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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절 장수산성과 주변유적들과의 관계
앞에서 장수산성은 그 형식과 내용의 여러 측면에서 고구려의 수도성들이였던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데 대하여 보았다. 수도급방위성으로서의 장수산성의 특징은 그 주변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과의 관계를 보면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다.
장수산성 남쪽의 구릉지대와 재령강 량안의 평지대에는 아양리토성과 도마동토성, 그리고 아양리, 월당리의 고구려 건축지, 1000여기나 되는 고구려 돌칸흙무덤떼 등이 하나의 구성체로 이루어진 고구려 시기의 도시 유적이 있다.
그리고 장수산성의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안악지방에서는 고국원왕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벽화무덤이 10여기나 알려졌다. 또한 장수산성 주변 해주, 배천, 연안, 평산, 서흥, 옹진, 태탄, 안악 등 장수산 일대와 통하는 중요한 요충지들에는 험준한 산세에 의거하여 쌓아진 고구려 산성들이 분포되여 있다.
그런데 장수산성을 둘러싼 고구려 유적들은 거리상으로나 그 배치상태와 내용으로 볼 때 장수산성과 서로 밀접히 련관되여 있거나 련관시켜 볼 수 있는 유적들이다. 이것은 장수산성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도시유적, 안악지방 벽화무덤, 주변 고구려 산성들과의 호상관계를 보기로 한다.
1. 부근의 도시유적과의 관계
부근의 고구려 도시유적은 장수산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유적이다.
산성 부근의 도시유적인 아양리토성과 도마동토성, 아양리, 월당리 건축지, 무덤떼는 장수산성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적 유물의 구성에서 하나로 통일되여 있다.
1) 토성, 건축지, 무덤떼의 분포와 내용
① 토성
아양리토성
이 토성은 산성에서 남으로 약 1.7km 떨어진 재령강 서안의 아양리 성현동 벌판에 흙으로 둘려 쌓아진 평지성이다. 이 평지성은 동쪽으로는 재령강에 면하고, 서쪽은 장수산의 하니봉에서 남으로 뻗은 긴재등에, 남쪽은 대추모로산에 면하고 있다. 성벽은 북벽과 서벽의 일부 구간만 남아있다. 서벽은 긴재등에서 동쪽으로 뻗다가 뚝 끊어진 사직골 남쪽언덕의 동쪽 코숭이에서 시작되여 남으로 긴재등, 동쪽 경사면의 웃턱을 따라 대추모로산의 북쪽 경사면에 닿는다.
서벽의 길이는 약 1.5km이다.
북벽은 서북모서리로부터 140m 남아있다. 성벽이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성은 본래 남북으로 길게 노인 부정형의 길쭉한 형이였으며 그 크기는 약 2.5km였던 것으로 인정된다. 성벽의 구조를 보면 평지에서는 4-5m, 폭에 0.3-0.4m 깊이로 땅을 파고 진흙을 다져넣은 다음에 그 우에 성토하였다.
경사지에서는 기초를 따로 마련하지 않은 채 땅위에 그냥 성토하였다. 지금 성벽이 제일 잘 남아있는 높이는 0.55m이다.
이 토성은 성벽부근의 장대, 또는 감시소였다고 인정되는 곳들에서 고구려의 노끈무늬, 격자무늬, 그물무늬가 새겨진 붉은기와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에 쌓아진 성인 것이 분명하다.
토성안의 중심부에는 동서길이 76m, 남북너비 67m의 크기를 가진 축대를 한 건물터가 있다. 축대는 지면보다 0.5-0.8m더 높다. 축대 우에서는 많은 주추자리돌들이 드러났는데, 남북으로 치우쳐 동서로 길게 4줄, 동쪽에서 3줄 드러났는데 그 배치상태로 보아 축대 우에는 남향한 두 채의 건물이 동서로 나란히 놓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주추자리돌의 규모와 생김새는 평양일대의 안학궁터와 청호리 건물터와 비슷한데* 궁터로 인정된다.
* ≪조선고고연구≫ 1990년 2호, 9페지.
