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타지마할, 아그라성, 바라나시 등 유명지역이 북인도에 있다. 그러나 남인도에도 명소가 많다. 남인도는 화창한 날씨로 5월이 여행적기다. 남인도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고, 경제와 교육 수준이 앞서 있어 여행하기도 좋다.
인도는 데칸 지역을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분된다. 데칸은 남쪽 나라를 뜻한다. 나르마다 강 이남의 고원 지대를 말다. 그런데 데칸이라는 말은 실제는 아리인이 사는 북인도에서 그들의 높은 문화에 비해 드라비다인이 사는 남인도의 문화가 낮다는 데서 붙여졌다.
원래 데칸 지역은 통행이 불가능한 밀림 지역이어서 이를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는 문화와 관습 및 생활상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북부 아리아인의 문화는 아소카 왕의 남부 진출로 남인도의 맨 끝 타밀 지역까지 늦게나마 알려졌다.
남인도는 데칸 중심지역과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구분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국가 전까지는 북인도가 아리아인 문화일 때, 남인도는 드라비다인 문화였다.
남인도 타밀 지역은 마우리아와 굽타 왕조 시대에도 독립적이었다. 그들의 문명은 북인도와는 조금 달라도 높은 수준었다. 또한 북인도가 이방인의 유입으로 문화가 변질될 때, 남인도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된 드라비다족의 문명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아 고유의 문명을 간직했다. 그리고 드라비다 문명의 남인도 지역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과 접촉했고 페르시아 만, 홍해, 그리고 인도의 서해안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했다. 남인도는 또한 바다를 통해 태평양의 여러 섬들과도 교류했다. 그로인해 기원 전후로 인도의 문명이 이들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인도와 로마 제국의 해상무역이 매우 왕성했다. 로마 제국은 인도의 향료, 면화, 진주 등을 수입했다. 폰디체리와 케랄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 이 지역이 로마 제국이나 지중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하던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화폐와 유물들은 남인도 지역이 높은 수준의 문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인도의 가장 남쪽 타밀 지역에는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이 존재했다. 그들은 안으로는 드라비다적인 정치 체제를 이룩하고 밖으로는 지중해나 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무역을 통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매우 높은 수준의 경제적인 부를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역시 드라비다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냈다. 드라비다인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오늘날에도 나야르족의 뱀 신앙이 있다. 그러나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북인도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아소카 왕의 불교 전파 정책으로 힌두이즘보다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늦게서야 힌두교 영향을 받았다. 남인도는 언어와 문화에서 드라비다인의 땅으로 구분되지만, 다른 민족 사람들도 거주하고 현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드라비다 사람도 인도의 다른 지역과 스리랑카, 오세아니아, 동남 아시아, 마다가스카르 등에 널리 거주하고있다.
뭄바이 남쪽으로 아라비아 해 연안을 따라 있다. 옛 왕국의 이름이기도 한 '코친'은 때때로 지금의 에르나쿨람, 바탄체리, 코친 요새, 윌링돈 섬, 비핀 섬, 군두 섬 등을 포함하는 섬과 도시군(群)을 일컫기도 한다. 대도시권에는 에르나쿨람과 마탄체리가 포함된다.
이름 없는 어촌이었던 코친은 고츠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하천과 아라비아 해의 역수(逆水)가 이 내륙항구를 본토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인도 서해안에서 가장 안전한 항구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항구는 곧 새로운 전략요충지가 되었으며, 상업적인 면에서도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양을 횡단하여 인도 남서해안에 상륙하던 15세기말 포르투갈의 항해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 이곳에 인도 최초의 유럽인 거주지를 세웠다. 1502년에는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최초의 포르투갈 해외상사(무역소)를, 1503년에는 포르투갈인 부왕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가 최초의 유럽인 요새를 각각 건설했다. 그후 이 도시는 1663년 네덜란드에 정복될 때까지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았으며, 시내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포르투갈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1663~1795년의 네덜란드 통치기에 코친은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항구를 통해 후추·소두구 등을 비롯한 향신료와 마약·코이어·코코넛·코프라 등이 선적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민족이던 힌두인과 이슬람교도, 시리아인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등의 소수집단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인종과 종파를 떠나 도시의 번영을 함께 나누었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은 영국인의 통치는 1795년부터 인도가 독립한 1947년까지 계속되었다. 20세기초에 건선거와 선박수리소를 갖춘 현대식 항구가 축조되었고, 부두의 내부수로 준설작업을 거치면서 윌링돈 섬이 생겨나 철교와 도로편으로 코친 요새를 에르나쿨람 및 다른 도시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코친은 인도 독립 후 인도 해군의 주요 훈련 중심지가 되었다.
해안선과 나란히 내륙 수로망이 갖추어져 수송료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교역이 촉진되었다. 심해항은 계절풍이 부는 여름을 비롯하여 1년 내내 개방되어 있으며, 에르나쿨람까지 연결되는 철도가 있다. 공항에서는 뭄바이와 첸나이 등의 국내 주요도시들을 잇는 항공편이 운항된다.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석호와 역수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코친 요새에는 1510년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인도 최초의 유럽인 교회로 바스코 다 가마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옮겨질 때까지 묻혀 있던 상프란시스쿠 교회가 있다. 그밖에 힌두사원, 모스크, 역사적인 유대교 예배당(마탄체리 소재) 및 다른 교회들이 있다. 4세기부터 형성되었다고 하는 인도 최고(最古)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으나 수천 명에 달했던 유대인들은 20세기말에 거의 모두 이스라엘로 이주해갔다.
