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 53. 거룩한 성에 들어가 - 마 27: 56. 여자들의 이름
마 27: 53. 거룩한 성에 들어가 -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
1] 예수의 부활 후에
여기서 '부활'(*, 에게르신)이란 말은 특수 동사로서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을 부활시켰음'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능동태로 취급하여 '예수 자신이 부활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볼 때 '예수의 부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고전 15: 23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影響力)에 의거해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성도의 부활 장면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이 사실을 이곳에 앞당겨 왔다.
2]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에 들어가 행하였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 겔 37: 12 -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그리고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폭발적으로 이방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전까지 여전히 성도(Holy City) 예루살렘은 복음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 27: 54. 예수를 지키던 자들 -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
또 하나는,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군병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잘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때에 되어진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죄가 없는 의인이시며(눅 23: 47)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
1]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문의 신앙고백을 백부장 혼자서 하는 데(막 15: 53) 반해 본서에서는 백부장 외에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같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이 예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하였다.
본서에서는 '지진과 그 되는 일', 즉 흑암과 지진과 예수의 부르짖음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고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의 처형이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고 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이 가담한 그 범죄에 대한 하늘의 진노였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2]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본문의 '두려움'(*, 에포베데산)은 단순한 공포심 이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면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 종교적 두려움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
* 사 6: 5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한 전설에 따르면 이러한 경건한 두려움에 휩싸였던 본문의 '백부장'은 '론지누스'(Longinus)이며 (외경 베드로 복음서에는 '페트로니우스'<Petronius>) 예수의 죽으심을 친히 목격했던 그 십자가 아래서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3]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에 의하면 백부장을 위시한 군병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누가에 의한 고백은 예수를 죄인으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판결이 잘못된 것으로서 예수는 무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記述)된 것 같다.
당시 백부장과 군병들은 죽어가는 예수에 대해 그분은 과연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백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고백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것은 약속의 메시아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가장 분명히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아들'(*, 휘오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단순한 영웅적 인물 정도로 고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 호칭은 메시야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임이 분명하다.
이 같은 사실은 그들이 고백한 '진실로'(*, 알레도스)라는 강조적 표현에서 더욱 확신 할 수 있다. 이 부사는 유대인들이 조롱한 내용(3: 5-13. 15: 21-28. 27: 39-44)과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방인의 입술에서 이 같은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이방 선교의 신호탄인 동시에, 십자가의 효능이 즉시 발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 27: 55.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 -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은 십자가 근처에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비록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1]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마태는 또 한 부류의 십자가의 산 증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인습으로 볼 때 천한 신분에 속했던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무덤을 맨 처음 찾아간 여인도 있었다. 특히 마태가 그 여인들의 이름과 행적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 고전 1: 27-31 –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온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들과 예수의 쓸 것을 돕고 또 천국 복음을 듣기 위해 예수를 따라다니곤 했다.
* 눅 8: 2-3 –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 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께 대한 그들의 헌신적 노력과 사랑은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것이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이다.
* 요일 4: 18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수가 체포되자 죽기까지 예수를 쫓겠다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달아났다. 가장 열심 있는 자로 자처(自處)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否認)하고 말았다.
* 마 26: 57 -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 마 26: 69-75 - 베드로의 부인 –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런 와중에 갈릴리 전도사역 때부터 예수의 쓸 것을 돕기 위해 예수를 따라 다녔던 여인들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旅程)에 동참했으며.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처절한 예수의 최후를 타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눅 8: 2-3)
그 여인들은 예수께 대한 숨은 봉사자들이었으며 예수의 생(生)과 사(死)의 조용한 증인들이었다.
2]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십자가 현장 주변에 접근하기가 용이(容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이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들도 잡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러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마 27: 56. 여자들의 이름 -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며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1]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의 최후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로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천한 신분으로 간주함)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 광경이라 볼 수 있다.
* 고전 1: 29-31 -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