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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주만 공습(The Attack on Pearl Harbor,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眞珠灣攻襲, The Attack on Pearl Harbor)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제국 해군의 항공모함 6척으로 편성된 연합함대가 미합중국 자치령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섬 북쪽 200마일 해상까지 접근, 400여 대의 일본 함재기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부통령, 그리고 상하원 의장과 의원 여러분.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략)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 이후 성립된 미합중국과 일본제국 간의 전쟁상태를 의회가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치욕의 날 연설문 중.
진주만 공습의 배경에는 일본제국의 과격한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제재로써 미국이 시행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 조치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이와 같은 금수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전쟁을 택한 일본제국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한 대함대를 이끌고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해군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는 곧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자 제2차 세계대전을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다.
일본제국의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하였고 2,334명의 미군 장병과 10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진주만의 유류보관소와 무기고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덕분에 미국은 이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전력을 원상회복(原狀回復, Restitution) 할 수 있었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은 야마모토 이소로쿠(高野五十六, 1884년∼1943년)이며 지휘는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1887년∼1944년)가 맡았다.
당시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 불러온 충격은 매우 지대했다. 불과 공습 전까지만 해도 미국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추세를 꺾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기습 공격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진주만 공습은 역사상 최장거리의 기습작전이었으며, 또 전술적으로 완벽한 일본제국의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듦으로써 일본제국, 더 나아가 동맹국 나치 독일 등 추축국 전체를 패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된다.
일본제국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 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 depth)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단, 이들이 놓친 점이 있었으니 독일이 1, 2차 세계대전 두 전쟁에서 패배한 계기인 전선이 이중화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원인 역시 중일전쟁을 벌인 육군이 제공한 것이다. 육군이 중국을 다 잡아먹겠다는 행동을 하자 당시 중국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에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자제하라고 했는데, 이걸 일본이 무시한 것이 원인이다. 더군다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육군만 따지면 세계 1위, 해군도 세계 2위에 드는 강국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탑3 안에는 항상 들었던 전력으로, 각각 전쟁 중반에 러시아(동부 전선), 전쟁 초반에 프랑스(서부 전선)을 정리하여 전선 축소까지 해버리고도 패배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제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루마니아와 이탈리아 같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럽에선 제한적인 역할 이상은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으나, 동맹국이 충분히 존재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시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결판을 지어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나를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獨蘇戰爭, 1941년∼1945년)인데 이 경우도 독일은 소련을 아주 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膠着狀態, deadlock)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유럽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땅맛을 본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
사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 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데 한계가 있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이 결정적 승리가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나온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제국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마침 전쟁의 시작을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도 진주만 공습과 유사점이 있다. 여기서 일본은 철저한 준비와 여러 호재가 겹쳐 유리한 전장 상황과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 1905년)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물론 그럴 능력도 없었고, 일본 본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도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와 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실패하게 된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역봉쇄를 실시한 이유는 일제가 중국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중국과의 전쟁은 당시 군국주의에 경도(傾倒)되어 버린 일본 군부가 정권을 몇 년 더 쥐는 데에 도움이 됐을 수는 있어도 국가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제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일본 군부 중에서도 상식과 거리가 먼 파벌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일본 국민들 또한 여기에 동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존 군부가 실각(失脚)할 수는 있어도 중국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미국의 국력은 당시 일본제국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GDP(국내총생산, Gross Domestic Product)는 일본제국과 12배나 차이가 난다. 대영제국마저도 미국의 생산력에는 마냥 밀리기 마련이었는데, 가령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이 영연방과 타국에서 지원받은 수송선을 다 합쳐서 1,500만 톤의 수송선을 건조한 것과 비교해 미국은 단독으로 2,500만 톤을 생산했다. 이런 생산을 진행하는 동시에 주력함 수십 척을 포함한 수백 척의 군함을 건조해낸 것이다. 1941년 3월 11일에 발효된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 and Lease Act)’하원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법이 통과됐고 ‘연합국의 무기로’로 변해갔다. 그러던 중 일본에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은 중립에서 벗어나 직접 전쟁에 참전하면서 무기대여법의 지원 대상국도 크게 넓혔다.
