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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일로 詩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골드
그는 왜 홀로 걷고 있는 것일까? 복잡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다는 것은 누구나 구미가 당기는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임에 분명하건만,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 실행하기 어려운 길을 왜 그는 걷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그에 대한 나의 진솔한 화두였다. 그가 지난 4월 29일 이 여행을 시작하였으니 벌써 10여일을 그는 홀로 걷고 있다. 나는 5월8일 아침 7시 50분에 부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며칠간 그와의 동행을 함께 하기로 그의 승낙을 얻은 것이다. 한 열흘을 그와 함께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마음 같아선 그와 강화도까지 끝까지 걷고 싶었지만 내 체력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나도 박물관 교양대학과 가양주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속버스는 부안까지 3시간 10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도중에 휴게소에 들러 밀짚모자와 우비 하나를 샀다. 부안에 도착하여 그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가 쉬고 있는 지점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서로 해후했다. 그는 벌써 얼굴이 그을렸고 그동안 깍지 않은 수염이 제법 자라나서 그럴듯한 모습이 어울렸다. 이 세상의 길에는 우리처럼 도보여행이나 자전거여행을 하는 나그네도 더러 있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이 사진속의 인물이 그의 배낭에 꽂힌 "서해안을 따라서 목포-강화" 라는 깃발을 흥미있게 바라보며 인사말을 건네온다. 그도 자전거로 서해안길을 가고 있으며 일산 자전거 도보여행 동호인 아무개라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일산에 같이 사는 이 두 나그네들은 금방 친숙해져서 내가 한 나그네와 또 한 나그네의 이 기념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그와 함께 길을 걸었다. 내가 십여년 전 전주에 근무할 때 수시로 다니던 길이었다. 그 당시 본부에서 감사가 나오거나 외빈을 접대할 때는 부안 내소사와 채석강만한 풍광이 없었다. 그래서 그 분들을 모시고 수시로 자동차로 그냥 지나치던 이 길을 도보로 걷는다는 것이 새로운 감회에 젖게하었다. 가는 길목의 유채꽃밭이 너무 아름답다. 간혹가다 자동차는 지나갈지언정 보행인은 그와 나 단 둘뿐인 그런 길이었다. 한 3키로 정도 걸었는데 문제가 터졌다. 내가 도보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그래도 장성한 딸년들이 마사이 신발을 사왔는데 치수가 맞지 않아 깔창도 없이 한 십년 처박힌 운동화를 태연히 신고 왔는데 걸어보니 발바닥에 약간의 모래같은게 남아 걷는데 좀 지장이 있었지만 이를 무시한게 화근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걷는게 약간 거북스러웠지만 미련 곰텡이처럼 그 모래를 털어내지도 않고 걷다보니 발바닥이 내게 강력한 항의를 한 것이다. 이런 나의 사정도 모르고 논두렁 둠벙가의 황소개구리는 그 큰 목청으로 우엉우엉 울어댄다.
점심 때가 되어 부안에서 제일 유명한 향토음식점(계화회관)에 들르게 되었다. 오늘의 오후 여행 일정은 부안읍에서 죽산면까지 가기로 한 여정인데 죽산으로 향하는 순로에 이 식당이 있는 행운을 입었고, 사실은 내가 전에도 이 집은 알고 있었는데 택시 기사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한 결과였다. 대합정식을 주문했다. (1인분 13,000 대합죽, 대합탕, 대합구이) 12시도 채 안됐는데도 자리가 겨우 한자리 남아 우린 운좋게 좌석을 얻어내었으나 탕을 끓이고 구이를 하고 죽을 쓰느라 한 30분정도 기달려야 했다. 기다리기도 지루하고 목도 말라 우선 맥주 한 병을 시켜 그와 함께 목을 추기었다. 음식이 정갈하고 담백하다 보니 어이 소주를 안시킬 수 있으랴? 그와 함께 소주 한 잔 곁들이니 목넘김이 부드럽다. 걷는다는 명제를 스스로에게 묻노니, 스피드한 시대에 스피드한 운송수단에 담보잡혀 살아 온 현대인들에게 우리의 인체는 왜 조물주가 너희 인간들에게 발을 주었느냐고 되묻지 않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대합죽을 참 복스럽게도 잘 먹는다. 