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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5 -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에서 승리하고는 부르봉 왕조를 창시하다!
프랑스의 여러 왕조 중에 마지막 왕조는 부르봉 왕조인데..... 수많은 전쟁을 통해 프랑스를
유럽 제1의 강국으로 만들고는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한 루이 14에다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와 함께 프랑스 혁명에서 처형된 루이 16세가 후손들이니 그 시조는
앙리 4세로 그는 개신교도라 가톨릭과 싸운 제8차 위그노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 입니다.
프랑스는 게르만 프랑크족이 세운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지나 샤를마뉴 대제의 외손자
로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987년에 프랑스 왕국의 초대 왕으로 즉위하니 "카페 왕조" 입니다.
카페 왕조는 1328년에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프랑스왕
에 올라 새 왕조를 여니 발루와 왕조인데, 영국 왕 에드워드 2세는 왕비 이사벨라가 샤를 4세의 누이이니
부부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침략하니 이른바 100년 전쟁 입니다.
수세에 몰렸던 프랑스는 1429년에 잔다르크가 나타나면서 간신히 승리를 쟁취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온전한 프랑스 영토를 되찾는데.... 이후 프랑스왕들은 귀족을 억누르고 봉건제를 무느뜨린후
독일과의 싸움을 통해 부르고뉴등을 되찾고 북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싸웠으며
피렌체 출신 카트린의 자식들이 모두 죽자 1589년에 앙리 4세가 국왕에 오르니 "부르봉 왕조" 입니다.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손자인 루이 14세와 더불어 대왕(Henri le Grand) 칭호를 받은 두 왕 중에
한명으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짐은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 는 말을 했다는데, 위그노(개신교도) 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낭트 칙령“ 으로 유명합니다.
1553년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아틀랑티크 지방인 나바르 왕국의 베아른 지역 포 성에서 '나바르의 앙리'
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방돔 공작 앙투안은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의 8대손
이었고, 어머니인 잔 달브레는 나바르의 여왕으로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마르그리트의 딸이었습니다.
앙리는 모후 사망후에 나바르 왕위를 이어받아 '헨리케 3세' 로 즉위했으며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으나
나바르 여왕이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는 신실한 위그노 답게 강경한 인물이었기에 위그노로
자랐으니 개신교 신앙에 기반한 이상주의자인 어머니 와는 다르게 온건한 성품을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1561~1567년까지 파리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6촌인 앙리 2세의 자녀들과 함께 지냈으나, 1562년
바시에서의 신교도 학살로 제1차 위그노 전쟁(1562~1563)이 일어나면서 그의 일가는
프랑스 칼뱅파인 위그노와 가톨릭으로 나누어졌으니, 아버지인 방돔 공작 앙투안은
위그노와 동맹을 맺다가 편을 바꿔 가톨릭 편에 서서 싸우다가 노르망디 루앙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1568년 앙리 드 나바르는 내란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어머니 잔 달브레 곁으로 돌아와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으면서 군사 교육도 받았는데, 1569년 가을에 나바르 남부의 반항적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의 이름뿐인 지휘자(나이 15세!) 가 되어 진압하는데 성공합니다.
제3차 위그노 전쟁 (1568~1570) 이 발발하면서 중립을 유지하던 잔 달브레는 적극적으로 위그노를
지지했고, 앙리 드 나바르를 같은 위그노이자 시동생인 콩데 공작 루이 드 부르봉에게 맡겼으나,
1569년 3월 13일 자르냐크에서 벌어진 가톨릭 앙주 공작 앙리의 기습 공격으로 패배하고,
콩데 공작 루이가 전사하게 되자 잔 달브레는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사령관의 권한은 앙리 드 나바르의 군사교육을 맡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있었으며,
사촌인 소 콩데 공작 앙리 드 부르봉과 함께 10월 3일의 몽콩투르 전투에 참전했으며,
1570년 6월 26일 16세 나이로 아르네르뒤크에서 처음으로 출전하여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고, 이후 푸아투에서 부르고뉴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원정합니다.
