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8시부터 정토담마스쿨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정토담마스쿨은 영어로 진행되는 정토불교대학 과정입니다. 북미 서부, 북미 동부, 캐나다, 영국, 독일, 키프로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홍콩, 한국에서 17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의 소감을 들은 후 스님이 어떤 관점을 갖고 정토 담마스쿨을 공부해야 하는지, 왜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학생들은 현재 코스1인 실천적 불교사상 학습을 마치고 지금은 코스2인 부처님의 일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두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출가하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데, 출가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My question is, what was Buddha’s goal in converting people into monks? Recently we learned that after Buddha attained enlightenment, he began converting a lot of people into monks who would leave their families to become free from their sufferings. However, once these people become monks, it seems like they focus solely on spreading the teaching and meditating. They accept alms from people, and frankly, from what I see, they don't seem to be doing anything productive for society. And I would have thought that monks would be more self-sufficient and support the society, like Jungto is today. So my question is what is the ideal society that the Buddha envisioned, and what was he trying to accomplish by converting all these people?”
(부처님이 사람들을 출가시킨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최근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을 떠나 출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수행자가 된 사람들은 가르침을 전파하고 명상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보시를 받는데, 솔직히 제가 보기에 그들은 사회를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행자들이 오늘날의 정토회처럼 자립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것은 부처님이 구상한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이며, 모든 사람들을 출가시켜서 이루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궁금함이 생길 수 있겠다 싶습니다. 부처님이 출가라는 것을 독자적으로 창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이미 존재했던 출가라는 사회적인 조류에 참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날 당시 인도의 전통사회를 브라만 문명의 사회 또는 아리안 문명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브라만이라고 하는 사제 계급이 그 사회의 최고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처음에는 하나로 있다가 분리되면서 주로 정치 지도자가 더 우위에 서게 되는데, 인도에서는 반대로 종교 지도자가 정치 지도자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계급이 사제 계급인 브라만, 두 번째 계급이 정치 지도자인 크샤트리아, 세 번째 계급이 경제력을 갖고 있는 바이샤였습니다. 그리고 아리안족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해 그들을 네 번째 계급인 노예 계급 수드라로 편제하면서 인도 사회의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리안족이 드라비다족을 정복하려던 시대에서는 브라만 신의 힘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비다족이 다 정복된 시대에서는 모두 같은 브라만을 믿는 나라들 간의 경쟁이었기 때문에 경쟁의 우위를 점유하는 것은 신의 힘이 아니라 바로 경제력이나 군사력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크샤트리아 계급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브라만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사회로 변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는 나라별로 독립되어 경쟁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나라를 초월하는 무역이 행해지면서 거대한 부를 형성한 거부장자인 바이샤 계급의 지위도 향상되었습니다. 오늘날 사회와 비유해서 살펴본다면, 종교적인 영향보다는 정치적인 영향이 커지고,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가의 영향력이 정치적 지도자 못지않은 사회로 변해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계급 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변화된 사회를 설명하려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주류 사상가들인 브라만은 태어난 것만으로도 권위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흥 사상가들은 본인들이 브라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권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권위를 얻고자 했습니다. 전통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집을 떠나는 풍습이 있긴 했지만, 이들 신흥사상가들도 본인의 선택으로 가족과 집을 떠났습니다. 걸식을 하고 아주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세상에 대해 자기 나름의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만 사회가 점점 변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흥사상가들은 모두 브라만교를 반대하고 부정하긴 했지만 ‘이 세상은 이렇다’ 하고 설명하는 사상적 측면에서는 그 내용이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옷은 떨어진 것을 입고, 밥은 얻어먹고, 아주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류들을 통칭해서 ‘사마나(Samana)’라고 불렀습니다. 붓다는 이 그룹에 참가했기 때문에 그도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걸식하며 생활한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주류인 브라만교의 믿음과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출가한 이후에는 사마나(Samana)의 여러 사상들에 심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때는 양쪽의 극단을 모두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중도’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 때 그는 브라만이 아니기 때문에 사마나 그룹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도 다 사마나 그룹에 편제가 되었고, 그 전통에 따라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출가하라고 직접 말한 적이 딱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아들을 출가시킬 때 출가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동생을 출가시킬 때 출가하는 게 좋다고 설득했습니다. 그 외에는 붓다가 출가하라고 말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저를 승단에 받아주세요’ 하고 요청하면 ‘오라, 비구여!’ 