“불난 옆집에서 소방 호스를 빌려달라고 하는데 우물쭈물하면 우리 집에 불이 옮겨 붙을 수밖에 없다. 소방 호스를 빌려줘 일단 불을 끈 다음에 돌려받는 게 낫다.”루스벨트 대통령 연설
무기대여법과 함께 전시 생산체제로 들어간 미국은 유례없는 생산능력을 뽐내며 과자 찍어내듯 각종 무기를 토해냈다. 전쟁 중 제작한 군용기만 32만 4,750대, 항공모함 141척, 구축함 349척을 뽑았다. 또 연합국이 쓴 석유 70억 배럴 중 60억 배럴도 미국 내 유전에서 나왔다. 무기대여법의 혜택 국가는 영국으로 총 314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에게도 113억 달러 상당의 군수품과 원자재가 들어갔고, 프랑스는 32억 달러, 중국은 16억 달러 규모의 물자를 제공받았다. 결과적으로 무기대여법은 연합국의 승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입장을 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쓰시마 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의 내부 정치 사정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국내사정은 미국으로 치면 진주만 공습 당시에 남북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1940년대 미국은 그런 약점이 없었고, 오히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미국의 전쟁 여론을 폭발적으로 자극하는 정치적 실책만을 벌였다. 이 덕분에 미국은 국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을 몇 년 동안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은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戰)을 세워 미국해군을 상대하려 했다. 이 작전의 전제조건은 미국해군이 수십 년 전 1905년의 러시아 해군처럼 전함 함대를 몰고 와야 했으나, 정작 미국은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군을 운용했다. 막상 당시 전함도 제대로 정찰조차 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진격하는 식으로 운용하지는 않았으며,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에 난점이 하나 있었으니 유럽에 있는 발트함대(Baltic Fleet)를 거의 세계일주(世界一周)를 하다시피하며 쓰시마 섬까지 끌고 와야 했던 것이다. 반면 태평양전쟁 당시는 이미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지 오래였으며, 때문에 미국 대서양의 함대들이 태평양으로 합류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일본이 중재자로 지목한 소련은 친미적이지 않지만 당연히 일제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할힌골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일본은 엄연히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발생할 때 일본 편을 서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이 격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스크바 전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배치해 두었으며, 태평양전쟁 말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거의 격퇴된 뒤 결국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서의 내용과 같이 소련은 자신들이 서방과의 중재자 역할을 되어주길 희망하는 일본제국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다가, 1945년 8월 8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를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달함과 동시에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이후 소련군은 일본제국의 관동군을 격퇴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밀고 내려왔다.
기습을 통해 태평양의 미군을 빈사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남하를 미국이 용인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하에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당시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미국의 정치적 단결력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영국과 캐나다에게 공격받은 사례를 빼곤 본토를 공격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의 미군 함대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계속 수세에서 작전을 했어야 할 정도로 약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일본군 대본영은 미 해군을 진주만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이후 증원되는 미국 함대 역시 점감요격작전에 따라 차례차례 요격하여 큰 성과 없이 지속적인 피해를 미 해군에 강요한다면, 경제적 문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을 용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기습을 했던 일본의 행동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1945년) 대통령과 해군의 어니스트 킹(Ernest Joseph King, 1878년∼1956년)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이전까지 소수파이던 미국 내의 참전여론이라는 엔진에 초 강력한 추진력을 넣어준 셈이 되어버렸으며,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적 사상도 만연해 있었던지라 진주만 공습은 전미적으로 큰 공분을 샀고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조차 일본에 대한 전쟁에는 찬성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켜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역효과만 내고 협상이 불가능했다.
