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리의 시조왕인 주몽은 왕즉위후 19년 가을 음력 9월에 우리나이로 40세에 승하(升遐)했다고 적혔잇다..그러나 나의 생각에 40세의 이른나이에 돌아가고 그것도 시신를 발견하지 못하고 주몽이 남긴 옥채찍을 무덤안에 남겨 무덤을 조성했다는(이규보의 동명왕편)데서 시체가 없이 돌아갓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이런글을 쓰게 되엇다..
광개토왕비에...
[(추모왕이) 세상에서의 지위를 즐기지 않아, 황룡(黃龍)을 아래로보내어 왕(추모왕)을 맞이하니,왕(추모왕)이 홀본동쪽에서 龍(룡)의 머리를 타고서 昇天(승천)하였다]라고 하엿다..
여기서 우리는 추모왕이 고구리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즐기지 않았다는 것(싫어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물론 아닐수도 잇겠지만...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주몽왕이 재위(在位)한지 19년에 升天(승천:하늘로 오름)하고 안오시다..가을9월에 왕(주몽왕)이 승천하고는 내려오지 않으니, 그때의 나이가 40세엿다, 태자(류리)는 남기신 옥편(옥으로 만든 채찍)을 龍山(룡산)에 장사하엿다고들한다.]라고 하엿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왕이 승천하고서 주몽의 무덤을 지을때 주몽의 주검(시신)없이 주몽의 무덤안에 옥채찍만을 넣어두었음을 알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에는 이런글이 잇다...
[평양 금수산 아래에는 기린굴(麒麟窟)이 있는데 東明王(동명왕)이 말을 기르던 곳이다.또 朝天石(조천석)이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여기서 말을타고 하늘에 조회하였다고 한다..]
[김극기의 시에 "주몽이 말을타고 하늘에 조회하려고, 고개중턱 금당(金塘)에 옥기린(玉麒麟)을 길렀네.문득 채찍을 떨어 뜨리고 끝내 아니 돌아오니 九梯宮(구제궁)에 누가 다시 가을하늘에 오를꼬"하였다. 이색의 시에 "기린은 백운굴(白雲窟)을 떠낫고 龍(룡)은 芳草洲(방초주)로 돌아갓네. 강산이 바로 어제 같은데, 손이 홀로 다락에 올랐구나" 하엿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부의 기록임...
저 위 광개토왕비의 기록의 [주몽이 룡머리를 타고 승천하엿다]는 기록과 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몽이 평양 금수산(=홀본???)에 있는 조천석(朝天石)위에서 말을타고 하늘로 조회하엿다]란 기록에 따라 주몽은 룡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게 아니라 룡(龍)이라 비유한 썩좋은 말(龍馬(룡마=준마)을 평양 금수산의 기린굴에서 기른후에 그 말(馬(마)=麒麟馬(기린마)=龍馬(룡마)=준마)를 타고 다른곳으로 이동한것이 아닌가한다...
근데 마침 제주도 즉 탐라의 시조이야기에 삼성(三姓)시조이야기가 있다 그야기를 잠시 인용해 보겠다....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탐라현은 전라도 남쪽바다에 있다. 古記(고기)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한라산의 북녘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홍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곳이 그곳이다. 맏이를 량을나(良乙那)라 하고 그 다음을 고을나(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해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오는 것을 보고 나가 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돌함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 세 사람이 탄강하시고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사오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서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나누어 장가들고 물이 좋고 기름진 땅이 있는 곳으로 나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점치니, 량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하고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삼도라 했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살림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瀛洲誌(영주지)]에는 조금다른 야기가 전한다
우선 고려사완 다르게 삼성인(三姓人)중에 고을나(高乙那)가 맏이고 둘째가 양을나(良乙那)이고 세째가 부을나(夫乙那)로 되어있다...그리고 공주가 온 나라가 일본국이 아니라 동해(東海) 위에 있는 碧浪國(벽랑국)이란 나라로 되어있다.그리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량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부을나가 거처하는곳을 제삼도라 했다.
