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꺼졌다
하는 이것이 바로 생사ㄴ데, 보통 생사라 하면
이 몸띵이를 부모를 통해서 받아나면 그것을 생이라
하고, 또 한 평생 살다가 죽게 되면 그것을 사라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 생사의 의미는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보기보다는 그 근원인 생각,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생사를 관찰을
해야 참으로 올바르게 생사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사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그 뿌리를 살펴보면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생각으로 인해서 육체의 생사도 받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가,
아무 까닭 없이 한 생각이 일어났어.
눈으로 무엇을 보면 그것을 동기로 해서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 그것을 통해서 생각이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띵이로 ‘차다’ ‘덥다’ 느끼면 그런 감각을 통해서도 우리의 생각은 일어나게
됩니다.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십팔계가 벌어지는데,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원인이 되아서 육체의 생사를 받는다’ 했지마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자체가 생사인 것입니다.
그 생사의 자체인 그 근본을 요달을 허며는
우리는 설사 육체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육체로 이 세상에서 죽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가 아니고
생사해탈에 경계고 열반에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외도들은
이 육체를 가지고 이백 년삼백 년 내지 천 년 이천 년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방법을 연구를 하고 그러헌 목적으로 노력을 허는데
그것이 바로 외도에 도라 하는 것이고,
우리 불법은
이 육체를 가지고 장생불사를 도모허는 것이 아니라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바로 거기서 생사없는 도리를
깨닫는 거,
그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정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승에 있어서는
그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심을 어쨌든지
그 끊을랴고, 끊어가지고 열반을 증득헐랴고 노력을 허는 것이 그 소승에 생사관인데, 이 대승법에 있어서는,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사를 일단 인증을 하고 그래가지고
그 생사를 끊을랴고 허는 것이 아니라,
생사자체가 본래 없다 그 말이여.
생사자체가 본래 없다’고 믿고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그러면 ‘왜 생사가 있는데 왜 생사가 없다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비유를 들어서 말을 허자면,
눈병이 난 사람은, 안질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나있기 때문에
이 허공 속에 꽃 같은 것이 서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눈병을 치료허고 나서 보며는
허공 속에 허물거린... 서물거리고 있는 꽃, 꽃이 보이지를 않게 되거든. 그러면 눈병이 났을 때 그 눈병 난 그 환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서물거리고 있는 것처럼,
허공에 꽃이 서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지는 그 허공에 꽃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눈병이 완치가 된 다음에 그 꽃이 없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는 없어진 것도 아니다
그 말이여.
본래 없는데 무엇이 없어질 까닭이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러면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허느냐? ‘
중생이 고해에 빠져서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으니 그것이 가엾어서 그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탄생을 하셨다.’
이렇게 표현을 허는데,
중생을 건지는 것이 아니여.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물에 빠져서 물을 빠...
꿀꺽 꿀꺽 마시면서 허우적대고 있는 그 중생을 가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생사다’ ‘열반이다’ 허고 느끼는
그 중생의 그 소견
잘못된 소견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탄생을 허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표현을 해야 똑바로 표현을 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데 생사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 자기가 스스로 착각한 그 생사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에 ‘생사라 하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하는 바로 그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이 사바세계에 탄생허셨다고 말을 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사가 없다고 일러주어도
중생에게는 분명히 생사가 있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고
일러주어도 믿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허공 속에
이글이... 그 한량없는 허공에 꽃이 서물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데 없다고 해도 곧이를 안 듣거든.
그 눈병을 고쳐주듯이,
생사가 있는 거처럼 착각을 하고 또 열반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그 소견을 바로잡아주는,
바로잡는 방법이 이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구참선과 활구참선두 가지로 말을 헐 수가 있는데
, 사구참선, ‘죽을 사’자(‘死’字) ‘글귀 구’자(‘句’字)
사구참선은
말길이 있어. 또 이치길이 있어.
또 이렇게 더듬어서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듣고 알고 생각하고 허는 그러헌 것이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사구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은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다면
벌써 그것이 사구선이요 말길이 있으면 그것이 사구선이요 이치길이 있으면 그것이 사구참선이여.
사구참선은 미륵불이 하생헐 때까지
밤잠을 안자고 밥을 굶으면서 헌다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고,
활구참선을 해야만 확철대오를 해서 견성성불허는
것이다 그 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