대합구이를 먼저 먹으라고 했더니 죽이 식으면 맛이 없다고 구이는 나중에 먹겠다며 그는 순식간에 그 죽을 달게 비웠다 그와 내가 대합정식을 먹는 모습을 스냅사진으로 한 장 찍어달라고 종업원에게 부탁했으나 시간이 없어 나중에 곧 찍어드리겠다는 그 종업원의 의 약속은 빈말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식사를 다하고 느낀 바이지만 현지인들은 대합찜(대합과 온갖 해물을 버물린 찜)과 대합죽을 따로 시켰다. 대합찜 큰 냄비 하나 가득 30,000인데 양도 많아 보이고 더 먹음즉스러웠다. 소주 마시기도 대합찜이 더 풍미가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이미 끝난 일, 다음에 올 일이 있으면 현지인과 같이 주문하리라
점심을 마치고 우린 다시 길을 걸었다. 내 발은 몹시 부릅터서 걷기가 불편하였다. 반나절도 못걸어서 벌써 이지경이라니 난 걷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난처하기만 하였다. 그가 말했다. 장기 도보여행은 발바닥을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한다고.... 길도 재미없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 같아 보였지만 그는 달리 이 길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이 도보여행을 위하여 5만분의 1 지도를 구간에 따라 오려 그 지도를 손에 들고 길안내를 하며 말없이 앞서 가고 있었고, 나는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으로 그와 한 3백미터 거리를 두고 그냥 묵상에 잠기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시 쉬는 동안 그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다. 저명한 여행기고가의 모습이며 노예술인의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벗어나니 동진강이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포위되어 멸망을 앞둔 시점 그 당시 일본군은 모국이나 다름없는 백제(구다라)를 구하기 위해 대단위 전함을 이 동진강에 파견하여 당나라 수군과 맞붙었지만 그들은 참패하였고 이 패전과 동시에 백제도 멸망하였다. 일본은 한탄하였다고 한다. 모국이나 다름없는 구다라를 이젠 언제 가볼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일본은 20세기 초 동북아 삼국 5천년 역사상 서해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대파하고 만주국을 세우고 모국이나 다름없다는 조선을 집어삼키고 식민지를 삼았음에도 모자라 미국을 상대로 이미 질 전쟁을 하였으니, 일본의 극우세력들이여! 제발 반성할지어다. 그 동진해전의 무대인 이 동진강은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좁은 강이었다. 백제가 사비성에 도읍을 두었던 그 시기엔 이 동진강 일대는 드넓은 바다였다니 이런게 바로 상전벽해라고 하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호 애재라! 그나마 동진강은 몹시도 오염돼 있었고 동진교도 500미터가 되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 동진강 휴게소에서 그와 나는 맥주 2병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는 별로 말이 없다.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같이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 수염도 더부룩 길렀고 꼭 형님 같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없었지만 . 난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간혹 우스개 소리를 나불댔다. 오늘의 여행종착지 죽산면에 도착하였다. 마침 우리와 같은 도보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익산에서 부안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가 길을 물었다. 죽산면에는 민박이나 여관이 있는지의 여부였다. 그 도보 여행자가 답하기를 죽산면에는 여관이 없다는 것이다. 김제 시내에 가서 잘수 밖에 없다는 답을 얻었다. 난 호기를 부렸다. 아무리 인심이 각박하다지만 우리같은 도보여행자에게 하룻밤 재워 줄 집이 없겠느냐고 큰소리를 쳤지만 곧 후회해야 될 말을 내 어이 그리 쉽게 하였는고? 그의 배낭에 꽂힌 서해안을 따라서 목포-강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웃고 있다.
