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청양성당(주임 임상교 신부)은 청양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성당은 큰 별이 위에서부터 감싸 안은 독특한 형태다.
마중물 도서관은 성당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린이집으로 운영하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 4월말 문을 열었다. 1층은 경당과 부엌, 사제 집무실로, 햇볕이 잘 드는 2층은 도서열람실과 큰 모임이 가능한 넓은 홀로 만들었다. 4,000여 권의 책은 임상교 신부와 신자들, 그리고 출판사의 기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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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중물 도서관에서 오카리나 모임을 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
취재를 한 날은 마중물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가 열리는 날이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시작하는 인문학 강좌는 8월 중순,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이야기로 문을 열었다. 정신장애를 앓는 이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사회의 편견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위캔두댓>의 공동체 상영부터 ‘사회적 경제의 의미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 만들기’ 등을 주제로 강좌를 진행했다. 이어서 도보여행가 황안나 씨, 이현주 목사 등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고, 11월 이후에는 생태영성을 주제로 ‘생태적 세계관’, ‘흙집 짓기’ 등에 관해 강의를 열 예정이다. ‘인문학’ 강좌지만, 삶과 사람, 그리고 마을 이야기가 중심이다.
본당 주임인 임상교 신부는 “처음 시작이니만큼 사회 · 정치적인 내용보다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며, 참석자들에게 ‘자기 삶의 자리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본당 신자와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개설한 인문학 강좌는 도시에선 낯설지 않은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볼 것과 즐길 것뿐 아니라 정보와 교육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구성도 물론 알차지만, 청양에서는 이런 인문학 강좌 자체가 ‘새로운 시도’다.
강좌와 도서관 운영을 돕는 우동옥 씨는 청양을 ‘독특한 지역’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그나마 교통이 좀 좋아졌고요.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게 힘든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삶의 모든 게 이 안에서 이뤄졌지요.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 결혼해서 사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다보니 살아가는 모습이나 생각이 고립되기 쉬워요. 자기 생활만 하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고나 할까요.”
닫힌 공간에서 오래 살아온 이들이 흔히 그렇듯, 주민들은 전반적으로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임 신부는 “마을에 새로운 무엇이 들어오는 걸 불편해 하는 이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이런 지역 분위기에서 새로운 경험은 중요했다.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기 전인 8월초, 청양성당은 1박2일로 여성캠프를 열었다. 임 신부는 ‘엄마도, 주부도, 아내도 아닌 여성만’ 참석할 수 있다고 말했고, 4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신자 30명이 캠프에 참석했다. 아름답게 꾸민 성당 앞마당에서 촛불을 켜고 낭만적인 여름밤을 보내고, 다음날엔 근처 수련관 수영장을 통째로 빌렸다. 겉으로는 그저 즐거운 1박2일이지만, 캠프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수영장에 간 이들도, 처음으로 밴드의 음악을 직접 들은 이들도 있었다.
여성캠프에 이어 어르신 캠프도 열었다. 새로움이란, 삶의 에너지가 됐다. 우동옥 씨는 “캠프를 하면서 도서관에도 관심이 더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신자 분들 중에서는 농사짓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인문학에 큰 관심은 없으시죠. 그런데 캠프를 하면서 마음이 열리니 여기서 뭐하나 관심이 생기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제 책 빌리러 오신 신자 분은 지금 하는 교육을 한번 쭉 따라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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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감싸 안은 형태의 청양성당 ⓒ문양효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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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교구 청양성당 마중물 도서관 ⓒ문양효숙 기자 |
취재가 있던 날은 이현주 목사의 강의가 열렸다. 신자와 지역 주민 40여 명이 함께 둘러앉아 짧은 강의를 듣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강좌에 참석한 이들은 “목사님이 성당에 와서 강의를 하는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는 본당 신자부터 “첫 강좌부터 재미있고 유익해 온 가족이 함께 왔다”는 지역 주민까지 다양했다.
부인, 아들과 함께 온 지역 주민 강영림 씨는 “청양에서는 새로운 강좌를 접할 기회가 부족한데 성당에서 이런 강좌를 마련해 주니 좋다”고 말했다. 경기도 군포에서 귀농한 강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해 왔다고. 그러던 중 우연히 읍내에서 <위캔두댓> 상영회 소식을 들었고, 이후 마을 네트워크 강좌를 비롯해 모든 인문학 강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강좌를 들으며 사회적 기업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내가 마을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협력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남은 숙제”라고 말했다.
마중물 도서관에도 숙제는 있다. 첫 번째는 도서관 문턱이 낮아지고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우동옥 씨는 도서관이 문을 연 뒤에도 조금씩 공간을 바꿔가는 중이라 했다. 햇빛 비치는 창가에 둔 몇 개의 테이블, 기증받은 커피머신과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디오 등 작지만 하나하나 그런 공간이 되기 위한 노력들이다.
“그냥, 갈 곳이 없어서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생각나는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여긴 갈 곳이 별로 없거든요. 개인적인 만남을 여기서 가져도 좋고,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이 공간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엮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임상교 신부는 지역의 특성상 “새로운 걸 시도한 사람들이 많이 실패했다”며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양에서 자유총연맹이나 새마을운동 단체 같은 곳은 튼튼해요. 하지만 지역에서 움직이는 다른 시민단체나 활동은 지원도 전혀 없고, 다들 개별적으로 움직여서 힘을 모으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공간이 열려서 지역에서 ‘다른 삶’을 고민하는 분들이 소통하면서 힘을 얻었으면 합니다.”
임 신부는 “내년에는 인문학 강좌도 조금 더 방향을 드러내, 사회 곳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증언해 주실 분들을 모실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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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목요일 저녁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는 마중물 도서관 인문학 강좌. 이날은 이현주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문양효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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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0권이 넘는 마중물 도서관의 책들 ⓒ문양효숙 기자 |
하지만 마중물 도서관은 모든 걸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려고 한다. 임 신부는 “욕심도 있고 지향도 있지만 방향은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올라오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러니 마중물 도서관의 모든 숙제는 기대와 바람, 그리고 기다림이기도 하다.
도서관에서는 현재 본당 신자들이 하고 싶다는 오카리나 모임이 진행 중이다. 조만간 다양한 책을 읽는 독서 모임, 그리고 한글을 배우고 싶지만 부끄러워 말하지 못한 이들을 만나 일대일로 가르쳐주는 성인문해교실을 시작할 계획이다.
작은 나무 한 그루의 존재감은 그 나무가 어떤 땅에, 어떤 풍경에 서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나무가 뿌리내린 곳이 숲이라면 그는 수많은 나무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일 테지만, 몽골 사막 한가운데에 심어졌다면 몇 십 년 뒤 대륙의 사막화와 황사를 막아줄 숲이 될 것이다. 비록 뿌리내리기까지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디고 갈증을 이겨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임상교 신부는 “미세한 울렁거림은 느껴지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라며, “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누군가 냇가를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장의 변화는 아니더라도, 새로움에 조금씩 눈뜨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공간, 그리고 다른 세상에, 더 넓은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공간. 그래서 도서관의 이름은 ‘마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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