둘째는 미 해군의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상실시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전함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미국 해군의 최초의 항공모함 USS 랭글리(CV-1)을 대파시켜 미군이 자침시키도록 하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급 항공모함 USS 렉싱턴(CV-2)를 격침시키는 등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여전히 태평양 함대의 최후의 주요 전력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척(USS Enterprise, USS Hornet, USS Yorktown)이 끝까지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멸시켜 미국의 태평양 전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의 주역들인 카가(加賀), 아카기(赤城), 소류(蒼龍), 히류(飛龍)와 공고(金剛)급 순양전함 2척까지 끌고 와서 미드웨이 해전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미 해군은 위 3척 중 1척을 잃으면서도 위 진주만의 주역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거기다가 그 살아남은 2척 중 1척인 USS 엔터프라이즈(CV-6)은 미 해군이 항모를 지속적으로 1척씩 상실하는 동안에도 과달카날 해전까지 끈질기게 버티면서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아 미 해군의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 해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해군의 기동방어를 파쇄하지 못하여 끝내 태평양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제해권을 상실시키지 못했고, 이후 시기적절하게 미 해군이 증원되자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와해되었다.
셋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우처럼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주요 동맹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역시 당시 유럽전선에서 협력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논외인 부분이었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 당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를 파괴하지 못했고, 기반시설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 공격하기로 한 일자가 하필 주말이라 상당수의 인원들이 외박 중이어서 기지의 방어태세도 낮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인명피해가 적어 수병 전력의 피해가 기습적 공격에 비해 적었다는 점 때문에 미 해군은 우월한 본토의 공업생산력에 의해 배만 찍어내면 바로바로 전력을 복구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있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은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해서 주요도시에 미군의 보복공습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넷째로 장기전과 군사대응 요인에 대한 결여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군령부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선 단순히 군사자산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식민지 및 동맹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지만 연합함대는 이와는 반대로 격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한다는 잘못된 시각을 오랫동안 견지하여 주력함과 해군항공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삼국동맹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이상 영국의 향방은 곧 일본의 협상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으로 약체화된 ABCD 함대를 격파한 뒤 재빨리 인도양과 남태평양에 공세를 가해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와 인도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영 측의 전략적인 소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일례로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대 소속으로 남방작전에 참가한 함장 중 일부는 상부에서 명령만 내렸다면 얼마든지 남태평양 보급선단을 격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는 만큼 인식의 부족 탓에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지도 못하였다.
진주만 공습은 일본 해군 작전참모부가 낸 최선의 전략으로 당장은 큰 전략, 전술적 이득을 가져다주고 시간도 벌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인 의지를 지나치게 얕보았고 거듭되는 자만에 빠져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 못한 채 오판을 반복했기에 미국이 공습의 피해를 수습하고 전력을 회복하자마자 파멸하게된 것이다.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 미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대일 선전포고 요청 연설. 일명 “치욕의 날 연설(The Day of infamy Speech)”이라 불린다. 루스벨트가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하며 연설을 끝맺자 의원들이 전부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의 날로 기억될 날에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 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공습 전까지는 무의미한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20년 전 유럽의 지옥과 그 지옥불바다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 미국 전통의 외교 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
상 괜히 참견할 필요 없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에 선제공격을 날리면서 미국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매우 화나게 만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조차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 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역시 고립주의에 참전 반대파였던 한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 놈들을 철저하게 때려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 즉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진주만에서 당한 이상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 일본군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 밖에 없었다.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같은 대규모 민간인 피해 따위는 “Remember Pearl Harbor!” 앞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滿場一致),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의 입대 러쉬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자진입대율(自進入隊率)은 90%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를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고 한다.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었던 클라크 게이블(William Clark Gable, 1901년∼1960년), 제임스 스튜어트(James Maitland Stewart, 1908년∼ 1997년)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Robert William Andrew ‘Bob’ Feller, 1918년∼2010년)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거기에 물량공세(物量攻勢)가 더해졌다. 그러나 이건 걸러들어야 할 것이 미군의 그 압도적인 물량공세는 과달카날 전선 중반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다. 산호해 해전에서 반파당한 요크타운도 미드웨이 해전 준비를 위해 급히 수리를 하던 참에 와서 수리가 덜 끝난 상태였다. 만약 요크타운이 없었으면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1942년)에서 패했을 수도 있었다.
