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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체스터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1885년∼1966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한 명장이다.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윌리엄 홀시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해군 원수의 일원이다.
1885년 2월 24일 텍사스 프레더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니미츠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계 미국인이다. 부친은 니미츠가 태어난 지 5달 만에 류머티스성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니미츠는 모친이 재혼하기 전까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양육되었다. 8세 때부터 방과 후에 정육점 일을 하는 등 힘든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니미츠의 조부인 찰스 H 니미츠(Charles H. Nimitz)는 독일 상선의 선원 출신이었는데 니미츠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니미츠가 해군에 관심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니미츠는 원래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미 육군 장교가 되고 싶어 했으나 당시 추천권이 있던 텍사스 주 미국 상원의원이 자신에게 할당된 육사추천인원이 다 찼다며, 대신 인원이 남은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추천했다. 니미츠는 그땐 육군 장교가 될 길이 막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어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수락해 입학하였으나, 입학 후부턴 열정적으로 해군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졸업할 당시에는 114명 중 7등으로 졸업하는 등 생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니미츠 본인은 독서, 산책과 운동 등을 즐겨해 언뜻 보면 조용히 혼자 지낼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집에 해군관련 인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환영했다고 한다. 기억력이 좋고 배려심이 많아 조직 관리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재치가 있는 즉흥적 유머가 뛰어났다고 한다. 오만하고 극단적인 성격 탓에 적들이 많았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 인성문제가 아무것도 없다 보니 전 국민에게 사랑받은 제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정치에 관심이 없는 참군인이라 해군참모총장의 지위에서 멈추게 되지만...
2차 세계대전 해군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제독이며 그 당시 주력함 전함보단 잠수함에 더 관심이 많은 제독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2차 세계대전까지(그리고 그 이후로도) 전함과 인연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 해군 최연소 구축함 함장(21살)을 맡은 적이 있고 뛰어난 기술자+행정가여서 민간 기업으로 스카웃 제의도 받은 적이 많은 진정한 해군 함대의 사령관이다.
소위 때 구축함 함장을 하다가 한번 좌초한 경험이 있었으나 평소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고 과실이 거의 없다 보니 상당히 관대히 넘어갔다.
근무 중 수병 한 명이 바다에 빠지자 직접 뛰어들어 구조한 적이 있는데, 이 덕에 미합중국 해안경비대로부터 인명구조장 은장(Silver Lifesaving Medal)을 받기도 했다. 이 훈장은 약장을 잔뜩 달고 다니는 걸 싫어했던 니미츠 제독이 잠수함 장교 휘장 및 해군 공로장과 함께 항상 달고 다니는 몇 안 되는 훈장이었다.
그 이후 독일로 유학 가서 배워 온 디젤엔진기술을 이용해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로부터 니미츠는 디젤엔진에 관한 한 해군 제일의 권위자라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도 모셔가기 제의가 들어왔으나 해군에 남기 위해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잠수함에 디젤엔진을 적용시키기도 하고 잠수함 승조원으로 근무하기도 하면서 니미츠는 다른 연합군 장성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발발 직전에도 잠수함에 대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가졌으며, 태평양함대 사령관 취임식 역시 잠수함인 그레일링호 갑판에서 이루어졌다. 니미츠 본인이 잠수함 부대 출신이라 원하기도 했지만, 니미츠의 잠수함대 애호와는 별개로 취임식을 거행할 만한 대형 수상함정이 전무했다는 사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취임식을 치른 진주만의 잠수함 도크는 연료 저장 시설과 함께 진주만에서 타격을 입지 않은, 한 손에 꼽히는 해군 시설 중 하나였다. 참고로 취임식을 치렀던 진주만 잠수함 도크는 니미츠가 초급 장교 시절에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설이다.