1570년 8월 평화조약이 체결돼 프로테스탄트에게 관대한 포교령이 내려졌고, 내전종식을 기대하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이디어로 왕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혼담이 나바르 사이에서 오갔으니, 이
혼담은 1572년 봄까지 질질끌다가 두 어머니들 간의 합의로 마침내 앙리는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준비를 위해 먼저 잔 달브레가 파리에 갔으나 2개월 뒤인 1572년 6월 9일 호흡기 질환으로 죽으면서
앙리 드 나바르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국왕 헨리케 3세가 되었으며 8월 18일, 예정대로
마르그리트 공주와 노트르담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여 카트린과 잔의 의도대로 두 가문이 화해
하고, 순조롭게 잘 풀리거라고 생각했으나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위그노파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아들인 샤를 9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카트린이
가톨릭파의 기즈 공작가와 결탁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샤를 9세를 충동질한 대학살극으로, 헨리케
3세(앙리 4세)는 카트린에 의해 감금당했고, 그 사이 콜리니 제독을 포함한 파리에 있던 위그노
들이 학살당하면서 고립되고 말았으며 굴복해 가톨릭으로 개종해 목숨은 구했지만 3년동안 감금됩니다.
이후 파리에서 유폐생활을 보내던중,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즉위한후 암군으로 돌변하니
1576년을 기점으로 국내의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나바르 왕국에 도착해 다시
위그노로 개종해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나바르 왕국은 신교도의 집결지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헨리케 3세는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 에서 개신교도 맹주가 됩니다.
하지만 헨리케 3세는 위그노들이 계속 연패하면서 열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1577년 위그노들
의 희생을 강요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가톨릭 진영에서 가론 강 연안의
라레올성을 점령하자 곧바로 폴뢰망스를 기습 공격했으며 이후 1580년 봄에 카오르를 공격해
점령했고 1583년 자신의 소유지였던 몽드마르 시가 반환되지 않자 야간 공격을 감행해 점령합니다.
1584년 2월 앙리 3세의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네덜란드의 신교도인 빌럼 판 오라녜에 의해
네덜란드의 군주로 추대받았다가.... 안트워프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후 죽으면서 앙리 3세는 아들이 없는지라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집니다.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가까운 친척으로는 나바르 부르봉- 방돔가의 헨리케 3세와 숙부였던
루앙의 추기경 샤를 밖에 없었는데, 특히 헨리케 3세(앙리 4세)의 경우, 앙리 3세와는 6촌
형제였지만 왕위 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계로는 21촌 관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 프랑크족 “살리카법”에 의해 훗날 프랑스 국왕이 되어 부르봉왕조를 개창합니다.
제8차 위그노 전쟁(1587 ~ 1589) 은 “세 앙리의 전쟁" 이라 불리는데.... 앙리 3세는 위그노
나바르 왕 헨리케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기즈 가문을 위시한
가톨릭 동맹(신성동맹) 내에서도 헨리케 3세의 숙부로 가톨릭의 성직자 샤를을 다음
왕위계승자로 내세우면서 헨리케 3세는 기즈 공작 앙리를 위시한 가톨릭 동맹과 대립합니다.
