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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부터 2박 3일 동안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 인사들을 모시고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생 200주년 기념 순례를 다니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순례 1일째 날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생가와 묘소를 방문하며 동학사상의 뿌리를 되새겼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업무를 보다가 기념 순례를 하기 위해 경주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오전 8시에 3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인사들이 버스를 타고 경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12시에 경주에 도착하여 순례단을 맞이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경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순례의 첫 여정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말 그대로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대신사가 태어나신 곳입니다.
생가 입구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 앞에서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님이 최제우 대신사가 탄생한 생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교령님은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열정을 다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 집이 최제우 대신사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모두 불타 버립니다. 불에 탔으면 다시 복원하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불이 나면 뭐가 탑니까? 재산이 타고, 책이 탑니다. 그래서 아버지 근암공 최옥 씨가 그동안 닦아오던 유림의 역사가 다 타버린 겁니다. 이 얘기는 유교나 불교의 역사를 갖고 수련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새로운 걸 깨달아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신사님은 이곳을 떠나 팔도강산을 떠돌게 됩니다. 그때 ‘내가 팔도를 다니면서 백성을 구해낼 도를 얻지 못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하고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동학은 뭐고 천도교는 뭔가’ 하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옛날에는 동학이고 지금은 천도교라고 대부분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동학이고, 지금도 동학이에요. 대신사님이 쓰신 논학문이라는 글귀에 보면 ‘도는 천도요. 학은 동학이다’ 하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동학도 천도교이고, 천도교도 동학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이 동학과 천도교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려고 ‘우리는 천도교는 안 해! 그 대신에 동학을 할 거야’ 이렇게 말하는데, 동학도 천도교이고, 천도교도 동학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종교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
오늘 이 자리에 스님도 오셨고, 신부님, 목사님, 교무님도 오셨는데요. 오늘은 대한민국 종교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입니다. 대신사 탄신 200주년이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사회 지도층과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함께 순례를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종단의 교조 탄신 200주년이 됐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두 큰 박수로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하고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다 함께 생가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박남수 전 교령님은 대신사님과 관련된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운 대신사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시켰습니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이정자 여해여성포럼 대표님이 감탄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건 정말 혁명적인 일이네요.”
생가를 둘러보고 나와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 한 장에 남겼습니다.
“대신사님, 감사합니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다시 버스에서 내린 곳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의 묘소입니다. 생가의 맞은편에 위치한 구미산 기슭에 대신사님의 묘소가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단풍이 우거진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늘이 높이 트여 있는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정비가 안 되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최근에 경주시에서 묘지 정비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역시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님이 묘소에 대해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이 구미산에 대신사님의 태묘가 있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대신사님은 대구 장대 관덕정에서 참형을 당했는데, 그 후 3일이 지날 때까지 시신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신사님의 몸에 열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대신사님이 생존하실까 봐 치우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시신을 그대로 보관해 놓고 있었는데, 7일째 되는 날 제자들이 만져보니까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시신을 옮기기로 했는데, 그 당시에는 좌도난정의 죄수 시신을 옮기는 것이니까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대구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신을 옮기기로 하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대신사님의 조카인 최세조라는 사람을 앞세워서 ‘우리 산에 산소를 모시겠습니다’ 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용담정 관내에 있는 이곳이 대신사님의 산소로 확정이 된 겁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무리하면서 묘소에 드실 때까지도 고통을 많이 겪으신 거죠.”
교령님의 안내에 따라 묘역 참례식을 했습니다.
“대신사님이 계신 곳이니까 다 함께 묵념으로 예를 갖추면 어떨까 싶네요. 다 함께 기도!”
스님,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무님, 모두 묘소 앞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다시 교령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수운 대신사님의 묘소에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인들이 자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자들까지도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마 대신사님의 숙령이 굉장히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참례식을 마치고 묘소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종교인 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스님, 신부님, 주교님, 교무님은 별도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최제우 대신사님이 깨달음을 얻은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으로 향했습니다.
묘소가 있는 산기슭의 왼쪽 산골짜기에 용담정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산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노란 은행잎이 도로를 뒤덮은 입구부터 단풍이 절정이었습니다.
왼쪽에 작은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길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이 들어서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입구에서 두 개의 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700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아름다운 용담정이 나타났습니다.
