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界-5蘊
일련의 6계열의 법들의 나열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66법이라고 합시다.
66법의 중요성은 병고 고익진 선생님에 의해서 일찍이 알려졌지만
그 의미와 중요성이 많이 공유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六六이라는 표현은 잡아함304의 六六經과 M148의 chachakkasutta에 직접 나타납니다.
이런 일련의 법들의 나열은 여러 형태가 있다고
고 익진 선생님은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빠알리 경문에 나타나는 이런 일련의 법들의 나열은
여러 경문에 산재하여 있는데 가장 많은 법수를 기준으로 하면 65법, 60법, 59법이 나열되어 있고
六六經과 chachakkasutta에 나타나는 6內-6外-6識-6觸-6受-6愛(36가지 법수)와 비교하면
59법은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界-5蘊>이고
60법은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이고
65법은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5蘊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법들이 나타나는 경문은 이미 많이 소개했습니다.
여기서는 6內-6愛 사이의 <6想-6思>는 제쳐두고
6愛이후의 <6界-5蘊>을 중심으로 의견을 드려보겠습니다.
6界는 주지하듯이 地水火風空識이고, 5蘊은 色受想行識입니다.
이 두 가지 분류는 18계처럼, 공통적으로 (6, 5온)界라고도 표현되며
地水火風은 色의 다른 표현이므로 이 두 가지 분류는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해도 되며
色이 배제된 4온의 受想行識과 空(무변)과 識(무변) 등은 무색계를 지칭하므로
6界와 5蘊은 욕계 혹은 넓게는 색계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다만 66법에서 6內~6愛까지는 모두 욕계에 대한 법수들이지만
6界와 5蘊은 색계에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6법성이 사라진 법수들입니다.
이런 일련의 법들의 나열에서 M143에서는
[‘na cakkhuṃ upādiyissāmi, na ca me cakkhunissitaṃ viññāṇaṃ bhavissatī’ti.
Evañhi te, gahapati, sikkhitabbaṃ.
'나는 눈을 취착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나의 알음알이는 눈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부지어야 합니다.]
識이 취착하거나 의지<識住>하지 않아야 하는
즉 갈愛에 의한 取의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법들이 나타납니다.
6內-6外-6識-6觸-6受
그리고는 6界와 5蘊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무색계의 공무변, 식무변, 무소유, 비상비비상,
그리고 이 세상, 저 세상(idhaloka, paraloka)
그리고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pariyesitaṃ anucaritaṃ manasā.
여기서 색계 대상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욕계(혹은 넓게는 색계)의 66법과 무색계 사이에 6界와 5蘊이 나타나는 경문입니다.
혹시 6界의 지수화풍공식에서 空(혹은 識)이
空(혹은 識)무변처의 즉 무색계의 空의 의미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6계가 함께 나타날 때는
욕계(혹은 넓게 보아도) 색계와 관련된 空(혹은 識)이라고 읽는 것이 적당하지 싶습니다.
이와 같이 66법이 함께 나타날 때는 모두 욕계의 법들이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jivhāya, rase, jivhāviññāṇe]에 대해서[jivhāviññāṇa-viññātabbesu dhammesu]에 대해서
'설식에 의해서 식되어질 법들(복수형)'은
욕계가 아니면 생겨날 법들은 아니지 싶습니다.
viññātabbesu dhammesu와 nissitaṃ viññāṇaṃ를 함께 병치하여 읽으셔도 연결됩니다.
다만 이처럼 66법에 대한 心의 오염원을 버린 불환자가
만약 색계 상태라면 그 內입처는 아마 [천眼, 천耳계, 意] 상태로 짐작되고
무색계 상태라면 [意] 상태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갈애에 의한 취착의 대상은
[意], [法], [意識], [觸], [受], [空무변 등의 想]에 대한 [愛]는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意], [法], [意識], [觸], [受] 등의 일련의 법들은 3界에 모두 공통이지만
그 질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여깁니다.
