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쉐카이나 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KESLL
(위 글은 현재 경북대학교 교수로 계신 김두식 변호사님의 글입니다. 블로그 주인이 쓴 글이 아님을 사전에 밝히는 바입니다.)
경남 김해 출신으로 경북대 의예과에 재학 중인 정규식 형제님으로부터 지난 8월 말 이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김해중앙교회 대학부 학생인 그는 먼저 그동안 <한겨레>에 실린 저의 칼럼들과 제 책 <헌법의 풍경>을 잘 읽었다고 밝힌 다음, 제 책의 내용 중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른바 ‘김해여고 사건’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출처] 김해여고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사건에 대한 칼럼|작성자 세리에스
1973년 김해여고에서는 고등학생 6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가 제적 처분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이와 같은 처분이 잘못되었다며 소송을 제기하지만, 대법원까지 올라가 패소하게 되지요. <헌법의 풍경>에서 저는 그 소송의 진행과정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대법원 판결이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제가 김해여고 사건에 대해 처음 전해들은 것은 1년 반쯤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탈영자들의 기념비>라는 책의 공동 집필에 참여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군법무관 시절 국선변호를 하면서 젊은 여호와의 증인 병역 거부자들을 대면한 일은 있었지만, 법정 밖에서 여호와의 증인들 다수를 한꺼번에 만나보게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심지어 2002년 봄 <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라는 병역 거부 관련 책을 내면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헌법상 기본권 차원에서 옹호하면서도, 여호와의 증인들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버리지 못했던 까닭에 그들을 직접 대면할 기회를 애써 피해왔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바로 그 날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는, 1973년 김해의 어느 곳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사건이 있었고 학생들이 제적처분을 당해 대법원까지 올라갔었다는 이야기를 참석자들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사건이 당연히 자기 쪽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저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지요. 제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기억을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자라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나 통합 전통을 생각해 보면,
도무지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애국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였고, 일부 교회에서는 강단 위에 태극기를 놓거나 국경일에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애국조회와 교련검열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수없이 반복되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혹시 이것이 일종의 우상숭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의문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전도사님들께 여쭤보면,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의식일 뿐, 우상숭배가 아니다”라는 상투적인 대답만 반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제시대에 신앙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과 국기에 대한 경례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신사참배는 경배의 대상이 침략자들의 신이었으므로 문제되었던 것이며 우리나라 국기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 단순히 국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면 왜 하필 사람 손으로 만든 국기에게 인사하는 형식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 경의와 경례가 그렇게 다른 것인지, 그렇게 치면 집안의 제사도 그저 사진에 절하며 가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닌지, 여러 애국심 표현의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면서 거부할 경우의 처벌은 왜 그렇게 가혹한 것인지.... 고등학생이었던 제 마음 속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들이나 하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에, 저는 그저 제 마음 속에 자꾸 떠오르는 이러한 ‘이단적’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했을 뿐, 저의 생각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험들 까닭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로부터 김해여고 사건을 전해 듣고, 해당 대법원 판결을 찾아 읽으면서도 이게 여호와의 증인 사건이라는데 대해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탈영자의 기념비>에도 그 이야기를 잠깐 언급했고, <헌법의 풍경>에서도 여러 면을 그 판례 비판에 할애했습니다.
정규식 형제님의 메일은 바로 이 사건의 주인공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아니라, SFC(학생신앙운동, Students for Christ) 활동을 열심히 하던 고신 교단 소속 고등학생들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맙게도 그는 이 사건으로 제적처분을 당한 여섯 명 중의 한 명이 향상교회 사모님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주었습니다. 메일을 받고도 저는 긴가민가했습니다. 설마 예장 고신 소속 학생들이 그랬을 리가 있을까?
