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명(孔明)과 노숙(魯肅)의 치열(熾烈)한 설전(舌戰) -
다음날, 형주(荊州)에 도착한 노숙(魯肅)은 유기(劉琦)의 빈소(殯所)를 방문(訪問)하여 조문(弔問)하였다.
이 자리에는 유비(劉備)와 공명(孔明)이 함께 하였다.
잠시 후 빈소(殯所)를 떠나 세 사람은 마주 앉았다.
유비(劉備)가 입을 열어 말한다.
"자경(子敬) 선생, 제 조카를 조문(弔問)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와 주시다니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오."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노숙(魯肅)이 답례(答禮)를 하면서 말한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저는 황숙(皇叔)의 인의(仁義)를 보고자 왔습니다."
"어?..."
"한 가지만 황숙(皇叔)께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황숙(皇叔)께서 약조(約條)하시길 유기(劉琦) 공자(公子)가 없으면 형주(荊州를 돌려주신다고 하셨지요. 이제 공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실행(實行)에 옮기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언제 돌려주시겠습니까?"
"하!... 그 문제(問題)는 며칠 시간을 주시오. 훗날 상의(相議)합시다."
"훗날이오? 훗날이란 게 대체 언제입니까?"
"자경(子敬), 정말 매정하구려. 상 중(喪中)에 그런 말을 꺼내다니..." 공명(孔明)이 듣다 못해 노숙(魯肅)을 나무라며 말을 가로맡았다.
"그렇소, 상 중(喪中)이니 허언(虛言)은 없겠지요? 더구나 유기(劉琦) 공자(公子)의 영령(英靈) 앞에서 그 말을 꺼내야 더 솔직(率直)할 게 아니오?" 노숙(魯肅)은 유비(劉備)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아니하고 망연(茫然)한 모습을 보이자 공명(孔明)을 향하여 말하였다.
그러자 곧바로 공명(孔明)의 말이 튀어나온다.
"천하(天下)에 왕토(王土) 아닌 곳 없고 세상에 신하 아닌 자 없다고 했는데 형주(荊州)는 누구 것이오? 오후(吳侯)의 것이오? 아니면 조조(曹操)의 것이오? 그러나 형주(荊州)는 둘 다 아닌 조정(朝廷)의 것이오. 과거(過去)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께서는 숱한 고생(苦生) 끝에 한(漢)나라를 세우셨소. 불행(不幸)하게도 지금은 간웅(奸雄)들이 사방(四方)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각기(各其) 지방(地方)을 점거(占居)하고 있다는 것은 자경(子敬)도 잘 알고 계시는 일이 아니오? 그러나 지금 형주(荊州)는 천도(天道)가 옳게 돌아가 정통(正統)으로 가는 중이오.
우리 주공(主公)이신 유비(劉備)로 말씀드리면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예(後裔)인 효경 황제(孝景皇帝)의 현손(玄孫)이시고, 금상황제(今上皇帝)의 황숙(皇叔)이시오. 게다가 형주(荊州)의 주인(主人)이셨던 돌아가신 유표(劉表) 장군으로 말하면 주공(主公)의 의형(義兄)이시니 이제 아우가 형님의 유업(遺業)을 이어받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소? 하나 동오(東吳)의 손권(孫權) 장군으로 말하면 지방(地方) 관리(官吏)인 아전(衙前)의 아들로서 조정(朝廷)에 대해 아무런 공로(功勞)도 없이 강동(江東) 육십일 주(六十一州)를 힘으로 얻은 데 불과(不過)하지 않소?
그렇건만 손권(孫權) 장군은 동오(東吳)의 주인(主人)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하고 이제 형주(荊州)까지 탐(貪)을 낸다면 이게 무슨 도리(道理)요? 자경(子敬)은 과거(過去) 우리 주공(主公)께서 서주(徐州)를 세 번이나 양보(讓步)하셨던 일을 들어보셨을 것이오. 이렇게 유황숙(劉皇叔)은 항상(恒常) 인의(仁義) 군자(君子)였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인의(仁義)를 목숨보다 소중(所重)히 여기는 분이시오. 주공(主公)께서 형주(荊州)를 점하신 이래 수많은 비난(非難)을 받으시며 마음이 편하셨겠소? 편치 않아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거요. 왜? 주공(主公)의 가슴속에는 신의(信義)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그것은 바로 한실 부흥(漢室 復興)이오. 속으로는 비웃겠지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한실의 선수(先手)를 외치는가?...
