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 개역한글)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기독교 외 다른 종교에는 전혀
구원이 없다. 메시지의 배타성이
다. 그래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싫어하고 핍박한다."
그래서 복음은 희생으로 포장해
전달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메시지에 사람들은 분노한다. 복음의 배타성 때문이다.
근데 죽어가면서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행7:60)는
용서의 기도가 죽이는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든다.
그 중 하나가 핍박자 사울이 었다.
결국 전도자 바울로 변화된다.
중증 외상으로 1년에 30만명이
죽는다 암보다 외상으로 다쳐 죽는
사람이 더 많다.
중증 외상 전문의 이국종의 말은
거칠다. 동료 의사들이 싫어할 말만
한다.거침없이 비판한다.
응급은 신속해야 한다.
근데 김밥에 모래바람 들어간다는
항의 때문에 아무데서나 헬기가
착륙 못한다. 주택가는 소음 반대로
응급 환자 근처에 착륙도 못한다.
⚠️ 사람 체중의 5%가 혈액이다.
대개 3리터 정도의 피를 가지고 있다. 1.5리터 피가 빠지면 죽는다.
1.5 리터 패트병 정도 피가 빠지면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시간 끌면 죽는다. 이걸 막지 못하는 게 나라냐고
묻는다.
중증 외상 환자는 대개 가난한 사람
들이다. 부자들은 아는 연줄 통해
우선적으로 치료 받는다.
병원도 힘 있으면 잘해준다.
한번 아파보면 이걸 절감한다.
이렇게 돈의 유무로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된다. 이건 정의가 아니다.
그래서 의사 사회를 질책한다.
동료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근데 이런 험한 직설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의 희생때문이다.
그는 잠 못잔다. "저녁이 있는 삶"을
비웃는다. 그렇게 살면, 사람들 다
죽는다. 1년에 몇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삶을 산다. 사명감으로 뭉친
수십명의 팀원이 존재한다.
그들 때문에 죽을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사람
들은 배타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희망이 있기에 듣는다.
명확한 논리가 있는가?
올바른 정의가 있는가?
희생 없이 하는 정의 주장은 헛될
뿐이다. 옳은 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가? 희생없는 웅변은 저항감만
불러올 뿐이다.
우리에겐 완성된 복된 소식이
있다. 예수가 복음이다.
아무리 옳아도 희생없는 증거는
힘이 없다. 희생하고 말하라.
피 흘리고 외치라.
그게 증인의 삶이다.
샬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