한끼 7홉은 (540*0.7= 378 ml) 에 불과하다 (1되=1800ml는 일본 도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