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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7 / 선택이 결과를 가져온다 (룻1:14-18)
교회를 잘 다니던 부부가 어느 주일날인가는 교회 가기 전에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남편이 지금 같아서는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라면서 골프채 챙겨 들고는 나가버렸습니다.
한참 골프를 치는데 갑작스레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남편이 들고 있던 골프채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손에 화상만 입은 채 정밀 검사차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입원한 남편에 대한 부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이런 경우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아내가 ‘여보! 많이 놀랐지요? 내가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라고 하게 되면 남편 역시나 ‘당신이 무슨 잘못이오. 내가 성질부리느라 주일에 딴짓하다가 이리된 거지.’라고 하며 다퉜던 부부 사이가 화해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아내가 대뜸 ‘거봐요. 주일날 혈기나 부리고 예배드릴 시간에 골프나 치고 있으니 벌을 받는 거예요.’라고 하게 되면 언뜻 듣기엔 신앙이 좋아서 하는 말 같지만, 실상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말로 사랑의 하나님이 졸지에 벌 주시는 공포의 하나님이 돼버리셨고 남편 역시 스스로가 마음에 찔림을 받던 차에 아예 죄의식에 던져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주위엔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한 번쯤은 따끔하게 지적을 해줘야 할 만한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지적을 받아서 고쳐지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분란을 발생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적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테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적을 하자니 그 역시 고민이고, 안 하자니 그 또한 고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됐든 고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나요?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하는 것이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향해서든 ‘지적은 하나님께’. 그리고 당사자에겐 ‘덕을 베푸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여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하실 일을 내가 그에게 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신앙적으로는 그럴듯한 말들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하실 지적을 자기들이 ‘지적질’했기에 그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과 관련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실을 지적하는 나는 누군가로부터 지적받을 일은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내로남불은 금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6:1에서 말하기를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던 겁니다.
사는 중에 혹여라도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기는 때라고 하면 힘들어만 하고 하나님께 서운해 하지만 마시고 ‘혹 이때가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서라고 지적하시는 때인가?’라든지, ‘이 일이 혹시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라시는 지적이신가?’라는 생각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생각 속에서는 ‘하나님의 지적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성경에서도 내게 되어진 불행을 하나님의 지적인 줄로 깨닫고 그때라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기록한 책이 오늘 본문의 룻기입니다.
특히 룻기 1장에서는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불행에 처하게 되며, 다시 어떻게 행복을 찾게 되는지에 대한 교훈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어려운 순간에도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선 1절을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말로 본 장을 시작했는지. 이제쯤은 다들 아시지요?
사사시대엔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했습니까?
‘믿음으로’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들 살아가던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다음은 짐작이 되시나요?
흉년에 대처하여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 엘리멜렉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이라 했는데 축복의 땅인데도 흉년이 들더라는 겁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게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흉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실패나 어려운 일, 억울하거나 안 풀리는 일이 아주 없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의 길에도 그런 것들은 있겠지마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살다 보면 흉년도 만나겠지만 흉년 중에라도 하나님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영어로 황금이 뭡니까?
‘G.O.L.D.’ 골드입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단어 중에 왜 황금을 골드라고 했을까요?
누군가 책에 쓰기를 사탄이 사람들에게서 GOD 즉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 GOD에 한 글자를 쓸쩍 끼워 넣어 만든 GOLD 즉 황금이라는 겁니다. 그랬기에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신이라고 만든 금송아지도 재료가 황금이었고,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이 황금으로 유혹했던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선택에 있어서 GOD냐? GOLD냐로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어땠습니까?
자신들에겐 은과 금이 아니라 하나님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믿었기에 기적을 선포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본문에서 갓 대신 골드를 택했던 엘리멜렉의 결국을 보며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사노라면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실수로 그냥 놔두면 결국엔 실패가 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실수했을지라도, 비록 내가 실패했다 해도 내 모습, 내 형편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께는 언제든 성공만 있고 복만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이런 믿음이 우리 인생을 엘리멜렉이 아닌 나오미의 결과로 이어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엘리멜렉의 아내로 흉년 때 남편을 따라 본의 아니게 하나님을 떠났던 나오미였지만, 남편이 죽고 난 후 자의로 결정할 때가 되자 그녀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있을 때 잘해’란 말을 하는데,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아직은 내게 다소나마 물질이 있고, 행복이 있고, 건강이 있고 힘이 있을 때 하나님 잘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있는 게 전혀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있거나 없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나에겐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또 사람들은 말하기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라고 하면서 건강만은 잃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 보지만 그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기에 안 되는 걸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오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세상적으로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안 되면, 그래서 맨 마지막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다행인데 본문을 보면 선택과 관련해서 나오미의 두 며느리 즉 오르바와 룻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선택의 순간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어땠다고 했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선택하여 세상 쪽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둘째 며느리 룻은 어땠나요?