인도 남부의 하이라이트는 코친항이다. 한때 세계에서 기장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이다. 아랍의 이슬람, 중국 광둥의 어업, 유대인 상업, 포르투갈 가톨릭 등이 모두 녹아 있는 ‘문화의 융합로’다. 구도심 마탄체리에서 향신료 향기를 가장 선명하게 맡을 수 있다. 대형 향신료 창고, 시장 골목, 포르투갈의 성 프란시스 성당, 네덜란드 궁전, 유대교회당(파르데쉬 시나고그) 등 중세 국제 도시로서의 기능과 특성을 완벽히 갖췄다.
바스쿠 다가마 상륙 이전엔 유대인이 이곳 상권을 주도했다. 약 2000년 전에 이미 향신료 장사가 큰 돈벌이가 된다고 생각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이다. 20세기 중엽 이스라엘 건국 이후 모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몇 명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근 해안에는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중국 광둥식 조업망이 그대로 남아, 실제 고기를 잡아 팔기도 한다.
인도스럽지 않은 케랄라서 오히려 가장 인도다운 모습과 마주칠 수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케랄라를 ‘꼭 가봐야 할 50곳의 세계 여행지’ 중 하나로 선정했다.
남인도 여행지 중 특히 인기 있는 곳이 바로 향신료 무역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코친이다. 유서 깊은 항구 도시였던 코친은 중국, 동남아, 로마, 아라비아, 유럽 등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현재도 다양한 국적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도시 어디에서나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더치 팰리스'라고도 불리는 마탄체리 궁전, 포르투갈의 항해자인 바스코 다 가마가 매장되었던 성 프란시스 성당을 방문하면 유럽과 얽힌 인도 역사의 한 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현재 골동품 거리로 변모한 유대인 마을, 아라비아해를 장식하고 있는 중국식 어망, 화려한 전통 무용극 카타칼리 등은 특히 눈을 즐겁게 해준다.
1.코친 시내 관광
무역과 향신료로 유명하며 아기자기한 도시
인도가 아닌 인도의 풍경, 코친 케랄라 공항에 비치된 케랄라 안내 책자에는 케랄라가 인도에서 가장 깨끗한 지역으로 소개돼 있다. 문맹률 0%, 인도에서 유아사망률이 가장 낮고 평균 수명이 가장 긴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케랄라 여행의 시작은 항구 도시 코친이다. 아라비아 해와 인도 최대의 벰바나드 호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코친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이다. 포구를 따라서는 독특한 생김새의 중국식 어망이 해변에 펼쳐져 있고 거리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코친은 인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항구다. 예로부터 케랄라 해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열강이 몰려들어 각축을 벌였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넓은 포구에는 집채만한 중국식 어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20m가 넘을 법한 기다란 나무 5개에 그물을 엮어 펼치고 커다란 나무로 지지대를 만든다.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렸다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이 어업 방법은 원래 중국 광둥성의 어부들이 하던 것으로 1400년대 몽골군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전파했다고 한다.
2.코친 성프란시스 성당
코친 요새에 1503년~1510년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인도 최초의 유럽형 교회다. 마탄체리지구에 있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 중 하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옮겨질 때까지 묻혀 있던 성당이다. 인도양 개척 항해에 나선 바스코 다 가마는 1502년 코친에 도착했다가 1524년 포르투갈의 인도 무역 책임자로 부임했는데 과로로 숨지고 성 프란시스 성당에 묻혔다. 이 성당이 유명해진 것은 152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은 포르투갈의 항해왕 바스코 디 가마가 이곳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성당 한쪽에는 포르투갈 항해사의 모습을 담은 액자와 그의 무덤을 덮었던 묘석이 놓여있는데, 그의 유해는 12년간 이곳에 있다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옮겨졌다. 인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의 하나지만, 인도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 침략의 알리는 시작점이다. 코친 포구에서 10분 거리인 마탄체리 지구에 있는 이 성당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흔적이다. 포르투갈 식민지였고 중세까지 중국과 아라비아, 유럽상인들이 드나들었던 코친에는 과거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 성당에서 300m 떨어진 산타크루즈 대성당은 화려한 외관으로 사진촬용 차 많이 오는데 1904년 건설 되었다.
3.코친 마탄체리 궁전
성프란시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의에 16세기 포르투칼인들이 지은 궁전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건설해 1555년에 코친의 지배자인 비라 케랄라 바르마에게 선사한 건축물이다. 코친에 대한 무역허가를 따내고 싶어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당시 코친의 지배자인 바르께랄라바르마에게 바친 일종의 뇌물이다. 1663년 궁전이 부식되자 당시 께랄라의 마하라자는 네덜란드의 장인들을 불러 궁전을 보수했다. 네덜란드가 증축한 후 지금도 현지에서는 ‘네덜란드 궁전(Dutch Palace)’ '더치 팰리스'로 불린다.
아잔타 벽화 이후 인도에서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아름답다는 궁전이이도 하다. 궁전 안뜰에 있는 크리쉬나 사원은 힌두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
4.코친 중국식 어망(차이니스 피싱넷)
드넓은 아라비아해를 그물망으로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중국식 어망으로 코친의 상징물이다. 성 프란시스코 성당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코친항이 자리잡고 있다. 코친 인근 해안에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중국 광둥식 조업망이 그대로 남아, 실제 고기를 잡아 팔기도 한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넓은 포구에는 집채만한 어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20m가 넘는 기다란 나무 5개에 그물을 엮어 펼치고 그보다 더 큰 나무로 지지대를 만들어 대여섯 명이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고기를 잡는 식이다.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렸다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다. 다소 미련스럽게 보이는 어획법이지만 어획량은 제법 쏠쏠하다. 이 어업 방법은 원래 중국 광둥성의 어부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원나라 황제인 쿠발라이 칸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인 140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군들이 여기까지 내려와 코친항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꽤 앞선 어획법이다.