그래서 먼저 대법원 판결부터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 수십 번은 읽어본 판결이었습니다. 거기 어딘가에는 분명히 해당 학생들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서술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본 판결 어디에도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제 책의 오류가 드러나는 순간이라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기대 섞인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 학생들은 누구일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였던 것일까? 그래서 정규식 형제을 찾아 전화를 걸었고, 정 형제는 자신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근거자료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1951-2001 : 김해중앙교회 50년의 발자취>를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는 이 사건 당사자들 중의 한 명으로 훗날 브니엘 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박명순 선생님의 증언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행경과를 차분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워낙 깔끔한 문체로 잘 정리되어 있어 별로 가감할 것이 없는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3년 9월 18일 김해여고에서는 영어를 가르치던 어느 선생님이 수업시간 중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도록 학생들에게 지시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 수업을 받던 학생 한 명이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고, 학생과 영어 선생님 사이에는 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곧 교내 전체에 알려지게 되지요. 마침 교련검열대회를 앞두고 예행연습이 한참이던 민감한 시기였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교련검열이 있다면 전국의 고등학생들은 거의 수업을 전폐하다시피하고 그 준비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민감한 시점을 맞아 전교생이 운동장 조회대 앞에서 교련검열대회를 위한 제식훈련을 하던 중에 이번에는 35명의 학생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함으로써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는 김해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합니다. 경례 거부로 적발된 35명의 학생들은 모두 김해지구 SFC에 소속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측 학생들이었습니다. 마침 학생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김해여고 교장 선생님은 “내 목이 달아나나 너희들이 쫓겨나나 보자”며 노발대발합니다. 선생님들 중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구해주는지 두고 보겠다”며 기독교를 비방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 분도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목사님 한 분이 다음 날 학교를 방문해 “교장 모가지가 얼마나 두꺼운지 보자”라는 식의 과격한 표현을 하는 바람에, 이 사건은 단순히 몇 학생들의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를 넘어 학교와 지역 기독교계 사이의 심각한 충돌로 비화됩니다.
이 사건은 국가 주도하에 한창 애국심을 고취하던 당시 분위기와 맞물려 전국 중요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기까지 하지요. 이에 따라 학생들은 불온한 사상에 물든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하는 사상적 의심까지 받게 됩니다. 교장 초임발령을 받고 의욕에 넘치던 50대 초반의 윤 모 교장과 선생님들은 적발된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 회유와 협박을 계속합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학생들 일부가 이탈하여 거부 학생수는 며칠 후 22명으로 줄어들게 되지요.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겠노라고 담임선생님과 약속한 어느 학생은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국기경례 절대거부”라는 혈서를 써서 학교에 제출하기도 합니다. 학교 측의 대응도 갈수록 교활해져서, 학교 게시판에 ‘제적 공고’라는 제목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22명의 학생들 이름을 게시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수용하겠다는 학생들이 나올 때마다 그 이름들을 한 명씩 지워나가기로 한 것이었지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학부모들을 불러 자녀들이 부모님들 앞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압박의 강도도 높여갑니다.
이런 엄청난 압력 앞에 노출된 사람들은 성인이 아니라 고등학교 1, 2, 3학년에 불과한 어린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엄청난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나가기로 결심하고 학교가 끝나면 교회로 달려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지요. 그러나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이런 압력을 이겨내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학생수는 곧 7명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그 중 2학년이었던 김해중앙교회 출신 박복숙 학생이 브니엘 고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어 최종적으로는 6명만이 남게 됩니다. 박복숙 학생의 전학비용을 소속 교회에서 부담하기로 했던 것을 보면, 교회도 이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사건 발생 후 13일째인 1973년 10월 1일 학교 측은 교사의 지도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남아있던 학생들을 제적 처분합니다. 제적된 학생들은 류영화 (당시 3학년, 가락교회), 백순옥 (2, 대저제일교회), 이화영 (1, 대저제일교회), 문은미 (1, 대저제일교회), 김영혜 (1, 활천중앙교회) 박명순 (1, 조눌교회) 등이었습니다. 학부형과 김해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은 학교장을 찾아 제적처분을 다시 고려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학교 측으로부터 이미 전교생에게 공고했고 언론에도 보도되었으므로 재고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듣게 되지요. 