역시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햇습니다. 그러나 오르바와 다른 게 있다고 하면 룻이 옳다고 여긴 소견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매사를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되 여러분이 옳다고 여기는 소견들이 항상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우린 인생에서 전부를 얻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생 흉년의 때에도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 흉년의 때에 오히려 믿음을 버립니다. 사실은 그때야말로 믿음이 필요한 때인데도 하필이면 그럴 때 믿음을 버리거나 믿음이 약해집니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이 잃게 되면 그때부터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것 같아도 결국엔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이시지만, 사탄은 넘어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봉독하진 않았지만, 본 장 1절과 2절의 각 마지막 단어를 보면 ‘거류하였더니’와 ‘살더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같은 말 같지만, 원어의 의미로 보면 ‘거류한다’는 말은 ‘잠시 거처를 정하여 지낸다.’는 말로 엘리멜렉도 처음엔 ‘다시 돌아가야지.’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면 그 단어가 ‘살더니’라는 말로 바뀝니다. 잠시 살려고 갔다가 완전히 그곳에 주저앉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처음에는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늘 ‘믿을 건가, 말 건가’를 결정하는 한순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처음엔 다들 ‘잠깐만’이나, ‘한 번 정도는’이지만, 세상이 그렇지를 않습니다. 늘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있는 게 세상살입니다.
엘리멜렉도 잠깐만 있겠다고 한 선택이지만 잠깐이 뭔가요? 그 잠깐 중에 졸지에 자신이 죽게 되고 두 아들 말론과 기론도 죽고 맙니다.
결국 세 명의 여자만이 한순간에 불행하게 남게 되었는데, 이때 나오미는 그 상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21절을 보세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아시지요? 하나님이 나오미네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평탄한 길이라면, 세상이 인도하는 길은 늘 롤러코스터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랬기에 나오미의 불행이 하나님 때문은 아닌 겁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곤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복이 있지만, 세상에선 매번 복불복이란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 산다고 늘 불행만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잘 풀리고 잘 살게도 되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사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기 위한 작전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탄에게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작전으로 크게 ‘시험과 유혹’이라는 두 가지가 있는데, 누구에게 어떤 것을 적용할지는 사탄만이 알 뿐입니다. 그렇다 보니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시험은 잘 이겨낸 사람이 유혹엔 덜컥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믿었어도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이겁니다. 신앙과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사는 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언제든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영향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세상이 나에게서 자기들 것인 양 다 뺏어 간다고 할지라도 내게서 절대 빼앗지 못하는 한 가지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려 하든 매 순간 확인해야 할 것이 ‘내가 어디 있는가?’ 내지는 ‘내가 어디로 가려 하는가?’를 묻기 전에 먼저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가?’라든가 ‘내가 가려는 곳에 하나님도 가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묻기만 하면 다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었는데 나 있는 곳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거나, 내가 가는 곳에 하나님이 안 가신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게 하기 위해, 또한 내가 가는 곳에 하나님도 가시게 하려면, 하나님께 기도하되 여러분이라면 ‘하나님. 내가 있는 이곳에 오셔서 함께 계셔 주소서.’라고 하거나, ‘하나님. 내가 가는 그곳에 함께 가셔서 역사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일보다는 기도 먼저 하라는 거고, 세상 것을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가지기 위해선 기도부터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하면, 성경을 보세요.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광야가 기적을 먹는 잔치 자리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인생이라면 내 인생도 기쁨의 자리가 되고 기적의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인생을 계속 살아야 할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수많은 선택 앞에 놓이겠지만, 그 선택이 믿음적이냐 세상적이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선택 앞에서는 기준을 분명히 정해 두어야 합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을 하나님으로 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준이 ‘하나님’이어야만 그 선택이 믿음적이 될 수 있고, 선택이 믿음적이어야만 결과도 믿음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인생에서의 모든 생각과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라는 기준과 믿음으로 살아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삶이 늘 기쁘고 형통하고 만족케 되며 감사하시기만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