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귀양살이 위리안치
지독한 귀양살이인 위리안치(圍籬安置) 얘기다. 그 옛날 주로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되던 형벌로서 민초들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이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流配刑) 중에 하나로서 ‘유배된 죄인의 거처(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을 뜻한다. 위리안치는 가장 중죄인에게 내리던 형벌로서 살아있는 자의 무덤이라고 하여 집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완전 차단했을 뿐 아니라 외부인의 출입도 철두철미하게 막아 세상과 단절시켰다. 한편 죄의 경중에 따라서 고향에서 지내도록 벌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 변방에서 지내도록 벌하는 극변안치(極邊安置), 섬(島)에서 지내도록 벌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중죄인을 가시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 싼 집안에 갇혀 지내도록 벌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다.
‘죄인을 먼 변방 오지나 섬으로 보내 일정한 기간 동안 살게 하던 형벌’을 귀양이라 했다. 귀양의 본딧말은 귀향(歸鄕)으로 고려나 조선 시대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이 귀향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는데 발음이 변하여 귀양이 되었다는 전언이다.
오늘날 개념으로는 철저한 분리와 고립을 전제로 한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가택연금형(家宅軟禁刑)이 위리안치이다. 여기서 위안리치의 조건이 얼마나 엄하게 정해 시행했는지의 한 예이다. 조선의 세조(世祖) 10년에 의금부에서 건의한 안치 죄인인 화의군 이영 등에 대한 금방조건(禁防條件) 중에 중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담장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며, 둘째로 바깥문은 늘 자물쇠로 잠그고, 일상적인 먹거리는 열흘에 한 차례씩 조달해 주며, 울안에 샘 즉 우물을 파서 음용수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치하고, 외인과 소통을 철저히 차단한다. 셋째로 외부인이 출입하거나 혹은 각종 물품을 제공하는 자는 불충(不忠)으로 처벌한다. 넷째로 수령이 불시에 점검하여 문을 지키는 자가 비리를 저지르면 법률에 따라 엄하게 치죄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안치 죄인의 심신이 피폐해져 정상일 수 없지 싶다.
조선 시대 형벌 중에서 곤장 100대를 맞고 멀고 먼 변방이며 사람이 살기 어려운 개마고원 중심부의 황무지 같은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유배되어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음을 당하는 게 최악의 귀양살이였다. 그렇다면 한양에서 거의 3000리 떨어진 오지중의 오지를 유배지로 정했을까. 이처럼 곤장을 때리고 멀리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형벌이었던 조선시대 형법의 근간은 중국의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이었다는 귀띔이다. 이 대명률에 따르면 유배를 보낼 때 죗값에 따라 2000리~3000리까지 보내도록 되어있지만 한양에서 2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는 게 사실상 어려웠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900리 정도 떨어진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법에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인 속전(贖錢) 즉 속죄금(贖罪金) 제도가 있어 관료 정도만 되어도 장형을 받고 귀양 가는 일은 드물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조소와 한탄이 널리 회자되지 않았을까 싶다.
대역 죄인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열악한 오지에 유배된 채 누추한 거처(집)에는 드높은 탱자나무 울타리(15척(尺)~30척 정도의 높이)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므로 바람과 햇볕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드나들 수 없는 환경인 까닭에 과연 정상 생활이 가능했을까.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절애고도 같은 옹색한 곳에서 숨통을 조이는 생활은 정신적으로 심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한편 실제로 위리안치 당했던 몇 몇 예이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불과 2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광해군도 인조반정 이후에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는 제주도로 옮겨졌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어 8년을 보내기도 했다.
원래 어떤 귀양이든지 오늘날에 견주면 무기징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내일을 기약할 희망이 없었다. 따라서 비록 위리안치의 형벌이 아닐지라도 모든 귀양은 그 끝을 예측하기 어려워 절망의 연속인 참혹한 삶이었지 싶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4차례에 걸쳐 2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었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18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모든 걸 포기하고 세월을 탓하며 술에 찌들어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정약용은 유배생활 중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같은 저술과 학문 연구에 발군의 성과를 거둔 특이한 경우도 있다.
고관대작으로 고래 등 같은 저택에서 떵떵거리면서 아랫것들을 부리며 살다가 오지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삶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터이다. 게다가 귀양길의 이동 비용을 비롯해서 유배지에서 의식주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때문에 경제적 궁핍에다가 정신적 피폐는 극에 달했으리라. 이러한 처지에서 체통을 지키거나 정상적인 처신은 구두선(口頭禪)에 가깝지 싶다. 만일 요즈음 개인을 집에 감금하고 외부사람과 소통이나 만남을 완전 차단함과 동시에 온라인(online)이나 오프라인(offline)의 소통 망(網)을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숨만 쉬며 비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과연 며칠이나 정상적으로 버티거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때 그 옛날 귀양살이는 오늘날 감방에 갇혀 무기수(無期囚)로 살아가는 경우보다 혹독한 형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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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각성(鹿角城) :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짧은 나무토막을 비스듬하게 박거나 십자 모양으로 울타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으로 오늘날에 비하면 바리케이드(barricade)와 유사한 개념의 구조물이다. 그 옛날 성 둘레에 연못을 만들어 적의 침입을 방지하려던 해자(垓子)와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한맥문학동인사화집 제23호, 2023년 2월 28일
(2022년 11월 7일 월요일)
첫댓글 좋은 내용의 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