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바스텐은 펠레를 뛰어넘은 유럽 최고의 포워드로 꼽힌다. 신기에 가까운 골들과 그라운드를 장악하는 움직임. 그는 센터 포워드로서의 완벽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렌지 군단의 팬이던가, 아니면 AC 밀란의 광팬이리라. 그건 반 바스텐이 부상에 허덕이다, 94 월드컵은 뛰어보지도 못하고 축구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 바스텐이 부상으로 축구계를 떠나자 축구에 등진 사람이 존재할 정도로 그 충격은 팬들에게 엄청나게 다가왔다. (사실 반바스텐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외에도 부상으로 축구를 떠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린 선수는 많다. 독일의 유망주 세바스챤 다이슬러 역시 부상으로 장기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는 중이고, 지금은 부활했지만 축구 황제 호나우두도 98 월드컵 이후 4년의 긴 시간을 부상에 시름하며 지내야했다. 부상은 그만큼 선수들에게 가장 큰 시련이고, 팬들에게서 스타들을 앗아가버리는 사악한 존재이다. 이번에 얘기하고자 하는 이관우는 부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결정적인 순간 부상으로 인해 발목을 잡히곤한 선수다. 걸핏하면 재발하는 발목부상등은 그의 기량을 뻗어보기도 전에 그를 좌절시키고는 했다. 만약 그가 부상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어떤 선수가 되어 있었을까. 이관우가 부상을 털고 그의 팬클럽 네임 '시리우스'처럼 환히 빛날 것인지, 아니면 잊혀져 버린 선수로 사라져 갈 것인지 한 명의 팬으로서 이관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관우'는 팬들에게 윤정환과 함께 언제나 대표팀에 필요한 인물로 인정을 받는다.윤정환과 단순히 비교를 해봐도 두 선수가 주는 이미지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선수는 감각적인 패싱력이나 재치있는 드리블 능력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패싱에 주력하는 윤정환에 플레이에 비하면 '이관우'는 조금 더 공격적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보다, 한양대에 진학하면서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팀메이트인 김남일에게 넘겨주고 공격수로 전향했을만큼 이관우의 공격력은 빼어난 것이 있다. '이관우' 선수에 대해 떠올려보자면 우선 곱상한 외모와 볼을 참 예쁘게 차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게임에서 강력한 중거리 슛이라던지 화려한 드리블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부상으로 프로무대 데뷔 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치료에 보냈던 이관우가 필드에 나설때마다 팬들은 가슴을 졸이고만 있다. 사실 스포츠 게시판의 이관우에 대한 글들은 대다수가 '제발 부상만 당하지 말아라'라던지 '이관우여 부활하라'라는 내용이다. 그만큼 그의 부상일지는 화려하다. 그의 화려한 실력이 부상에 가리워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축구를 하며 많은 시련을 겪어 온 이관우, 과연 그는 화려하게 재기 할 수 있을까?
이관우와 청소년 선수권 대회
이관우는 96 아시안 청소년 선수권대표로 선발된 이후 고종수와 함께 청소년 팀을 이끌 쌍두마차로 평가 받았다. 동갑인 둘은 한양공고(이관우)와 금호고(고종수) 시절부터 개인 랭킹 1,2위를 다투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고종수가 스타의식에 젖어 감독의 전술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팀에서 탈락한 이후 언론은 청소년 대회 4강 신화를 재현할 선수로 이관우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기대에 보답하듯 이관우는 친선경기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며 팬들을 기쁘게 했고, 결국 MVP로 6년만에 한국에게 아시아 선수권 우승을 안기며, 1997년 6월에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선수권 출전권을 따내게 된다. 이때까지도 청소년 대표팀에서는 탈락했지만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던 고종수에 비해서 전혀 꿀리지 않는 이관우였다. 아니 오히려 96년 이란에게 6:2의 패배를 당하며 불안하기만했던 국가대표에 비해 아시아를 제패하며 세계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청소년 대표야 말로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는게 옳을 것이다. 물론 청소년 팀의 에이스인 이관우에게 거는 팬들의 기대가 매우 컸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세계 청소년 대회가 이관우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을 주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1997년. 그 해 6월 17일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남아공과의 본선 첫번째 경기를 펼치게 된다. 경기 내용은 8대 2정도로 한국의 일방적인 경기. 수차례의 슛이 남아공 골키퍼인 로버츠의 품에 안기고, 0:0으로 한국으로서는 조급하게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브라질과 한조에 편성된 한국으로서는 남아공을 잡지 못하면 2라운드 진출에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반 37분경 기대하던 이관우에게 찬스가 찾아온다. 이관우는 공격 3 수비 1의 절대적으로 유리한 찬스를 잡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한국이 골을 넣을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다. 경기가 거의 종료시간에 가까워 가고 있었던 시점이라 한골이 터진다면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다음 경기들에대한 부담도 훨씬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이스 이관우는 패스하지 않았고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다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결국 한국은 0:0으로 반드시 잡아야 했던 남아공전을 놓치고 말았고 첫경기에 대한 부담때문에 이어진 프랑스전에 트레제게와 앙리에게 2골씩을 헌납하며 4:2의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관우가 그 상황에 패스를 했다면 그의 인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한번의 찬스가 이관우가 겪어온 선수생활중 가장 큰 시련이 된 장면이되고 말았으니까. 한국은 마지막 남은 브라질전에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보지만, 브라질에게 무려 10:3 이라는 청소년 대회 최다 점수차의 엄청난 스코어차 대패를 당하고 만다.(물론 이 기록은 브라질이 바로 다음의 2라운드 경기였던 벨기에 전에 10:0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경신되었다..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경기에서 '역대 한게임 최다골', '한팀 한게임 최다골', '개인 한게임 최다골', '최다골 득점왕', '최단시간 대량골' 등 대회사상 일찍이 없었던 수치스런 기록들을 남기게 되었다.) 결국 한국의 유망주 스트라이커였던 이관우는 자신을 위한 무대가 되리라던 세계 청소년 선수권의 실패에 그렇게 비난과 함께 잊혀져 갔다..