항공모함의 경우는 오늘날 주류가 된 항공모함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는 원형진을 고안한 연구 멤버 중 한명이었다. 참고로 이 진형은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1916년)의 사후 연구과정에서 영국군이 자랑했던 복잡하고 예술적인 기동이 ‘그저 복잡하다’는 미 해군 지휘관들의 문제의식 하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직사각형의 함대 배치를 했기 때문에, 함대가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 개별 함정의 기동이 매우 복잡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하여 니미츠가 참가한 연구에서는 유틀란트 해전 역시 혼란을 우려해 두 함대가 선회를 하지 못한 채 조우하고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니미츠는 해군 대학에서 이 연구를 갖고 학위를 땄는데, 딸이 유틀란트 해전의 의의를 ‘요약’하는 것에 대해서 대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질문을 하자 이쑤시개와 후추 통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식탁 위에서 개별 함정의 기동을 일일이 설명했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점까지 니미츠가 해군에서 했던 일들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퇴역 함정의 항공기 공습의 위력을 시험하는 실험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비주류였기 때문에 떠맡은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실험에서 항공기의 뇌격은 퇴역한 순양함을 일격에 두 동강 내는 위력을 과시했고,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니미츠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니미츠가 항공기나 항공모함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진주만 공습 직후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최초 부임 시에는 패전 처리가 임무였던 것 같다. 유명한 일화로 부인에게 “태평양함대의 사령관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인이 “축하해요. 당신은 항상 그런 직책에 부임하길 원했잖아요.”라고 축하의 말을 하니 “그런데, 그 함대는 이미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게다가 해군 본부는 비밀리에 니미츠를 부임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니미츠는 전속부관과 함께 사복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서해안까지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해서 잠수함 위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니미츠는 자신의 정체를 기자들이 알아챌까 조마조마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니미츠는 그 당시에 소장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부 지휘관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당연히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한 승진이기 때문에 니미츠는 현지에 부임해서도 ‘현지 지휘관들의 깔보는 시선’에 상당히 곤란해 했으며, 그런 예하 제독들의 태도를 아니꼽게 여긴 윌리엄 홀시 제독의 도움으로 간신히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니미츠 본인마저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그나마 유효한 전력인 항공모함 및 잠수함대로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맞아 전선을 유지했으며, 해군 장관에게서 위임받은 태평양함대 사령부 인선을 위한 무제한의 인사권을 휘둘러서 미 해군 본부의 인사부처에서 일할 때 눈여겨 본 ‘인정받지 못했던 인재들(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대표 주자)’을 하나씩 긁어모아 자신만의 사령부를 건설하게 되며, 이 시기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윌리엄 홀시, 마크 미처, 커티스 르메이 등등의 태평양 전쟁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령부에 합류하게 되고(르메이는 해군 장관의 요청),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큰 실적을 남긴 태평양함대의 정보부 역시 질적,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게 된다. 니미츠 제독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윌리엄 홀시 제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중부 태평양 진격 작전 이후 많은 도움을 줬다. 루손 섬 상륙작전 중 태풍이 제 3함대를 직격해서 많은 손실을 입어 사문회(査問會)에 불려나갔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적극적으로 비호해 준 일은 그 한 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니미츠는 자신이 뽑은 인물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지휘관들이 전투에 돌입하면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한 스타일로도 유명하며, 이후 혼자서 함대를 통제하려 들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나 작전 입안 전에 참모진들의 난상 토론으로 계획을 만들면, 실전에서는 본인의 허락 없이는 작전변경을 할 수 없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스타일과도 종종 비교되었다. 레이테만 해전 당시 ‘전 세계가 궁금해 하고 있다’고 홀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낸 일화는 이런 불간섭 원칙을 깼던 예외 중의 예외로서 당사자였던 홀시 제독마저 곤혹스러워 했던 해프닝이다.
사실 “전 세계가 궁금해 하고 있다.” 사건은 의도치 않게 일이 확대돼 버린 경우다. 원래 “34기동부대는 어디 있는가?”가 전문의 본 내용이고, 뒤의 “전 세계가 궁금해 하고 있다.”는 전문의 끝을 알리는 삽입구였다. 이 경우 뒤의 삽입구는 해당 전문을 다른 전문과 문장길이를 동일하게 맞춰서 도청을 당하더라도 전문의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일이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이라 전문 담당하는 소위가 더미 문자로 발라클라바 전투를 기리는 테니슨의 “경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의 한 소절을 삽입구로 쓴 것. 그런데 당시 홀시가 이끌던 3함대는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미끼 전술에 낚이는 바람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완전히 비워 버려서 니미츠는 물론이고 7함대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도 빨리 돌아오란 전문을 수시로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홀시가 해당 전문을 전 세계가 궁금해 하는데 너 어디서 삽질하고 있냐? 빨리 안 와?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당연히 격분, 니미츠는 당황했고 담당 소위는 전출 당했다.
