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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思惟)의 시간(時間)
“이 세상(世上)에 무엇을(什么) 하러 왔는지(来了吗)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소명(疏明)은 자기 자신만을(只顾着自己) 생각해서는 발견(發見)할 수 없습니다.”
농업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농업연구대상(벨기에 국왕상)을 비롯하여 각종(各種) 유수(有數)의 상(賞)을 수상( 受賞)한 농학자(農學者) 김순권(金順權)박사.
그는 1976년 아시아 최초로 생산량이 세 배나 되는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를 개발했습니다.”
이후 나이지리아에서 아프리카 적응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 개발, “위축바이러스 저항성 품종 개발”, 스트라이가(Striga) “공생저항성 품종 개발” 등 아프리카 대륙의 식량난 해결에 기여하면서, 1992년 이래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노벨상 (Nobel賞 : 1896년, 스웨덴의 화학자 노벨의 유언에 따라 수여되는 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습니다.
“옥수수(玉垂穗) 한 알에서 세계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김순권(金順權,1945-, 農學者)박사에게 ‘공생(共生)’에 대해 듣는다.
딱히 어떤 고집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하도 많이 걸어 다니니까 운동화를 신는 게 편합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있으면 언제라도 옥수수(玉垂穗) 밭으로 달려가서 옥수수(玉垂穗)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좋습니다. 이렇게 다닌지 꽤 됐는데, 젊은 시절 스승이신 부루베이커 교수님께 익힌 것입니다. 교수님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명한 농학자(農學者)인데, 강의가 없을 때면 언제나 농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웃통을 벗고, 맨발로 일꾼들과 섞여 일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분을 닮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흉내를 내다보니 어느덧 나 또한 작물과 함께 사는 자세가 몸에 익었습니다. 육종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세운 원칙이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육종,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환경 친화적인 육종을 개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연구실에만 있어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뙤약볕을 쬐고 비를 맞으면서 현장에서 일을 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밭에서 일하기 편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농부이면서 어부였지요.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메뚜기 잡고, 개구리 잡고, 산에 가서 꿩을 잡을 수 있으면 좋고, 물에 들어가 전복 따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려웠지만 모두 그랬기 때문에 어려운 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1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비록 가난했지만 칠남매 중에 막둥이어서 크게 고생을 몰랐는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려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농사짓고, 밤에는 고기잡이배를 타고……. 우리 집 소(牛)까지 아버지 말은 잘 듣는데,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는 겁니다. 쟁기질을 해도 내가 잡고 있으면 삐딱삐딱하게 가고. 하루는 보리밭을 갈고 있는데 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를 들고 소를 세우는 겁니다. 당연히 소를 다그치려는 줄 알았더니 외동아들인 나를 야단치시는 겁니다. “사내가 돼서 소도 한 마리 못 다루니 앞으로 뭐가 되겠느냐” 하시면서. 그렇게 1년 동안 강훈련을 받은 것이 이후 전 세계 어디를 가서라도 옥수수(玉垂穗) 육종을 할 수 있는 인내심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배운 근면한 농민의 자세가 옥수수(玉垂穗) 육종을 연구하는 데 살아 있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나는 세 차례 중요한 시험에 낙방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가 부산상고 시험에 떨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논밭을 다 팔아 치료비에 보태고,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떨어진 것입니다. 내 꿈은 고등학교 때부터 육종학을 하는 것이었는데도, 대학교 때 교수님이 그 대학원을 나오면 농업경제학 교수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도전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낙방하고 농촌진흥청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 차례의 좌절은 나를 훨씬 투지 있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 모자람을 극복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었지요.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나쁘니 더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죠. 안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런 노력을 하다 보니,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당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농촌진흥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연구기관이라기보다는 그대로 관공서였습니다. 연구원들에 대한 평가조차 연구 성과보다는 입사 연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옥수수(玉垂穗)는 벼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연구할 환경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개발에 성공만 하면 농가소득을 훨씬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국 농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요. 미국은 1950년대부터 모든 옥수수(玉垂穗) 농가가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를 심었고, 이때부터 미국 농촌을 잘살게 만든 농업의 산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농업의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나는 우리나라라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 옥수수 연구소인 국제 옥수수 밀 연구소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매년 새로 종자를 생산해야 하는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는 대규모 종자회사가 없는 한국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며 연구를 방해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안 되니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지, 쉽게 되면 나 같은 바보가 뭐 하러 하겠는가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내가 죽든지 성공을 시키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반드시 성공을 시켜서 우리나라도 잘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으니까요. 그때는 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나를 옥수수(玉垂穗)에 미치게 했고, 옥수수(玉垂穗)를 사랑하게 했습니다. 