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刻印) 전시를 둘러보고
임인년이 밝아와 한 달이 지나는 마지막 날은 음력으로 섣달그믐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이태 전부터 코로나와 무관하게 설과 추석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공자맹자의 정통 유학은 송나라 주자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어 동쪽으로 건너와 조선 통치 이념의 근간을 이루었다. 고향을 지키며 농사일과 한학에 천착한 큰형님은 무척 보수적인데도 기제사를 시제로 통합했다.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지 않고 서울 아들 녀석도 번거로운 걸음을 줄이도록 했다. 어쩌면 코로나가 만들어 낸 명절 풍속도는 앞날의 풍향계가 될 가늠자일련지도 싶다. 묵은해 가고 새해가 올 때는 몸을 조신하게 보냄이 선현들의 삶에서 묻어나는 생활의 지혜였다. 예전에 오간 연하장은 ‘삼갈 근(謹)’자를 넣어 ‘근하신년’이라고 했어도 하는 일도 없이 집안에 머물 수만 없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맞은편 아파트단지를 지나 용호 주민운동장으로 가봤다. 지난해 연말 인조잔디를 입히는 공사를 끝낸 운동장은 산뜻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용호 주민운동장은 나와 같이 거제로 오갔던 카풀 지기가 속한 조기축구회 전용 경기장이기도 했다. 축구장 바깥은 산책로가 개설되어 인근 주민들이 걷기 운동을 나와도 좋을 듯했다.
인조잔디를 밟아보며 용호 주민운동장을 한 바퀴 걷고는 메타스퀘어 가로수 길을 지나 창원시 자연학습장으로 갔다. 자연보호협회에서 관리하는 유리온실 세 개 동 열대식물은 겨울임에도 싱그럽게 자랐다. 이웃한 어울림동산을 거닐다가 주택지를 거쳐 경남도청으로 가니 드넓은 뜰의 넓은 잔디밭이 드러났다. 관공서는 설 연휴로 이어져 휴무에 들어가 주차장은 썰렁하기만 했다.
도립미술관은 휴관하지 않아 실내로 들어가 봤다. 한국 근현대 목판화 100년을 기린 ‘각인(刻印)’의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목판 인쇄는 세계에서도 으뜸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 직지심경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의 부모은중경과 삼강행실도를 비롯해 대동여지도도 목판으로 찍어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층 전시실은 한국을 대표한 목판작가의 대형 작품이 시선을 압도했다. 지나간 20세기를 온몸으로 거쳐 온 중진 원로 작가들이 오랜 시간 인생을 걸고 남긴 작품이 걸려 있었다. 내게는 생소한 작가들이지만 우리 국토 산하가 판화로 재탄생함이 신기했다. 특히 김준권의 ‘산의 노래’와 정원철의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초상을 판화로 남겨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2층 전시실에서도 여러 작가들을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 언젠가 읽었던 미술 평론가의 서책에서 알게 된 오윤 판화를 만나 반가웠다. 그는 80년대 민중 미술사의 큰 획 긋고 마흔 살에 세상을 떠 아쉬움이 남았다. 전시실에는 표지가 판화인 시집이나 문학잡지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었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과 김지하 ‘오적’을 비롯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이었다.
판화 전시실을 나와 도청 별관을 거쳐 경남경찰청으로 건너갔다. 청사 건물 모퉁이에 자라는 한 그루 목련나무를 살폈다. 볕 바른 남향에 높이 자란 목련나무는 가지가다 솜털이 감싼 꽃망울이 조금씩 부풀어 갔다. 한 달 전보다 더 도톰해져 매화가 피고 나면 연방 하얀 꽃잎을 펼칠 기세였다. 도청 뜰의 연못을 거쳐 중앙대로를 따라 걸어 용지문화공원에서 용지호숫가를 지나왔다.
내가 사는 맞은편 아파트 상가 주점에는 초등 친구와 퇴직 선배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 자주 자리를 가져왔지만 해가 저무는 섣달그믐이라 그냥 넘기기 아쉬워서였다. 막걸리 마니아인 퇴직 선배는 곡차 잔을 받고 친구와 나는 맑은 술잔을 채우고 비우면서 다가오는 한 해도 순리대로 살자고 했다. 안주로 나온 생선구이가 뼈만 남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2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