하나 황숙(皇叔)께서는 고(故) 황제(皇帝)의 후예(後裔)가 아니오? 지금 천자께서는 조조(曹操) 밑에서 고통(苦痛)의 나날을 보내고 계시고 황숙(皇叔) 역시 여기서 매일(每日)같이 고통을 받고 계시오. 자경(子敬), 따지고 보면 우리 두 사람 모두 한나라의 신하(臣下)요. 우리 선조(先祖)들께서도 모두 한(漢) 나라의 녹(祿)을 먹고 살아왔고, 신하(臣下)는 아니더라도 한(漢)나라의 백성(百姓)으로 살아왔소.
그러나 주유(周瑜)는 근본(根本)을 잊고 사리 분별(事理分別)을 못하오. 당신(當身)은 사리(事理)가 분명(分明)하니 알 거요. 천자(天子)의 황숙(皇叔)께서 발붙일 곳조차 없다면 어찌 한실(漢室)을 부흥(復興)하며 어찌 천자(天子를) 구하시겠소?. 하물며 조조(曹操)는 또 어찌할 거요. 조조와 마찬가지로 손장군(孫將軍)도 한낱 토호(土豪)에 불과한데 어찌 유 씨(劉氏)의 천하(天下)를 가지려는 욕심(欲心)을 부린단 말이오. 적벽대전(赤壁大戰)에 관해서 말하더라도 그 싸움의 승리(勝利)를 누가 이끌어 주었소?.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욕심(欲心)만 부리는 것은 인간(人間)의 도리(道理)에 심(甚)히 어긋나는 말씀이오."
공명(孔明)의 변론(辯論)은 원칙(原則)에서 어긋남 없이 정연(精硏)한데다가 힘이 있고 정열(情熱)이 있었다.
노숙(魯肅)은 공명(孔明)의 기막힌 변론에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어 말한다.
"옳은 말씀이오. 한실(漢室) 부흥(復興)을 이루려면 황숙(皇叔) 혼자의 힘 만으론 어려울 것이오. 만약 우리 주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런 성과(成果)가 있으셨겠소?"
"옳은 말씀이오. 자경(子敬)은 충직(忠直)한 사람이오. 내가 오후(吳侯)와 동맹을 맺게 된 것도 선생의 탁월(卓越)한 식견(識見) 덕분(德分)인 것은 확실(確實)하오." 비로소 유비(劉備가) 입을 열어 말하면서 노숙(魯肅)을 향(向)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자 노숙(魯肅)이 답례(答禮)하면서,
"과분(過分)한 칭찬(稱讚)입니다. 솔직히 손유 동맹(孫劉 同盟)이 맺어진 지난 이년 동안 동맹을 유지(維持)시키려고 나름대로 갖은 노력(努力)을 다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수차에 걸쳐서 주공(主公)께 간언(諫言)을 했습니다. 그쪽에 양보(讓步)하라고 말입니다. 하나 만사(萬事)에는 정도(正道)가 있는 법입니다. 무례(無禮)를 용서(容恕)하십시오. 황숙(皇叔)께서 잇속을 차리기 위해 형주(荊州)를 돌려주지 않으신다면 설사(設使) 우리 주공(主公)께서는 참으실지라도 누군가는 참지 못할 겁니다."
"누구요?" 하고 유비(劉備가 묻는다.
"우리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 공근(公瑾)입니다."라며 노숙(魯肅)이 답한다.
"허허 허허... 주유(周瑜)가 도발(挑發)을요? 부상(負傷) 중임에도 성격(性格)은 여전(如前)하군요." 공명(孔明)이 유비(劉備)를 건너다보며 말하였다.