토성안의 축대 건물터 주변 특히 남쪽에는 수많은 건물터가 집중 배치되여 있다. 건물터의 구체적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기와가 드러난 상태를 보면 건물터가 매우 조밀하게 배치되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안에는 3개의 못자리와 여러 개의 우물터들이 있으며, 붉은색의 련꽃무늬 수키와막새를 비롯하여 붉은 기와, 청회색 기와, 회색 기와, 벽돌, 유약바른 물결무늬 단지, 옥도장, 쇠 아궁틀, 쇠보습 등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성안에서 드러난 붉은 기와와 회색 기와는 산성에서 드러난 것과 꼭 같다. 이 평지성 유적은 그의 규모나 성안의 건축지에서 드러난 유물로 보아 집안의 통구성이나 평양 안학궁성 다음가는 유적으로 주목된다.
도마동토성
이 토성은 장수산성 외성 남문 앞 옛 도마동 부락을 둘러싼 토성이다. 그 둘레는 약 2km이다. 이 성은 장수산성의 외성남문을 더욱 보가하는 동시에 도시의 동북방이대를 지키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인정된다.
② 건축지
건축지는 산성의 남쪽 아양리와 월당리 일대의 넓은 지역에 분포 되여 있다. 건축지는 건축부재의 하나였던 기와의 분포 상태를 통하여 그 범위를 알 수 있다. 건축지는 평지성 유적이 있는 아양리 일대와 월당리 일대를 중심지역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동서 약 4km, 남북 약 4.5km 범위 안에서 고구려 때의 청회색, 붉은 색, 회색 기와 쪼각이 수많이 드러났다. 건물터의 규모와 구조를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은 아양리토성 안과 월당리의 반송동 상월동 룡호동에서 드러난 건물터 들이다.
반송동에서는 동서로 70m 남북으로 230m 범위에서 3채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비교적 잘 남은 반송동 2호 건물터는 모래 우에 5-7cm의 두께로 바닥을 굳게 다지고 세웠던 것이다. 건물터의 바닥에서는 주추자리돌들이 드문드문 드러났다. 건물터와 건물터 사이에는 80-100cm의 폭으로 강자갈을 깔았다. 이 시설은 서로 직각이 되게 곧추 뻗었는데 이것은 건물과 건물상이의 도로 시설로 추측된다.
상월동에서는 돌을 깔아놓았던 도로시설과 건축군이 드러났다. 상월동과 룡호동의 건물터로 방송동의 것과 비슷한 것이다. 건축지들에서는 많은 기와쪼각들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서 아양리 소재지부근(이전 성촌동, 중초동, 성현동)의 운대천 좌안에는 고구려 때의 붉은기와 (노끈무늬, 격지무늬, 그물무늬)가 도처에서는 나왔다. 같은 종류의 기와는 아양리의 북부(이전 동산동, 도마동 일대)와 월당리 북부(이전 반송동, 하월동, 상월동)에도 많고 월당리 남부(이전 림암동), 아양리 남부(이전 장동) 등에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붉은 기와류는 장수산성은 물론이고 평양대성산성, 청호동일대, 삼석구역 장수원일대, 봉산군 토성리 등지에서 드러난 것과 같다.
이밖에도 아양리 일대에는 청회색기와, 회색기와류들도 널려있는데 청회색 기와는 붉은색기와보다 아래층에 있고 회색기와는 위층에 있다.
기와는 그 분포범위가 넓은 뿐 아니라 중요건물들에만 쓰이었던 막새기와도 발견되었다. 아양리 소재지 부근, 동산동 앞 재령강가, 반송동, 하월동, 상월동 등지에서는 련꽃무늬, 해살무늬 등이 있는 붉은 수키와막새들이 발견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산성에서 드러난 것과 꼭 같은 것들이 적지 않다. 막새기와들이 드러난 것을 통하여 이 일대에는 비교적 큰 건물터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와분포지역 안에서는 강자갈로 포장한 도로시설과 대형이 주춧돌, 주추자리 돌시설, 문확돌 등 시설물의 일부가 드러났다. 이처럼 넓은 구획 안에서 고구려 고유의 붉은기와 청회색, 회색기와들이 드러난 건축지가 있고 중요건물들에만 쓰이었던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대형주추돌과 문확 돌이 나왔다는 것은 이 일대가 고구려 남부의 중요도시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③ 무덤떼
산성부근에는 고구려 무덤들이 수많이 분포되여 있다. 무덤은 산성남쪽기슭에 300여기 긴재등에 100여기, 신원읍의 백할동, 대청리, 탑동, 암지동, 로환동, 월당리의 룡호산과 망우동, 반송동, 운양리 등지에 모두 1000여기 있다.