다비드 지놀라의 경우처럼 남아공전 이관우의 플레이는 이후 쭈욱 그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한양대 진학 후 김남일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당한 교통사고는 정말 치명적이었다. 이관우는 더 이상 팬들의 기대가 아니었고, 오히려 97년 한국의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예상밖의 최고의 성적으로 마친 국가대표에게 모든 관심은 집중되었다. 완전히 상황 역전되어버린 고종수와 이관우.. 이관우는 이후 슬럼프에 시달리며 흔들렸지만 고종수는 한국의 월드컵 실패에도 불구, 멕시코전, 벨기에 전에 통렬한 슈팅을 선사, 이동국과 함께 한국축구의 희망으로 우뚝서게 된다.
부상에 허덕이는 신예 테크니션
국가대표급의 성적을 볼때 1997년 청소년 대회와 98월드컵 그리고 99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의 잇따른 참패는 한국 축구에 위기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결국 한국축구는 방황의 시기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 시기 허정무 감독은 한국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올림픽 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동시에 지휘하게 되었다. 허정무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을 중심으로 대표팀을 운영했는데, 이관우는 허정무의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하게 되면서 97년 이후의 슬럼프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허정무는 이관우에게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는 평가를 내리고, 결정짓는 위치가 아닌 만들어 주는 위치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그의 자리를 정하였다. 이후 이관우는 더욱 성숙해진 플레이를 과시, 1999년 1월 15일에 있었던 호주올림픽 대표와의 한국 올림픽 대표 출범 첫 경기에 결승골을 기록하며 이후 올림픽 대표의 상승세를 주도하게 된다.
이관우는 좌 영표 우 진섭 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린 박진섭, 이영표 그리고 당시 한국 최고의 기대주였던 이동국과 함께 1999년 올림픽 대표의 14승 1무 2패 (득49 실10)의 성적을 냈다. 주목할 점은 이 기록에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등의 약체도 있었지만, 체코 올림픽대표팀 등의 강호도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특히 체코 올림픽팀
의 감독이 체코 올림픽 대표를 4:1로 이기고 출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나서는 대표팀의 허정무 감독의 손을 잡으며, '꼭 올림픽에서 우승하라'고 말했던 얘기는 유명했다. 일본에게 1:4, 0:1 의 2연패를 당하며 잠시 주춤했던 올림픽 대표였지만, 2000년 호주 원정에서 5연승으로 다시 상승세를 이어갔다.