1587년 10월 20일 헨리케 3세 (앙리 4세) 는 8,000명 국왕군을 이끌던 앙리 3세의 총신인 주아이외즈
공작을 쿠트라 전투에서 격퇴했으며, 1588년 12월 23일 블루아에서 앙리 드 기즈와 그의 동생
추기경 루이 드 기즈가 앙리 3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헨리케 3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앙리 드 기즈의 죽음은 기즈 가문이 앙리 3세의 왕권을 무시한데서 비롯되었으니 당시 앙리 3세는
모후 카트린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았으며,
쿠트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에도 사치를 줄이지 않아 파리 시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1588년 5월 12일,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모후 카트린이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앙리 3세는 파리를 탈출해 샤르트르로 피신했고, 같은해 7월 19일
앙리 3세가 루앙에서 기즈 가문을 위시한 가톨릭 동맹에 유리한 11개의 조항으로 된 연맹
조약을 발표했는데 부르주, 오를레앙 등 4개 도시를 가톨릭 동맹에 제공하는 불합리한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1589년 1월 5일 앙리 3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기즈 가문의 막내 마옌느 공작 샤를을 비롯한 가톨릭 동맹에 의해 앙리 3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프랑스 대도시들이 공개적으로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립니다.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하던 파리의 대법원이 해산되고, 가톨릭 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
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법원 마저 가톨릭 동맹편에 서는등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자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 수장인 나바르 왕 헨리케 3세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앙리 3세는 헨리케 3세와 손을 잡게 되었고, 1589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는데 5월 8일 가톨릭
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헨리케 3세가 이끌던 위그노군에 의해 앙리 3세가 구원 받았습니다.
이후 두 왕은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2개월 동안 준비후 7월말에 42,000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합니다.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중에 가톨릭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자크 클레맹이 앙리 3세에게 백작의
편지를 건네니 편지에 정신을 팔리는 사이, 자크 클레맹에게 칼에 찔렸으며 문병을 온
헨리케 3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권하며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숨을 거두니..... 필리프 6세에 의해 개창된지 261년만에 파란만장했던 발루아 왕조가 단절됩니다.
앙리 3세의 암살후 발루아 왕조의 맥이 끊기자 나바르 왕 헨리케 3세가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고, 프랑스와 나바르는 동군연합이 되었는데, 연합군
내에서 앙리 3세를 따르던 가톨릭 교도들이 위그노였던 앙리 4세를 버리고 탈영합니다.
그러자 앙리 4세는 뒤로 물러나야 했고, 몇주일 뒤 노르망디의 아르크성이 보이는 곳에서 마옌
공작 샤를 드 기즈와 싸웠으니 제9차 위그노전쟁 (1589~1598) 으로..... 1590년
3월 14일에는 이브리 전투에서 마옌 공작을 패퇴시키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시기 입니다.
앙리 4세의 경쟁자이던 숙부 샤를이 죽으면서 왕의 정통성은 견고해졌고, 가톨릭 동맹은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스페인왕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에우헤니아를 내세우는등 게르만
프랑크족 “살리카 법” 을 무시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1591년
4월 10일에 샤르트르가 앙리 4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가톨릭 세력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리고 1593~1594년쯤 되면 앙리 4세의 군대는 파리를 충분히 함락시킬수 있을 정도였는데,
샤르트르에 이어 누아용 까지 점령했으나 루앙 만큼은 점령되지 못하자, 앙리 4세는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들이 묻히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 는 명언을 하고 가톨릭으로 재개종합니다.
앙리 4세의 개종은 그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킬 정도
로 국외의 신교도들에게 파격적이었으나 장기간의 종교 내전으로 고난을 겪은
프랑스인 들은 환영했으니.... 이후 오를레앙과 리옹이 복종했고,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른후 3월 22일에 파리에 무혈입성합니다.
이후 가톨릭동맹 치하에 있던 여러 도시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했고, 랑의 경우, 포위공격 끝에야 겨우
복종했으나 브르타뉴 만큼은 앙리 4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저항했으니
1595년 1월에 앙리 4세는 스페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6월 5일 부르고뉴의 풍텐프랑세즈
전투에서 스페인 기병대를 격퇴했으나 그 보복으로 스페인군은 캉브레와 칼레, 아르드르를 점령 합니다.
1595년 9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앙리 4세의 파문을 취소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스페인군은 프랑스령에서 떠나지 않았고, 앙리 4세는 6개월 동안 라페르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는데 성공했으나, 1597년 3월에 스페인의 기습 공격으로 아미앵이 점령됩니다.
