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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2 - 빈 2차 포위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를 잃고 밀리다!
( 오스만 제국이 싸운 나라 :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보이,
헝가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베네치아, 그리스, 러시아 및 페르시아 )
오스만 제국은 1520년에 쉴레이만 1세가 제위에 올라 로도스 섬, 동헝가리 왕국, 이라크, 예멘,
리비아 및 알제리를 얻었고 1538년에는 "프레베자 해전" 에서 승리하니.....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으며 1560년 튀니지 제르바 섬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에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1565년에 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섬을 침공했으나 패했으며 1566년에 쉴레이만 1세가
사망하고 셀림 2세 하에서 1571년 키프로스(셀림 2세) 섬을 점령하니..... 섬을
빼앗긴 베네치아가 나서 스페인 및 교황청과 함대를 조직해 벌인 "레판토 해전" 에서 패합니다.
쉴레이만 1세 때인 1529년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수도 빈을 포위해 벌어진 전투를 1차 빈 공방전
이라고 하는데.... 54년후 쉴레이만 2세때인 1683년에 "두번째 빈 공방전" 이 벌어지니..... 7월
17일부터 두달간 이어진 포위전의 마지막 이틀에 벌어진 폴란드군과의 기병전인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오스만의 동맹인 프랑스의 공격을 우려한 빈 조정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과 휴전을 원했으나, 연합군
의 통수권을 지닌 폴란드왕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기세를 몰아 진격을 강행했으니..... 10월 7일,
에스테르곰을 향해 진격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파르카니에서 오스만군의 습격에 직면해 2천을 상실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로렌 공작 샤를 5세가 이끄는 신성로마 제국군이 당도하자 2만 8천 연합군은
반격해 오스만군을 격퇴하고 파르카니를 장악했으며 도나우강을 건넌
연합군은 에스테르곰을 포위하였고, 10월 28일 오스만의 지휘관 이브라힘 파샤가 항복합니다.
이로써 헝가리 북부의 주요 도시 "에스테르곰" 은 78년만에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그후 로렌 공작 샤를이 기습적으로 페슈트를 점령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곧
철수했으며 12월에 오스만군 총사령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교살됩니다.
1684년 교황의 제창으로 헝가리 해방을 목표로 한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으니 오스트리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외에도 루스 차르국,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가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속국 에르데이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도 중립을 약속받습니다.
1684년 봄 오스만 제국의 동맹인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룩셈부르크를 공격해 점령하였지만,
교황의 중재로 더이상 싸우지 않고 레겐스부르크에서 20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습니다.
한편 6월 18일 출정한 연합군은 비셰그라드를 점령한 후 남하하였고, 이에 부더의 무스타파 파샤 역시
2만 대군과 북상하였는데, 6월 27일 바츠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트므슈바르
총독 아흐메트 파샤를 포함한 3천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하였고, 포격 끝에 바츠 수비대가 항복합니다.
6월 29일 바츠를 떠난 연합군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소개된후 방화된 페슈트에 입성하였으니 독일 기병대는 철수하는
병력의 후방 엄호를 맡은 예니체리 부대를 공격하였고 격전 끝에 오스만군은 부더(부다) 로 철수했으며 6월
30일 제국군은 페슈트를 중심으로 진영을 꾸렸고, 논의 끝에 바츠에서 센텐드레 섬을 건너 부더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부더(부다)의 무스타파 파샤는 2만 5천 병력으로 출정해 10일 센텐드레 섬에서 연합군을 공격했으나 패퇴하였고
12일 부더 남쪽 에르드로 철수했으며 7월 14일 3만 제국군은 부더를 포위하는데, 당시 부더는 5명의 파샤
휘하에 놓인 1만이 넘는 수비대와 2백문의 대포를 갖추었으니..... 포격이 시작되었고 17일 성벽에 틈이 생깁니다.
18일 제국군은 부더 성벽을 공격했으나 무스타파 파샤의 기병대와 2천 수비대가 협공하여 격퇴했으며 헝가리군과
합류한 포위군은 19일 부더강변 성벽에 총공격을 가하였고 격전 끝에 외성을 장악하니 수백의 오스만 수비대
는 내성으로 철수하려 하였으나 수비대장 카라 메흐메트 파샤가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제국군에게 학살됩니다.