무덤의 분포범위는 장수산 남쪽기슭 긴재등 월당리 등지에 동서로 5.5km, 남북 6km이다. 무덤의 형식은 고구려의 평천정식돌칸흙무덤과 고임천정식돌칸흙무덤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청회색기와층에 해당한 유물은 평천정식돌칸흙무덤에서 많이 드러났으며 고임천정식돌칸흙무덤에서는 붉은 기와층의 유물갖춤새와 공통한 유물이 드러났다. 장수산 일대에 분포된 무덤들은 당시 이 일대에 사람들이 집중하여 살았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일대의 무덤수는 4세기 중엽 이곳에 수많은 인구를 가진 고구려 남방의 큰 지방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장수산성과 그 부근도시 유적과의 관계
장수산성은 그 주변유적들인 토성, 건축지 무덤떼 등 부근의 도시유적과 밀접한 련관을 가지고 있는 유적이다. 산성이 부근의 도시유적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유적이라는 것은 이 유적들이 모두 주민집단의 거주와 직접적으로 련관되여 있는 것으로서 선행시기 고구려 수도성들이 있던 집안일대와 평양 대성산일대 유적들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집안일대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가 있던 곳으로서 고구려 유적이 매우 많다. 집안일대의 유적들은 산성인 산성자산성(위나암성)과 그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평지성인 통구성(국내성)이 자리 잡았고 그 부근에 동대자건축군, 그리고 무덤때가 있는데 이 유적들은 호상 밀접히 련관된 유저들이다. 즉 평지성인 통구성은 평상시 왕이 거처하고 있던 궁성이며 산성자산성은 전시에 왕의 거처지와 대건축군을 포괄하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성이며 주변의 무덤떼는 산성과 평지성, 건축군 유적을 쓰던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서 호상 유기적인 련관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후의 수도였던 대성산성과 그 남쪽의 평지성인 안학궁성이 있으며 그 주변의 청오리 일대의 건축지 1,000여기의 무덤떼가 서로 밀접히 련결되여 있다. 이러한 고구려 유적의 배치와 구성은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알려졌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시기 수도성의 유적배치와 구성은 산성, 평지성건축지, 무덤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평지성, 건축지, 무덤은 하나로 련결되여 있는 유적이라는 사실이다.
장수산성과 그 부근유적의 밀접한 관계는 드러난 유물을 가지고도 설명할 수 있다. 산성과 평지성, 건축지 무덤들에서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는 모든 유적들에서 다 드러난 유물이 있다. 그러한 유물은 붉은기와이다. 붉은기와는 산성과 평지성, 건축지 무덤에서 모두 드러났으며 그것은 이 유적들에 하나로 관통되고 있는 유물이다.
이러한 관계는 산성의 축조년대를 론하면서 언급되였다. 이것은 산성과 그 부근 유적들이 시기적으로도 밀접히 련관된 유적이라는 것을 실증해준다.
산성과 부근의 유적들이 서로 밀접히 련관된 유적이라는 것은 유적분포범위의 긴밀성을 통하여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산성, 평지성 건축지 무덤 떼는 4-7km 범위안에 집중분포 되여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도시유적이 별개의 유적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장수산성 일대의 유적 유물이 집안일대나 평양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유물과 같이 고구려 력사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적유물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고국원왕무덤을 비롯한 안악지방의 벽화무덤과 련관시켜 보면 더욱 명백히 볼 수 있다.
2. 안악지방 무덤과의 관계
장수산성과 안악지방의 고구려벽화무덤과의 관계는 장수산 일대에 4세기 수도급에 해당하는 성곽유적과 고구려의 대도시유적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이 유적들의 성격을 밝히는 문제와 4세기 안악지방에 왕릉급무덤, 10여기가 되는 벽화무덤들이 어떻게 되여 생겨나게 되였는가하는 문제행명은 서로 관계되는 것으로서 반드시 해결 되여야 할 문제이다.