그러자 노숙(魯肅)이,
"주공근(周公瑾)의 성격을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렇소. 남군성(南郡城) 전투(戰鬪)에서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하나 그 원한(怨恨)을 씻을, 혹은 치욕(恥辱)을 씻을, 그런 기회(機會)가 주어진다면 우리 주공(主公)이라 해도 그를 저지(沮止)하진 못할 겁니다. 며칠 전 파릉(巴陵)에서 돌연(突然) 명을 내려 삼만(三萬) 보군(步軍)과 오만(五萬) 수군(水軍)에게 동진(東進)을 명하였소. 이런 사실(事實)은 그쪽 척후병(斥候兵)이 이미 보고(報告) 했을 것이라 생각하오. 다행(多幸)인 것은 우리 주공께서 결단(決斷)을 내려 병권(兵權)을 박탈(剝奪)해 버리고 공근(公瑾)의 보군과 수군을 원대 복귀(原隊復歸)하라 명하셨소. 유황숙(劉皇叔)? 인심은 못 속입니다. 막바지에 몰리면 강동의 병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좋소! 자경(子敬)의 말을 들으니 매우 간절(懇切)하군요. 선생(先生)이 보기엔 이제 형주 문제는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그 질문(質問)은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황숙(皇叔)이 보시기엔 이제 형주(荊州) 문제(問題)는 어떻게 처리(處理)해야 할 것 같습니까?"
"자경(子敬), 이렇게 합시다. 형주(荊州)는 그쪽 것이고 우린 잠시(暫時) 빌리는 것이라고... 오늘 우리 주공(主公)께서 친필(親筆)로 써서 드릴 터이니 우리가 다른 지역(地域)을 점하고 그곳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잠시 빌리는 것으로 해두지요. 그렇게 하면 우리도 발붙일 곳이 생기게 되고 그때 형주를 돌려드리면 되지 않겠소?"
"어디를 말이오?"
"서천(西川)에 유장(劉璋)이 어리석은 자인지라 주공께서 그곳을 치려고 하시니 서천(西川)을 취(取)하면 형주(荊州)를 돌려드리겠소."
노숙(魯肅)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없이 생각하다가,
"좋소, 그런 문서(文書)가 있다면 저도 주공(主公)께 말씀드리기 쉽지요. 다만 주공께서 승낙(承諾)하실지는 모릅니다. 그럼 황숙(皇叔)과 공명(孔明), 두 분께서는 문서(文書)에 날인(捺印)해 주십시오."
"좋소!" 유비(劉備)는 흔쾌(欣快)히 대답(對答)하였다.
다음 날, 노숙(魯肅)은 공명(孔明)의 배웅을 받으며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기 위해 포구(浦口)로 나왔다.
"공명(孔明), 배웅해 주어 고맙소."
"자경(子敬), 우리 두 사람의 처지(處地)가 때로는 자기(自己) 주군(主君)께 못 하는 얘기도.. 피차(彼此) 서로를 알기에... 할 수있지 않겠소?"
"그렇소."
"조조(曹操)가 건재(健在)하니 孫劉 同盟이 깨져서는 안되오. 우리가 교전(交戰)하는 순간(瞬間) 조조는 천하(天下)를 얻을 것이오."
"그렇소..."
"돌아가 오후(吳侯)를 뵈오면 우리 입장(立場)을 잘 전해 주시오. 우리가 발붙일 곳을 잠시(暫時) 빌려주시되 서로 창검(槍劍)을 겨누진 말자고."
"우리 주공(主公)께서 거절(拒絕)하신다면?..."
"허!... 그건 우리 발붙일 곳을 빼앗는 것이니 발붙일 곳이 없는 입장(立場)에선 부득이(不得已)하게 동오와 교전(交戰)을 벌이고 발붙일 곳을 찾을 수밖에요. 그때는 강동(江東)의 팔십일개(八十一個) 현(縣)도 편치 못할 거요." 하며 공명(孔明)이 말한다.
"공명(孔明), 내 말도 명심(銘心)하시오."
"말씀하시오."
"일단 서천(西川)을 얻고 나면 형주(荊州)는 돌려줘야 할 거요. 아니면 우리 주공(主公)께서 무력(武力)을 쓸 테니 그때는 그쪽도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살아서 편한 날이 없을 것이고,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을 것이오." 하고 노숙(魯肅)이 말하자,
"하! 명심(銘心)하겠소." 하며 공명(孔明)이 답(答)한다.
"가보겠소." 하며 노숙(魯肅)은 떠났다.
삼국지 - 214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