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떠날 때는 두고 떠나라! ”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농촌을 살리고, 물질문명에 대조되는 정신문화의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인간화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1995년에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기로 정하였다. 올해는 열한 번째 맞이하는 농민 주일이다. “떠날 때는 두고 떠나라.” 오늘 복음 묵상을 제대로 한 탓일까? 우리나라 기업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떠나면 그만인 것을…. |
선부동 성가정 본당 | 김태규(방그라시오) 신부 |
| |||
발행인 정진석·편집 홍보실/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회관 619호 홍보실/전화 727-2033/FAX 753-6006/E-mail jubo@seoul.catholic.or.kr |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제1526호 / 2006. 7. 16.(나해) | |||
| |||
| |||
|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
저희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할아버지 수사님의 장례식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니 수사님은 젊은이들로만 이뤄진 저희 공동체에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기나긴 투병생활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늘 장난스런 얼굴로, 손을 꽉 쥐시며 후배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시던 재미있던 어르신이셨습니다.
수사님을 땅에 묻고 돌아와 수사님께서 머무셨던 방에 들어갔는데, 어찌 그리 황망하던지요. 수사님께서 남기신 소지품을 훑어보면서 다시 한 번 수사님의 가난하고 검소한 삶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고 떠나신 것은 겨우 낡은 옷가지 몇 벌, 이젠 구식이 된 라디오 하나, 쓰시던 안경, 틀니, 다 합해서 한 상자도 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당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 않으셨던 분, 거의 외출이나 외식을 하지 않으시며 공동체에서 머무르시던 분, 단 한번도 공동기도에 빠지지 않으셨던 분, 언제나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삽을 드시던 분, 참으로 좋은 모범을 저희 후배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건강문제로, 또 성소문제로 오락가락할 때였습니다.
"서원한 수도자가 가긴 어딜 가! 그냥 계속 가! 가다보면 길이 생겨!"
단 한마디 말씀, 단순한 말씀, 투박한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지난달 저희들은 또 다른 선배 수사님 한분과 작별했는데, 수사님께서는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회원이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에서 궂은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무척이나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이셨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것 미사 도구를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덩치가 산 만한 후배들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그런 수사님 영정 앞에 저희 후배 100여명이 모였지요. 한 목소리로 크게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가 제 귓전을 울리더군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수사님께서는 수도자로서 좋은 모습을 저희 후배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켜주고 가시더군요. 떠나시기 오래 전에 장기 및 시신 기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이랬습니다.
"어디든 흔적 남기지 말고 내리(살레시오 캠프장이 있는 서해 바닷가, 수사님의 노고와 진한 애정이 깃든 곳) 앞바다에 뿌려줘!"
장례미사가 끝난 후 장지나 화장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떠나시는 수사님을 배웅하던 저희 후배들은 다시 한번 수도자로서 봉헌생활을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한가지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한평생,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수도자로서 삶에 충실하셨던 선배님들, 그분들이 오랜 풍랑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 한결같이 든든한 바위 같던 이유, 그리고 영예롭게도 수도자 신분을 간직한 채 삶을 잘 마무리한 배경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주님 말씀 따라 한평생 청빈지도를 생명처럼 지켜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총의 저녁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갔던 수사님들의 영혼, 그리고 먼저 떠나가신 모든 겸손하고 소박한 영혼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기쁘게 당신 나라에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신앙생활을 머리로만 할 수 없다” |
구슬이 서말이라도… -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
함께 하는 길 더불어 사는 길
하느님 창조사업의 가장 큰 협력자인 농민은 이른 새벽부터 해지는 저녁때까지
땀흘려 가꾸고 다듬으면서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허허벌판에 모를 심어서 푸른 물결이 춤추게 만들고, 빈 밭에 콩과 마늘과 고추를
심어서 장식을 하면서 창조주 하느님을 본받아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농업·농민은 위기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고 하나 둘씩 농업을 포기하는 현실로 인해 하느님 생명사업은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1천만 명에 가까운 농민이 이젠 343만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농촌인구 중 40대가 3% 미만뿐이고 60%가 60대 이상으로 고령화되었으며
농민들 또한 자녀들에게 농업을 물려주려 하지 않습니다. 고된 농사일에 불안전한
소득 앞에 누구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농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노무현 참여정부는 2003년도에 10년간 119
조원의 투융자계획을 포함한 '농업·농촌 종합 대책안'을 발표했습니다. '119'조 '6헥
타르' '7만호'의 대책안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농업개방'과 '대다수 농민의 일방적인
희생' 만을 강요하는 졸속적인 농업 포기 정책입니다.