전쟁 참가법 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ickering Rankin, 1880년∼1973년) 의원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 임기인 1917년 때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 임기처럼 랜킨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허나 남자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도 반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로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 전 국민의 분노는 랜킨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혼자 반대표를 던진 탓에 미국인들의 분노가 그대로 집중되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왔고 엄청난 반박과 위협들이 쏟아졌으며, 해당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수많은 부모들의 전화와 랜킨에게 실망했다는 가족, 친구, 친척들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랜킨은 결국 이에 굴복하여 이틀 후 하원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할 때는 찬성에 투표를 던졌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의원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다만 훗날엔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南方作戰)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작전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었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航空母艦)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로 대변되는 솔로몬 해전(Battle of the Eastern Solomons)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전투기조종사 및 숙련병사(熟練兵士)들이 모조리 수장(水葬)되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독일, 이태리, 일본계 미국인들을 죄다 수용소로 몰아버린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물론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 중 진짜로 간첩 비슷하게 활동한 케이스도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 1세대 심지어 2세대들도 옛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이 선빵을 맞은 와중에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부적절한 짓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국적이나 사상적 문제 등으로 일본인의 삶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고 있던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온건 소수파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한편 이승만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조명되어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근데 사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이 한 판 붙을 것이라는 예측은 난무했다. 다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십거리 정도로 전락한 얘기를 1930년대 후반 들어 웬 동양인 듣도 보도 못한 잡놈에 망명가가 해 봐야 “또 그 소리임? 제발 그만 좀 우려먹어라!”하는 반응이 나오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들의 가상전쟁(假象戰爭) 시나리오 설은 떠돌아다니지만, 현실에서 실현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주만 공습은 미국 정계에도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는데, 미국역사 최초로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이후 세계대전을 정리하겠다는 명분하에 4선까지 도전하려 하자 정적들 사이에선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고립주의자이자 반 루스벨트 성향의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존 T. 플린(John Thomas Flynn, 1882년∼1964년)이었다. 그는 1944년 10월 17일 《Truth about Pearl Harbor》라는 46쪽 짜리 소책자를 발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가 유럽 전쟁에 돌입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한때 미국 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듀이(Thomas Edmund Dewey, 1902년∼1971년)의 캠프에서도 이러한 음모설(陰謀說)을 들고 나올 것을 고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군을 감청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암호체계를 전쟁 전부터 해독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년∼1959년) 장군이 직접 제동을 걸었다. 듀이 또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익을 해칠 수 없다며 입을 닫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그가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진주만 음모론을 무리하게 논쟁비화(論爭飛火)했다면 국민의 공감을 얻기는커녕 전쟁사기를 떨어뜨림은 물론이고 이적행위(利敵行爲)로 정치 생명이 끝났을 수 있다.
이걸 훗날 한도 가즈토시(半藤 一利, 1930년∼2021년) 같은 일본 학자들이 받아가지고 비슷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 ‘아톰’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虫, 1928년∼1989년)의 작품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정설(定說)처럼 주장했다가 신나게 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놓지 못하는 집착인들도 있는데, 혹자는 당시 뉴딜 정책의 효과가 떨어진 루스벨트 정부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사실부터 틀린 것이 루즈벨트 1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뉴딜 정책이 집권 2기 초 2년간 이전보다 약발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1939년 들어 경기는 다시 호조세로 돌아섰고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침공 등으로 서유럽이 대대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작살나든 말든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고립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 역시 대선,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루스벨트 정부가 큰 격차로 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와중에 FDR(Franklin Delano Roosevelt) 정권이 굳이 전쟁참가(戰爭參加)라는 무리수(無理手)를 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진주만의 급소였던 지상의 원유 공급 시설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 많은 수의 전함들과 유조선 역시 살아남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유로 자꾸 이걸 정치적인 음모론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 미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을 좋게 보지 않고 중국에서의 철수를 압박하며 석유 제한 조치 등 각종 제동을 걸고 있었기에 미일 관계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상으로 풀려는 와중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건 결국 일본이었다.
