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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와 그 현대적 표출
영지주의와 그 현대적 표출
오늘은 영지주의의 이론을 알아 봄으로써 오늘날 나타나 있는 영지주의의 경향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세기 기독교의 정통교리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레니우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교묘한 언어로 속임수를 써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리스도의 계시(성경)를 타락시킨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경향은 실상은 기독교가 아닌데 기독교인 것처럼 혼돈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독교 가르침인 것처럼, 마치 그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인양 성경을 이용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속아서 영지주의로 빠져들기도 했었고, 또 어떤 이는 거기서 다시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영지주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돈하여서 그것에 빠지기도 하고, 또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지주의 이론이 무엇이며, 그것을 근거하여 그 경향이 오늘날에도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지주의 신관
영지주의란 흔히 이원론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이 이원론은 플라톤의 세계관에 있다고들 말합니다. 플라톤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이디아(Idea))의 세계 즉 천상의 세계가 있고 물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두 세계는 엄격하게 분리 됩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하늘의 세계요 신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세계는 이상적인 세계요, 지선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신은 당연히 이상적인 최선의 신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신을 진짜 신(God)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이 이데아의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물질계인 질료의 세계가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는 이상적 천상 세계에 비하면, 이상적이지 못한 세계요, 타락하고 선하지 못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가 물질의 세계이기 때문에 철학에서는 질료의 세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에 의하면 이 세계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신이 창조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은 천상의 신에 비하면 선하지 못한 신이요, 심지어 무섭고 잔인한 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물질계를 만든 신과 천상의 이상적인 신은 같은 신일 수가 없는 별개의 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신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상의 신은 순수하게 선한 신인 반면, 데미우르고스는 저급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선한 신과 저급한 신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애초부터 두 근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예수
이상과 같은 영지주의 세계관 및 신관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도 이원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의 세계를 타락한 것으로 보니, 그들의 이론으로는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천상의 존재요, 선한 존재라면 타락한 물질 세계에 속한 육신을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더럽고 따라서 심지어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데, 천상의 그리스도가 이런 육신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천상에서 온 그리스도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가 자신의 혼적인 아들(Psychic son)을 발생 시킴으로 출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물이 관을 통과하듯이 데미우르고스의 혼적인 아들이 마리아를 통과하여 예수라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와 그리스도는 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근원이 다른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천상에 있었던 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영은 언제 예수에게 왔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 영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에게 임하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 영은 천상에서 내려와서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에게 임하였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리스도 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영의 나라에서 온 순수한 영이요, 지선의 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영은 예수의 생애 동안 예수와 함께 있으며 일하다가 예수가 십자가 달려 죽을 때에 예수를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그리스도 영은 고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순수한 천상의 영이니까 그런 영이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고통 받고 죽은 것은 육신적인 예수이지,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상에서 영지주의 메시야관은 두 가지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예수를 근본적으로 분리시킨 것입니다. 이런 경향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온파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에비온파의 견해를 후에 소시니언(Socinians), 유니테리언(Unitarians),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위대한 인간 곧 하나님의 경지에 오른 위대한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시킨 두 번째 결과는 그리스도가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그리스도 영은 예수가 죽을 때에 그를 떠나버렸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현설 즉 그리스도가 가짜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 가현설이 주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현설은 후대에 그리스도 영을 받았다고 하는 모든 이단들에게 기반이 되는 이론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영은 하늘로 돌아갔다가 어떤 특별한 인간들에게 임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지상의 예수처럼 머리를 길게 늘이고는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한 사람이 일제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이 그리스도 영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리스처럼 되고, 신령한 지식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마치 신이라도 되는 듯이 교주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이 다 이런 유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성령을 받아서 예언하고 능력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영 대신에 성령을 받았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성경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받았다는 주관적인 것을 의존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개 한없이 교만하고 강퍅하고 자신을 절대시합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외치면서 신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다 영지주의의 후손들이요, 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부활 후에 그가 보내시는 성령을 을 믿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개 사람이 되었다가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 믿는다고 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임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 영'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믿는다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그리스도의 