결국 제적학생들이 소속된 김해시찰과 부산노회, 고신총회는 이 사건을 수습하고자 특별처리위원회를 구성했고 부산지방법원에 제적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교회 차원을 넘어 교단 차원에서 이 사건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학교 측의 제적처분이 정당했다는 판결을 내리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산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이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기로 하고 1973년 12월, 6명 제적생들의 입학을 허용해 준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신 총회에서는 이 사건을 놓고 두 가지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첫째는 국기에 대한 경례가 과연 제2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인가 하는 논쟁이었고, 둘째는 이 학생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는 논의였습니다. 박명순 선생님의 기억에 따르면, 첫 번째 문제는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긴다’는 애매모호한 방향으로 정리되었고, 두 번째 문제는 학생들의 복학을 위해 각계각층에 호소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은 청와대의 육영수 여사를 직접 접촉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누구로부터도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국기경례를 거부할 자유가 있듯이, 학교장은 교사의 지도에 불응하는 학생들을 퇴학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답변했던 육 여사는 목사님들의 방문을 받은 며칠 후 문세광에게 저격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신 교단 측은 각계각층에 호소하는 한편, 부산의 인권 변호사였던 김광일 씨를 선임하여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소송 진행도 계속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김해여고 측은 “만약 행정소송을 중단한다면, 해당 학생들이 현재 학적도 없이 브니엘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협박조의 타협안을 비공식 경로로 제시합니다. 고신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소송을 계속했지요. 결국 김해여고 측은 브니엘 고등학교를 상대로, 전학서류도 없이 제적된 학생들을 받아들여 공부시키는 것은 불법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당시 브니엘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박성기 목사는 헌법상 기본권인 교육을 받을 권리를 들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역부족이었고 1974년 7월 학생들은 브니엘 고등학교에서도 퇴교당하고 맙니다. 사건 발생 3년 후 대법원에서도 학생들이 패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법률적으로도 완전히 마무리되지요.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는 이 사건 당사자들 중 세 사람의 후일담만을 간결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3학년이었던 류영화 학생은 고신대학에 특례 입학하여 정주채 목사의 사모가 되었고, 1학년이었던 박명순은 검정고시로 부산대에 진학한 후 브니엘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이화영은 김해 양무리 교회 집사로 섬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와 같은 기본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저는 먼저 제 책을 낸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지금 진행 중인 3쇄에 나의 실수를 고백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출판사 측의 답변은 안타깝게도 막 인쇄가 끝냈기 때문에 몇 달 후 4쇄에서나 반영할 수 있겠다고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 사건의 주인공이 여호와의 증인이든 예장 고신 측 학생들이든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뭐가 다를 게 있냐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책을 당장 수정할 수 없게 되고 보니, 급한 대로 류영화, 박명순 두 분 자매님께라도 연락을 드려 먼저 사과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주채 목사님은 서울에서 잠실중앙교회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며 임기제 도입 등 개혁적 조치에 앞장서다가, 2000년 10월 용인 향상교회를 분리 개척한 것으로 유명한 분이라서 그 사모님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8월 말에 교회에 연락을 드렸을 때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해외여행 중이어서 연락이 좀 늦어졌지요. 박명순 선생님을 찾기 위해 브니엘 고등학교로 전화를 걸었지만, 선생님께서 이미 명예퇴직하신 후라서 연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9월 14일에야 두 분과의 연락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류영화 사모님과의 통화에서 저는 책을 쓰게 된 경위와 제가 범한 오류, 그리고 진실을 찾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드렸습니다. 류 사모님께서는 누군가가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 무척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범한 오류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사건 내용을 이야기해 주셨지요.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 당시에 고 3의 신분으로 불이익을 감수해 가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류 사모님은 “전혀 칭송받을만한 일이 아니었다.”면서 “저희는 그저 배운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는 말만 강조하셨습니다. 이야깃거리 될 것도 없다는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6명의 학생 중 유일한 고 3이었던 류영화 사모님은 졸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제적을 당했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다시 1년을 더 공부했지만 끝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단 측의 특례 인정으로 고신대학교에 입학하여 남들과 똑같은 학부 4년 과정을 마치고도 마지막에는 고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정식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요. 서울로 올라온 다음에도 여러 번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학사 학위를 갖지 못한 상태라 제약이 너무 많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사모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는 듯 했습니다.