용담정 안에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하자 동학수련원의 원장님이 천도교의 기도 의식인 청수봉전을 시작했습니다. 청수봉전이란 수운 대신사가 참형을 받을 때 청수를 받들고 순교함에 따라 일체의식을 갖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는 항상 청수를 떠놓고 기도를 합니다.
“시천주 조화정 열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청수봉전을 마치고 박남수 전 천도교 교령님이 이곳 용담정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이곳 용담정은 수운 대신사님께서 1860년 경신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은 곳입니다. 대신사님은 스무 살 때 이곳을 떠나 팔도유람을 다니면서 용담정은 다시 안 들어온다고 했지만,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신비한 체험을 한 이후 더 이상 밖에서 머물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용담정으로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용담정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내가 도를 깨닫지 못하면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 하고 불출산외를 맹세한 것입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후천 5만 년의 무극대도를 깨닫기 위한 공부를 합니다. 그것이 포덕 1년 1860년 4월 4일까지 이어졌고, 다음날 한울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날이 바로 대신사님이 최초로 종교 체험을 한 날입니다. 용담정은 후천 5만 년의 무극대도가 창도 된 성스러운 곳입니다. 우리가 이 장소를 답사하는 이유는 대신사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내가 직접 체험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에 대한 신념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다 함께 용담정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바위마다 이끼가 끼어서 신비로움을 더했습니다.
용담정 위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용추각이 있었습니다. 곳곳에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아기의 고사리 손처럼 생긴 단풍잎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용담정을 내려와 수운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일대기와 동학의 발전 과정이 다양한 사진 자료와 글로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동학교육수련원 대강당에서 대화마당을 열었습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탄생, 성장배경, 수도과정,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종교 지도자들과 학자들이 함께 동학의 깊이를 탐구하고, 오늘날 그 가르침의 의미를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천주교서울대교구 김홍진 신부님의 사회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뜻깊은 순례에 함께 하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입니다. 먼저 법륜 스님이 참석한 내빈들을 소개해 주시겠습니다.”
먼저 스님이 이번 순례를 마련한 취지에 대해 설명하며 대화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번 순례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 뜻을 모아 마련했습니다. 사실은 국가가 주관해야 할 행사인데 현재 정부가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저희들이 조촐하게라도 행사를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100주년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못했지만, 200주년은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으로 보면 성대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천도교에서 기념행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뜻깊게 해 보자고 해서 이런 자리가 마련이 됐습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은 우리 민족사의 어르신이니까 종교를 떠나서 함께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모든 종교인이 다 참여를 했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내빈들을 모두 소개했습니다. 천도교, 성공회,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불교, 사회원로, 시민단체 활동가, 정치인, 평화재단 연구위원과 기획위원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다양한 사회 지도층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시에서도 시의회, 문화계, 역사학계, 종교계, 언론계,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청중으로 자리했습니다. 한 명씩 호명이 될 때마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서 대한성공회 박경조 주교님의 인사말과 함께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주교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예수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가르침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천도교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수운 대신사의 사상은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제가 몸담고 있는 종교를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군대를 앞세워 땅을 점령하고 십자가를 꽂는 방식으로 퍼졌습니다. 저는 그런 교회의 역사를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수운 대신사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스스로의 존엄을 일깨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종교들의 지혜를 모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서 제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가 새롭게 되는 일에 제 한 몸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교님의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습니다.
이어서 주낙영 경주시 시장이 귀국이 늦어 참석하지 못한 것을 대신해서 경주시 부시장이 축사를 하였습니다. 경주시민을 대표해 참석자들을 환영하며 수운 생가 복원, 동학교육수련원 건립, 그리고 해월 최시영 선생 생가 복원 등 경주시의 주요 사업들을 소개하며, 앞으로도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헌신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천주(侍天主)의 혁명적 의미
대화마당의 마중물 역할로 두 명의 발제자를 초대했습니다. 먼저 천도교 윤석산 교령님이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종교 체험과 동학 창시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특히 ‘시천주(侍天主)’ 사상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민중의 주체성을 일깨운 동학의 혁명성을 강조했습니다.