포위군은 심한 포격과 갱도 작전으로 공세에 나섰지만 수비대의 빈번한 반격에 연거푸 실패하였고,
수백여 기독교도 포로들이 처형되었으며 연이은 전투와 역병으로 8월 중순에
이르면 3만 5천의 포위군 중 2만명 정도만이 남았고 11일 샤를은 레오폴트 1세에게 퇴각을 청합니다.
10일 수비대장 카라 메흐메트 파샤가 포탄에 맞아 전사했음에도 이브라힘 파샤가 지휘권을 이어
받아 항전을 계속하였고 양측 모두 원군이 파견되었는데, 우선 9월 중순 포위군은 1만 5천
병력을 증원받았고, 바이에른 포병대의 5일 간의 포격 끝에 9월 18일 성벽에는 큰 틈이 생깁니다.
바이에른 부대가 진격했지만 3시간 혈투 끝에 격퇴되었고 9월 22일엔 오스만측 원군이 근교에 당도해 포위망
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빈 때와는 공수가 바뀌었는데, 마침 내린 비로 제국군의 화기가 무력화되자
오스만 제국군은 성벽의 안밖에서 밀어붙였으나 격퇴되었고 무스타파 파샤는 세케슈페헤르바르로 철수합니다.
오스만 제국군이 지속적으로 페슈트를 공격하는중 9월 29일 최후의 공세를 결의하니 10월 4일 바이에른 부대를
중심으로 제국군은 부더 남쪽 성벽을 집중 공격했으나 4백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었고 밤새 수비대가 성벽의
틈을 메운 것을 확인한 포위군은 갱도 작전 마저 강물의 유입으로 실패하고 가을비가 내리자 철수는 불가피해집니다.
10월 26일 헝가리군이 먼저 철수하였고 4일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돌아온 무스타파 파샤가 포위망을
공격하며 오스만측 보급 선단이 부더에 당도하였고, 수비대가 성을 나서 바이에른 진영을
습격하자 11월 1일 포위군은 병약자들을 수송을 위해 머르기트 섬으로 옮겼고 화기를 선박에 실었습니다.
3일 제국군은 에스테르곰으로 철수하였고 일부는 페슈트로 향하였는데, 부더 수비대는 머르기트섬을
공격해 수천의 포로를 사로잡았고 센텐드레 섬에서 오스트리아측 수송선을 약탈해 승선한
이들을 학살했으며, 5일 무스타파 파샤의 입성과 함께 부더에서는 성대한 축하연이 열렸고,
이브라힘 파샤는 부더의 총독으로 봉해졌는데 부더 공방전으로 제국군은 2만 2천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포위 도중인 9월 17일 제국군이 에페례시에서 퇴쾨이 임레를 격파하고 28일 바르트퍼를 점령한 것이
빈 조정에겐 유일한 위안거리였지만 에페례시 포위는 실패하였고, 7월 8일 자그레브와
페치 사이의 주르데바츠에서 출정한 병력은 슬라보니아로 진격해 2일 후 비로비티차를 포위합니다.
소규모의 오스만 원군은 격파되었고, 2주간의 포위 끝에 수비대는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였으며 부더에서 돌아온
오스만 총독은 외세크 부근에서 군대를 모았지만 크로아티아군에게 격파되었는데, 무리하지 않은
크로아티아군은 회군했고 빈 조정은 부더공방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크로아티아 전선은 팽개쳐졌습니다.
1685년 7월 7일 제국군이 에르셰쿠이바르를 포위하였으니 타티 전투에서 오스만 측의 원군이
격파되었고, 19일 본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으며 공격 2시간 만에
수비대는 백기를 들었으나 제국군은 그에 개의치 않고 5천여 오스만 제국군 대부분을 학살합니다.
1686년 6월 독일인-헝가리인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모인 8만 신성동맹군은 도나우강을 건너 부더로
향했으니 에스테르곰을 지난 연합군이 15일 비셰그라드에 당도하자 현지 오스만
주둔군이 도주하였고, 지휘관 샤를은 포로 심문을 토해 부더에 1만 5천 수비대가 배치된 것을 알게 됩니다.
부더에서 총독 압둘라흐만 압디 파샤가 외성, 이스마일 파샤가 내성을 수비했는데 성벽을 보강하고 외부에
지뢰를 매설하였으며 포격시 화재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성 내부 주택들의 지붕을 허물었으니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버틴후 포위군을 역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는데 6월 24일 포위군은
부더의 외성을 장악하였고, 헝가리군은 체플 섬에서 오스만 보급 선단을 격파하고 승조원들을 학살합니다.