5.코친 유대인 마을
마탄체리와 빠르데쉬 시나고규 사이에 있는 길 일대를 유대인 마을이라고 한다. 힌두교인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부터 인도에 최초로 유대인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마탄체리 궁전 북쪽에 있다. 현재는 골동품 거리로 변모한 마을이다. 4세기부터 형성되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였다. 실제로 이 구역은 유대인들이 살던 구역으로 한때 2,500명에 달하는 유대인 집단 거주 구역이었는데 이스라엘 건국 이후 거의 본국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2001년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는 7가구 2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는 인도에서 가장 큰 골동품 거리다. 한국의 인사동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현대식 건물들이 옛거리를 침범하는 막개발의 인사동과는 달리 옛스러움이 한결 빼어난다. 향신료와 그림, 탈, 인형, 목공예품 등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많다. 향신료 무역을 위해 자리 잡았던 유대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가 상륙하기 이전까지 이곳 상권을 주도했다. 상점을 지나면 유대인 회당이 있다. 이곳 내부에는 중국 광둥성에서 왔다는 대리석 바닥과 벨기에에서 수입한 촛대가 있다. 긴 바지를 입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 반바지나 반소매 옷차림은 입장을 거절 당하므로 옷을 잘 갖춰 입어야 한다.
6.까따깔리(카타칼리) 인도 남부 전통극
코친에서 꼭 경험해야 할 것이 카타칼리(Kathakali) 관람이다. 인도의 5대 고전 무용 가운데 하나로 ‘카타’는 이야기, ‘칼리’는 연극을 뜻한다. 어두침침한 무대 한쪽에 악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북을 두드리고, 두 명의 배우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 잔뜩 부풀린 치마를 입고 화려한 장식을 한 배우는 모두 남자다.
<인도 남부 알레피>
알레피:알레피 하우스 보트로 수로 유람(케랄라 주의 내륙수로(backwater) 백워터 트립)
알레피 보트 유람 후 마두라이로 이동 7시간 소요.
알레피는 인도 남서부 케랄라 주 남부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다. 알레피 행정구의 행정중심지로 해상교통이 발달한 도시다. 알레피 행정구는 1968년에 설치되었다. 코친 남쪽, 아라비아 해와 벰바나드 호 사이의 좁은 갑에 자리잡고 있다. 알레피 항은 16㎞ 떨어진 포라카드에 있는 네덜란드 무역소의 상업 패권을 종식시키려던 영국인들에 의해 18세기말 외국 무역항으로 개항되었다.
코코넛 기름 제조 외에도 매트, 양탄자와 코코넛 겉껍질에서 채취하는 코이어 섬유로 짠 밧줄 등을 제조, 수출했다. 오늘날 도시의 경제는 주로 코코넛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검은 후추도 생산된다.
코친과 트리반드룸을 잇는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알레피는 철도는 없으나 운하망이 설치되어 있어 북쪽으로 트리추르, 남쪽으로 트리반드룸까지 연결된다. 앞바다로 1.6㎞쯤 떨어져 있는 정박지는 진흙둑으로 보호되어 있다. 케랄라대학교 부속 단과대학이 3개 있다.
1.알레피 하우스 보트(수로 여행)
알레피는 동방의 베니스라 불리는 인기 여행지다. 휴양지 쿠마라콤에서 케트발룸 하우스보트를 타고 강을 타고 내려가면서 여유있게 풍경을 본다. 알레피에서 꼴람까지 7~8시간 정도 달리는 페리다. 아라비아 해로 흘러드는 44개의 강이 서로 얽혀 있는 케랄라 주의 내륙수로(backwater)는 길이가 무려 900km에 이른다. 열대우림 사이로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강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처럼 마을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다. 쿠마라콤은 케랄라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이자 내륙수로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쿠마라콤은 인도 내에서 휴양지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한데, 아탈 베하리 바즈파이 전 인도 수상은 2000년 이곳에서 휴가를 보낸 뒤 “이제 과거의 문제를 풀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해 갈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성명 ‘쿠마라콤의 사색’을 발표하기도 했다. 쿠마라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하우스보트 ‘케투발롬’을 타고 벰바나드 호수와 수로를 여행하는 것이다. 하우스보트는 대나무 틀에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집을 얹은 목선이다. 원래 쌀을 싣던 화물선인 라이스보트를 관광용으로 바꾼 것이다. 보트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침대가 딸린 객실은 기본이고, 회의실에 부엌과 라운지까지 갖추고 있어 호텔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선장과 요리사, 선원이 함께 탑승한다. 하우스보트를 타는 여정은 말 그대로 유유자적이다. 물길 좌우로는 높다란 야자수들이 이국의 정취를 뽐내며 서 있고 보트는 그 사이를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모든 것이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다. 수로를 달린지 한참 후 갑자기 수문이 열리고 하우스보트가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간다. 보트가 정박한 곳은 고급 리조트다. 호수 곳곳에는 이처럼 고급 리조트가 숨어있다. 요가와 낚시는 물론 카누 타기에서 선셋 크루즈까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
고요히 흐르는 강과 열대의 정취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의 수로 유람은 잔잔히 흐르는 강물의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아름다운 파란 하늘과 짙푸은 녹색의 코코넛나무 등 평화로운 정경을 본다. 또한 그 속에서 현지인들의 만나는 수로 여행 체험이다.
<인도 남부 마두라이>
알레피에서 마두라이로 이동 7시간 소요.
