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그림의 문외한이라도 밀레(Millet, Jean Francois 1817-1875)의 "만종(晩鍾)"을 기억 할 것이다. 초등학교 미술 책에 자주 소개되고 액자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림이 또한 그것이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농부가 저녁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전원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하여 은은히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슬프나 신앙적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들 쇠스랑과 씨감자를 담는 망태기로 알고 있는 부부의 발밑에 있는 망태기 속에 씨감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지중지하던 아기의 시체가 담겨있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배고프지만 씨감자를 감사함으로 심으면서 겨울을 지나 봄에 감자를 30, 60, 100배의 수확을 거두리라 믿는 것이다. 슬픈 속에서 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아기를 땅에 묻는다. 육체는 썩지만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신 것처럼 이 아기도 주께서 부활에 동참케 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있다. 부부의 부활신앙이 그림전반에 종소리와 함께 은근히 퍼지고 있다. 비록 복사된 그림이지만 부활신앙을 가지고 다시 한번 "만종"을 감상해보자. 부활절에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당신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삶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빌 3:10-빌 3:12]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 카페지기의 찬양전도 사역과 영혼을 치유하는 사역을 위해 중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 카페지기의 시력회복(백내장 치유)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제목 : 예수의 부활 성경 : 마 28: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10-12).
만약 누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까닭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라 (고전 15:17-18)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이 아침에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죽음보다 생명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에는 생명보다도 죽음이 훨씬 더 강하게 보인다. 이 땅에 태어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때문에 사라져갔고, 오래 살아 보고자 발버둥치던 사람도 죽음 앞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매한 짐승들이 모두 다 죽어갔던 것처럼, 사람도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전 3:19).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고전 15:55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다시 사신 것이다. 이 말씀은 생명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생명 다 하는 날까지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 바란다. 둘째, 증오보다 사랑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에는 사랑보다도 증오가 훨씬 더 강하게 보인다. 사실상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은 서로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증오심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본체가 사랑하셨고(요 4:8-16), 그의 대적들은 모두 악이 가득했던 자들이었다(전 9:3).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런 까닭에 사도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고 말했다. 주님께서 다시 사신 것은 증오보다 사랑이 더 강한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기 바란다. 셋째, 불의보다 정의가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에는 정의보다도 불의가 훨씬 더 강하게 보인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짓밟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는 현실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합 1:13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고 우리의 시대가 처한 현실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패역의 시대에 살고 있던 불의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 머물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불의보다도 정의가 더 강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 자체가 우리들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사신 일은 현실적으로도 우리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있다. 바로 「죽음보다 생명이 강하고, 증오보다 사랑이 강하며, 불의보다 정의가 강하다는 점」을 변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더욱 더 깨달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함께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의 명언*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Gott isttot)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무(No)로 돌리시고 니체는 죽었다(Nietzsche isttot)라고 선언하셨다. 결국에는 니체 (Nietzsche)는 미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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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활의 신앙으로 새롭게 출발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감사합니다
부활 신앙에 감사합니다.
평안 장로님, 존재 목사님, 만경강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부활의 은혜와 축복과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 위헤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