우선 중요한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죄다 털렸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정비나 임무 중이라 흩어져 있었으며.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엔터프라이즈는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역할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공모함이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운용할 수 있는 게 항공모함뿐이라 급하게 항공모함만 가지고 운용했는데 의외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천대받던 항공모함들이 항공기의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전함들이 전투불능이 돼서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주요전력이 될 기회를 얻어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당장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이 뭐하다가 진주만에 없었는지 보라. 우리가 아는 함대의 중심 항공모함이라는 이미지와는 영 딴판으로 비행기 배달 하다가 왔다. 태평양전쟁 이전까지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보조하는 편성(編成)이였으나, 태평양전쟁 중반쯤 되면 전함들이 항공모함을 보조하고 호위하는 편제로 변화한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와 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공모함을 들이 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를 하도록 해준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라도 명분이 필요했다면 상식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필요까지는 굳이 없는 것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비록 미 해군의 군함들이 일본군함보다 속도측면에서 열세이기는 했지만 당시 진주만의 미 해군전력은 전함 8척에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등 일본군 전력과 비등한 규모였고 전투기도 400여 대 정도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육상 대공포대와 비행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방어전인 것을 생각해보면, 진주만 공습 직전에 초계를 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했더라도 피해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기습적으로 침공을 맞는다는 시점에서 전쟁명분은 충분히 서기 때문에 미리 공습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주방어를 하면 되었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굳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자아도취(自我陶醉)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달인인 일본군조차도 족히 절반 정도는 피해를 감수했던 작전인데 미군이 굳이 연합함대를 거의 온존하게 돌려보내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제로 훗날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 것(통킹만 사건, Gulf of Tonkin Incident, 1964년)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서 6개월간 패전을 거듭 필리핀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고 엄청나게 후퇴하였고, 그 6개월 뒤인 미드웨이 해전으로 겨우 공세를 저지시키고 음모론자의 주장대로 미국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과달카날 점령 이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했는데도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음모론대로면 새러토가는 공창에 들어가 있고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돌려놓은 상태에서 6개월 넘게 고생할 필요도 없이 둘을 만반의 준비상태로 만들어놓고 진주만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묵사발로 만들어 준 뒤에 곧바로 항모 4척의 드림팀을 결성해 일본해군을 조져버려야 정상이다.
그리고 음모론의 근거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첫째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드라이 독이나 원유 공급 시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의 지휘관들이 지원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습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시설의 공습이 이뤄졌다면 태평양 함대는 더 오랜 시간 진주만에 발이 묶였을 수도 있고, 추가 공습에 의해 궤멸당할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교두보들은 물론 무방비 상태였던 호주와 뉴질랜드도 모두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떤 지도자도 전쟁에 참전하고자 이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가라앉거나 손상을 입은 전함들이 제1차 세계대전부터 사용되던 구형 전함이라고 하지만 당시 미 해군의 주력함들이었다. 진주만이 공습을 당했을 때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급 전함은 건조(建造)중에 있었고 노스캐롤라아나(North Carolina)급은 취역했으나 함체의 진동이 문제가 돼서 실전 투입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은 전함들이 정말로 쓸모가 없었으면 비싼 돈과 인력을 들여가며 굳이 인양해서 수리+개장해서 다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함만 공격하고 보급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하되 하와이의 보급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합의를 하고, 더불어 보급시설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에 하와이와 태평양 함대의 정밀지도 같은 중요정보를 넘겨줬다고 봐야하는데 상식선에서 이해하기도 힘든 음모론이다.
둘째로 일본이 위협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은 미국 정부도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 본토에 가까운 섬들의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이 한 ‘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설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점과, 첫 공격을 일본이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미군 기지를 놔두고 일본에서 한참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 진주만에 가할 것, 그리고 공격 이후에야 이런 선전포고문 같지도 않은 날림 선전포고문을 들이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다.
셋째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 정치나 군사는 게임이 아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을 알았다면 이는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는 게 아니라 정보기관이나 외교관을 거쳐 국무장관과 국무회의라는 복잡한 정식 절차에 따라 해당 부처에 보고된다.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중간 관료들의 입을 대통령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또는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듣고도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둘 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진주만 공습은 ‘쟤들이 설마 여길 때리겠어.’라고 모두가 상식으로 생각했고, 상식이 통하지 않던 일본군이 저지른 기습이었기에 기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