마두라이:스리미낙시 사원, 티루말라이 나야카 궁전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 마두라이 행정구의 행정중심도시로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다. 서쪽으로 케랄라 주와 접한다. 타밀나두 주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바이가이 강을 끼고 아나이말라이(코끼리) 구릉, 나가말라이(뱀) 구릉, 파수말라이(소) 구릉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옛 도시였다. 판디아 왕국(4~11세기)의 수도로서 미낙시순다레슈바라 사원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 사원과 티루말라나야크 궁전, 흙 제방으로 만든 테파쿨람 저수지, 1,000개의 기둥으로 장식된 홀은 마두라이가 모두 파괴되었던 1310년에 무너졌다가 비자야나가르 왕조시대(16~17세기)에 다시 세워졌다. 도시의 성벽은 1837년 영국인들이 도시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없애버렸다.
강 북쪽에는 행정중심지와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교외지역에서는 면방적, 면방직업과 함께 수송장비, 담배, 설탕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이 발전해왔다. 베틀로 짠 비단과 면제품은 소규모로 생산되지만 옛날부터 마두라이의 전통상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해진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타밀 문학회가 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새로운 문학회는 1901년 설립되었다. 마두라이카마라지대학교(1966)가 있다.
마두라이의 고대역사는 판디아 왕조의 왕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판디아 왕조 이후로는 촐라, 비자야나가르, 이슬람, 마라타 왕국에게 지배를 받다가 영국에 넘어갔다. 1940년대에는 영국 지배에 대항하는 시민 불복종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라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마두라이 행정구는 농업지대이기는 하나 1895년 페리야르 강 관개공사와 1960년 바이가이 강 관개공사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쌀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환금작물인 땅콩, 목화, 사탕수수, 커피, 생강, 감자, 배를 재배한다.
바이가이 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 마두라이는 유럽 식민지 역사를 거치지 않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고대 로마와 무역을 하며 경제를 키웠던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판드야 왕국의 수도였고, 16세기 중반에는 나야크 왕조의 수도로 성장해왔다. 이슬람 문화가 혼재된 북인도의 주요 도시나 영국 식민지 이후에 발달하게 된 첸나이와 달리, 마두라이는 인도 고유의 힌두 문화를 잘 지켜온 도시로 꼽힌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스리 미낙시 사원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행렬에서 이곳이 여전히 타밀나두의 정신적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 마두라이는 인도 최남단 타밀나두의 주도 첸나이에 버금가는 제 2의 도시로, 교통망이 발달했으며, 스리랑카와 께랄라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고대부터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로, BC 5세기~AD 11세기까지는 판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16세기 중반부터 1743년까지는 나야크 왕조의 수도였다. 인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스리 미낙시 사원을 중심으로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겹쳐진 형상을 하고 있다.
1.마두라이 스리미낙시 사원
타밀나두의 문장에 새겨진 힌두교 최고의 사원이다.
바이가이 강이 관통하는 마두라이 역시 남인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과거 판디아 왕국과 나야크 왕국의 수도였던 마두라이는 도시 곳곳에서 화려했던 과거를 볼 수 있다. 남인도 최고의 사원으로 꼽히는 미낙쉬 암만 사원은 마두라이의 상징 같은 곳이다. 하루 수만 명 이상이 찾는 이 사원에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고푸람은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푸람은 인도에 건설된 중세의 탑문으로 힌두교 사원의 울타리 역할을 한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인도 제일의 고푸람, 타밀나두 주 최고의 힌두교 사원이다. 힌두교의 시바신과 미낙시의 사랑을 그리며 그들에게 봉헌하기 위해 17세기 나약왕조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사원은 드라비다 힌두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사원 동서남북의 거대한 탑문인 고푸람에는 33,000의 신과 악마,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본전 안에는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여신의 황금연지’라 불리는 연못과, 985개의 돌기둥과 그 기둥에 각종 모형이 새겨진 만다파가 있다.
타밀나두의 무장에도 새겨진 최고의 남인도 스리미낙시 사원은 쉬바신의 또다른 화신인 순다레스와레와 그의 아내 미낙시를 모신 사원이다. 미낙시 여신 파르바티와 그의 남편인 시바 순다레스와라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이며 호랑이 머리의 신인 가네샤와 시바가 타고 다니는 황소인 난디를 모시는 대표적인 드라비다 양식의 힌두교 사원이다. 3300체 신들의 조각과 예배자가 몸을 정화의 연못에서 보이는 금빛의 두 신전 순다레스와라 신전과 미낙시 신전이 주요 볼거리다. 사원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실제는 미낙시 여신만을 위한 사원이다. 사원 입장시, 신발을 신을 수 없고, 가방 소지가 불가능하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착용시 입장 불가다. 카메라 촬영비가 별도 부과된다.
1. 민소매,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 착용 시 입장이 어렵다. - 가디건이나, 롱치마, 큰 스카프 등을 준비한다. 2. 신발을 벗고 사원에 입장한다. - 너무 값비싼 신발보다는 쉽게 벗고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착용한다. - 물티슈를 준비하면 다시 신발을 신을 때, 편리하다.
스리미낙시 사원
2.마두라이 티루말라이 나야카 궁전
이 지방을 다스르던 티루말라이 나야카 왕이 1636년경 건축해서 궁의 이름도 동일하게 붙였다. 식민지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온 건축가가 했다. 미낙쉬의 드라비다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인도.사라센양식(힌두+무갈건축)으로 건축 되었는데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왕의 공간, 알현장소 등 일부만 남아 있다. 마두라이라는 17세기 나야카 왕조 때부터 도시가 성립되었다.. 원래의 왕궁은 현재의 4배 크기였다. 12미터의 성벽 안 왕궁에는 거주지역, 정원, 극장, 음악실 등이 있다.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어 왕의 공간, 알현장소 등 일부만 남아있다. 그는 좋아서 매일 궁에서 음악회와 파티를 열였다. 그런데 티루말라이 나약의 손자인 초카난트 나약왕(1662~1682)에 의해서 왕궁의 일부가 해체되어 트리치로 옮겨져 그곳에 왕궁을 세우는데 이용되었다.