7월 7일에는 갱도 작전이 개시되었고 13일부터 공격이 시작되어 7월 중순에 이르면 성벽 곳곳에 균열이 생겼지만
수비대가 복구하던 15일 오스만군이 포위측 갱도를 야습했고, 20일 포위군은 수비측 시파히 기병대를 밖으로
유인한후 격파해 파샤를 전사시켰고 22일 마차시 궁전 옆 화약고에 포탄을 명중시켜 1천이 넘는 사망자를 냅니다.
그랜드 와지르 사르 쉴레이만 파샤 휘하의 원군이 외세크에 당도한후 부더에 전갈을 보냈는데
헝가리 기병대가 차단했으며 25일에는 포위 도중 최대 규모의 수비대가 남과
북쪽에서 동시에 성밖으로 나와 공격에 나섰고 포위 측과 서로 큰 피해를 주고받은 후 철수합니다.
27일 헝가리 기병대가 대폭발로 붕괴된 강변 성벽을 공격해 격퇴되었으나 교두보를 마련했고 8월 초까지 1만명
헝가리 증원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했으며, 오스만측 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도시를 점령하려고 3일에
총공격을 하니... 2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포위군은 사상자 및 질병으로 활용 가능한 인원이 4만으로 축소됩니다.
8일부터 오스만측 원군의 선발대와 포위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12일 쉴레이만 파샤 휘하 본대가
에르드에 당도했으며 10일 하트반에서 출정한 오스만 원군은 헝가리 군의 반격에 격퇴되었고
쉴레이만 파샤는 포위망에 공세를 퍼부으며 부더의 시파히 기병대도 벨그라드 문을 나서 협공에 나섭니다.
이들은 크로아티아-헝가리 기병대를 몰아붙였으나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군이 반격에 성공하였으며
기세를 얻은 연합군 2만은 참호를 나와 돌격하였고, 쉴레이만 파샤는 철수하니 부더커시 전투 입니다.
20일 새벽 1천의 오스만 기병대가 포위망을 뚫고 부더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저지되었고 포위군은
남쪽 성벽에 공세를 펼쳐 이슈트반 성탑을 장악했으며, 29일은 베오그라드 정복,
모하치 전투, 부더 입성 등 16세기 헝가리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여러 승리가 기록된 날이었습니다.
이날 1천 시파히와 2천 예니체리 부대가 포위망을 공격하였으나 소수만이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다음날 2천의 에르데이 공국 병력이 포위망에 합류하자 샤를은 포위를 풀고 원군과
전면전에 나선다는 소식을 퍼뜨린 후, 9월 2일 아침 북을 울리며 쉴레이만 파샤의 군대와 대치합니다.
참호로 돌아간 연합군은 오후 3시, 6문 대포를 3차례 발사하는 신호탄과 함께 부더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으니
샤를은 6천 병력과 북쪽 성벽을 공격하였고, 헝가리 병사들이 성벽에 깃발을 내걸자 사기가 고취됩니다.
포위군이 원군과 대치한다고 여기고 휴식을 취하던 수비대는 뒤늦게 낮잠에서 일어나 방벽으로 향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기운 상태였으니, 남쪽 성벽에서는 3천의 바이에른 부대가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지휘 하에 공격하였으나 북쪽 성벽과 달리 수비대의 맹렬한 저항에 막힙니다.
오후 5시 북쪽 성벽 빈 성문이 돌파되니 연합군은 시내로 몰려들어왔고, 부더의 지휘관 압둘라흐만 파샤는 휘하 병력
을 이끌고 시내 중심부 헤스 언드라시 광장에서 최후의 돌격을 가한후 전사하니 145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부더 지배가 종식되었으며 부더는 연합군에게 3일간 약탈되고 전리품에 눈이 먼 용병들은 시내 모든 집에 방화합니다.
주민들은 폭력에 노출되었고 특히 오스만 측에 협조하여 도시를 방어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유대인
구역이 전소되고 시나고그의 문서들은 불태워졌으며, 1천 탈러를 지불한 수백명 유대인만이 살아남았으며,
한편 이탈리아의 파도바 등 유럽 각지에선 반유대 폭동이 발발하였고 포위군은 4만의 인명 손실을 내었습니다.