하고 환영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은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속세에 있으면서 해탈의 길을 추구하는 재가 수행자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집을 떠나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출가 수행자의 길이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수행하겠다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다섯 가지 주의를 주었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둘째,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 셋째, 강제성을 갖는 성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넷째, 욕설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삿된 소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삿된 소견이라는 것은 술을 마시고 흥분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해탈을 즐거움이라고 이해하고,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술을 먹고 취하지 마라’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세상에 살면 이렇게 될 위험이 크니, 적어도 수행자라면 이런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애초에 이럴 가능성이 없어서 처음에는 계율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충분히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 형식적으로 출가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수행적인 관점을 놓쳤기 때문에 출가수행자에게도 계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자의 말처럼 ‘세상 사람이 다 출가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붓다는 출가하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출가 또는 재가를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재가에서 수행한다면 적어도 이런 원칙은 지켜야 한다’, ‘출가해서 수행한다면 이런 것은 지켜야 한다’ 이런 것만 있지 어떤 것을 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에 만연했던 성 차별이나 계급 차별에 대해서도 출가한 사람이 모인 상가 안에서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정토회도 이런 상가의 모습을 본받았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직업을 갖고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지만, 공동체 안에 들어올 때는 월급을 주고 받는 시스템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제적인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부처님 당시에 출가하는 방식은 아무런 경제적인 기반 없이도 확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재화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노동하지 않는 대신에 사람의 노동으로 생산한 어떤 생산물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음식도 남이 먹다 남은 것을 얻어먹고, 옷은 아무도 입지 않는 버려진 천을 입었습니다. 인도 당시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시신을 덮었던 천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몸에 걸치면 내 몸이 더러워지고 부정 탄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출가하면 시신을 덮었던 천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잠은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잤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집이 있다면 그 집의 처마 밑에서 자는 것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질문자가 이야기하듯이 사람이 생산해서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가 아무리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었고, 상가의 기반 유지를 위한 어떤 경제적인 노력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열반하고 나서 500년이 지나면서 수행자들의 생활 방식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건물인 절을 지었고, 버려진 천이 아니라 보시를 받아서 좋은 천으로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좋은 음식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당시에 왕이나 부유층이 대부분 기부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지금처럼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하나의 계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출가 수행자들에게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갖고 사용한다면 당신도 어떤 생산활동에 참여해야 하지 않나요?’ 하고 충분히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붓다가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말라’ 하고 말한 뜻은 어떤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농사를 짓든 어떤 노동을 하든, 그 노동의 대가를 받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대가를 받지 않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That was very clear. Thank you for the explanation. I think the main thing was that there was a clash between how I see the current monks and the monks that are described in the textbook. I think you've resolved that issue.”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의 수행자들에 대한 제 관점과 교재에 설명된 수행자들의 모습 사이에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네요. 스님 설명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에 답변을 한 후 9시 30분에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전 10시부터는 전국 법사단 연수에 참석했습니다.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고 네 번째 진행되는 전국 법사단 연수인데요. 오늘은 내년 상반기에 계획하고 있는 백일 특별정진과 법륜스님의 백일 법문을 앞두고 그에 따른 법사의 역할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연수를 시작하기에 앞서 입재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정체 국면에 들어선 정토회가 어떻게 하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그속에서 법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1차 만일결사를 끝내고 새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기간을 1년 정도 갖고 2차 만일결사를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3년 정도는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긴 역사에서 볼 때는 그런 준비 기간을 둘 경우 30년, 60년 단위로 딱 계산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1차 만일결사를 끝내고 바로 2차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목표를 설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당할 준비는 부족한 상태에서 2차 만일결사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차 만일결사라고 하지만 1차 만일결사의 연장선 위에서 지금 나아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온라인 방식에 맞게끔 사업이 진행되지 못하는 이유
2차 만일결사의 큰 변화는 온라인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1차 만일결사의 말미에 이미 온라인 전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크게 본다면 1차 만일결사는 오프라인상에서 진행이 되었고, 2차 만일결사는 온라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 전환은 했지만, 지금의 정토회를 이끌어가는 지도부는 대부분 오프라인에서 경험하고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당장 지도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전환은 했지만 아직 온라인에 맞게끔 사업을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정토회가 직면한 정체 국면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 온라인 방식을 강화하기 위해 ‘온라인 불사 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현재까지 특별한 진전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성원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누구도 온라인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가 온라인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데, 정토회가 사회보다 앞서가기에는 우리들의 기술적인 축적도 미약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가진 경험만 가지고도 정토회의 활성화를 위해 더 기여할 것이 있다면 오프라인 활동을 좀 활성화시켜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가 온라인으로 가다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다시 오프라인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코로나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죠. 큰 방향에서는 온라인으로 전환해 가고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비해서는 오프라인 활동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활동만 해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 활동을 좀 보강하자는 관점에 서 정토사회문화회관 활성화 방안이 나오게 된 겁니다.