*마두라이 티루치라팔리 선택관광(이동 2시간 소요)-스리랑감 사원
스리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으로 인도 최대 힌두교 사원이다.
스리랑감 사원으로도 불리는 이 곳은 비슈누 신의 8개의 자기 파괴 성지 중 가장 중요한 장소다. 108개의 비슈누 사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리랑감 사원은 156 에이커 (약 631,309 ㎡)에 지어져 거대한 규모다. 7개의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울타리들은 두껍고 거대한 성벽으로 되어있다. 21개의 거대한 타워들은 방문객들에게 독특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코베리와 콜리담 강 사이에 형성된 섬에 위치하고 있다.
<탄자부르>
마두라이에서 탄자부르로 이동 4시간 소요
(탄자부르 관광 후 남인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 있는 다시 마두라이로 이동 4시간 소요)
탄자부르:브리하다슈와라 사원 및 요새와 거대한 난디상 관람.
촐라 왕조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 브리하다슈와라 사원 및 요새와 거대한 난디상.
탄자부르는 9~13세기에 걸쳐 촐라왕조의 수도로 번창한 고도다. 이 시대에 시바 사원이 많이 건축되고 바라문 문화가 번성했다. 매우 작은 도시지만 촐라건축의 최고 건축으로 꼽히는 브리하다슈와라 사원과 왕궁 등의 볼거리가 다양한 지역이다.
또한 탄자주르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에 있는 탄자부르 행정구역의 행정중심도시다.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 동부, 코베리 강 하류 연안 코베리 강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9~11세기에 초기 콜라 왕국의 수도였다. 비자야나가르, 마라타 왕조와 영국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중요한 도시로 번성했다.
지금은 관광 중심지로 브리하디슈바라 콜라 사원, 비자야나가르 요새, 마라타족 왕자 사르포지의 궁전 등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내려온 수직기를 이용한 직조 외에도 면직업과 비나(남인도의 현악기) 제조가 활발하다. 마드라스 대학교에 부속된 8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탄자부르 행정구는 인도의 중요한 쌀 경작지 가운데 하나인 평평하고 기름진 코베리 강 삼각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남동쪽으로 팔크 해협과 벵골 만이 합류하는 칼리메레 곶까지 뻗어 있다.
삼각주에는 관개 운하를 통해 연결되는 코베리 강의 수많은 물줄기들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이들 운하 가운데는 10세기 이상 이용해온 것도 있다. 주요작물은 쌀, 사탕수수, 땅콩이며, 곡물 가공이 주요산업이다.
여러 도시들 가운데 탄자부르, 쿰바코남, 나가파티남이 가장 크다.
탄자부르 2월 기온:19도~32도 강수량:0
1.탄자부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및 요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1987년 등록된 힌두 사원이다. 1010년 촐라왕조의 최전성기의 왕 라자라자(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 1세에 의해 지어진 시바 사원이다. 지어질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사원이었으며, 현존하는 인도의 사원 건축물 중에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촐라왕조 라자라자 1세(985~1012)가 건축한 이 힌두 사원은 높이가 66m로 남인도에서 가장 높다. 피라미드형 탑 꼭대기에 올린 힌두사원 꼭대기 시카라 무게가 81.3톤이나 된다. 성인 1500명 무게와 같으며 매우 큰 무게다. 사원정문인 고푸라 2개를 지나야 본당에 들어간다.
사원 내부와 외부의 프레스코화와 부조상들이 주요 볼거리다.
2.탄자부르 거대한 난디상
난디는 시바가 타고 디니는 황소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본당에 가려면 두 개의 사원정문인 고푸라를 지나가야 한다. 육중한 돌로 건축된 거대한 고푸라에는 시바 신의 춤추는 모습이 여러가지 형태로 새겨져 있다. 고푸라를 지나가면 중앙에 흑색의 거대한 황소 석상이 있는 사당이 있다. 무게 25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소상인 난디상 앞에서는 힌두교 요가 수행자인 사두들이 힌두경전을 읊는다. 사람들은 난디에게 공양물을 바친다. 사두는 공양물 중 꽃은 난디상에 뿌리고 다른 공양물은 밑에 놓는다. 난디에게 공양물을 바치고 시바 신에게 경배를 하기 위해 본전 비마나로 향한다. 높이 66m의 비마나는 시바신이 거하고 있다는 카일라스 산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디 상의 귀에 대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도하며 난디 상의 머리와 등에 꽃과 풀을 장식하고, 입에는 밥이 물려준다. 난디는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신성한 황소다. 힌두교도들은 이 황소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난디의 귀에 대고 소원을 말하면 그 안에 있는 신들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는다. 난디 사당 앞에서는 화려한 복장을 한 무희들이 시바 신이 추었다는 전통춤을 춘다.
<폰디체리>(푸두체리)
폰디체리:오로빌 마을, 마뜨리만드르 외부 관람
폰디체니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17세기 말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고 1761년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푸두체리는 1674년 프랑스가 인도를 식민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다. 17~18세기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였고, 프랑스 무역의 중심지였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식민지였던 도시다. 30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54년에서야 인도에 반환되었다. 1963년 인도의 연방직할시로 승격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직도 프랑스어를 하는 인도인들이 있다. 현지인들은 식민지 시절 이름인 ‘폰디체리(Pondicherry)’로 부르고 있다.
폰디체리에 1926년에 세워진 스리 오로빈도 힌두교 아쉬람은 요가와 현대 과학을 결합한 힌두교 수양지로 유명하다. 해안가에 있어 인도의 주요 관광지다. 인도의 주 가운데 관할 면적이 가장 적다.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프랑스 문화를 느끼는 곳이다. 거리와 해안가에는 지중해와 유사한 건축물이 많다.