점령군이 살인과 약탈에 치중하던 틈에 쉴레이만 파샤는 벨그라드를 향해 철수하였고, 샤를은 약탈이 끝난
6일에야 6천 헝가리 기병을 보내 추격했지만 타격을 입히진 못하였는데, 여러
전선의 전쟁에 시달리던 오스만 제국은 제한된 병력을 소수의 거점 도시에 집중시키는 패착을 저질렀습니다.
헝가리- 신성 로마 제국군은 방치된 성채들을 점령하며 도시들을 봉쇄한 결과 수비대의
항복을 이끌어앴으며 이후 1687년 12월 17일에 제국군이 에으리를
점령했고 6백여 튀르크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15년 전에 크레타섬의 상실을 기억하던 베네치아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대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신성 동맹에 가입하였고 함대를 출동시켰으니 첫번째 목표는 레프카다 섬이었는데, 16일 동안의
포위 공격으로 함락시키는데 성공후 오스만 제국의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고 프레베자와 보니차만을 점령합니다.
하노버 선제후국과 작센 선제후국 용병을 고용한후 코르푸에 집결한뒤 모레아 정복을 시작하니 이를 들은 그리스인
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지만, 1685년 6월 베네치아 함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진격했고
베네치아의 옛 요새 코로니에 상륙해 요새를 함락한 베네치아군은 이오니아 제도로 향했으나 겨울에
불어닥친 질병으로 전투는 지속되지 못하고 휴전했으며 이듬해 3월초 베네치아군은 메세니아만을 공격합니다.
옛 나바리노 성을 함락한 베네치아군은 이스마일 파샤의 군대를 격퇴시켜 코린트로 후퇴시키고
다시 병력을 모은뒤 공격했지만 베네치아의 모르시니의 군대에 의해
격파당해 코린트는 함락당했으며 9년 간의 전쟁으로 신병과 용병이 탈영을 해 진격은 늦춰집니다.
메흐메트 파샤는 파트라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쾨니히스마르크의 공격에 함락당했고 그 후 베네치아군은 아테네로
입성했으니 오스만 수비군과 싸우며 오스만 측의 화약고였던 "파르테논 신전" 에 대포를 명중시켜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형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던 2000년 된 신전을 파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테네를 빼앗긴 오스만 제국군은 테베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아티카 반도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싸울 의사가 없어 아테네에서 후퇴해 네그로폰테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질병이 퍼져서 하노버와 헤센 용병은 그리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으니, 모르시니는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새로운 사령관으로 지올라노 카르나로가 부임합니다.
카르나로는 그리스 보다는 달마티아 지역 공격을 주된 목표로 삼았으니.... 그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시골도시
신지를 공격해고 크로아티아의 지역 민병대를 모집해 공격하지만 대실패로 끝났지만
헤르체그노비 요새가 함락당해 오스만 제국군은 저항을 포기하였고, 라구사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빈을 구원한후 폴란드왕 얀 3세 소비에스키는 1676년 상실했던 포돌레 수복에 나섰지만 세임(의회)
이 재정 지원을 거부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몰다비아 공국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자
심신이 피폐해진 국왕 얀 소비에스키는 바르샤바 근교 빌라누프 궁전에서 칩거
하다가 1696년 사망했으나.... 포돌레 자체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폴란드 영토로 돌아옵니다.
오스만 제국은 대반격을 준비했으니 헝가리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파견할 정예군을 파견할 준비가거의
끝났을 무렵, 루스 차르국이 전쟁에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참전하였다는 소식이 코스탄티니예에
닿았는데....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바흐치사라이 조약에서 드네프르강을 국경으로
정하며 20년간의 평화를 약속한바 있어 크림 방면은 안심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동맹국인 크림 칸국이 위험에 처한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만 조정은 정예군의 대부분을 아자크
로 파견할 수 밖에 없었으니..... 오스만 반격 부대의 대부분이 동방으로
빠지면서 오스트리아 군대는 더욱 수월하게 헝가리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까지 진격합니다.
1687년 로렌 공작은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강의 지류 드라바강의 도시 외세크로 향해 드라바강
유역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공격이 실패하자 부대를 옮기니 사리 쉴레이만 파샤는
지나가는 제국군을 공격했지만 기습은 실패로 끝이났고 오히려 반격당해
오스트리아군 좌익만 공격을 감행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10,000여명이 전사하는 괴멸적 피해를 당합니다.