안악지방에는 현재까지 고국원왕릉을 비롯하여 11기의 고구려 벽화무덤들이 발견되였는데 그것들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것으로서 이른 시기의 것이다. 안악지방에 있는 벽화무덤들로는 안악 1,2호 무덤, 고국원왕무덤, 복사리벽화무덤, 봉성리 1,2호 무덤, 로암리벽화무덤, 안악읍벽화무덤, 평정리벽화무덤, 월정리벽화무덤 들이다. 그 가운데서 고국원왕릉은 4세기 후반기 무덤이며, 복사리벽화무덤, 봉성리1호무덤, 평정리벽화무덤, 안악1호무덤들은 4세기 전반기, 또는 4세기말의 무덤이다.*
*≪조선전사≫3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년판, 327페지
고구려의 벽화무덤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80여기 인데 그것들은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20기,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에 54기, 그밖에 11기는 황해남도 안악지방에 분포 되여 있다.
고구려벽화무덤의 이러한 분포상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그것들이 고구려 력대 수도 부근에만 있다는 사실이다. 평양과 집안부근의 벽화무덤들은 그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사정과 관련하여 생긴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것은 벽화무덤이 고위급귀족들의 무덤이며, 또 그런 무덤을 쓸 수 있는 귀족들은 모두 수도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국원왕무덤을 비롯한 안악지방의 벽화무덤들은 무엇과 련관시켜 보아야 하겠는가.
그것은 4세기 안악지방 벽화무덤들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안악지방을 포함한 고구려 남부지방(황해남도)이 차지하고 있던 정치적 비중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고구려 남부지방에 정치, 경제, 군사적 중심지의 존재와 결부시켜 보아야 한다. 특히 고국원왕무덤과 같은 왕릉이 있다는 사실과 비추어볼때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황해남도 지방에 당시 고구려 남부지방의 정치, 경제, 군사적 중심지에 해당되는 고구려 유적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유적으로 주목되는 곳이 바로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고구려 대도시 유적인 것이다.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유적에 대해서는 앞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안악은 고구려 도시 유적이 있는 장수산 부근과는 가까운 곳이며 장수산과 고국원왕무덤은 100리도 못되는 거리에 있다. 그리고 안악지방 벽화무덤의 년대도 4세기 전반기∼4세기 후반기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장수산성과 그 부근유적과 시기적으로 서로 일치하다.
장수산성과 안악지방 벽화무덤들의 관계는 당시 수도였던 평양지방에서 얼마간 떨어져있는 강서지방 벽화무덤들과의 관계를 보아도 별로 차이나는 것이 없다고 본다. 안악일대의 벽화무덤을 장수산성과 그 부근유적, 즉 장수산 일대에 존재했던 4세기 고구려 유적과 결부시키는 것이 무리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안악지방에서 수도급에 해당하는 고구려 유적유물을 찾아볼 수 없고, 또한 당시 고구려가 남쪽의 령토를 통합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한 조건에서 장수산 일대는 고구려 남부의 정치군사적 거점이면서도 전연지대와 가까운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조선에서 고위급에 해당하는 벽화무덤들은 장수산성의 북쪽 안전지대인 안악지방에 썼다고 보아야 리해가 더 잘 되므로 문제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이것은 고국원왕 무덤의 주인공과 관련시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고국원왕은 371년 백제와의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한 왕이다. 고국원왕은 371년 전투 때 평양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그 평양은 고국원왕 무덤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국원왕의 무덤은 안전한 후방에 썼다고 보아야 순조롭게 리해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뒤에서 다시 론하려고 한다.) 따라서 고국원왕무덤을 비롯한 안악 지방의 고구려 벽화무덤들은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게 된다.
3. 주변 산성과의 관계
장수산성 주변에는 고구려 산성들이 수많이 배치되여 있다. 장수산성 주위에 배치된 고구려 성들은 주로 황해도를 남북으로 흐르는 례성강 류역과 바다가 연해에 쌓아졌다. 장수산성 주변의 대표적인 고구려 산성들로서는 해주의 수양산성, 연안의 봉세산성, 배천의 치악산성, 평산의 태백산성, 서흥의 대현산성, 옹진의 옹천성, 태탄의 오누이산성, 안악의 구월산성을 들 수 있다.
고구려가 장수산성과 같은 바위력이 강한 큰 규모의 산성을 쌓은 중요한 목적이 이 성을 거점으로 하여 삼국통일을 실현하자는데 있었고, 또 그것을 저애하는 세력이 남쪽에 있었던 만큼, 고구려는 장수산 일대에 장수산성과 같은 위력한 방위성을 구축하는 것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한 성방어체계 형성에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장수산성과 관련한 성방어체계를 살펴보는 것은 장수산성 연구에서 필수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의 하나이다.
