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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 묵상 강론 7.16.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찐빵 추천 0 조회 45 06.07.16 18:51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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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7.14 11:35

    첫댓글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이나 신분을 받았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권한과 신분을 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제도는 경직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직성이 없고 하느님의 일만 보이는 하느님 자녀의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섬김이 있고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는 유연한 공동체입니다.

  • 작성자 06.07.14 11:3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 작성자 06.07.14 11:38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으로,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것을 갖추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강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답게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 작성자 06.07.14 11:39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한 다원(多元)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경직된 개인과 집단은 고립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작성자 06.07.14 11:39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신앙인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데 실효성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과 함께 사는 교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인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 작성자 06.07.14 11:40

    복음 선포자의 기쁜 소식은 자신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고 파견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백성을 위해 사명을 위탁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점점 꺼져가는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의 기름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은총은 무한합니다.

  • 작성자 06.07.14 11:41

    문제는 믿음 속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거센 풍랑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우리의 내면은 불안에 요동칩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가진 지팡이나 여행 보따리나 전대의 돈, 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사실 불안은 그것을 해소하고 의지할 만한 방법이나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유혹에서 옵니다. 이런 불안을 떨쳐 버리고 신뢰심을 키워 주는 분은 늘 함께 계시는 예수님뿐입니다.

  • 작성자 06.07.14 11:43

    파견의 목적만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면 다른 변화는 이해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청빈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제의 모습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독신과 함께 가난은 사제적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임에 분명하다. 중산층이 붕괴된 양극화의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누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 복음선포자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 작성자 06.07.14 11:44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오(2티모2,8), 섬기러 왔습니다(마르10,45),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보십시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19,26)

  • 작성자 06.07.14 11:44

    깊은 데로 가라(루가5,4),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고린12,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루가10,37),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1,23),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12,9),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루가19,34).

  • 작성자 06.07.14 11:52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 작성자 06.07.14 11:53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 작성자 06.07.14 11:54

    그리스도는 떠나는 자의 이름. 나도 늘 떠나야 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은 몸이 무거우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나는 가진 게 너무 많고, 욕심이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돈으로도, 법으로도, 힘으로도...... 까불어봐야 30년...... 결국은 벌거벗은 채 아버지의 바다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따금 너무도 무거워진 나를 발견할 때마다 기도합니다. 내가 가진 소유가 영혼의 자유를 좀먹지 않기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선망하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 작성자 06.07.14 11:56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자신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선포와 구원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복음선포 사명을 부여하시는 그리스도와 세상에 파견되는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는 교회의 복음 선포 활동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또한 그분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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