결정적으로 패배한후 술탄인 메흐메트 4세는 책임을 지고 하야했으며 파디샤로 즉위한 동생 쉴레이만
2세는 인도의 무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하지만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랑제브 역시 마라타 동맹과의 데칸 전쟁을 치르고 있던지라 지원군을 파견할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과거 기독교도 국가들이 패배했던 제1차 모하치 전투의 복수에 성공한 오스트리아는 여세를 몰아
벨그라드로 향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사바강에서 제국군을 막으려 하였지만 이미
강을 건넌뒤였고, 제국군이 후속 병력을 위해 부교를 건설하는걸 막고자 오스만
제국군 포병이 투입되었지만 오스트리아의 기습 공격으로 무산되었고 벨그라드는 함락되었습니다.
헝가리에 이어 세르비아와 그리스까지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오스만 제국에서는 심각한 위기감이 느껴졌고,
예니체리 부대가 종군을 거부하기도 했으니,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재상 사르 쉴레이만 파샤가
처형되었고, 뒤이어 술탄 메흐메트 4세도 폐위되니 새로 즉위한 술탄 쉴레이만 2세는 위대했던
쉴레이만 대제의 명성을 잇고자 군을 쇄신하고 쾨프륄뤼 가문의 파즐 무스타파 파샤를 대재상으로 선임합니다.
재상 파즐 무스타파 파샤는 1690년에 비딘, 스코페, 니슈, 벨그라드를 수복하며 다뉴브 강 방어선을 재확립
했고 동시에 퇴쾨이 임레가 일시적으로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했으며, 1691년에는 베네치아의
블로러 공격이 격퇴되었으니 이로써 신성동맹은 다시 한번 오스만 군을 도발해 회전에서 겨루려 합니다.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남진해 오스트리아, 오스만 양군은 도나우강 지류 티서강을 두고 대치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의 실력으로는 판노니아 평원의 광활한 대지에서 오랜 전쟁을 벌일수 없었고 제국군은
오스만 제국군 보급마차를 공격해 보급을 차단하고 총사령관 쾨프륄뤼 파즐 무스타파 파샤가 전사하자 후퇴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일으킨 대동맹 전쟁(9년 전쟁) 의 영향으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에르데이
점령만으로 만족했으며, 1693년 오스트리아군은 벨그라드를
포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고 이후 한동안 발칸 전선은 다시 소강 상태에 빠집니다.
루스 차르국의 장군 바실리 골로친은 9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페레코프로 향했지만 강행군이라 군사들과
군마가 지쳐 페레코프에서 130km 떨어진 곳에 진지와 요새를 구축한 후 방비에
들어가자, 이를 본 크림 타타르족은 공격을 감행했고 러시아군은 선전하였지만
식수가 없어서 고전해 골리친은 후퇴하니 이는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무너진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다시 크림반도를 향해 진군을 명령했으니 목표는 크림 반도로 가는 길목에있는
항구도시 아자크였으니, 카자크 기병대로 구성된 3만명의 군대는 첫번째 아자크 공격
에는 실패했지만..... 두번째 공격 때는 오스만 함대를 막기 위해 함대를 건설해
돈강 유역에 나타난 오스만 제국 함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1695년 7월 19일 아자크를 함락합니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신경을 쓰자 오스만 제국군은 반격을 가했으니, 이에 위협을 느낀
베네치아군은 그리스 민병대를 모집해 타개하려 했지만 이 지역은 오히려 독립
무장세력의 안식처가 되고 베네치아군의 달마티아인과 알바니아인이 탈영해 독립세력에 합류합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오스만제국군 모집에 응하거나 베네치아군을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니 베네치아군은 알바니아
와 몬테네그로에 군대를 상륙시켜 발로나와 카니니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켰지만 1691년 3월 14일 오스만
제국군은 블로러(발로나)를 다시 되찾은후 현지에서 학살을 벌이자 베네치아군과 현지인들은 코르푸로 후퇴합니다.
베네치아가 밀리기 시작하자 모르시니가 다시 전선에 나서게 되고 대치 상황은 연이어 일어나지만....