장수산성 주의의 성으로는 우선 장수산성의 남쪽 약 20km 되는 황해남도 해주시 동북쪽 수양산에 있는 수양산성이다. 해주는 에로부터 상륙조건과 해상활동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곳으로 하여 중요시 되여 왔으며 지금도 우리나라 서해안의 중요 항구의 하나로 되고 있다. 바다로부터 해주를 거쳐 북쪽으로 신원, 사리원 이북으로 통할 수 있으며, 륙지로부터 바다로 진출하여 해상활동을 벌릴 수 있다.
수양산성은 북쪽에 멸악산 줄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있고 서남쪽에는 무연한 연백벌과 해주만이 한 눈에 안겨오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성안의 수림이 울창하고 깊숙한 골짜기마다 시내물이 흐르며 이름난 수양폭포까지 있어 경치가 매우 좋다. 수양산성은 동남 북쪽이 높고 서쪽은 낮으며 두개의 깊은 골짜기와 넓은 공지를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이다. 이 성은 북쪽에 높이 솟은 장대봉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련결한 둘레 약 8.2km의 큰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지물을 잘 리용하여 대부분 바위 우에 쌓아졌다.
성벽의 높이는 보통 6-7m이고, 밑너비는 7-8m 웃너비는 3-4m, 남문부근에서 성벽의 두께는 14m이다. 이 성은 거의 전 구간을 량면 쌓기 방법으로 튼튼하게 쌓았다. 성벽은 굽도리부분은 큰 돌로 쌓고 우로 올라가면서 납작납작하게 점차 작은 돌로 수직으로 쌓아졌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있다. 북문을 제외한 모든 문들에는 옹성을 쌓았다.
성에는 수원이 풍부하다. 장대봉 동북쪽과 서북쪽 골짜기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시내물은 합쳐져서 련못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데 여기 절벽과 잇닿는 곳에 수구문을 냈다. 산성에는 14개의 크고 작은 치와 그 밖에 장대터, 많은 집터들이 있다.
수양산성에서는 많은 붉은기와 쪼각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등에 격자무늬가 있고 한쪽에는 베천무늬가 찍힌 것으로서 대성산성이나 다른 고구려 성들에서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수양산성의 축조시기가 고구려시기였다는 것을 실증해주는 자료의 하나이다.
수양산성 밑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해주시 학현동에는 고구려 시기의 도시유적인 내미흘터가 있는데 이 유적과 결부하여 볼 때에도 수양산성이 고구려 시기에 쌓아진 성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해주는 고구려 때 내미홀, 또는 지성, 장지 등으로 불리웠으며 후기 신라때는 폭지군이라고 하였고 고려 때부터 해주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은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힘있게 추진시키던 4세기 중엽, 또는 후반기에 축조되였다고 인정된다.
* ≪조선전사≫3,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년판, 101페지
장수산성의 동남쪽 약 50km 되는 곳에는 봉세산성이 있다. 이 성은 황해남도 연안군 연압읍의 북쪽에 솟은 봉세산(비봉산)의 281.6m 고지를 중심으로 두 개이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등선을 따라 쌓아진 둘레가 2,260m되는 고로봉식 산성이다.
산성의 남쪽에는 둘레가 약 2km 되는 고구려의 평지성 유적인 연압읍 성터가 있다. 연안은 본래 고구려의 동삼홀 혹은 동청이라고 불렸다.
(≪세종실록≫ 지리지 연안도호부)
연안은 예보루터 조선서해연언 여러 고을들 가운데서 가장 이름 있는 곳으로서 그 후 여러봉건 왕조들도 이곳을 황해도 남부의 중심적인 고을로 보았다.
산성의 주변에는 연안, 배천, 청단벌과 봉천일대의 기름진 땅이 펼쳐져 있다.
성의 남쪽으로는 조선 서해를, 동남쪽으로는 례성강하구를 가까이 하고 있다. 성벽은 석성벽와 토성혼축벽으로 이루어졌다. 성벽의 밑에서부터 3분의 2 정도는 석성벽이고, 웃부분은 토석혼축벽이다.