“천도라는 것은 수운 최제우 선생님이 나오기 이전에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을 비로소 밝힌 분이 수운 최제우 선생이라는 뜻에서 '창명(創明)'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시천주(侍天主)는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한울님은 초월적 공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차 계시며, 신령으로 내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천주(天主)를 모신 존재로서 임금이나 천민이나 본원적으로 동등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봉건 사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을 떠나 하층민도 주체로 나서서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시천주'의 가르침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님께서 구도의 여정과 종교 체험을 거치지 않았다면 동학이라는 가르침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천개벽이라는 말은 새로운 질서를 통해 조화와 균형의 삶을 이루겠다는 의미로, 사회의 귀천을 넘어서 모두가 한울님의 일을 하는 성스러운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나 자신이 이 시대의 주체로서 새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동학 창명은 서양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자생적으로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열어가는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교령님은 수운 대신사의 깨달음이 단순한 종교적 체험이 아닌, 철저한 수련과 고민 끝에 얻은 철학적 성취임을 역설했습니다.
동학,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
이어서 대구대학교 김용휘 교수님이 철학적 관점에서 동학의 의의를 재조명했습니다. 그는 동학사상이 3·1 운동, 4·19 혁명,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임을 강조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3.1 운동은 10년 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해방 이후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는 잘못된 권력을 백성이 바로잡는 동학 정신의 표출입니다.
동학은 단순히 서학에 대응한 학문이 아니라, '동국의 학문'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조선 백성을 위한 새로운 학문이자,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철학적 시도였습니다. 수운 선생은 2천 년 동안 잃어버렸던 천도(天道)를 조선 땅에서 다시 밝히며, 도와 덕의 회복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했습니다.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시다'는 신의 내재성을 깨닫는 것을 넘어, 한울의 본성을 온전히 구현하며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운 선생이 말한 '후천개벽'은 문명적 대전환을 의미하며, 내면부터의 혁명을 통해 모든 존재를 공경하고 고통을 공감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새로운 삶을 제시합니다. 동학은 서양의 근대 문명과 동양의 유교 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문명을 제시하며, 동서 융합의 문명 전환 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태적 위기와 인간의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며, 품격 있는 도의적 신문명을 열어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제입니다. 동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선언하며, 모든 존재를 공경하는 삶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을 강조합니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우주와 생명,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학문이자 실천 철학입니다."
교수님은 서학에 반대되는 동학의 개념이 아니라 동학이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결합한 새로운 문명을 제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두 분의 발제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동학사상이 논의되었습니다. 특히 김기화 신부의 발언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김 신부님은 동학의 본질과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최제우 선생님은 한울님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고 받아들인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우상화하는 것에 그친다면 동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동학이 앞으로 나가려면 최제우 선생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제우 선생님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동학은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새롭게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최제우 선생님만 찬양하는 동학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발제자들은 동학이 한울님과 인간의 조화 속에서 개인과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김 신부의 시각을 포용하여 논의를 확장시켰습니다.
행사의 마지막,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님이 자리해 감사의 뜻을 전하며 순례단과 주최 측의 노고를 격려한 후 최제우 대신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앞장서 나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경북은 동학의 발상지로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동학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며,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내년에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APEC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제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로, 경주가 삼국통일의 기운이 넘치는 땅인 만큼, 이 행사가 세계 평화와 번영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시진핑 주석 등 세계 주요 정상들이 참여할 예정입니다. 만약 남북 관계가 개선된다면, 김정은 위원장까지 초대해 경주에서 6자 회담과 같은 의미 있는 평화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APEC이 남북통일의 기운을 받아 평화와 번영의 길을 여는 중요한 행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화마당은 저녁 6시가 되어서 끝났습니다. 수운 최제우 대선사의 사상을 마음에 새기며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스님은 이철우 경북 도지사님과 차담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도지사님은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의 중요성과 이를 통한 남북 평화 및 국제 협력의 비전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스님의 조언도 들었습니다.
차담을 마치고 참석자들 모두가 뷔페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며 미진한 대화를 더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참석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는 포항에서 오늘 저녁에 강연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다시 결합하겠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하기 위해 포항으로 출발하고, 참석자들은 저녁 7시부터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 3
둥근 모양으로 둘러앉아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오늘 하루 최제우 대신사의 탄생, 성장, 득도의 과정을 순례하고 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경주의 첫날은 깊은 울림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포항 뱃머리평생교육관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5년 만에 포항에서 처음으로 오프라인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올해 들어 열두 번째 진행되는 행복한 대화 강연입니다.