베네치아군은 15세기 중반에 베네치아령이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를 회복하였고
더 나아가 16세기까지 점유하던 에게해의 섬들을 재정복,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한세기 반만에 회복합니다.
1695년 오스만 제국을 도우러 참전한 알제리 제후인 메조 모르토 휘세인 파샤가 이끄는 알제리 함대가 오이누세스,
제이틴부르누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하며 에게해에서 베네치아의 추가적인 해상 공세를 막을수
있었고 베네치아는 모레아와 에게해 섬들을 정복했지만 크레타, 로도스, 에비아 등 큰 섬들은 점령하지 못합니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신경 쓴 시간에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2세는 군제개혁을 감행한후 1696년
원정에 나서 티미쇼아라 근처의 올라슈 전투, 제네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을 연이어 격파했으니,
올라슈 전투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총사령관인 헤이슬러 백작을 포함 6천여명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젠타 전투 (Battle of Zenta) 는 1697년 9월 11일 세르비아의 센타 (Сента) 남쪽, 티서강(Tisa)
의 동쪽에서 벌어진 전투로 대튀르크 전쟁 (Great Turkish War 1683–1699) 의
주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또한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패배 중 하나입니다.
1683년 빈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 수도를 구원한후, 오스트리아군은 1688년 베오그라드와 판노니아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군은 투르크 전선에 병력을 집중할수 없었고,
오스만의 대와지르는 군대를 재편하여 반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1690년 오스만군에게 베오그라드를 상실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던 사보이 공 외젠 (Eugene of Savoy) 은 최초로 독립지휘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외젠 공작은 공작으로서 앞으로 보여주게 될 놀라운 활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외젠 공작은 1697년 7월 5일 헝가리 왕국의 최고 지휘권을 갖게 되었으니 지휘할수 있는 부대는 총병력이
70,000명에 이르렀고, 이중에 35,000명이 당장 전투를 벌일수 있는 상태였지만 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젠 공작은 병사들에게 임금을 주고, 의료시설을 갖추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술탄이 지휘한 군대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젠 공작은 북부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로 부터 통솔 가능한 모든 군대를 불러 모았고, 페트로바라딘을 향해
진군하였으니 병력을 집결시킨후 50,000 여명에 달하는 황제군을 통솔하여 8만명 오스만 군에 맞섭니다.
8월 동안 외젠 공작은 페트로바라딘의 요새 근교에서 오스만 군과 전투를 벌이려 하였으나, 공성전을 벌이고자
했던 오스만군은 외젠 공작의 군대와 교전하길 거부하였고 9월중에 오스만 군은 스제게드
(Szeged) 의 요새를 함락시킬 의도로 북쪽으로 진군하니 외젠 공작이 지휘하는 황제군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드샤페르 파샤 (Dschaafer Pasha) 의 군대가 황제군 기병들에게 따라잡히자, 술탄은 스제게드 요새를
공략할 계획을 포기하고, 티미소아라 (Timişoara) 근교의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니 외젠 공작은 술탄의 이러한 결심을 알아채고는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합니다.
1697년 9월 11일 오스만 군은 젠터 근처에 있는 티소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외젠 공작이 지휘
하는 황제군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황제군은 적을 기습할 기회를 잡았고,
이를 통해 강을 건너는 도중의 오스만 군을 공격하는데 성공햇으니 강력한 포격이
있은 후에 많은 용기병 부대는 말에서 내려 오스만 군 진영을 포위하여 적들과 총격전을 벌입니다.
해자 뒤에 있던 오스만 군은 적에게 교란되어 다리방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오스만군은
혼란 상태에 빠졌으니,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오스만 군을 노리고 사격을 계속해 무수히 살상
했으며 황제군의 좌익은 공격을 개시하여 오스만 군의 좌익과 다리 사이를 돌파하여 적의 퇴로를 끊었습니다.
동시에 황제군은 전면 돌격을 개시하여 육탄전을 벌인 끝에 오스만군 진영을 둘러싸고 있던 참호를 돌파
하였고 오스만 군 진영 안에서 보급마차들 사이로 끔찍한 살육이 시작되었으니 외젠 공작
휘하의 황제군은 끊임없이 공격하였고, 오스만군은 간신히 퇴각하는 데 성공하니
10,000명의 오스만 군이 티소강에 수장되었고, 거의 20,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살육됩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에게도 놀라운 승리였으니.... 겨우 500명의 손해로 적에게 30,000명의 손실을 입혔고, 술탄의
하렘 궁녀들, 87문의 대포와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 등을 탈취하였다. 오스만 군의 주력군은
궤멸되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사라예보(Sarajevo) 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의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획득합니다.