류 사모님께서 박명순 선생님이 부산 동부삼일교회에 출석하고 계신다고 알려주신 덕분에, 교회에 연락하여 박명순 선생님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또렷한 목소리로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에 실린 내용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다만 당시 고신 총회에서 진행된 논의에 대해서는 전은상 목사님께서 가장 잘 기억하고 계신데, 지금은 캐나다에 계시기 때문에 당장 여쭙기가 곤란하다고 아쉬워 하셨습니다. 고 3이었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준비할 여유조차 없었던 류영화 사모님과 달리, 고 1이었던 박명순 선생님은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해여고 사건을 정리하고 관련자들과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유신독재의 어두운 그늘이 내려진 가운데, 김해라고 하는 조그만 동네에서 일어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빨리 잊혀져서 이제는 그 사건이 여호와의 증인들 사건으로 잘못 알려져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지요. 사람들이 이 사건을 여호와의 증인들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한 저의 입장에서는 무척 부끄러운 ‘진실의 발견’이었지만, 이 사건의 내용은 그런 부담감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한 찬반 입장과 상관없이 이 이야기를 듣는 기독교인이라면 저와 같은 감동을 느끼리라 믿습니다. 주일에 사법시험을 치러 가면서도 별로 신앙양심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던 저 같은 사람도, 1924년 올림픽 대회에 참가해 “나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자기 종목이 아닌 분야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던 에릭 리델의 실화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김해여고 사건도 그와 같습니다. 신앙이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요즘 한국교회 분위기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진지성을 발견한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30여 년 전의 이 사건은 잔잔한 감동과 함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 과제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과연 우상숭배인지 아닌지를 신학자들이 정리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논쟁이라도 벌여 신도들의 판단을 도와야 합니다. 박명순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고신 총회가 이에 대해 ‘개인의 신앙 양심에 맡긴다’는 결론만 내렸다면, 그건 사실상 목양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신도들이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결행한 일로 인해서 학교에서 제적되었고, 만약 그곳이 학교 아닌 군대였다면 항명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각자의 신앙 양심에 맡긴다니요. 저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지만, 초대교회 신도들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교인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그처럼 심한 박해를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주의 입장에서 병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시각이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이 국가와 충돌하게 되는 경우는 모두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할 때’입니다. 국가가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행위이고, 시민의 생명을 직접 빼앗거나(사형제도) 시민에게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는 것(전쟁) 역시 ‘생명을 주기도 하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유일한 분’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기존의 주류 교단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를 너무 소홀하게 취급해 왔습니다. 가정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대해서 극단적인 저항을 했던 것과는 한참 다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고 가족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제사가 우상숭배라면,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면,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일 수 없겠지요.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적어도 우리 교회가 최소한의 일관성은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군사독재 정권이 물러가고 국가의 과도한 폭력이 완화되어 가는 지금 시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보다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둘째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우상숭배인지 아닌지를 잠시 접어두고 나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비록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생각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는 형식적인 의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신학의 영역이 아니라 법학의 영역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국방의 의무와 양심의 자유라는 두 개의 헌법적 가치가 충돌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와도 구별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병역의무 위반이라는 중대한 실정법 위반행위를 낳기 때문에 형벌권의 발동이 어느 정도 정당화될 여지를 갖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우상숭배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할만한 헌법적 가치를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계속하고 있을 뿐이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헌법상의 의무로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법학자로서 저는 만약 김해여고 사건이 지금 다시 일어난다면 대법원에서든 헌법재판소에서든 분명히 학생들의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판결이 나오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 정도 종교의 자유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나라는 이미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진 다양한 전통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에서 자라나 통합 측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통인 고신 측의 신앙에 대해서 배워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시절을 고신 측 교회에서 보내셨고 사촌들 대부분을 비롯한 일가가 여전히 그 교단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신사참배 거부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 주일 날 뭘 사먹으면 배탈 나는 줄 아는 사람들, 율법적인 전통이 강한 사람들’ 정도로만 생각해 온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고신 측 전통이 그렇게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편 ‘신사참배 찬성 결의라는 아픈 상처를 간직한 교단일수록 애국심을 더 강조하고 태극기와 애국가를 앞세우는 등 수선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라면 기회가 되는 대로 다른 교단들의 좋은 전통을 따로 공부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친일파들을 색출하는 식의 역사 바로 세우기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던 보수 기독교인들의 긍정적인 유산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신화적’ 인물들과 출옥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반대편에 서 있던 신사참배 찬성파들이 그 분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 차근차근 공부해 가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같은 상황이 닥쳐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부는 단순한 과거사 찾기가 아니라 잘못된 미래를 막기 위한 예방 효과를 갖습니다.