지난 10월에 연수원에서 정토회 임원단이 모두 모여서 TF팀을 구성했는데, 막상 논의를 해보니 이 구상만 갖고는 힘이 실리지 않겠다는 일부 우려와 평가가 있었습니다. 원래 처음 계획은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이 일절 참가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저는 2차 만일결사부터 개척 사업을 하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습니다. 세계 전법을 위한 국제지부의 활성화, JTS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각 나라별로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환경위기 시대에 안정적인 먹거리를 마련하는 일, 오래 활동한 사람들의 노후를 고려해서 지방에 미래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 등 이런 활동에 제가 역량을 투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일 특별정진에서 빠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법륜스님이 빠지면 이 계획에 힘이 좀 안 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제가 백일법문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조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 법륜 스님이 전적으로 결합하기로 결정이 나면 내년에 계획한 해외 순회 강연, 해외 JTS 사업, 국내 순회 강연 등 모든 사업을 전반적으로 다시 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시대에 법사의 역할
온라인 방식은 장점도 많습니다. 온라인 기술을 사용하면 법사가 개개인에게 밀접하게 수행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이를 직접 체감하는 경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격에 감화를 받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만남을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프라인 만남은 여러 대중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법사가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결국은 강의를 하는 식으로 흘러갈 단점이 또 발생합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 앞으로 법사단이 계속해서 개발하고 개척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법사는 말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역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오프라인으로 가면 말하는 역할을 많이 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경험해 보면서 어느 것에도 치우침이 없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경험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처음입니다. 원효대사, 서산대사, 용성조사도 경험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조사들이 말한 경구를 해석한다고 해서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인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는 것을 따라하거나 이런 어려움을 누가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또 그런 경험을 100여 명의 법사가 함께 나누면서 더 좋은 방법들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갖고 오늘 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입재 법문이 끝나고 수행법회 분과와 불교대학 분과, 경전대학 분과에서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책을 마련해 본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발표를 경청한 후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그룹별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식 지부를 이동할 때 활동가들의 애로 사항과 대안, 지회 법사의 역할, 인력 파악 및 관리 방안, 명예 서원행자와 전법회원의 정년 등 다양한 주제로 11개의 그룹이 토론을 한 후 다시 화상회의 방에 모였습니다.
오후 3시 30분부터는 그룹별로 토론한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스님은 법사단의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필요한 내용은 메모를 했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한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법사단은 지부와 지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예로 들며 법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질의응답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한 가지 당부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최근에 법사님들 중에 병가를 신청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법사님들 중에서는 암이나 교통사고로 인해 병가를 신청하신 분들이 있고, 대중부 법사님들 중에서도 몇 분이 병가로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법사님들이 바쁘신 중에도 조금씩 전화를 드리고 위로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주는 아니라도 한 번씩 그분들을 방문해서 그동안 정토회 활동을 한 덕분에 외롭지는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제가 관심을 갖고 찾아가는 것이겠지만, 저의 현재 처지가 그럴 형편이 못 됩니다. 무심히 살아야 저도 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들이라도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시면 좋겠다는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사홍서원으로 전국 법사단 연수를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오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스님은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대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대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빵으로 요기를 하고 저녁 7시 55분에 대구 공항을 이륙하여 1시간을 비행한 후 8시 55분에 제주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공항을 나와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렌트카를 빌린 후 숙소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되었습니다.
숙소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행복한 대화 열 번째 즉문즉설 강연이 제주시 한라 아트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