1.폰디체리 오로빌 마을
폰디체리에 있는 모두가 꿈꾸는 세상으로 인류 공동체 마을이다.
스리 오르빈도의 이상향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세워진 공동체 마을 오로빌이다.
푸두체리에서 북쪽으로 약 12km 거리에 있는 오로빌(Auroville)은 전 세계 40여 개국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평화와 공존을 실험하고 있는 인류 공동체 마을이다. 1968년 세워진 이곳은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이상을 꿈꾸던 인도의 사상가이며 영적 지도자인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의 신념에 따라 만들었다. 종교,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오르빌이란 이름은 이 ‘스리 오로빈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로빌리언(Aurovillian, 오로빌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물이 부족한 이 땅에 댐을 건설해 숲을 가꾸고,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직접 재배해 왔다. 석유 대신 태양, 물, 바람 등의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화폐가 없는 자급자족 경제도 오로빌의 특징이다.
또 오로빌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적, 인종, 종교,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상의 도시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필요한 물자를 무료로 배급하고 교육의 기회도 무료로 부여한다. 학력이나 자격증이 없어도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서로가 가진 배경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국적,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오로빌이다.
최근 오로빌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오로빌 내에서 자급자족의 불균형이나 초기 정신이 잊혀지는 등의 문제점들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로빌이 앞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오로빌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 것인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사람과 자연을 한 몸으로 엮는 생태 공동체이자 개인의 탐욕을 버리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위해서 오로빌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오로빌을 상징하는 건물로 외부 관람을 한다. 전세계 121개국의 흙을 모아 빚어 만든 황금빛 구형 건축물이다. 은하계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오로빌 마을에 황금색 골프공 모양으로 건축된 명상홀이다. 마트리만디르는 인류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마말라푸람> (마하발리푸람)
폰디체리에서 마말라푸람으로 이동 2시간 소요
마말라푸람:해변사원, 파이브라타스,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크리쉬나 버터볼
아름다운 사원과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비슈누 신이 마하발리라는 거인을 무찌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 마하발리푸람이라고도 한다. 첸나이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는 인구 약 1만2000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작은 마을로 석공들의 도시이다. 석공들의 돌깨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곳곳에 정교한 돌조각들이 있다. 마말라푸람은 한때 남인도를 호령하던 7세기 빨라바 왕조 시대에 세워진 항구도시로 중동 및 그리스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활동을 하며 동서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석공들의 도시로도 명성을 얻었다. 시바 성지순례의 출발지다. 바위를 깎아 조성해놓은 아름다운 해변의 사원이 있는데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유적지와 카페, 해산물 레스토랑이 가득한 여행지다.설악산 흔들바위를 연상시키는 크리쉬나의 버터볼, 거대 석조 기념물인 아르주나의 고행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파이브 라타스와 해변 사원 등으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1.마말라푸람 해변사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해변의 석조사원이다.
거센 바람과 파도에도 자리를 지키는 사원이다
벵골 만 마말라푸람 바닷가의 이 사원은 촐라 왕조의 대왕인 나라심하 바르만 2세가 재위했던 7세기 빨라바 왕조 시대에 처음 지어져 나라시마바르만 2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팔라바 문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남인도 최초의 8세기경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진 석조 사원이다. 남인도 최초의 석조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7기의 석조사원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2개의 탑이 남아있다. 오랜 세월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표면이 침식되고 부식되어 있다. 두 탑 사이에는 시바신을 모시고 있는 조그만 사원이 있다. 사원의 중심부에 시바의 남근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정교한 조각들이 사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사원은 마말라푸람의 다른 사원들처럼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 쌓아 올려 만들어진데다 해안선에 가까운 위치 때문에 2004년에 발생한 쓰나미에 의해 부분 침식과 조각 유실 등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를 이겨내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원의 강인한 모습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건축양식은 다른 인도 사원과 다르며 독특하다. 멀리서 볼 때 사원은 두 동이다. 각각의 신당에 쉬바와 비슈뉴를 모시고 있서 독립적이지만 두 개 사원의 담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해변 쪽의 더 큰 사원이 쉬바사원이고, 작은 사원이 비슈뉴 사원인데 두 사원이 붙어있는 이유로 비슈뉴신에 대해서 여성성을 부여해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뱅갈만에서 떠오른 햇살이 쉬바사원의 링감을 정면으로 비춰준다고 하는데 힌두교도들에게는 최고의 장엄한 순간이라고 한다.사원의 해변 북쪽이나 남쪽으로 가면 깨끗한 해변에서 휴식할 수도 한다. 벵골 해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빨라서 수영보다는 바다 낚시나 서핑을 즐기기 좋다.
해변사원
2.마말라푸람 파이브 라타스
모대 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석조 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화강암 사원이다.
라타스는 힌두어로 전차를 의미한다. 파이브 라타스는 전차모양을 한 5개의 사원이다. 5개 사원 각각의 이름은 인도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파이브 라타스는 각각 한 개의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졌다. 라타스 외부와 내부에는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라타스 주변에는 코끼리와 소 조각들이 맴돌고 있는데 실제 크기와 비슷하다.
3.마말라푸람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다양한 인도의 신화가 새겨진 거대하고 아름다운 조각이다.
거대한 암석 전면에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새겨진 마말라푸람 석공들의 솜씨를 알 수 있는 부조다.