죽산면에서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는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에서 그의 사진을 한 방 찍었다. 놀랄만한 일은 일본은 한일합방이 되기도 전 이미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자국민을 상대로 조선어회화를 각 직업분야별로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조선어회화 교본이 일본의 각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조선어회화 독본이 우리의 고어를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이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한 한국의 한 여대성이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난 한달여 전 어느 중앙지를 통해 알고 있었는데 이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에 와보니 그 사실감이 피부에 와닿는다 하시모토는 벌써 1906년에 이곳에 진출하여 헐값에 개간지를 사들였으니 합방뒤에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자세한 하시모토의 족적은 아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내부, 지금으로 부터 약 100년전에 그들은 이런 현대식 대농장 사무실을 차리고 조선인들을 550명이나 고용하며 대단위 기업농을 영위했으니 할말 없다. 그 당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의 주인공들이던 이 죽산면민들이 당한 가혹한 착취를 어이 필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옛 우리 조상들의 허기진 뱃가죽과 한숨소리가 여기 저기 들려온 듯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잠자리였다. 죽산면은 정말 빈촌이었고 숙박시설도 없었다. 나는 어떤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하룻밤 재워주시고 밥도 할머니가 드시는 그대로 차려주시면 고맙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물론 돈도 드리겠다고 하였으나 그 할머니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내가 한마디 했다. 할머니 보아하니 연세가 칠순은 넘어보이시는데 저희도 육순이니 누님같은 분이시고 우리도 그리 나쁘지 않는 사람이며, 서울서 오랜 직장생활하다 그만 두고 이렇게 여행길에 접어들어 산천을 구경하는 사람들이니 안심하시고 덕을 베풀어달라고 말했다. 그 할머니는 처음에는 응할듯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거절사유가 걸작이었다. "아따 혼자 산지라." 내가 답했다. "아따! 할머니 혼자 사시면 어때요?" "방은 있는데 화장실에 갈려면 내 안방을 거쳐가야 쓰는디 어찌 그라겠소. 안돼겠소. 그리고 좁은 바닥 소문이라도 나면 으짤라구라. 그리고 밤늦게 아들이 온다고 하였어유."
난 거절을 당했지만 유쾌하였다. 할머니의 사정을 들어보니 딴은 그럴듯 하다. 그렇지만 그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더 재미있었다. 처음엔 혼자 산다고 해놓고 갑자기 왜 아들타령이며 <밤늦게 아들이 온다고 하였어유>의 語尾인 <어유>이다. 이 곳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이지만 충청도 방언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그 할머니의 마지막 핑계에서 접하고 이제 충청도 길도 머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이 날 밤의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그와 함께 두군데 식당을 들러 내가 저녁과 아침을 사먹을테니 재워달라고 부탁해 보았지만 모두 거절을 당했다. 개나리 봇짐에 감발을 싸매고 정처없이 길을 떠나던 100년전 조선의 나그네들이 들으면 세상 인심 참 고약타 돈을 준다해도 싫다하니 말세로다 절로 한탄할 만한 일이었다.
할수 없이 죽산면에 있는 파출소로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죽산면의 그 파출소장은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사정을 다 듣고 그는 우리에게 커피도 대접하면서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하에게 전화하여 경찰순찰차로 우리를 김제시에 있는 여관까지 바래다 드리고 내일 아침에 그 여관에서 이 분들이 다시 여행의 시발점이 될 이곳 파출소 까지 픽업해 드리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와 나는 생전 처음으로 경찰순찰차를 타고 보무도 당당히 김제시내의 아리랑여관에 투숙할 수 있었다.
아리랑 여관에 투숙하니 목욕탕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고 숙박비는 25,000 이었는데 투숙객은 목욕이 공짜였다. 나는 목욕을 끝내고 그와 함께 내 워킹화를 사러 나갔다. 10년 째 묵혀둔 그 운동화는 반나절의 강행군에 앞뒤축이 모두 아가리를 벌린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있었고 내 양발은 물집이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고생한 경험을 거울삼아 질좋은 르까프 워킹화를 한 족 구입했다. 그리고 잠을 청하는데 첫날 밤이어서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냥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까웠다.
아리랑여관 인근의 콩나물해장국집에서 모주 한 잔을 곁들어 아침을 먹고, 7시30분경 우린 택시를 잡아타고 벽골제로 갔다. 어제 우리를 이 여관까지 데려다 준 그 경찰관에게 아침에 우리를 픽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두었기 때문이었다. 벽골제와 조정래문학관을 구경하고 우리가 알아서 가겠다고..... 사실 내가 전주에서 근무할 때 이 벽골제를 보고 싶었지만 직원들이 별볼일 없다고 자꾸 말해서 접어둔 상태였기 때문에 여관에서 한 3키로 정도 떨어진 벽골제를 이 기회에 보지 못하면 다시 볼 기회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벽골의 어원은 벼의 고향 (稻鄕)이다. 이를 이두식 한자로 표현하여 벽골제(碧骨堤)가 되었다 한다. 벽골제는 아담한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제일 처음으로 접한 곳이 단야각이었다. 단야각의 전설을 읽었다. 단야각 바로 뒤에 AD300년에 이 벽골제를 축조할 당시 인부들을 점검하는 돼내미 건물이 있었고 벽골제에 들어오기 전 왼편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신털뫼이다. 그 당시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낸, 그 흙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산이 되었다고 한다.