아미앵이 스페인군에 점령되면서 3월 초순에는 수도 파리가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
앙리 4세는 기적적으로 병력을 재편성한 후에 9월 19일에 아미앵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자신의 서자와의 결혼을 미끼로 브르타뉴 총독인 매르쿼르 공작 필리프 에마뉘엘 드 로렌을 회유
하는데 성공했으며,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는 낭트에서 역사적인 “낭트 칙령” 을 통해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5월 2일 스페인과 베르벵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기나긴 전쟁을 끝냅니다.
앙리 4세는 이후 위그노 전쟁 내란으로 황폐해진 프랑스의 복구에 힘쓴 뒤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 자리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1610년 5월 14일 가톨릭 광신도였던 프랑수아 라바이약 (François Ravaillac) 에게 암살당합니다.
앙리 4세는 신성로마 제국과 전쟁을 논의하려고 재상 쉴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5월
13일에 후처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정식으로 왕비 대관식을 치렀으며, 그 다음날에는
대관식과 관련된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파리 시내에는 교통체증이 발생한 상태였습니다.
교통 체증으로 국왕의 마차가 가지 못하자 근위병들이 길을 트게 만든다고 국왕의 마차에서 떨어졌는데,
그때를 노렸던 라바이약이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앙리 4세를 칼로 2번이나 찔러 죽인 것입니다.
앙리 4세의 암살은 프랑스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으니....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체포된 라바이약한테 고문
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배후는 없고 단독범행이라 주장했으며, 그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으니 라바이약은 재판에서 극형을 선고받았고, 5월 27일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거열형으로 조각난 라바이약의 시신은 불태워져 파괴되었고 무덤도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다만 서양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연좌제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형사처벌이 없었으며 대신 라바이약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은 '라바이약' 이라는 성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프랑스 거주가 허락되었습니다.
앙리 4세는 죽은후 방부처리되어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는데 훗날 프랑스 혁명때 혁명군들이 생 드니
대성당을 약탈하고 훼손하면서 국왕, 왕비, 왕족들의 시신과 함께 앙리 4세 시신도 훼손되었으니
구덩이에 파묻고 대원군 부친의 묘처럼 생석회로 막아놓았는데, 왕정 복고후 루이 18세가
복구했으며 약탈 때 잘린 시신의 머리는 2010년에 신원이 밝혀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앙리 4세는 앙시앙 레짐 (Ancien Régime, 프랑스 절대왕정 체제) 의 초석을 닦아놓은 왕이자,
근세 프랑스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성군이며, “낭트 칙령” 을 선포한
중재자이나 동시에 매관매직의 선도자이며 문란한 호색한이자 농민을 저버린 왕이기도 합니다.
앙리 4세 이전에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잉글랜드 왕국, 신성 로마제국, 스페인 제국 등 프랑스와 비슷
하거나 더 높은 국력을 가진 나라들이 존재했으나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1589년
부터는 프랑스는 전 유럽이 모두 한 편을 결성해야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그 위상이
올라갔고 손자 루이 14세 때까지 150년간 유지되었으니 “유럽의 중국” 을 만들어낸 왕이라 불립니다.
앙리 4세는 정치와 군사면에서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고 걸맞는 업적을 세웠으니 그는 불리해 보이는 여러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대 최고의 명장인 스페인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도 한번 패퇴
시켰을 만큼 군사쪽으로도 재능이 뛰어났으니 평가에 인색한 프랑스인들로 부터 대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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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길이 없다고 했다
노년에 이르면 내면(內面)을 바라보며 길을 찾고,
꿈을 향해 걸어가라고 한다.
남이 보기에 아름답게 사는 것을 넘어
스스로 느끼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건강관리 잘하시고 품격 높은 삶 되시길 바랍니다.
🫷🫸🫷🫸
드디어 부르봉 왕조가 탄생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와 혼맥으로 얽히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