지난 10년간의 농업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봐도 비현실적인 경쟁력 위주의 규모화,
전문화, 기계화로 인해 농가부채가 10배로 늘어났으며 농가소득의 하락으로 도시
노동자의 70%의 소득, 43%에서 25.3%로 떨어진 식량 자급률, 농촌의 급속한
붕괴, 농민들간의 양극화, 농민의 고령화, 반복되는 농업재해, 국민 밥상의 안전한
먹거리 욕구에 대한 대책 등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 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과거와 똑 같은 정책을 내세운 이 정권은 과거 김영삼 정부가 62조 보다 더 강
력한 119조로 농민들을 현혹하면서 농촌을 벼랑으로 몰아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참여정부는 경제 발전과 성장이라는 명목 하에 세계무역기구가 주도하는
각 나라별 자유무역협정을 서둘러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협상은 대폭적인 관세 및
국내 보조금 감축을 통해 전면적인 농산물 시장 개방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협상이
타결된다면 우리의 농업·농촌은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한미 자
유무역협정의 위험성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의 모든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모든 병을 몰고 오는 병원
균입니다.
멕시코는 12년 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통해 선진국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 농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져 멕시코 인구 1억 400만명 중 6,500만명이 극빈층과 빈곤층으로 전락되었습
니다. 나프타 이후 200만명이 농촌을 떠났습니다.
나프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수백만명이 조국을 버리고 미국 땅으로 탈출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매년 30만명). 경제 활동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실
상 실업이거나 반실업상태이고 국민의 1천2백∼1천4백 정도만 의료, 연금, 보건 등
사회 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고착화된 불평등과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
이 지금 멕시코의 현주소입니다.
어떤 재경부 고위 관리는 "이제 식량안보 운운하며 사기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고, 어느 재벌 회장은 "농지에 공장을 지어
수출을 해서 번 돈으로 농산물을 사먹으면 경제적으로 훨씬 효율적"이라는 말을 거
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식량자급은 국민의 안정된 식생활 유지와 공익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기구 농업협상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식량안보를 잃게 되면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일이 닥칠 것입니다. 세계적으
로 지금의 식량 작황을 보면 최근 30년간 최저입니다. 전세계의 식량 부족량은 자그
마치 2천 만톤이나 됩니다. 2006년 현재 우리 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5.3%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쌀을 빼면 2.7%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로 인해 앞으로 닥칠 식량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국내외적인 이런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이제 교회는 누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며 더 적극적으로 농민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
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농부이신 하느님의 뜻이며 생명이신 하느님
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농부이시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뜻을 본받는 3가지 운동을
제시하면서 동참을 호소합니다.
첫째, 쌀 약정운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쌀 약정운동이란 1년에 쌀 한가마니(80kg)를 먹는다면 한가마니 값에 해당되는 쌀
값을 미리내고 매월 또는 격월로 쌀을 받아먹는 운동입니다. 한마디로 도·농 상호 부
조 제도입니다.
둘째,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 운동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피해는 나프타의 피해에서 보듯이 농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서민들에게도 직접적인 피해를 주면서 국가 안보까지 위협하는 협정이기에 국민들
모두가 농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식량 다양성 확보를 할 수 있게 해야 합
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권과 안보를 지키는 일입니다.
셋째, 1교 1촌을 맺는 것입니다.
도시에 있는 성당에서 농촌 한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거기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직거래를 통해 공급받는 것입니다. 또한 농산물 직거래만 맺는 것이 아니라 도시
농촌간의 형제자매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찾아가 주고 함께 일하면서 서로간의 애환
을 나누는 것입니다. 도시의 많은 성당이 농촌과 1교 1촌의 연대를 맺는다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을 것이고 드러난 농촌문제 중에 많은 부분이 해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생명을 살리고 창조사업을 계승하는 농사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농촌·농민
을 돕는 일에 보다 더 적극적인 관심과 동참이 필요한 때입니다. 농민들의 소망은 농
부이신 하느님처럼 땀흘리며 기쁘게 농사짓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생명 사업을
계승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을 계속 유지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이런
농민들의 소박한 소망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농민들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져 기쁨과 희망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쁨이자 행복인 것입니다.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하는 길이 희망의 길이며
더불어 사는 길입니다.
- 안동교구 농민사목전담 김시영 베드로 신부
무얼 그리 재십니까?