힌두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아르주나가 시바신을 대상으로 고행하는 장면을 바위에 새긴 조각상이다. 지름 30m, 높이 9m, 길이 27m의 거대한 화강암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아르주나의 고행상 외에 다른 신화들도 생생히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남인도에서 가장 섬세한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위에 새겨진 코끼리상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조 조각 중 하나로 실제 코끼리와 거의 비슷한 크기다.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조각은 마말라푸람에 존재하는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나고, 인도의 고대 예술 작품 중 가장 아름답다. 거대한 바위 위에는 힌두교의 신화와 남인도의 생활 모습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중앙에 있는 뱀 형상의 틈새는 강가(갠지스 강)를 의미하며, 왼쪽에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아르주나는 고행을 통해 시바 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빠수빠따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이 아르주나가 아닌 바가리타의 고행을 표현했다고 말하는데, 그의 고행은 시바 신에게 천상에 있는 강가가 땅으로 내려와서 선조들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다. 작품에 얽힌 두 가지 해석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강가가 본래 천상에 있던 강이라는 내용은 동일하다. 이는 힌두교에서 강가가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마말라프람에 있는 두 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보다 더 인기있는 마말라푸람의 최고 볼거리로 인도의 각종 신화들이 새겨져 있다. 각 조각마다 사연이 있다.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조각은 아르주나를 뜻한다. 신화시대의 고행은 요즘과 달리 무지막지한 힘이 있다. 고행만으로 산을 정복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다. 고행 속의 아르주나는 현재 쉬바신에게 시위 중인 모습 등 여러가지 모습이 새겨져 있다.
4.마말라푸람 크리쉬나 버터볼
가파른 바위 절벽 위 언덕에 아슬하게 올려져 있는 듯한 거대하고 동그란 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붙어있는 듯한 크리쉬나 버터볼은 거대하고 동그란 바위다. 언덕 중간에 위치하여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로 과거 팔라바 왕조의 왕들이 코끼리를 이용해 바위를 옮겨보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로 굴러 떨어져야 정상일 것 같은 모양새이지만 이외로 바위에 잘 붙어 있다. 이런 바위라면 사연이나 전설이 깃들어 있을 법한데 이야기꾼들이 많은 인도인들이 이곳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만들어 왔다는 것이 놀랍다.
크러쉬나 버터볼
<인도남부 첸나이>
마말라푸람에서 첸나이로 이동 2시간 소요
첸나이:성조지요새 외관, 산토메 성당, 마리나 해변
인도 남부의 최대 도시이자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뱅골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남부 인도 최대의 도시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원래 이름은 마드라스(Madras)였으나, 1996년 첸나이(Chennai)로 도시명이 변경되었다. 164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이곳에 세인트조지 성채를 구축하고 동방무역과 교역기지로 삼은 것이 시(市)로 발전하게 된 시초이다. 성채를 중심으로 해안의 사구(砂丘)를 따라 시가지가 발달하고, 성채 북쪽에 오래 된 상업지구인 조지타운이, 남서쪽에 새로운 상업지구이며 부도심(副都心)인 마운트로드가 형성되었다. 성채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은 마리너비치로드는 아름다운 거리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의 산책로이다.항구는 성채 북쪽에 인공적으로 굴착된 것으로, 1만t급 이상의 선박이 접안 가능한 부두 18개가 있다. 철도는 북부의 센트럴역으로부터 콜카타, 델리, 뭄바이, 벵갈루루로 뻗고, 남쪽의 이그모아역으로부터 주내(州內) 및 케랄라 주, 마이소르 주,방면으로 협궤철도가 뻗어 있다. 국제공항도 있어서, 유럽·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와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다. 면직물·기계·차량·정유·고무·비료 등의 공업이 성하며, 피혁·철광석·면직물을 수출한다. 또 영화산업의 도시이고, 마드라스 대학교를 비롯하여 공과대학·의과대학 및 미술관·박물관 등이 있다.
인도 타밀나두 마드라스 주의 주도로 벵골 만과 접한 남인도의 최대 도시이다. 과거 명칭인 마드라스로 알려져 있다. 종교적으로 엄격한 색채를 띠기 때문에 전통 복장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화가 꽤 진행된 구역에서는 비교적 서구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가족제 아래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전통 복장을 입는 것을 문화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여성은 사리를, 남성은 베스티와 셔츠를 즐겨 입는다. 언어는 타밀어를 많이 쓴다. 마드라스 바샤이라고 해서, 타밀어를 모국어로 쓰는 화자처럼 자연스러운 슬랭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첸나이 하면 자동차라고 할 만큼 자동차 산업이 크게 발달돼 있다. 자동차 산업의 허브로 각광받으면서 심지어는 인도의 디트로이트라는 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다. 정부의 산업친화적인 정책, 항구와의 접근성, 전통적 산업기지라는 점이 자동차 산업을 크게 키웠다. 진한 파란색 도색이 특징적인 첸나이 지하철이 있다.
2월 기온은 21도~31도다.
1.첸나이 성조지 요새
동인도 회사가 세운 인도 최초의 요새(외관)다.
1653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완공한 이 건물은 현재 타밀나두 주의 총무부와 입법부로 사용되고 있다. 요새 박물관에는 식민지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요새 안에는 1680년에 완공된, 인도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국식 교회인 세인트 메리 교회가 있다.
2.첸나이 산토메 성당
예수의 제자 도마가 안치된 성당이다.
첸나이의 산토메 지역에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도마가 인도로 와서 AD 52~72년 동안 선교하다가 순교한 후 묻힌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1504년에 포르투갈이 탐험가들이 건축했다. 1893년에 영국인들이 신고딕 양식인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한 성당이다. 아름다운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로 성당 뒤편에는 도마의 무덤을 참배할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
1956년 3월 1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준대성전급으로 승격되었고 2006년 2월 11일 가톨릭 성지가 되었다. 본당 회중석은 길이가 34m, 너비가 10m이며, 회중석과 성소 사이에는 길이 32m, 너비 7.6m의 익부(翼部)가 있다. 뾰족탑은 3층 규모이며 최상층에 시계가 있고, 뾰족탑에 달린 십자가의 끝은 지면으로부터 50m 높이이다. 성당 건물 옆에 박물관이 붙어 있으며, 도마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곳이 보존되어 있다. 인도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3.첸나이 마리나 해변
인도 타밀나두 주 첸나이 벵골만에 인접해 있는 해변이다.