350여 명의 포항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사전공연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버스킹 공연을 하는 최수비 님이 신나는 노래 두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4,9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이어서 얼마 전 스님이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학교를 새로 짓고 준공식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박수 소리가 잠잠해지자 환한 웃음과 함께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불교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이 법담이 아니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것을 법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나 스트레스 같은 것들을 내어놓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저와 둘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 모인 350명의 사람들이 함께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고개를 가로 젓기도 하면서, 모두 함께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법담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부부간의 갈등이나 자식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저 집에는 문제가 있구나’, ‘저 집은 부부싸움을 하네’ 이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질문은 법담의 소재일 뿐입니다.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아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다섯 명이 먼저 스님과 대화를 나눈 후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노년에 혼자 사는 게 무섭지만, 딸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부담이 된다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물어보았습니다.
혼자 사는 게 무섭지만, 딸들에게 신세 지는 것도 부담입니다
“저는 딸이 셋 있는데요, 제가 몸이 많이 아픕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저를 부양하는 아이들에게 부담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지낸 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그동안 수술도 많이 하고, 현재는 정신과 약까지 먹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한테 너무 부담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엄마로서 아이들한테 해준 것도 없어서 많이 미안합니다. 그런데 요즘 밤에 무서운 꿈을 많이 꿔서 힘듭니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꿈에 나오고, 죽은 동생도 꿈에 나오고, 쫓기는 꿈도 꿔서 너무 무서워요. 막내딸이 같이 살자고 하긴 하는데, 또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꿈꾸는 게 뭐가 힘이 들어요? 여기에 모인 사람들도 다들 그런 꿈을 꿉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요.”
“너무 무서워요.”
“문 잠그고 자는데, 뭐가 무서워요?”
“죄지은 것도 없는데, 무서운 꿈을 꾸니까 너무 힘들어요.”
“죄를 지었구만요.”
“아니에요.”
“죄를 안 지었는데 왜 무서워요?”
“제가 수술을 많이 해서 아이들이 많은 수술비를 대느라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이들이 힘들겠다고 걱정할 수는 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엄마가 힘들어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병원비가 들고 병간호를 하느라 힘들어도 엄마가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좋을까요?”
“마음 편하게 사는 걸 좋아할 거 같아요.”
“그런데 왜 아이들을 불편하게 해요?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더 괴롭히는 것 아니에요? 아이들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고 병원비 드는 건 괜찮으니 엄마가 편하게 치료 받으라고 하는 것인데, 엄마가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면 아이들이 돈을 쓴 보람이 없어지잖아요.”
“항상 아이들이 엄마는 돈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아이들한테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아이들의 말을 좀 들으면 안 돼요?”
“들으려고 하는데, 제 마음이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이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그래서 지금 죽겠다는 거예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밤에 자다가 꿈을 너무 많이 꾸는 게 문제예요.”
“그럼 딸하고 같이 살면 어때요? 옆방에서 같이 살면 낫지 않아요?”
“딸이 일을 하는데, 엄마랑 같이 살면 힘들까 봐 걱정이 돼서요.”
“딸이 일을 하니까 같이 살면서 낮에 자기가 살림을 해주고, 밤에 옆방에서 자면 되잖아요. 자기는 밤에 잘 때 무서워하는 거니까요. 한 집에서 밤에 같이 자고, 낮에 회사 출근하는 게 뭐가 문제예요? 막내딸이에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네.”
“그럼 같이 살면 되겠네요. 한 집에 같이 사는 게 부담스러우면 가까운 곳에 작은 아파트를 두 개 얻어서 따로 사는 것도 좋아요.”
“네, 지금 따로 살고 있어요.”
“딸이 옆 동에 가까이 살면 자기가 심리적으로 덜 불안할 것 아니에요?”
“딸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제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요.”
“그럼 딸한테 부담을 주지 말아야죠.”
“저도 부담을 안 줄려고 몸이 아파도 말을 잘 안 하고, 많이 아플 때만 말을 합니다.”
