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재작일에 거행하였는데 혼인하는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12.24.)
배정자(裵貞子·1870~1951)(50대 때의 모습)의 결혼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이것이 3번째 결혼이었던 데다 신랑 박영철이 아홉 살 연하이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까지 한 때문이었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유학생 전재식과 결혼해 아들까지 두었고, 전재식과 사별한 후 귀국해 현영운과 결혼했다.
궁내부 번역관 등 한직에 머물던 현영운은 배정자와 결혼한 후 육군 참령, 궁내부 대신서리 등 파격적 승진을 거듭했지만, 이혼 후 사기죄로 기소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배정자는 박영철과 5~6년 살다가 이혼하고, 일본인 오하시(大橋)와 결혼했다. 그 후로도 은행원 최덕, 무역상 조병헌, 20세 연하의 청년부호 정봉진, 25세 연하의 일본 순사 가와지리(川尻), 부호 조희경 등과 동거하고 헤어지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으로 유명했다.
배정자는 어릴 때 대원군의 측근이었던 부친이 명성황후 집권 후 처형되자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부 관기를 거쳐 통도사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통도사를 떠나 1885년 부친의 친구였던 밀양부사 정병하의 소개로 일본인 밀정 마쓰오를 만나 도일(渡日)해 망명 정객 안경수에게 맡겨졌고 그의 도움으로 학교에도 다녔다.
1887년 안경수의 주선으로 김옥균 문하에 들어갔고, 그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어 스파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수영·승마·사격·벽장술 등을 배웠다는 것이다.
▲ 실존인물인 배정자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요화 배정자'
1927년 배정자의 구술을 바탕으로 편찬한 책 '배정자 실기'에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지만,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배정자의 도일을 주선했다는 정병하가 밀양부사에 부임한 것은 1888년이었고, 배정자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 1887년 김옥균은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유배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자처한 배정자는 1894년 귀국 후 황실과 국정을 농간했다. 엄비와 고종에게 접근한 뒤, 황실과의 친분, 타고난 미모, 현란한 화술을 이용해 일본의 밀정 역할을 수행했다. 한일 강제합병 후에는 호화사치 생활과 엽색행각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만주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가를 정탐·밀고해 생계를 유지했다.
"배정자는 작년 합이빈(哈爾濱)에서 다수의 동포를 적에게 잡아주고, 협잡을 하고 봉천(奉天)으로 도망하여 와서 봉천 동포의 사정을 적(敵) 영사관에 고(告)하야 동포의 받는 곤란이 막심하외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 가살(可殺)의 요녀(妖女) 배정자의 명(命)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독립신문' 1920. 5. 8.)
광복 후 배정자는 여든 살의 나이로 반민특위에 기소되었다가 출옥 후 6·25전쟁 중에 사망했다. 그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요화 배정자'가 1966년(김지미 주연 영화 포스터)과 1973년 두 차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