영 곧 고난 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구하여 그를 통해서 자기들 스스로가 신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어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부활하시는 과정을 겪으심으로 우리의 메시야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물질에 속한 육신으로 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지 않았다면, 육신으로 난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의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칭이라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능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원래 천상의 있던 영의 이름이 아니라, 구원사역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 확립된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은 그것을 예수에게 확립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익두스'라는 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익투스'라는 헬라 말은 '물고기'를 뜻하는 말이지만, 이 말을 구성하는 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주'라는 말들의 머리 문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던 중에서도 물고기 그림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메시야요 구주가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오,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엉터리 구원론
영지주의자들은 아주 다양한 종류의 분파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영을 받고, 영지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그들의 영이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분파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 중의 한 분파였던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본래 영적인 사람(the pneumatics), 혼적인 사람(the psychic), 육체적인 사람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래 영적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당연하며, 혼적인 사람은 올바르게 살고 열심히 정진하는 생활을 하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육체적인 사람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사람은 구세주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셈입니다. 그 영이 육체를 떠나서 원래 있던 하늘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의 사람들에게 구원은 영이 몸을 벗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구원에는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적인 사람은 자기의 선한 삶이 구원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 역시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사람은 아예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운명론 혹은 결정론적입니다. 어쨌든 여기서는 구원자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어서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구원을 얻을 사람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의나 혹은 자기 노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아예 육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영지주의는 참으로 사변적입니다.
영지주의가 이렇게 된 이유?
영지주의가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에게서 들어보겠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은 비록 우리와 비슷하게 말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가 잘못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사고의 동기가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서서 생각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모든 오류의 근원은 교만"이라고 이레니우는 말했습니다. 둘째는 '영지주의자들은 그 근원부터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고 이레니우스는 말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을 사용하고 마치 자기들이 기독교인인 것처럼 말하지만, 기독교와는 근원부터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교회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였음을 이레니우스는 지적하였습니다.
발렌티누스 영지주의자들은 비성경적인 자료들을 사용하였으며, 이것들을 예수의 비유에 적용시켜 해석하였고,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사변에 맞추어서 해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다른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르게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변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되 자기들식으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골로새서 2:9, 3:11절을 사용하여 '천상의 구주'를 언급하였고, 고린도전서 15:50절을 사용하여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천상의 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Col. 3:11 pa,nta kai. evn pa/sin Cristo,j; all and in all Christ-'Christ is all and in all', NIV)이신 부활하신 예수를 말하고 있으며, 혈과 육을 제외한 영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을 영생에 참여시키는 전인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자기들의 사변을 마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인 양 가르쳐서 사람들을 오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의존해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기들의 주관적인 사변을 따라서 사고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철학적인 사변에 의존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은 영지주의와 같은 주관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성경 밖에서 끊임 없이 지식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지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 유대인의 하나님은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저급한 신, 노하며, 심판하며,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잔인한 신이었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이 있고, 신학의 세계에서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사변을 따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에서 우리는 인간 사변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또 주의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적인 사변이 사색의 근거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가 사색의 근거라는 것을 주지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는 만큼 가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자유의지를 주장한 에라스무스에 대항하여 '노예의지'를 말했고, 칼빈 역시 자유로운 이성적 사유를 경계하며 경건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으로 넘기고 겸손하게 그의 섭리를 따르려는 자세를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개혁신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자들은 계시의존적인 사유를 주장했습니다.
계시의존적 사유는 계시에 복종하는 사유입니다.
이것을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신앙에 참으로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신뢰하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이 세상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피조 세계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런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절대로 선하시며, 절대로 위대하시며, 절대 주권을 가지고 이 세계의 시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분을 믿는 자는 합리성을 잣대로 하는 모든 이론 신뢰를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