“말을 못 한다면서 할 말은 다 하네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딸이 돈이 없어서 엄마를 더 이상 못 도와주겠다고 하거나 더 이상 병간호를 못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딸이 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치료 받으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딸한테 보답하는 길은 편안하게 있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자기가 딸의 도움은 받으면서 편하게 못 있으면 딸이 돈 들인 보람도 없어지고, 보살핀 보람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죠. 이걸 알면 정신을 차려야지요.”
“저도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면 병원에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딸이 엄마의 병원비를 내고 돌보면서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겠어요? 엄마가 편안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엄마한테 그렇게 해줬는데도 엄마가 불안해하면 딸이 엄마를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한 보람이 없잖아요. 엄마가 불안해하니까 조금 더 편하게 해주려고 한 집에 살자고 하는데, 그것도 안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딸 앞에서 무서운 꿈을 꿔서 겁난다는 말을 안 해야죠. 무서운 꿈을 꾼다고 말을 해서 딸을 매우 걱정시키면서 딸이 하자는 대로는 안 하잖아요.”
“부담을 안 주기 위해서요.”
“부담을 안 주기 위해서라고 말은 하면서 딸에게 계속 부담을 주고 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얘기 그만하세요. (웃음) 부담을 주기 싫으면 나쁜 꿈을 꿔서 무섭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나 혼자서 잘 지내야 됩니다. 아니면 영감을 사귀어서 옆에 놔두면 좀 덜 무서워요.”
“그런 건 싫어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냥 딸한테 부담이 안 되게 살고 싶어요.”
“양로원에 들어가는 건 어때요?”
“그건 싫어요.”
“그러면 자기 좋을 대로 하세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이것도 부담되고, 저것도 부담되고,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어차피 자기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니까 무서우면 무서운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사는 수밖에 없겠네요. 달리 길이 없어요. 기도하면 꿈을 안 꾸는 기도문을 하나 줄까요?"
"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기도문 팔아서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질문자와 같은 사람은 종교단체에 사기당하기 십상이에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내가 지금 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딸에게 ‘엄마가 미안하지만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너한테 많이 부담이 되겠냐?’ 이렇게 물어보세요. 만약 딸이 부담이 된다고 하면 무서워도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런데 딸이 괜찮으니 엄마랑 함께 살아보겠다고 하면 같이 살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의 성격으로 봐서는 같이 살다 보면 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아요. 질문자는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인 사람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요. 먼저 딸하고 같이 한번 살아보다가 딸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또 따로 살아보는 거예요. 이렇게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기 자신을 봐야 됩니다. 질문자는 이렇게 하려면 저게 문제이고, 저렇게 하면 이게 싫은 사람이에요. 결국 자기 문제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천주교 성당에 나가요? “
"아니요. 절에 다닙니다."
"천주교 성당에 좀 다니면 좋겠어요. “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누가 성당을 좀 다니자고 하더라구요.”
“여기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이 분을 좀 성당에 데리고 가세요. 천주교 성당에 가서 하루 세 번씩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좀 도움이 될 거예요.
항상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라면 자기 자신이 문제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도 한 번 해보고, 저렇게도 한 번 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할머니가 비가 와도 걱정이고, 날이 맑아도 걱정이라고 스님한테 하소연을 했습니다. 스님이 이유를 물으니까 할머니의 큰딸은 짚신 장수한테 시집을 가고, 작은 딸은 나막신 장수한테 시집을 가서, 비가 오는 날은 짚신 장사가 안 될 테니 큰딸 걱정에 울고, 맑은 날은 나막신 장사가 안 되니 작은딸 걱정에 운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비 오는 날은 나막신 장사하는 딸만 생각하고, 맑은 날은 짚신 장사하는 딸만 생각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상황이라도 생각하는 관점만 바꾸면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안 놓으려고 해요. 생각을 딱 바꾸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자꾸 어느 하나에 집착을 해서 목을 매달면 어려워지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생각을 바꾸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런 관점으로 한번 여러분들이 살아보시면 훨씬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현장에서 추가 질문을 세 명 더 받고 나니 밤 9시 30분이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정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행복 시민, 포항!”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강연장을 나와 곧바로 포항을 출발하여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1시간을 달려 밤 11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기념 순례 2일째 날입니다. 대신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경주를 출발하여 남원으로 이동한 후 동경대전 등 동학의 많은 경전들을 집필한 교룡산성 덕밀암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남원시 관계자들과 동학 연구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화마당을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