허정무 감독이 올림픽 팀을 지휘하게 되며 채택한 포메이션은 3-4-3이었다.(후에는 3-5-2로 전환한다.) 선수시절 네덜란드 리그에서 활동했던 감독답게 네덜란드 전통의 쓰리톱을 사용한 이 전술로 한국은 매 경기 화려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 하였다. 이관우는 다이아몬드 형태로 늘어선 미드필더의 꼭지점인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에서 플레이 하였고, 1999년 올림픽 대표 17경기에서 총 4골을 기록할만큼 공격력도 발휘하였다. 다만 그 위치에서 그의 문제점은 체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전반을 뛰면 후반은 거의 뛰지 못하다시피 할 정도의 그의 약한 체력은 이관우 뿐아니라 대표팀 전력의 중요한 약점이었다. 결국 허정무호 초기에 꾸준히 출장했던 그도 점점 한양대 동기인 김남일에게 플레이 메이커 자리를 내주며, 교체투입용으로 전락했다. 물론 강력한 중거리슛이나 수비수 한두명은 가볍게 따돌리는 발재간, 감각있는 패싱력을 지녔지만 체력 소비가 상대적으로 더욱 심한 3-4-3 시스템에서의 그의 활용도는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고종수가 뒤늦게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이관우는 완전히 후보로 내몰릴 위기에 처하고 말았고, 라이벌 고종수와의 대결은 또 다시 고종수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그러나 아시아지역 최종예선과 호주 원정을 거치면서 이관우의 가치는 다시 입증되기 시작했다. 최종예선 바레인 원정경기에서 이동국에게 결승 어시스트를 한 것을 비롯, 바레인과의 홈경기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골대를 맞추어 박진섭이 역전골을 넣는데 기여했다. 특히 최고였던 , 2000년 1월 호주 원정, 호주 올림픽 대표와의 경기에서 수비수 4명을 제치고 넣은 골은 그가 아마추어 선수임에도불구하고 유일하게 팬클럽을 갖고 있을만큼 화려한 공격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멋있는 장면이었다. 결국 그의 가치를 인정한 J-리그의 아비스파 후쿠오카는 그에게 7억원을 제의하고, 이관우는 후쿠오카팀으로의 이적에 사인하며 J-리거로의 진출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J-리그 진출 직전 그는 드래프트 문제로 파문에 휩쓸리게 된다.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하고도 J-리그 이적서에 사인해 이중 계약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드래프트 파동의 이유였다.
이관우는 어쩔 수 없이 J-리그 진출을 포기하고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목한 대전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 다행스럽게 사태가 가라앉아 안정적인 마음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청소년 대표, 올림픽 대표부터 쌓아온 이름으로 전문가들은 맹활약을 점쳤고, 팬들은 화려한 플레이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2000년,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수시로 찾아드는 부상의 그림자는 한창 만개해야 할 시리우스를 가만 두지 않았다. 2000년 4월 6일 아시안컵 예선 라오스전에서 오른쪽 발목인대 파열, 2000년 8월 6일 울산전에서 다시 오른쪽 발목 재부상, 그리고 이로 인한 올림픽대표팀에서의 제외.여기에 재활치료 후 가진 포항과의 첫 경기에서 다시 왼발 부상을 당한 그는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서 기대를 모았던 프로 첫 시즌을 12경기 1골 1어시스트의 부잔한 성적으로 마감했다. 특히 맹활약으로 고종수, 김남일, 이천수 등과의 경쟁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던 올림픽호의 도중 하차는 이관우뿐아니라 그에게 기대했던 많은 팬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는 8강진출에 실패했고, 경쟁자였던 고종수와 이천수의의 부진은 이관우의 공백을 진한 아쉬움으로 남기고 말았다.
이후에도 부상의 그림자는 이관우를 비껴가지 못했다. 2001년 15 경기 6골을 기록하며 대전의 선전을 이끌어 그동안의 부상을 훌훌 털어 버리며 재기에 완전히 성공한 듯 했다. 하지만 이관우는 전남과의 경기에서 전반 김남일과 부딪히며 왼쪽 무릎 부상을 당했다. 큰 부상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연골이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은 후 이관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양대 동기였던 김남일의 태클로 이관우가 부상을 입자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남일은 팬들로 부터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나 그의 부상은 2001년 히딩크호 4기에 합류하기 직전에 당한 부상이라 많은 아쉬움을 샀다. 지난해 FA컵 결승 직전에 부상에서 회복하여 공오균, 김은중등과 FA컵 우승을 이끌어 다시 회복하는 듯 했으나 전지훈련중 부상으로 2002년 시즌 현재까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3번째 시즌을 맞고 있는 그이지만 경기에 나선것은 교체 포함하여 29 경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부상의 늪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그리고 대전..
이적 파문을 일으키며 대전으로 입단했던 이관우는 팀의 간판선수로서 김은중 선수와 함께 팬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의미에서는 이관우의 대전이적은 결과적으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대전의 선수층이 얇다는 데 있다. 대전 시티즌의 재정이 타 구단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팀의 선수 수급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김은중, 이관우같은 어린 선수들이 팀의 핵심 멤버가 될 정도로 대전의 스쿼드는 강하지 못했고, 주전과 비주전의 실력차는 확연히 났다. 언제나 초반에 상승세를 타며 기대를 모으고 후반에 무너지는 것을 반복했던 대전의 문제는 그러한 스쿼드의 부족에서 초래된 것이다. 덕분에 대전은 이관우를 무리해서라도 투입할 수 밖에 없고, 항상 그가 부상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관우 뿐 아니라 팀 주축 선수들의 부상은 많았다. 성한수가 대전에 있을 당시 성한수와 김은중의 투톱은 K-리그에서도 경계대상으로 인정받았지만 성한수가 무릎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라 시즌을 마감한적도 있었고, 김은중도 나이지리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이후 계속된 사소한 부상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태호 감독은선수수급의 문제로 2001시즌에 원정경기에는 2진만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대전의 선수난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전의 선수부족은 어린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물론 드래프트 제도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 어린 스타 이관우에게 대전행은 팀이나 그에게 안좋았던 점이 있는게 사실이다.