여하튼 제독들을 포함해 도크, 보급, 정보, 해병대 등등의 병과 역시 니미츠의 기대에 충족하는 활약을 펼쳤으며, 니미츠가 뽑지 않은 동시에 실적도 좋지 않았던 이들은 니미츠가 말없이 지켜보다가, 사령관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순간 태평양 사령부에서 전출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징계 형식이라기 보단 그저 근무지 변경이나 진급을 위한 순환 근무 등으로 처리하여 원성을 들을 일이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니미츠의 인선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함대 운영의 중심을 항공모함으로 변경하는 기본 지침이 결정된 이후, 미 해군 태평양함대는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줬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을 모조리 인공어초로 만든 뒤 주요거점을 중심으로 반격을 펼쳐서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 승리를 일궈낸 것은 니미츠가 완성한 ‘알아서 완벽하게 돌아가는 자신만의 사령부’였고, 니미츠 본인은 위에서의 압박에 실드를 쳐 주거나 부하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것 외에는 권총사격(군인다운 취미라고 생각해서 취미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수전증 치료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과 산책으로 시간을 때웠다고. 이는 사령관이 권총 사격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있음을 부하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제임스 포레스탈 앞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태평양 사령부를 방문한 포레스탈과 니미츠가 보트를 타고 진주만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상륙함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니미츠는 상륙 작전 때 상륙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그리고 상륙함의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해 포레스탈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니미츠의 말이 끝난 직후 상륙함 위에 나타난 것은 수영복 차림의 해군 간호사들(...).
그 활약상으로 종종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비교되는데, 전체적인 평가는 니미츠 제독이 가치 있는 승리를 더 많이 일궈냈다는 평이다. 그러나 일본 항복 조인식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명예가 맥아더 원수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장면에서 묻히는 감이 없지 않다. 니미츠도 맥아더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공식 항복문서 조인식에 서명을 하게 된 것을 알고 짜증을 냈지만, 포레스털 해군장관의 제안으로 니미츠는 미국 대표로써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본국으로 귀국한 뒤 어니스트 킹의 뒤를 이어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고유 권한을 상당히 포기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랐던 걸 보면 일생일대의 꿈이었나 보다. 포레스탈은 직설적으로 그 자리를 원한다는 니미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니미츠는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포레스탈은 관례보다 촉박한 인수인계 시간을 주면서 뒤끝을 부렸다. 해군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라 그런 것은 아닌지.
해군참모총장의 임기가 끝난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다가 그 당시 분쟁이 벌어졌던(그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조정위원회의 유엔 판문관을 지내기도 했다. 허나 이 위원회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이 조정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해산되고 그 뒤론 해군장관의 고문역을 하다가 그만둔 후엔 인기가 많다 보니 각지를 돌면서 연설 혹은 행사에 참여하거나 했고 1960년대에 출판된 《해양력:해군의 역사》 편찬에 참가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바뀐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싸움이 슬슬 시작할 때 니미츠의 해군참모총장 퇴임 연설은 해군에 힘을 실어 줬고 후에 있었던 제독들의 반란 사건에 도움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말년에는 폐렴으로 인한 뇌졸중을 앓았고, 1966년 2월 20일 샌프란시스코 예바 부아나 섬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인접한 트래저 아일랜드(Treasure Island)의 예배당에서 치루었고, 산 브루노의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니미츠 자신은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 때문에 구술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부하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도 전부 부인이 소각해 버렸다. 니미츠 사후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인 포터가 쓴 전기가 니미츠에 대한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도 2권으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양장 합본이 나왔다.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여졌으니 그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일까. 항공모함 함대를 앞세워서 승리를 일궈낸 사람을 기리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무기는 없으리라.
1976년 영화 미드웨이에선 헨리 폰다가, 미드웨이(2019년 영화)에선 우디 해럴슨이 연기했다. 특히 우디 해럴슨은 딱 보기만 해도 니미츠라고 알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온화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무른 사람은 아니었다. 함장 시절부터 부하 장교들에게 차상급자의 역할 수행 기회를 부여한 뒤 그 성과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으며, 능력이 자기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쳐냈다. 정확히는 “무난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장교이다”라는 근무평정을 써 주었으나, 니미츠의 스타일을 아는 사람은 이를 보고 그 사람이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할 것”이라는 의미를 캐치했던 것. 철저하게 능력주의적인 인사 원칙을 고집했기 때문에 윌리엄 홀시나 마크 미처처럼 인맥과 친분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도 없었다. 니미츠가 홀시, 스프루언스, 터너, 스미스 같은 개성 강한 장성들을 하나의 사령부 밑에서 원활하게 다룰 수 있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