신학생 시절, 복지시설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버려진 아기들을 맡
아서 돌보다가 입양시키는 기관이었는데 처음 봉사를 나가던 날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혹시나 잘못해서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기저귀 채우는
법도 모르는데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나 있을까? 아기가 자꾸 보채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온갖 걱정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처음 봉사 나간 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기를 보는 일이 아니라 방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방바닥을 걸레질하면서 다른 봉사자가 아기에게 분유
를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잠을 재우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봉사 나갔을 때에는 어깨 너머로 배운 걸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첫 아기를 가진 엄마가 아기를 낳자마자 완벽한
엄마일 수는 없습니다. 밤에 징징대는 아기와 씨름을 하고, 목욕시키는 법을 몰라
허둥대면서 서서히 엄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교편을 잡은 선생님
이 첫 수업부터 완벽한 교사일 수는 없습니다. 학생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헤쳐나가
면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심지어 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떠나라는 것입
니다. 부족한 것은 주님이 채워주신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준비 없이 떠났
고 훌륭히 복음 선포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가끔 신자들을 보면 봉사라는 단어에 기겁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는 아직 때
가 되지 않아서 시작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분 생각대로 때가 되려면, 준비
를 다 갖추려면 언제여야 할까요?
며칠 전 의정부교구에서 처음으로 사제가 되신 새 신부님들을 바라보며 몇 년 전에
있었던 제 자신의 서품식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정
말 행복했었습니다. 이제 신부가 되었으니 다 이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발령받은 본당에서부터 제 자신의 미흡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원로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제는 수단을 입고 관에 들어
가야 비로소 사제인 거야.” 평생을 살면서 사제가 ‘되어가는’ 것인데 벌써 ‘되었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었지요.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시는 주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간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고, 믿음도
미약하고, 봉사하라는 말에 눈치만 보고, 잘 사랑하지 못하고, 잘 용서하지도 못하
는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로 더 채우려 해 봤자 그다지 도움이 되
지도 않습니다. 그냥 시작합시다. 우리가 시작하면 이미 반은 간 것이니, 나머지 반
은 주님이 함께 가주실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최용혁 베드로 신부
제 목 |
존재의 이유 |
지은이 |
김성남 야고보 신부 ( 부산교구 신선성당 주임 ) |
존재의 이유 | |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4-5) 이러한 하느님의 심오한 세상 구원 계획이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 받은 12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실현 된다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주제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 즉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는 목자요, 돌 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그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께 선택되어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경우에도 아모스 예언자와 같은 상황이 적용된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부르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며 세상에 파견한다. 복음 선포 사명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다. 복음 선포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큰 은총이요 하느님의 축복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의 사명은 하늘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팡이 이외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무엇은 가져가고 무엇은 가져가지 말고 가 아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고 해서 복음 선포 사명의 모든 상황과 조건이 만사형통 탄탄대로를 걸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미친 사람이란 소리도 듣고 내어 쫓기고 거절당하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이 복음 선포를 그 누구보다 죽기까지 충성스럽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부귀영화를 주고,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편안하게 신자 생활 접어두고 어렵게 복음 선포해야 하는가?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이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예수님 존재 이유의 처음과 끝이다.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고 우리 삶이 지속되는 한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신자생활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아모스도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살아가는 존재 이유를 따라갔을 뿐이다. 요즈음 신자들의 생활을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감이 점점 희박해 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절대적 존재 이유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자! |
교구별 강론을 읽으시려면 아래"주일강론"을 클릭하세요
☞바오로딸/가톨릭정보/주일강론
첫댓글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이나 신분을 받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권한과 신분을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제도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직성이 없고 하느님의 일만 보이는 하느님 자녀의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섬김이 있고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는 유연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으로,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것을 갖추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강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답게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한 다원(多元)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경직된 개인과 집단은 고립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신앙인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데 실효성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교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인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기쁜 소식은 자신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파견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백성을 위해 사명을 위탁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점점 꺼져가는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의 기름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은총은 무한합니다.
문제는 믿음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거센 풍랑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우리의 내면은 불안에 요동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가진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전대의 돈, 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사실 불안은 그것을 해소하고 의지할 만한 방법이나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유혹에서 옵니다. 이런 불안을 떨쳐 버리고 신뢰심을 키워 주는 분은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뿐입니다.
파견의 목적만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면 다른 변화는 이해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청빈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제의 모습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독신과 함께 가난은 사제적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임에 분명하다. 중산층이 붕괴된 양극화의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누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 복음선포자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2티모2,8), 섬기러 왔습니다(마르10,45),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보십시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19,26)
깊은 데로 가라(루가5,4),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고린12,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루가10,37),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1,23),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12,9),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루가19,34).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그리스도는 떠나는 자의 이름. 나도 늘 떠나야 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은 몸이 무거우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나는 가진 게 너무 많고, 욕심이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도, 법으로도, 힘으로도...... 까불어봐야 30년...... 결국은 벌거벗은 채 아버지의 바다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따금 너무도 무거워진 나를 발견할 때마다 기도합니다. 내가 가진 소유가 영혼의 자유를 좀먹지 않기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선망하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복음선포 사명을 부여하시는 그리스도와 세상에 파견되는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는 교회의 복음 선포 활동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또한 그분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