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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절 장수산성은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성
앞에서 론한 모든 것은 장수산 일대가 4세기 고구려 남부의 정치, 경제, 군사적 중심지였으며 장수산성은 바로 그 중심지의 방위성이였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실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하여서는 당시 고구려의 정치정세와 고구려 정세발전에서 장수산 일대가 차지하고 있던 자연지리적 경제지리적인 조건이 어떠하였으며 실지로 4세기 고구려 남부 정치, 군사적 거점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4세기초 중엽 고구려의 정치정세를 보면 서쪽의 전연침략세력과 심각한 대립투쟁을 벌리고 있던 시기이다. 이런 조건에서 고구려 국가 앞에 나선 가장 중요한 과업은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급속히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반도의 서해안중부의 곡창지대, 광업지대의 개발을 다그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늘어나는 군량과 무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서는 넓은 평야 지대를 끼고 있고 기후가 따뜻하였으며 물 원천도 풍부하여 농업발전에 유리하고 철광과 유색금속광물의 매장량이 만아서 광업 쇠부리 수공업을 비롯한 각종 수공업 발전에도 매우 유리한 오늘의 신원, 재령지방을 중심으로 한 황해남북도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황해남북도 지역은 3세기말 4세기초 고구려에 통합된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통치력이 상대적으로 적게 미치고 있었다.
3세기말 4세기초 고구려 통합전쟁과 이에 대한 백제의 진출로 인한 두 세력간의 충돌로 하여 이 지방의 정치정세는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이 지방의 군현들을 정비하고 농업과 수공업 수산업 등의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제반 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하였다.
고구려는 황해남북도 일대에 대한 지배와 개발, 남방진출을 다그치는데서 먼저 이 지방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정치, 군사적 중심지로 선정된 것이 남평양이었다.
력사기록에도 4세기 중엽에 고구려 남평양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여 주고 있다. 고구려에 4세기 남평양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전기≫를 인용한 글에서 13대 근초고왕(346-375)이 고구려의 남평양을 차지하고 한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잡지 제 6, 지리 4, 백제
≪삼국유사≫에도 ≪고전기≫를 보니 13대 근초고왕 함안원년(371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평양을 점령하고 수도를 북한성으로 옮겼다고 쓰고 북한성은 지금의 양주(서울)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 제 2, 남부여, 전백제.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사에는 이 평양성 전투에 대한 기사와 함께 백제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빼앗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한산에 수도를 옮겼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 2, 근초고왕 26년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371년 고구려의 ≪평양성≫은 함락된 일이 없었으므로 ≪고전기≫가 남평양을 점령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지만 ≪고전기≫의 기사는 백제 근초고왕이 공격한 고구려 ≪평양성≫이 곧 ≪남평양성≫이였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4세기 고구려 남평양에 대한 자료는 또한 ≪고려사≫지리지에 있다. ≪고려사≫지리지에서는 양주는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일명 남평양성이며 백제의 근초고왕이 빼앗아 그 25년에 남한산으로부터 그곳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남평양에 옮긴 백제의 수도는 개로왕 20년에 고구려에 빼앗기였다고 하였다.*
* ≪고려사≫ 지 제 10, 지리1 남경류수관
≪고려사≫의 기사대로 하면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곧 고구려의 남평양이였으며 그것을 475년에 다시 고구려에 빼앗긴 것으로 도니다. 그러나 371년 당시 고구려가 지금의 서울부근까지 나간 일은 없었고 거기는 백제 건국 이래 백제의 령역이였다. 그러므로 371년 백제의 공격을 받았던 ≪남평양≫성이란 지금의 서울보다 더 북쪽 구체적으로는 서북쪽에 있던 고구려 성이여야 한다.
371년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성이였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백제간의 경계선이 패하(지금의 례성강) 계선이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69년 고구려-백제 사시의 전투는 수곡성후의 협계현, 신계군 침교리 이남에서 진행되였다.*1
373년에도 백제는 청목력(개성, 송악산)에다 성을 쌓았고, 375년에는 고구려가 수곡성을 함락하였다.*2, 386년에 백제는 바다가에서 청목령을 거쳐 팔곤성(후의 백계현, 고성)에 이르는 구간에 요긴한 방어시설을 축조하였다.*3
*1,2,3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년, 근초고왕 28년 7월,
30년 7월, 권 25 진사왕 2년 봄.
위에서 든 지명들과 성들은 모두 례성강(패하)계선에 있는 것으로 고증된 지명이거나 성들이며*2, 고구려의 4세기 중엽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고 례성강을 남쪽경계로 하고 있었다.*3
*1 ≪고구려 력사연구≫(고구려 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72-75페지.
*2 ≪고구려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년판, 176페지.
*3 ≪조선전사≫3,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년판, 101페지.
이러한 자료들은 이 시기 고구려-백제 사이의 전투가 례성강 좌안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남평양성은 례성강 이북 군사적으로 방어하기도 좋고 교통운수의 중심지로 되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한다.
371년 백제군 3만이 공격을 받았으며 거기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날아가는 화살에 맞아 전사한 평양성이 오늘의 평양성이 아니라 남평양성이였다는 것은 고국원왕릉을 비롯한 고위급 귀족들의 무덤이 4세기에 안악지방에 건설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공고한 후방이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방위력이 강한 수많은 성곽유적이 이 시기 황해남북도 일대에 축조되여 있었던 조선에서 볼 때 371년 백제군이 예성강계선에서 지금의 평양에 이르는 수백리 구간에 고구려의 아무러한 저항도 받음이 없이 쉽게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세기 70년대에 백제가 공격했던 ≪평양성≫은 오늘의 평양지방에 있던 성이 아니고, 례성강 이북, 평양 이남에 있던 또 하나의 평양성-남평양성이여야 한다.
그렇다면 4세기 남평양성의 위치는 례성강 이북 오늘의 평양이남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유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유적이다. 앞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한 바와 같이 4세기 고구려의 대규모 성곽유적, 그리고 그 부근의 대도시유적, 안악지방 벽화무덤과의 관계, 장수산성 중심의 위성방어체계의 형성, 고구려의 도성이 산성과 평지성의 결합으로 되여 있었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성은 장수산성이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세기 고구려 남평양성의 존재는 고구려 력사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그것은 첫째로, 새로 통합된 황해남북도 일대의 봉건통치제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중심지를 건설해놓음으로서 이 일대에 대한 정치적 지배와 통제를 강화할 수 잇게 하였다는데 있다.
큰 지방중심지 - 부수도 남평양성 건설의 의의는 둘째로, 그것이 이 지방의 경제발전을 촉진하는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데 있다.
남평양의 건설은 셋째로, 군사적 견지에서도 믿음직한 후방기지, 전방기지를 마련한 것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남평양성의 건설과 큰 지방중심지 부수도로서의 그 존재는 넷째로, 고구려 남부지방의 문화발전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