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까뮈의 ‘결혼’이라는 산문은 “봄이 되면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는 말로 시작된다. 멋진 문장 아닌가? 참으로 멋진 문장이 맞다. 이어지는 문장은...... 아니, 이어지는 문장도 첫 문장 비슷하게 멋진 말로 되어있고,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도 모두 그러하다. 지겹게도 말이다. 멋진 말, 참으로 멋진 말, 너무 멋진 말로 말이다. 그리고 너무 길다. 나는 그 글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내 스타일은 아니야.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화를 내고 책을 던져버렸다. 어릴 때 언젠가 그랬던 적이 있고, 연전(年前)에도 그랬다. 빌어먹을 놈. 나를 화나게 한 것은, 그 산문이 너무 멋진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였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그 산문은 아무 내용이 없다. 그냥 티파사라는 곳의 경치와 자신의 느낌을, 그것도 너무 현란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수사(修辭)로, 지껄일 뿐이다. 빌어먹을 프랑스 놈. 빌어먹을 프랑스 놈들. 앙드레 지드나 장 그르니에도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것 같다.
스타일(문체)이라는 것은 글의 내용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글의 형식과 관계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구분되니, 동일한 내용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이 달라지면 내용도 미묘하게나마 달라진다고 볼 수도 있다. 스타일이라는 것은 그러한 형식을 가리킨다. 내용과 떨어질 수 없는 형식 — 이것이 스타일이다.
‘결혼’의 내용(주제)은 무엇인가? 나는 화를 내면서 그 책을 던져버린 후, 내 스타일대로, 이렇게 물었다. 아무 내용이 없는 글이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산문의 주제는 디오니소스적 삶의 찬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오니소스는 예술과 감성 및 술의 신으로, 학술과 지성, 도덕의 신인 아폴론에 대립된다. 까뮈는, 앙드레 지드나 장 그르니에와 더불어, 아폴론적으로 살지 말고 디오니소스적으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가만히 있거라. 이게, 내 꼴이 이게 뭔가? “‘결혼’의 주제는 디오니소스적 삶의 찬미이다.” 이런 문장은 어디에서 많이 본 것 아닌가? 많이 본 것이다. 어디에서? 입시용 참고서나 입사용 참고서에서. 내 스타일이라는 게 결국 노량진 학원 스타일인가? 한심한 한국놈들, 내 아름다운 문장을 한 마디로 재단해버리다니...... 그래 무조건 외워라, 외워. 시험에 나오니까. 까뮈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앙드레 지드의 ‘돌아온 탕아’는 위의 주제를 상당히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지드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면서 산 모범생 형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가출하여 방탕하게 산 동생을 편든다. 성경(혹은 성경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돌아온’ 것을 중시한다면, 지드는 ‘탕아’, 즉 ‘방탕한’ 것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지드는 젊은이들에게 방탕하게 사는 것을 권장한다는 말인가? 지드는 모범적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지드나 까뮈가 권장하는 것, 즉 디오니소스적 삶이라는 것은, 내가 가끔씩 사용한 다른 용어로 말하면, 탁 놓아버리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항상 꽉 움켜쥐고 있다. 팔뚝에 경련이 일어나고 겨드랑이에 가래톳이 생기게 움켜쥐고 있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목숨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발발 떨면서 움켜쥔다. 무엇을 움켜쥐는가? 결국 돈 그리고 권력이다. 이것을 죽기살기로 움켜쥐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돈과 권력만이 아니라 도덕까지 놓아버리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 않은가? 도덕은 돈이나 권력과는 다르지 않은가? 어떻게 도덕까지 놓아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도덕은 사람이 끝까지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사회가 성립할 뿐 아니라 인격이 확립되지 않겠는가?