옥수수(玉垂穗) 없이는 내 인생이 아무런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결과 세계 최초로 개발도상국 자체의 힘만으로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인 수원 시리즈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 세계가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성공을 한 겁니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에도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때 논문 지도 교수님이 아프리카에 연구하러 가면서 같이 가자고 계속 나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무조건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를 성공시켜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가더라도 그 이후에 가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 개발에 성공한 것이 세계적으로 뉴스를 타면서 유엔에서 내가 간다고도 안 했는데 발령을 내고, 진급을 시키는 겁니다. 해마다 여러 차례 언제 오냐고 재촉을 하고요. 나 또한 성공한 다음에 가겠다던 약속을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79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반대한 사람들의 공헌이 큽니다. 그 사람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나도 좀 놀면서 천천히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도 반대를 하니까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이 어려움을, 불가능을 극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반대가 심할수록 ‘야, 이거는 정말로 전망이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는 영국, 프랑스 등 주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둔 나라들이 30년 가까이 연구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결국 아프리카에서는 안 된다고 포기를 해버렸죠. 그런데 안 된다던 한국에서는 성공을 한 겁니다. 그러니 유엔의 연구소에서는 의아해하며 나를 초대해서는 한번 해보라고 한 것이죠. 스트라이가(Striga)는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 번성하여 옥수수(玉垂穗), 수수, 조, 벼 등 주요 농작물을 완전히 말라죽게 하여 일명 ‘악마의 풀’이라고 불리는 기생 잡초입니다. 선진국 학자들도 100년 동안 해결 방안을 연구하다가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스트라이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에 우연히 나이지리아 북쪽에서 스트라이가를 보고 1982년부터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악마의 풀은 원산지가 아프리카인데 외부에서 온 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것을 두고 ‘너는 나쁘니까 모두 죽어야 된다’는 식으로 연구를 하는 겁니다. 내 생각에는, 외부 사람이 아프리카의 원주인을 쫓아낼 수는 없을 듯했습니다. 나는 ‘스트라이가 100퍼센트 박멸’이 아니라 ‘스트라이가에게도 5퍼센트의 생존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연구 목표가 바뀌어야만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선진국 학자들은 나와 이론적으로도 다르고, 자기들이 해오던 방식과도 다르니까 반대를 심하게 했습니다.
그렇죠. 예를 들면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는 미국이나 선진국에서 수확량이 많습니다. 그러니 개발도상국에서는 옥수수(玉垂穗)가 적당히 생산되는 게 그들에게는 경제적, 국제정치적으로 이익입니다. 그런데 나는 미국보다 더 많이 생산되도록 하겠다니까 선진국에서, 특히 식민지를 둔 나라들에서 상당히 안 좋아하는 거죠. 대부분의 선진국 학자들은 못사는 나라니까 적당히 해서 조금만 더 잘살게 하면 되지 않나 했습니다. 즉 가난한 아프리카를 돕기는 하지만 자기 나라에 손해 입히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니 나와 같이 식민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안 하면 누가 할까 싶었죠.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성공한 것처럼 아프리카도 반드시 가난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진화의 원리, 창조의 원리를 존경합니다. 그런데 ‘스트라이가를 완전히 죽이는 품종을 개발하겠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인간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는 옥수수(玉垂穗)는 물론, 스트라이가와 같은 독초까지도 종족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모든 생물이 ‘공생’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풀도 살고, 옥수수(玉垂穗)도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악마의 풀은 아프리카 농작물과 함께 수억 년을 진화해온 겁니다.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사람이나 농민들이나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병, 벌레한테도 조금 주고, 우리 먹을 것도 생산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쁘니까, 도둑놈이니까, 죽으시오’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면서, 이해해가면서 서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듯이, 육종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슈퍼옥수수(玉垂穗)는 자연 속의 잡종 강세들을 교잡종한 것으로 GMO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GMO 식품은 지금 당장은 피해가 없을는지 모르지만 20년 동안 먹으면……, 자연 상태에는 없는 외부 인자가 축적돼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기형아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GMO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까딱없다는 말만 해요.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해야 팔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GMO 연구에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GMO만이 대안이다”라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GMO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세계 식량 위기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건강을 생각하면, GMO 식품이 아닌 것을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비자들의 선택이 중요해집니다. 농작물의 벌레는 인체에 해로운 게 아닙니다. 벌레 좀 있어도 아무런 피해가 없어요. 오히려 그게 더 좋은 겁니다. 그만큼 농약을 덜 사용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소비자들이 무조건 깨끗한 것만 찾으면, 기생충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농약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농약을 많이 치는 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이래선 안 됩니다. ‘소비자들이 주인’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소비자만이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다. 농민은 자기 농산물을 완전히 보장할 수 있는 농작물을 생산하고, 소비자는 벌레가 좀 있더라도 몸에 해로운 거 아니니까 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도 인간도 건강해지는 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시간을 아껴서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세 건은 해야 학비도 내고 대학원에 갈 돈도 모을 수 있으니까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24시간을 가졌지만, 어떤 사람은 열 시간 정도만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열다섯 시간, 어떤 사람은 다섯 시간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일기 쓰는 습관을 함께 들여서 자기 시간의 가치를 적어가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노력하면 갑자기 확 변하지는 않더라도 차츰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왔는가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보다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거기에서 힘이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고, 사랑이 싹틉니다. 