오스트리아군 피해는 고작 500명의 사상자이니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놀랐을 정도인데,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은
사부아 공자 외젠으로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으니 한마디로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라?
젠타 전투로 인해 유럽의 군세가 오스만을 능가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더 이상의 대유럽 정복전쟁은 불가능해집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 체결 시에 오스트리아는 술탄 무스타파 2세
(Mustafa II) 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황제와 트란실바니아와 부다
(Buda), 에게르(Eger) 그리고 카니즈사 (Kanizsa) 와 같은 주요 요새들은 양도하게 됩니다.
이 지방들은 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Principality of Transylvania), 헝가리 왕국
(Kingdom of Hungary),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
그리고 국방 국경(the Military Frontier) 이라는 이름의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17세기 말엽 흔들리던 오스만 제국은 1703년에 등극한 아흐메트 3세의 지도력 하에 한숨을
돌리니..... 1711년 프루트 전투에서는 저 대단한다는 영민한 군주라는
표트르 대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조프와 몰다비아를 되찾았으니 중흥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1715년에는 베네치아로 부터 모레아를 수복하며 1683년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지만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가 참전해 명장인 사부아 공작
외젠의 지휘하에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북부를 점령해버렸고
이후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에서 제국은 다뉴브 방어선을 포기하며 발칸 지배력이 불안해집니다.
현실을 자각한 아흐메트 3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포병을 중심으로 군사 장교들을 초청하여 서양식 군대
체계에 입각한 장교들을 양성하니.... 예니체리들의 반발로 제한적인 개혁에 그쳤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점진적이나마 질적 향상을 이루어냈고, 한편 예술과 문화에 심취해 있던 아흐메트 3세와 그의 궁정은
튤립을 중심으로 평화와 예술의 시대를 구가하며 코스탄티니예에 수많은 건물들을 세우니 튤립시대라 부릅니다.
젠타 전투의 패전 이후 오스만은 유럽 정복을 포기하고 영토 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지만 이 시점까지도 오스만
은 유럽 내의 강대국 중 하나였으니 대표적으로 1735년~1739년에 일어난 러시아 - 튀르크 전쟁입니다.
이때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아군으로 참전하자, 오스만은 놀랍게도 오스트리아를 세 전투
에서 연달아 패배시켜, 과거 잃은 영토 (세르비아, 바나트 남부, 보스니아 북부) 를 수복할 수 있었습니다.
대 튀르크 전쟁의 파급력은 강했지만 전쟁 한번으로 오스만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으니, 오스만 지도부
는 대유럽 최전선이 부더에서 벨그라드까지 내려오기는 했지만, 애초에 헝가리까지 점유하는건 무리
였으며 "살다보면 질수도 있는거지" 정도로 치부하고 오스만이 유럽 국가들에 밀리고 있다는 인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 튀르크 전쟁 직후인 18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은 튤립시대라는 문화적 중흥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18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적국과 1대1로 싸웠을 때 사부아 공자 외젠이 지휘한 1716년 -
1718년의 전쟁을 제외하면..... 오스만 제국은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네치아에게 뺏긴 모레아, 러시아(루스 차르국) 에게 뺏긴 아자크를 모두 15년도 안되어 회복하고 오스트리아
에게 뺏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일부도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1739년의 벨그라드 조약에서 회복합니다.
이후 18세기 후반까지 오스만-유럽 전선은 사바강 - 도나우강 - 카르파티아산맥 - 드네스트르강 -
남부 우크라이나 선으로 안정화되었으며 또 유럽 국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와 중앙
아시아, 인도까지 평정한 전쟁기계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 나디르샤의 침공도 성공적으로 물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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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을 한 자,
험담을 들은 자,
험담의 대상자 등을 모두 죽일 수 있다.
유대인의 지혜가 집약된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말을 하기에 앞서 늘 3가지 체에 걸러봐야 합니다
마음 편안한 하루길 되시기바랍니다.
💵💶💷
참으로 옳은 말씀 입니다.
모두 다 지당하구요......
인터넷에서 악플도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