성벽은 산릉선경사면에 주로 외면쌓기 방법으로 축조되였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3.5m 성벽 밑부분 너비는 2m이다.
성문은 동남쪽, 서남쪽, 서쪽, 북쪽에 각각 있다. 성안의 여러 건물터들과 성벽의 여러 곳에는 붉은 색의 격자무늬, 그물무늬, 평행선무늬가 새겨진 기와쪼각이 많이 드러났다. 이러한 기와류는 장수산성을 비롯한 고구려 유적들에서 드러난 기와류와 꼭 같은 것으로서 고구려 시기 축조된 성이라는 것을 확증해주고 있다. 이 성은 그 남쪽에 있는 읍성과 함께 바다로 기여올랐거나 례성강을 건너 배천쪽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에 놓여있고, 북쪽으로는 청단, 해주를 거쳐 신원,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성으로서 고구려 남부의 성방어체계상의 중요한 성곽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성에서 서북쪽 수양산성까지는 약 41km 되며, 동남쪽 치악산성까지는 약 15km 정도 된다.
배천의 치악산성은 장수산성 동남쪽 53km 되는 곳에 있다. 황해남도 배천군 치악산에 있는 이 산성은 고구려 때의 성터이다. *
*≪고고민속≫ 1966년 1호 24-27페지
배천은 고구려때 도랍현인데 개성으로부터 례성강을 건너 황해남도로 들어오는 통로에 있다. 고구려가 여기에 성을 쌓은 것은 이 통로를 지키고 나아가서는 남쪽으로 나가는데 유리한 육로길과 서해를 따라 백제로 내려가는 배길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성의 동쪽으로는 례성강이 연백벌을 누비며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수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수로와 륙로를 리용하여 서쪽과 남쪽으로 통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륙로로 연안 해주, 신원 사리원 이북으로 통할 수 있다. 또한 치악성은 유리한 자연지세를 리용하여 짧은 성으로서 오랜 옛날부터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충지로 리용되였다. 성의 둘레는 3,600m로서 성의 구조형식에 대하여서는 이미 조사 자료가 발표되였다.*
* 우와 같은 책
성안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조각이 많이 드러난 것을 보면 고구려 때 성인 것이 분명하다. 구체적인 년대는 알 수 없으나 례성강가의 서쪽에 남쪽에로의 진출에 유리한 위치에 쌓아진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남진정책 추진 시기에 축조되였으리라는 것이 확실하며 고구려 남방 성방어 체계에서 그가 논 역할이 매우 컸으리라고 인정된다.
이 성은 369년 기록의 치양성으로도 고증되고 있다.*
* ≪고구려 력사연구≫(고구려 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 종합대학 출판사, 1985년판, 204페지.
태백산성(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은 장수산성의 동쪽 약 58km되는 곳에 있다. 태백산성은 동쪽으로는 례성강과 잇닿아 있으며 서쪽은 산으로 막히며 성과 산 사이가 좁은 골짜기로 되여 있다. 그러므로 태백산성은 이 골짜기를 막으면 남북으로 통하는 기본 통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는 요충지에 있다. 태백산성은 고로봉식 지형의 릉선을 따라 돌로 쌓아진 둘레가 2,425m 되는 성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있다. 성벽의 높이는 7m이고, 성벽웃부분 너비 3.5m 내벽은 약 1m 정도 되고 그 밑으로는 내탁(?)이 쌓여 있다.
성벽은 30단 내외로 돌을 쌓아올렸는데 밑으로부터 4개의 단은 계단식으로 쌓아진 것으로 을밀대축대의 밑부분과 비슷하다. 성에는 5개의 치가 적합한 개소들에 있다. 성의 동문부근과 성 안의 여러 곳에서 고구려의 붉은 기와 쪼각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대성산성을 비롯한 평양 지방의 고구려 유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 ≪고고민속≫ 1965년 2호, 53-58페지
태백산성을 쌓은 시기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산성에서 드러난 고고학적 자료로 보아 이 성은 고구려 시기에 처음으로 축조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산군은 고구려 시기 대곡군 또는 다지홀이라고 하였으며 후기 신라 때는 영풍군이라고 하였고, 고려시기에는 평주라고 부르다가 15세기부터 평산이라고 하였다.*
* ≪동국여지승람≫ 권 41. 황해도 평산 건치연력
태백산성은 고구려가 남부통합을 위한 정책수행시기 황해도 일대를 차지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군사시설물의 하나로 건설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현산성은 장수산성의 동북쪽 44km 정도되는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에 있다. 서흥일대는 고구려의 오곡군이 있던 곳이다. 이 성은 둘레가 약 7km되는 고로봉식의 지형에 쌓아진 석성이다.