벽골제는 지금으로 부터 1700년전에 백제국이 세운 삼국중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저수지였다. 순진스럽게도 난 그 드넓은 저수지를 보려고 제방으로 급히 올라 갔다. 그러나 그 광대한 저수지의 물의 형태는 이처럼 조그만 수로로 변해 있었다. 옛 벽골제의 둘레는 어른 걸음걸이로 77,406보라고 하였으니 1보를 대략 60센치로만 쳐도 그 둘레가 40키로가 넘는 바다와도 같은 저수지는 온데간데 없고 효용가치를 상실한 벽골제는 거대한 논밭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현직이었을 때 직원들이 벽골제 뭐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지금 남아있는 이 수로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제방 둑의 길이도 한 삼백미터 정도에서 끝나 있었다. 물론 여기저기 제방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2천년의 세월도 이리 잠시 지나가는 것이려니 생각하니 나그네의 회포가 가이 없다.
실망을하고 내려오다 이 벽골제 모형도 앞에서 난 옛 벽골제의 모습를 보고 겨우 보상을 받아낼 수 있었다. 바다같은 그 큰 저수지에 배수 관문이 다섯개나 있었고 경작하는 논의 규모가 약 삼천만평에 물을 대어 주었다니 아니 어떻게 1,700여년 전 이런 방대한 관개농업을 하였는지 옛 부강한 백제국이 연상되었다. 단야각의 전설에서 볼수 있듯이 그들은 얼마나 막강한 국가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가? 옛 백제인들에게 새삼 다시 존경을 표하며 벽골제를 빠져 나올 무렵 이 벽골제 공원을 조성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석정 시인의 벽골제 조성에 붙인 축시 시비가 있어 이를 사진에 간직하였다.
그 내용을 보기 쉽게 다시 옮긴다.
그것은 二千年前 까마득한 옛이야기
治山 治水로 나라를 다스리던 우리 祖上들의 슬기로운 智慧로 물둑을 이뤘으니 놀라지 말라 그 빛나는 우리 祖上들의 슬기로 七萬七千四百六步의 저 巨創한 물둑의 둘레와 九千八百四十結 九0.五ㅏ의 논이 모자라도록 지던한 벌판을 물은 흘렀거늘 太平盛代에 天地를 뒤흔들던 擊揚歌도 높았으리니 이제 우리는 碧骨堤 옛자리에 신털뫼와 돼내미를 바라보며 이 金萬平野에 울려퍼질 내일의 擊揚歌를 마련하리
지은이 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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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저도 팔봉지점시절 큰 맘먹고 벽골제를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적있으며 틈만나면 채석강에가서 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동진강휴게소서 아이스크림도 먹곤 하였지요..
지금도 마음은 셔해안길에 있습니다.
그쪽 지방은 생소한데 위 사진과 자세한 설명문까지 곁들여 많이 알게 되었네요.나중 시간되면 나도 차로 한바퀴 돌아볼까하는데 미리 알려주어 감사합니다.그런데 전국일주하면서 경상도와 강원도는 제외하여 아쉬움이 있습니다...
효림이 서해안을 완주한뒤 제가 그쪽 지방에 한 번 도전할까 하나이다.
난, 자동차로 전국사찰 순례를 할까, 서해안 동해안 남해안 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베트남 계획>과 체력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데 ........ 맘 가는대로 행동하는 님들 부럽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자동차로 어디를 못가시리이까
언제쯤 다시 동행하실 계획인가요
연락주세요

마무리 즈음에 함께했으면 합니다

27일 동행할까 합니다.29일쯤이면 그의 도보여행도 끝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