첸나이 도시를 따라 이어진 인도양 바다의 해변이다.
해변 북쪽에 있는 세인트 조지 요새로부터 남쪽에 있는 포어쇼어 이스테이트까지 6km로 인도에서 가장 긴 자연 도시 해변이다.
인도 남부 첸나이 관광 후 16:05분 비행기 탑승 후
스리랑카 콜롬보로 이동 1시간 20분 소요.
스리랑카 콜롬보에 17:25분 도착하여 스리랑카 여행한다.
<선택관광>
1.스리랑감 사원
스리랑감은 남인도 타밀나두주에 있는 도시다. 티루치라팔리의 북쪽 약 3km, 코베리강(江) 안에 있는 섬에 있다. 힌두교의 중요한 성지이며, 중심 사원은 17세기에 비슈누신(神)에게 바쳐진 것으로, 거대한 7각형 모양에 주변 길이가 3.5km나 되며 ‘천주실(千柱室)’이라는 큰 홀이 있다. 이 사원의 부근에는 더 오래 된 사원들이 많이 있으며, 10세기 이후의 각종 비문(碑文)이 현존한다.
코베리강의 연안에는 힌두교의 성지가 많아 ‘남부의 갠지스강’이라 일컬어지며, 이들 성지를 순례하는 힌두교도가 찾아오기 때문에 스리랑감도 번영을 누린다. 티루치라팔리에서 마드라스를 비롯한 각지로 통하는 철도가 뻗어 있다.
스리란감(Srirangam)에 있는 란가나타(Ranganatha) 사원은 비슈누신을 모신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며 13세기부터 시작하여 17세기에 완성되었다. 사원은 7겹으로 만들어진 주벽(周壁)이 있고 21개의 고푸라가 서 있다.
그림 스리란감 란가나타 사원 배치도에 나타나 있는 사원 평면은 안쪽에 4겹으로 주벽이 있는 부분의 건물 배치도이며 4번째 담장 구조는 매우 웅장하다. 이 담장 동북쪽에는 1,000주(柱) 홀의 만다파(A)가 서 있으며 그 평면 크기는 150×42m이다. 기둥수는 정면 16개, 깊이 방향으로 63개 모두 합해서 953개가 된다. 이와 같은 1,000주 홀의 건축은 비자야나가라 시대에 일반적으로 발전되었다. 기둥 간격은 사방 3m 정도이며 홀의 주위 부분 기둥 높이는 3m이고 홀 내부는 기둥 높이가 6m이다. 모든 기둥은 단일석(單一石)으로 되어 있으며 조각장식이 있다. 1,000주 홀의 남쪽에 있는 작은 규모의 세샤기리(Seshagiri) 만다파(B)는 이 사원에서 가장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 전면에 있는 8개의 대형 단일석 기둥에는 말이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말의 조각장식은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그 주제(主題)가 특이하다. 말을 탄 사람과 시종자들 및 신화적인 동물들이 말을 다루는 모습이 매우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쪽에 서 있는 고푸라(C)는 높이 44m이다.
후대에 가서 추가된 3겹의 높은 담장들 안에는 주목할 만한 건물이 없으며 브라만 사제들과 사원의 관리인들의 주거용 건물들이 점유하고 있다. 3겹으로 추가된 담장 4면에는 벽돌구조로 만든 고푸라들이 각각 서 있으며 그 표면에는 석회를 발라서 다양한 조각장식을 하였다. 가장 외부의 담장 내부에는 시장과 상가들 및 순례자들의 숙소들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외부의 담장으로 둘러 있는 란가나타 사원의 전체 경역 범위는 750×860m이다.
이 사원의 성장과정은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미완성의 최남단에 서 있는 고푸라는 1987년에 상부구조가 완공되어 그 높이는 72m이다. 이 사원의 규모는 인도 최대의 것이며 경내 시가지는 활기에 넘치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서 매우 번화하다. 대부분의 건물에는 비자야나가라 양식의 조각장식이 되어 있다. 이 사원의 기능은 단순한 종교의식을 위한 것뿐 아니라 부차적인 기능으로 시민들의 집회, 교육, 음악 및 무용 등의 활동을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2.첸나이 악어은행
첸나이에 있는 악어농장.악어들 많다.
인도 첸나이 1월 날씨
20°C평균 최저기온
29°C평균 최고기온
34.5mm평균 강수량
첸나이의 1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20.4℃, 평균 최고기온이 28.9℃로 더운 편입니다. 일교차는 평균 8.5℃이며, 평균 강수량은 34.5mm, 평균 강수일수는 2.7일로 비가 적습니다.
1월 옷차림
서울의 7월 중순 기온과 비슷합니다. 얇은 반소매 옷가지 위주로 챙겨가시고 모자와 선글라스등을 챙기셔서 자외선 차단에 신경써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인도 첸나이 2월 날씨
21°C평균 최저기온
31°C평균 최고기온
12.5mm평균 강수량
첸나이의 2월은 강수량이 12.5mm 이며, 강수일수가 0.9일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평균 최저기온은 21.2℃이고 최고기온은 30.6℃로 우리나라의 8월 평균기온과 비슷합니다. 평균 일교차는 9.6℃로 큰 편입니다.
2월 옷차림
강수일수가 0.9일로 매우 적으며 강수량도 적어 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덥고 건조한 날씨이므로 시원한 옷차림을 하시고 밤엔 걸칠 수 있는 얇은 옷을 챙기시길 바랍니다. 여행 중 지속적인 수분섭취를 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