까뮈나 지드는 더 심오한 대답을 내어놓겠지만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대답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도덕을 움켜쥔다고 할 때, 우리가 실지로 움켜쥐는 것은 도덕이 아닌 다른 것인지 모른다. 예컨대 체면 같은 것 말이다. 효도라는 도덕이나 예배에 관한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지 도덕적, 종교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에 관한 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사실은 도덕이 아니라 자기라고 보아야 한다. 이 경우의 ‘자기’는 보통 에고라고 불린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결함은 노량진 학원가에서 발견되는 지적 결함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 바로 자기를 탁 놓아버리는 것을 가르치는 듯하다. 자기를 탁 놓아버리면 또 다른 자기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 또 다른 자기는 내 속에 든 신(神)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에고를 탁 놓아 신적인 것이 드러나게 하면 우리는 삶을 흠뻑 살 수 있게 된다. 땀이 나서 옷을 버릴까 봐 걱정되어 깨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왕 버린 몸, 온 몸의 수만 개 땀구멍에서 동시에 땀을 쏟아내며 흠뻑 사는 것 말이다.
좋다.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살기로 하겠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까뮈나 지드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한심한 한국놈들, 노량진 스타일들”이라고 하면서 나를 또 비웃을까? 그렇게까지 심하게 비웃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비웃움을 띤 채 이렇게 말하지 모른다. 형씨, 당신은 어째서 그런 방식의 문답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우리 스타일 좀 배우게나. 우리는 그냥 티파사의 아름다움에 취해 삶의 기쁨을 노래한 것일 뿐이네. 우리는 그냥 옛날 옛적에 어느 부자(父子)에게 있었던 일을 들은 대로 이야기한 것뿐이네.
우리 같은 좀팽이들도 가끔씩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디오니소스의 화관을 머리에 인 채 흠뻑 땀에 젖는다. 축제 때 말이다. ‘축제(祝祭)’ 역시 일본 사람들이 만든 번역어겠지만, 잘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제(祭)는 신을 맞아들여 기쁘게 하기 위해 거행하는 의식이다. 명절이건, 기일제사(忌日祭祀)건, 결혼식이건, 축제에는 신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신이 나오고 신이 기뻐하는가? 탁 놓아버리면 된다. 그냥 탁 놓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있는 돈, 없는 돈, 여기저기서 끌어들여 흥청망청 쓰고, 쏘주, 맥주, 폭탄주 가릴 것 없이 마시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과 평소에 부르지 못했던 노래를 내지르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멘트 바닥이건, 마루 바닥이건, 하여간 땅바닥에 얼굴을 좀 비벼줘야 한다. 12라운드가 다 끝났는데도 다리가 풀리지 않는다면 권투를 모독하는 것이고, 축제가 다 끝났는데도 맨 정신이라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한 편의 이야기인 듯, 한 줄의 싯 구절인 듯, 벌써 어젯밤의 일이 되어버렸구나.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는 척하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실컷 놀았다.
첫댓글 결혼 이야기가 어렵네. 제 정신 아닌게 신을 제대로 모시는 것 이란 것은 알아 듣겠네.
영태거사, 다 내려 놓구 아주 제대로 노셨구만. 갑자기 일이 생겨 참석 못했는데, 많이 아쉽네.
아무래도 다음번 결혼식 주례는 영태교수 몫인 듯하다~ ㅎㅎ
나는 주례 못해. 정말이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ㅎ 그러고 보니 노박사가 안 보였구나. 그래 아쉽구만. 까뮈의 '결혼'은 보통 결혼이 아닌 것 같아. 은유법인 듯해. 예컨대 땅과 바다가 결혼한다거나, 사람이 자연과 결혼한다거나. 내가 알아들은 것도 신주필이 알아들은 것 정도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10장 4절에서.
이런, 성경에 이미 다 나와있구나. 알겠소, 목사님.
뭐 이리 어렵냐? 좌우간 왕창 축하한다는 말이겠지?
디오니..소스... 무슨 소스인가 .. 이동농민들 쫒아다니느라 더위먹은 나를 위해 마눌이 만든 여름밤 김치 냉면 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