또 900년이 흐른 후 고씨가 정권을 잡아 국호를 탐라라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탐라(耽羅)의 세 시조의 姓氏(성씨)중에 高(고)씨는 고구리에도 있는 고구리의 주몽의 성(姓) 즉 고구리 왕족의 성(姓)과 일치한다...그리고 탐라의 세 성씨중에 夫(부)씨는 고구리의 扶芬奴(부분노),扶尉염(부위염)등등의 사람들의 扶(부)씨와 발음이 같다...고구리의 扶(부)씨는 동부여에서 온 부여씨(扶餘氏)를 줄여서 扶(부)씨라고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扶(부)란 성씨는 발음을 나타내는것으로서 夫(부)라고도 적을수 있을듯하다..마치 扶餘(부여)를 夫餘(부여)라고도 쓰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의 생각엔 고구리의 주몽이 룡마(龍馬)를 가지고 홀본(=현평양시 금수산???)에서 어떻게 어떻게 해서 탐라즉 제주도로 온듯하다는 가설을 세워 본다. 이때 고주몽의 신하였던 扶(부)씨와 良(량)씨를 데리고 오지 않았나 한다.마치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때 혼자서 오지않고 여럿이서 왔듯이 말이다....물론 탐라의 夫(부)씨는 고구리의 扶(부)씨와 같다고 볼수있겠지만 탐라의 良(량)씨는 고구리에 있는 성씨인지는 자료가 부족하여 알수 없다..
고구리의 고주몽이 타던말은 과하마(果下馬)라고 한다 이런 과하마가 현재 제주도에 많이 자라고 있는점은 혹시 제주도에 주몽이 과하마를 가지고 오지 않았나 하는 가설을 낳게 한다..물론 고려시대 원지배시에 몽고에서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말을 길럿다고 한다....그러나 이당시 원지배시에 일본으로의 정벌하러 배를타고 가던 것이 파도나 해류의 어려움으로 모두 실패로 돌아 갔는데 어찌 그 많은(???어쩌면 적은) 말들을 제주도까지 안전히 배를 타고 올수 있엇던가?..아마도 나의 생각엔 원래 부터 제주도엔 말을 기르고 있었던 듯하다는 생각이다 원나라에서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설치하기이전부터 제주도엔 말을 기르고 잇엇던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고주몽이 홀본(=평양시 금수산???)에서 이동하여 탐라제주도까지 온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이유가 주몽이 이른나이에(나이 40세에)승천하엿다고 기록되어있는점이 의심스럽고..주몽의 시신도 없이 옥으로 만든 채찍만으로 주몽의 무덤을 조성햇다는 점이고 탐라에는 고구리의 시조 고주몽과 같은 성씨인 高(고)씨가 시조이야기에 맏이 형으로 등장하고 훗날 이 탐라에서 이 高(고)씨가 다른 良(량)씨,夫(부)씨를 제치고 고구리에서처럼 王(왕)이 되엇다는 점이고,고구리에 등장하는 扶(부)씨와 비슷한 夫(부)씨가 탐라시조이야기에 등장하고, 고구리의 고주몽이 타던 말인 과하마(果下馬)가 현제주도에 많이 길러지는 이유이다...
현제주도에는 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한 여러 시대 유적이 잇는것으로 안다..이 나의 [주몽이 탐라로 이동했다는 가설]이 증명되려면 유적이나 유물이 증명해 주어야 할것이다...문서의 자료는 그 증거 자료가 많이남아 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주몽의 탐라이동 가설에 대한 소설을 써볼 계획이다....여러분들이 많이 응원해주신다면...물론 문장구성력에서는 형편없는 졸작이겠지만...난 전에 주몽의 탐라이동가설을 소설로 쓰려면 고고학적지식이나 많은 상세한 잔지식이 필요해서 너무 어려워 즉 줄거리는 있으되 그 구성글의 잔지식이 부족하여 쓰지 않으려 했으나 간단히 현대식으로 2003년도식 고구리의 주몽이 탐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간단히 소설로 적어보려고 한다..물론 소설이라 상상력의 본질인 허구도 많을듯하다...나중에 함 시간되면 적어 볼 계획이다...많이 응원해 주시라...
첫댓글 高乙那의 45세손 自堅王까지 耽羅郡主로 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自堅王의 태자 末老가 高麗에 來朝하였다고 하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동 시기는 기원전 2~3세기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고구려 900년 존속설에 해당되는군요.
고구려 900년 설은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시 당나라 책사의 발언에도 나와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