또한 황주를 거쳐 신원으로 가는 방향, 평산, 신계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의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 성이다. 산성의 남쪽부근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대성산성, 장수산성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한 붉은 기와쪼각이 발견되며 남문 앞 평지에는 30-40m 구간을 두고 돌각담으로 쌓은 네모난 구획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우와 같은 종류의 기와들이 드러났다. 이 모든 사실은 여기에 고구려의 큰 고을이 있었고 대현산성은 그것을 지키기 위한 성이였으며, 그 축조 시기는 장수산성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고고민속≫ 1966년 2호 41-43페지
대현산성에서 남쪽의 태백산성까지의 거리는 약 32km인데 장수산성의 동부에 있는 이 두성은 호상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인정된다. 리조때 여기에는 서흥, 수안, 곡산, 신계, 우봉, 토산, 황주, 봉산 8개 고을의 창고가 있었다. 이 성은 정방산 줄기를 동쪽에서 넘나드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장수산성의 동쪽과 평양의 남쪽방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성이였을 것이다. 장수산성의 서남쪽 약 57km되는 옹진군 본영리에는 옹천성(옹진고성)이 있다. 이 성은 멸악산줄기의 한 가지인 불타산 줄기, 남쪽에 있는 광대산의 여러개 봉우리와 그 사이에 있는 비교적 넓은 골짜기를 포괄하고 있으며 서남쪽의 일부에는 평지에까지 성벽이 뻗어있다.
본영리는 리조 초기까지도 세면이 바다와 강으로 막혀 있어 하나의 작은 반도로 되여 있었다. 이 성은 이런 유리한 자연지세를 리용하여 쌓아졌다. 성의 둘레는 약 4.3km이다. 이 곳은 예로부터 서해해상통로였으므로, 바다를 통한 해상군사활동을 벌리는데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옹천성은 고구려 시기에 쌓아진 성이다. 그것은 성의 위치가 바다 쪽에서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한 것이라든가, 그 지형선정이 고구려 산성들이 가직고 있는 특징의 하나인 고로봉형의 지형을 갖추고 있는 것, 고구려 산성들에서 볼 수 있는 성벽축조 형식의 여러 가지 수범, 4각추형으로 된 성돌, 성벽 밑의 계단식 축조방법, 성 안에서 드러난 기와 등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적인 특징에 의해 고증되였으며 또한 국남7성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력사과학≫1986년 2호, 39-43페지
이 성에서 서쪽의 수양산성까지는 약 41km 이며 북쪽의 오누이산성까지는 약 20km된다.
황해남도 태탄군 성남리의 오누이산성은 장수산성에서 서쪽으로 약 45km 되는 곳에 있다. 이 성은 둘레가 3.5km 되는 전형적인 고로봉형 지형에 축도된 성이다. 그 쌓은 수법을 보면 산을 깎아 량쪽면을 쌓은 것도 있고 량쪽쌓기를 한 곳도 있다.
량면은 가공한 돌로 쌓고 그 가운데는 막돌을 넣었다. 성벽이 제일 잘 남아있는 높이는 2.9m이다. 이곳은 룡연, 해주와 신천, 재령, 사리원으로 통하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고로봉형과 지형, 쌓은 수법 등과 백제의 침범을 막거나 고구려 남진에 유리한 주요 지점에 있는 것만큼 국남 7성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성이다.*
*≪력사과학≫1990년 3호, 53페지.
장수산성의 서북쪽 약 50km되는 곳에 있는 구월산성은 황해남도의 해안지대에 남북으로 뻗은 구월산줄기에 있다. 이 성은 구월산의 주봉인 사왕봉(954m)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산릉선과 여러 봉우리를 련결하여 쌓아진 둘레 5230m 되는 고로봉식 석성이다. 성벽 축조는 량면쌓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외면쌓기방법도 적용되였다.
성돌은 구월산에 흔한 화강암을 4각추 모양으로 가공하여 썼다. 구월산성의 성벽축조에서는 성벽 밑부분에 계단식으로 쌓아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집안의 통구성, 평양성의 을밀대축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축조형식이다.