드리고자 하는 의견은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66법은 욕계의 법들 즉 一切>라고 읽으셔도 대과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앞뒤 문맥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66법을 해결하신 분들이 불환자이십니다.
68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所謂一切法 云何爲一切法, 佛告婆羅門
眼及色 眼識 眼獨 眼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耳鼻舌身意法 意識 意觸 意觸因緣生受 若苦若樂不苦不樂
是名為一切法.8)
8) 『雜阿含』卷13, 高麗 18, p.834.a; 大正 2, p.91.b(321)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견을 첨언합니다.
12연기에서 識緣 名色, 名色緣 六處가 6內,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界-5蘊> 혹은
6內-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
이러한 일련의 법들(66법)의 흐름은 욕계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마지막 두 무리의 법들인 <-6界-5蘊> 내지 <-6尋-6伺>는
12지 연기의 愛-取-有에서 取-有에 위치합니다.
이것이 식-명색 호연에서 名色緣 識으로 여겨지고
三昧란 6內→6外 이 방향이 아니라
名色緣 六處의 6內에서 名色 방향←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만약 名色이 {6계를 취하여 모태에 들었을 때 현현한 그런 종류의 명색}이라면
아직 욕계 상태의 삼매 즉 이른바 찰나 삼매로 여겨지고
만약 4념처 수행을 통해 慾(감각적 욕망을 일시적이라도), 까마를 벗어난 상태라면
색계 상태의 명색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이 상태가 초선이라면 초선에서의 尋伺는 [慾界 愛支 緣起] 마지막에 나타나는
6尋-6伺(색,성,향,미,촉,법에 대한 口行)과는 다른 出離 등의 正思惟(慧蘊)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드리고자 하는 의견은 삼매란
아직 욕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최소한 66으로의 惡化를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삼매는 재생연결 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더 나빠지지도 않는 안정된 상태의 욕계삼매이고
까마를 벗어난 색계의 삼매라면 바른 삼매가 아닐까 하는 의견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수준의 차이는 크지만 욕계에 태어난 중생의 입장에서 삼매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거나, 혹은 까마가 제거된 名色의 마음상태로 이해합니다.
물론 무색계는 名의 마음상태.
즉
識→명색→육입(6내)→6外 → 밖으로 방향은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방향이고
心←명색←육입(6內) ← 안으로 방향은 욕계를 벗어나는 혹은 벗어난 방향으로 이해합니다.
흐름을 거슬러 가는 방향이 內이고 그 첫 번째 수행 주제가 명색의 색身. 혹은 4大 등.
첫댓글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ayaṃ, bhikkhave, bhikkhuno agocaro paravisayo.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자신의 행동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범위이다.
ko ca, bhikkhave, bhikkhuno gocaro sako pettiko visayo?
yadidaṃ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katame cattār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인가?
바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무엇이 넷인가?
[gocaro sako pettiko visayo] ↔[agocaro paravisayo] 色聲香味触(5욕락)
[gocaro sako pettiko visayo] = [purāṇaṃ kammaṃ] 舊業(-> 自燈明)
nāyaṃ, bhikkhave, kāyo tumhākaṃ napi aññesaṃ.
purāṇamidaṃ, bhikkhave, kammaṃ
제6경의 담마와 4념처 신수심법의 담마는 범위가 같지 않을 겁니다.
제6경의 담마는 욕계 중생들의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전5경(색성향미촉)을 제외한 그 외의 것들(담마들)이라면
4념처의 담마는 신수심을 제외한 그 외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담마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다만 전5경인 아닌 제6경인 담마들에 대해서도
전5경에 정형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제6경인 담마들에 대해서도 나타납니다.
[santi manoviññeyyā dhamm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이때의 감각적 욕망과 연결된(짝이 되는, 상응하는) 담마들이란 무엇을 말하는 지는 경문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혹시 의견이 있으신 분이 계시면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