넷째로, 다른 사람들의 신념을 우리가 어떻게 존중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사학 대광고등학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지 않는 학생이 일방적으로 기독교 학교에 배정을 받아, 종교 교육을 거부하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젊은 친구에 대해서 “기독교 선교를 위해 기독교의 돈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학생 교육도 마음대로 못한다니 말이 되느냐? 기독교 교육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행동”이라며 배척하고 불관용 입장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과연 충분할까요. 종교계 학교로부터 학생선택권을 빼앗은 교육당국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면책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그 학생의 입장에 서 보십시오. 애국심에 불타는 선생님들에 맞서 신앙 양심을 지키고자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김해여고 학생들과 이 남학생의 차이는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중요한 만큼, 그의 무신론적 신념도 중요합니다. 더 늦기 전에 기독교 학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학생 선발권과 평준화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는 한편, 억지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황금 같은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저의 오류를 지적해 준 정규식 형제님과, 전화통화에 친절히 응해 주신 류영화 사모님, 박명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급하게 정리한 내용이라 여러 모로 거친 표현이 많습니다.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해 교계의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이 글의 조회수가 갑자기 많아져서 저도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글을 쓰신 김두식 변호사는 검사출신으로 지금도 대구에서 활동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만 아마 부르심을 받으셨을 가능성이 큰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글은 여러면에서 모두 고민을 해본 사람의 글임을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그 1973년도에 있었던 사건을 매우 세부적으로 기억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글을 진지하게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머지 4분의 삶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이 글에서 김두식 변호사께서 < 병역의무 거부> 문제와 <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문제를 구분한 것은 사안들을 면밀히 분석해온 분이 당연히 도달했어야 할 구분으로 해석됩니다. 과연 잘 분별한 것입니다.
또 대광고등학교 문제는 학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가와 교육청의 문제가 우선이라는데 동의합니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 학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문제로 비화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믿음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 믿음을 강제로 억압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학교들과 국기에 대해 경례해야만 하는 한국군대 생활을 생각할 때 참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 때문에도 한국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1973년 저는 거듭났습니다. 그 이전에 교회에 나가본 것은 12년 쯤되었고 교회를 본격적으로 다녀본적도 5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저는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는 당장 생각해보지 않았으면서 나는 국기를 신적 존재로 생각하고 경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경례한다고 변명했던 것같습니다. 헝겊에다 혼을 불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말씀으로 분별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는 우상숭배가 맞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에서 가슴에 손을 얹는 행위는 프리메이슨의 제스처(사인)를 약간 변형시킨 것입니다.
특정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뿐만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빰~ 빠 하는 나팔소리와 함께 "나는 자랑스러운...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소리가 들리면 멈춰서서 사방을 두리번 거려 사람들 시선이 향하고 있는 지점을 찾아내 가슴에 손을 얹고 차려자세로 서 있던 적도 있었던 터라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말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주의 또는 전체주의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패역한 이념이며 그것들이 막강한 공권력으로 행사되었던 군국주의나 독재체재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얼마나 훼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상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아는 일입니다. 한심한 것은 한국 땅에서 다까끼 마사오가 죽은 지 35년 지난 지금, 박정희가 철권독재를 휘두를 때 만들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가 그 딸에 의해서 다시 논의되고 관련 부처에서 법 개정을 착수했다는 보도도 얼마 전 보았습니다. 이 글에서 문제를 제기한 논지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정당화했던 경험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가 다시 시행되어도 아무 저항없이 동조 또는 찬양 고무할 것이 분명합니다. 환갑이 넘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분별하게 된 것과 아무 문제의식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경건하게(?)
@세힘 따랐던 그 당시와의 차이는 오직 하나님과 성경을 그 때는 전혀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이유는 그 조직이나 권력 구조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과 하나님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혹은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서나 나타날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전혀 거부감없이 수용할 것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십계명과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의 발상이기 때문에 거부할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힘 << 기독교라는 종교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이유는 그 조직이나 권력 구조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주의, 전체주의와 야합하는 기독교는 이미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입니다. 그것은 개톨익과 흡사하고, 개톨익의 사생아든지 2군단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