물론 대전의 선수난만이 이관우의 부상에 영향을 준것은 아니다. 오랜시간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약한 체력이 그의 부상에 결정적인 이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대전의 선수수급 부족은 부수적인 이유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체력이 약한 이관우로서는 프로의 거친 경기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역시 J-리그로 이적했다면 부상때문에 발목을 잡히지는 않지 았을까를 걱정할정도로 프로생활은 이관우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부상만 아니였다면 이관우의 프로무대는 화려했을지도 모른다. 2001시즌 이관우가 출전한 15게임중 12게임은 대전의 승리였다. 그의 출장만으로 약체로 분류되는 대전의 전력은 매우 강화되는 것이다. 부상없이 시즌을 마쳤다면 아마 대전역시 초반의 상승세가 무기력하게 껶이며 무너지지는 않았을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이관우의 약한 체력으로는 후반기로 갈수록 부상의 위험이 더욱 높아져 위험해진다는데에 있다. 사방에서 수비를 받아야 하는 중앙 미드필더의 위치에서는 체력의 부재는 더욱 문제가 된다. 체력의 문제는 부상이외에도 팀전력에 영향을 많이 끼치기 때문에 그의 미래를 위해서도 보완해야 할 문제다. 기복이 있거나 체력적인 문제가 있는 선수는 감독의 입장에서 확실히 고민거리다. 그가 더 많은 기회를 잡고, 바라고 있는 해외진출이나 2006년 월드컵의 출장을 이루려면 더욱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강인한 체력을 길러야 한다. 이관우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들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강한 체력이 월드 클래스급 축구의 발판 임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이관우는 뛰어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불운을 맛보며 그의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특히 몇년동안 계속되고 있는 부상은 한 명의 팬으로서 더욱 우려가 된다. 최근 부상에서 회복되어 K-리그에서 후반 교체투입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의 센스있는 동작들은 팬들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부디 부상을 털고 일어나 그의 축구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언제나 기대주로 머물것인지 다시한번 시리우스같은 환한 빛을 뿜어낼 것인지는 그 자신과의 싸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체력적인 면을 보완하고 부상을 조심한다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미드필드를 장악할 특급 테크니션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더불어 라이벌이었던 고종수가 히딩크 사단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다 똑같이 부상이라는 이유 2002 월드컵에서 출장하지 못해 이관우와의 대결은 어느정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고종수가 이루어 놓은 명성이 너무 대단하기에 부상으로 시름한 이관우와의 라이벌 구도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고종수와의 대결에서도 압승^^; 하길 바란다. 더불어 이번 2002 K-리그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어서 국가대표로의 복귀 역시 기대해본다. 팬으로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도 모르지만 부상으로 시름한 최고의 기대주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기다리는 팬들이 너무나도 많다. 필자역시 그러한 무리의 한명으로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를 기대해본다. 불운했던 이관우의 미래에 행운이 따르길 빈다.
첫댓글 몇년전에 쓴 글이라 이관우선수 체력이 약하다고 한게 눈에 거슬리지만..ㅎ
이관우 선수 대전에선 유명하죠.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 날? ㅋ 농담. 국가대표에서 볼수 있길 바랍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면 열심히 죽도록 뛴다던데..대전은 no. 8 이관우선수를 빼고 이야기 할수 없죠. 국가대표에서도 그랬으면 합니다.
정말 잘쓰셨군요. 제가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해주셨네요~감사합니다
내가 국내 선수 중에 제일 좋아하는 선수예요!! 박주영 박지성 고종수 보다도 이관우!! 제일 좋음!!!! >_<b
대전 하면 이관우!
제가 이번에 FM을 대전으로 시작했는데.... 이관우 최강입니다. ㅋㅋ 네안드롱도 실제와 다르게 득점기계 ㅋㅋ 5년동안 이관우 팬이였는데 포워드라는 사실을 몰랐네요. 어쩐지 FM에서 포워드로 나오더니.
얼마전 kbs스포츠 케이블 방송에서 이관우선수 특집으로 방송한게 있었는데요 너무 머찌더군요...다시 빛을 내는 날이 꼭 올껍니다
예전에 청대때였던가 다이빙헤딩이 정말멋져보였었던 이관우 선수;
이관우가 있기에 지금 대전이 있는거죠~ 전 하루빨리 이관우가 국대에 뽑혔으면 하는 바람이~
나도 이관우 제일 조아했었는데..부상땜에..제가 다 짜증이나더라구여
국대는 좀 힘들지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