성안의 집자리들에서 고구려의 붉은 기와가 발전되었으며 고구려, 고려, 리조시기 구분이 명백한 문화층도 드러났다. 이 성에서 볼 수 있는 성벽구조와 축조방법 성안의 집자리들에서 발굴된 유물, 문화층 등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고증되였다.*
* ≪조선고고연구≫ 1989년 1호 11-18페지
이와 함께 구월산성은 4세기에 해당하는 안악지방 벽화무덤이 분포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조건에서 이 성의 축조는 장수산성의 축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수산성의 서북쪽에 그 위성의 하나로서 건설되였다고 인정된다.
구월산성은 그가 차지한 위치로 보아 이 지역 방위성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장수산 주변에는 규모가 작은 고구려 성들이 더 있었을 수 있다. 우에서 본 장수산성 주변의 성들은 장수산성을 중심으로 한 위성들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성의 규모로 보아 그렇게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성의 규모는 성의 사명과 관련되는 것으로 장수산성의 크기는 주변성들 가운데서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한다. 장수산성이 큰 규모로 건설된 것은 당시 이 성이 가지고 있는 정치, 군사적 비중과 많이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장수산성은 규모뿐 아니라 방위력에서도 제일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장수산성은 주변성들과의 관계에서 중심성의 위치에 놓인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주변성의 분포상태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주변성들은 장수산성의 주위(동, 서, 남, 해안)에 장수산성을 호위하듯 반달형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이것은 중심성인 장수산서과 련결되여 있는 위성들로 볼 수 있다.
주변성들이 장수산성의 위성이라는 것은 그 거리와 적군이 장수산성으로 접근해 올 수 있는 주요통로들에 위치한 것을 보고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 산성들은 대체로 장수산성으로부터 100-130리 정도 되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모두 장수산성에 있는 신원, 재령으로 들어오는 교통로와 가가운 곳에 위치하였다.
다음으로 주변성들이 쌓아진 시가와 축조목적에서 서로 공통한 점을 보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장수산성과 그 주변산성들의 축조시기를 밝힌 기록은 없으나 거기에서 드러난 고고학적 자료들과 당시 고구려의 정치정세로 보면 이 성들은, 4세기 중엽 또는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시기 국토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쌓아진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성들이 모두 해상상륙지점, 침입해올 수 있는 주요길목이면서 고구려가 륙로나 바다 길을 리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는데 유리한 요충지에 쌓아진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장수산성이 4세기 고구려남부의 거점의 하나로 건설된 성이였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현실성 있는 것으로써 장수산성의 위성체계는 장수산성의 축조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370년대에 두 차례의 평양성(남평양성) 공격의 교훈으로부터 남 평양성 방위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고구려 남방의 성 방어체계와 남평양 중심의 위성체계를 완성하려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수산성 중심의 위성성곽방어체계는 일련의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위성체계에 속한 성들이 비교적 규모가 큰 성들로서 방위력이 높은 것이다. 장수산성의 위성들은 거의 3km이상 되는 비교적 큰 성으로서 그 지형과 방위시설의 구축정도로 보아 위력한 요새들이였다. 이러한 성들은 이로부터 개별적 성으로서의 독자적인 역할과 함께 지역방위성의 역할도 수행하였으리라고 인정된다.
장수산성 위성체계의 특징은 도한 매 성들이 장수산성의 위성방위체계에 속한 성들이면서 동시에 고구려 남부의 전연방위체계에 속한 성들이었다. 위성방위체계는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에 있는 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을 배치하여 중심성의 방위를 강화하는 성방어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가 장수산성을 남쪽의 거점으로 삼고 있을 때 방어의 가장 중요한 통로는 남쪽이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의 남방진출을 방해하는 주되는 적이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수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들은 당시 장수산성의 위성이면서 고구려 남쪽의 전연방어체계를 이룬 성들이였던 것이다.
이 위성방위체계 전연방위체계에 속한 매 성들 사이의 거리는 20-40km정도이다. 이것을 보면 성곽방어체계 안에서 1개 성들이 담당한 방위구간이 얼마만한 정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장수산성의 위성방위체계는 고구려 남부의 정치적 중심지의 방위를 강화하는데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로 하여금 남방진출의 성과를 담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