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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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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 | |
출생 | 1866년 11월 12일 중국 광동성 향산현 |
사망 | 1925년 3월 12일 중국 북경 |
국적 | 중국 |
직업 | 의사·정치가·혁명가·작가 |
쑨원(孫文; 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혁명가, 사상가,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시자이다. 자는 일선(逸仙), 본자(本字)는 덕명(德明),별호는 중산(中山)이다. 신해 혁명의 주요 인물이다.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 (香山縣: 지금의 중산시(中山市)) 부근의 취형촌 (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도천(道川)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孫眉)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 (孫文)과 중산 (中山)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 (孫德明 손덕명)이며 아명은 쑨디샹 (孫帝象 손제상)이다.
쑨원 (孫文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여 세 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 (字)는 재지 (載之). 원래의 호 (號)는 일신 (日新)이었으나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 (逸仙)으로 바꾼다, 일신과 일선은 광동어로 발음하면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 (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까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주에서 1895년 17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樵 (중산초: 중국 산의 나뭇군. 땔나무 樵 초)에서 유래한다.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대만)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 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 (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 (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 (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손메이 (孫眉 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본토 중국 및 대만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대만의 국부 (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라는 호칭보다는 혁명선행자 (革命先行者)라는 호칭을 주로 쓴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C%91%A8%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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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치가·혁명지도자. 자는 일선(逸仙), 호는 중산(中山). 광둥성[廣東省(광동성)] 샹산[香山(향산);지금의 中山(중산)] 출생. 공화제 창시자로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다. 가난한 농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형 쑨메이[孫眉(손미)]에게로 건너갔다. 그리스도교 계통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양문화를 체득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광주)]의 의학교(醫學校)에서 삼합회(三合會) 수령인 정사량(鄭士良)과 만났다. 1887∼1892년 홍콩에서 서의서원(西醫書院) 재학중 혁명에 뜻을 두고, 1892년 마카오·광저우에서 개업하였으며, 동시에 반청운동(反淸運動)을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형 쑨메이 등의 지원 아래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화교(華僑)·회당(會黨)과도 제휴하고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최초의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청(淸)나라 공사관에게 체포되었으나, 서의서원 재학시의 옛 스승 등에 의해 구출되어 《런던피난기》를 영문으로 발행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체류중에 견문을 넓히고, 유럽 선진국의 사회적 모순에 눈을 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착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과의 제휴 및 필리핀독립원조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1900년에 제2차거병(惠州事件)을 꾀하였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쑨원이 두번째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에 일본에 유학한 학생이 증가하여, 그 혁명화가 진척되었는데, 중국 국내에서도 광복회(光復會)와 화흥회(華興會) 등의 혁명조직이 생겼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도쿄[東京(동경)]에서 여러 혁명세력을 규합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하고 삼민주의와 혁명방략(革命方略)을 정하였다. 그 뒤 신해혁명(辛亥革命) 때까지 중국 중·남부 각 지방에서는 10회가 넘는 반청무장봉기(反淸武裝蜂起)가 되풀이되었다. 이 동안 쑨원은 제3·4의 세계여행을 하였는데, 1911년 10월 군자금모집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여, 서유럽을 순회하고 귀국하였다.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뒤 남북화의(南北和議)에 의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넘겨주었다.
사회개혁을 지향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 암살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에 실패하고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였는데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재혼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제3혁명에서 위안스카이가 타도된 뒤 군벌혼전(軍閥混戰) 상태 아래서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일으켰으며, 세번째로 광저우를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썼다. 1924년 1월 중국국민당을 개편한 뒤 중국공산당과 제휴(國共合作)하고, 노동자·농민의 결속을 도모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1월 북상선언(北上宣言)을 하고, 북상의 길에 올랐으며 도중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였고, 국민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베이징[北京(북경)]에 들어갔으나, <혁명은 아직도 이룩되지 않았다>고 하는 유촉(遺囑)을 남긴 채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죽었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베이징 근교의 시산[西山(서산)]에서 난징[南京(남경)]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으로 이장되었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 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 영국의 사회학설(H. 조지의 單稅論 등)을 도입하여, 중국 현실에 적합하게 한 것이며, 민족독립과 인권존중 및 사회평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정책으로 발전시켰는데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등이 신민주주의 기본이념으로 이어받았다.
<출처: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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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손문이 죽으면서 말한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는 상당한 여운을 남깁니다. 아직도 진행중인 것이 아닌지요? 이 분의 유지를 받을어 지속적으로 대륙의 복귀를 시도하는 후세들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의 아명은 '손제상', 흔히들 말씀하시는 '상제님'이 아닌가요?..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우기고 하였습니다. 일제의 '대동아공영'을 떠올리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하여 이분의 사상에 '멸청흥한(반청복명, 멸만흥한)'의 사고가 주입되었까요?...
그리하여, 이분의 어린시절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다음과같은 내용 윗글에서도 나옵니다. <18세 때 귀국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광주)]의 의학교(醫學校)에서 삼합회(三合會) 수령인 정사량(鄭士良)과 만났다.> 20세가 안되었을때, 즉,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생기고, 세계관이 생기기 시작했을때, 삼합회의 수령을 만났네요....
즉, 손문의 사상적 배경은 20세 전후에 주입된 '삼합회'의 '멸청흥한'의 이념이 주입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문도 일종의 '꼭두각시'인 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문-장개석등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뒤에는 지하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삼합회'라는 '명나라'후예들의 거대 지하조직이 있었던 것이죠....
'삼합회'는 18세기 후반 조선시대 번성하기 시작한 '천지회'라는 것의 하나라고도 문헌에서는 나타납니다. 드디어 그 시절, 조선후기의 최대 르네상스시기인 '정조대왕'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음 편에서 '삼합회'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