그게 바로 ‘공생의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실망하지 말고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는 남을 위해서 태어났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태어났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대한민국이 전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 최선을 다하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하는 것, 참으로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내 경험으로는 나보다는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은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면 끝입니다. 할 게 없어요.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남을 위해서 살아가면 일이 끝도 없이 많습니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나의 것은 먹고살 수 있는 정도, 안 죽고 살 수 있는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 조금 더 거룩한 생각,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끈질긴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가 죽든지 너를 넘든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리고 남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자들을 보면 계산이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손익계산이 너무 빨라요. 나는 그런 손익계산 방법을 조금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원 시리즈 성공으로 당시 강원도는 1년에 400억 원어치의 옥수수(玉垂穗)가 증산되었습니다. 그러면 내 연봉이 그만큼인 겁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조금 더 잘살고, 아이들 교육도 더 많이 시키고……. 수원 시리즈가 성공했을 때 어느 농민 분이 그러셨습니다. “우리 아이 고등학교 공부까지만 시켰는데, 이제 대학교 보내야겠다”고. 또 어떤 분은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다 하시고, 어떤 분은 오토바이를 한 대 산다 하시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로 보람이 컸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망하던 아프리카 농민들이 우리 연구팀이 만든 옥수수(玉垂穗)를 심어 악마의 풀이 나더라도 옥수수(玉垂穗)가 생산되는 것에서 희망을 갖는 것을 보고 정말로 기뻤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경계가 없습니다. 연구라는 것은 끝이 없고, 국경이 없습니다. 과학자의 길은 정말로 재밌고, 해볼 만하고, 좀 더 큰 의미에서 돈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보니, 중간에 학생들이 좀 더 쉽고 월급 많이 주고 일은 적게 하는 곳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그 길이 반드시 좋은 길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정말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길,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17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북한 동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북한은 1995년, 1996년의 대홍수에 1997년의 해일까지 겹쳐 식량 생산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1998년 겨울에 처음 북한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했던 것은 그곳 연구원들과 정부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1998년 첫해에 협동농장에 심은 옥수수(玉垂穗)가 23퍼센트나 증산됐습니다. 그리고 2002년까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당시 나를 안내했던 북한 안내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옥수수(玉垂穗) 때문에라도 반드시 통일은 될 거라고. 어느 날 박사님은 옥수수(玉垂穗)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우리가 와서 ‘박사님, 통일이 됐으니 빨리 나오세요’라고 이야기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콜럼버스부터 시작하여 400년의 역사를 담은 미국 역사책 표지에는 내가 아프리카에서 개발한 슈퍼옥수수(玉垂穗) 왕1호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종자 한 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A seed can change the world)”
라는 글과 함께요. 옥수수(玉垂穗) 한 알을 심으면 중국에서는 1200개, 우리나라에서는 칠팔백 개의 알곡이 나옵니다. 1200배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식량 위기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제옥수수재단의 목표가 30억 인구, 세계의 반을 잘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중국이 13억이고, 인도가 10억, 아프리카가 5억이니 가능하리라 봅니다. 기후변화 문제 또한 극복 가능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옥수수(玉垂穗) 알맹이에서 에탄올을 추출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미국과 중국 등에서 옥수수(玉垂穗) 알맹이로 에탄올을 뽑다 보니, 식량과 가축 사료로 만들 옥수수(玉垂穗)가 부족해지면서 세계 곡물 파동이 왔습니다. 옥수수(玉垂穗)를 이용해 자동차를 굴리는 것도 좋지만 그 때문에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2005년부터 연구하던 알맹이에서 에탄올이 더 많이 나오는 옥수수(玉垂穗) 육종을 포기하고, 지금은 옥수숫대에서 에탄올을 추출하는 옥수수(玉垂穗) 육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옥수수(玉垂穗) 한 알에는 남북통일과 세계 평화의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각 나라에서 옥수수(玉垂穗) 연구에 미친 사람이 좀 더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농가에서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우장춘 박사의 시험장에서
김순권(金順權)박사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기차역에서 만난 역무원이 너무 멋있어 보여 나중에 기차표 찍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다 울산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세계적인 육종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에 우장춘 박사의 시험장을 둘러보면서 그는 친구들과 “우리도 이분처럼 훌륭한 육종학자가 되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김순권(金順權)박사는 옥수수(玉垂穗)를 연구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으로 하이브리드 옥수수(玉垂穗) 수원 시리즈 개발에 성공하고, 아프리카에서 슈퍼옥수수(玉垂穗)를 개발해 농업 분야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국제농업연구대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수상하였다. 옥수수(玉垂穗) 한 알이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노벨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추천되고 있습니다.
♥ 농학자 김 순권 [農學者, 金 順權, 1945. ~ 한동대학교 국제개발협력 대학원 석좌교수, 공생(共生)의 육종학을 실천한 옥수수(玉垂穗) 박사]
옮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