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피파
https://www.dmitory.com/issue/224279606
<양들의 침묵>
미궁에 빠진 '버팔로 빌 살인사건'을 해결하고자
FBI 훈련생 클라리스(조디 포스터)가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를
프로파일링 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내용의 스릴러물.
스릴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주요부문 싹쓸이한 영화이기도....
이 영화를 보면 매우 남성 중심적인 범죄 수사계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으로서 클라리스가 일상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성차별과 여성혐오적 순간들을
아주 예리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보여주고 있어.
사건을 수사하는 클라리스 조차 늘 남성들에게 대상화되며 끊임없이 관찰당하고 평가된다는 점에서
클라리스와 관음과 쾌락의 대상으로서 남성 연쇄살인마에게 반복적으로 희생양이 되는 여성들의 부당한 처지를 아이러니하게 연결시키고 있지.
그렇다면 영상물에서
남성 집단에게 대상화되고 타자화되는 여성의 일상과 여성혐오적인 순간들을 과연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성적인 욕설을 여성에게 내뱉는 남성의 모습을 통해? 아님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91년도 작품 <양들의 침묵>이 찾은 방식은 지금까지 회자될 만큼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여전히 세련됨.
어때?
이 장면은 <양들의 침묵>에서도 가장 유명한 샷 중 하나야.
여성을 비하하는 수준낮은 대사나 노골적인 폭력 장면 없이
클라리스가 일상적으로 겪을 그 '불편한' 순간들을 이미지적으로 전달하고 있어.
클라리스가 남초 직군에서 겪고 있는 소외감, 대상화를
클라리스를 비하하는 남성들의 백 마디 대사 보다도 훨씬 효과적이고 강렬하게 포착해서 보여주고 있지.
전원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남성 훈련생들과 달리
혼자서만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올라탄 위축된 자세의 클라리스.....
양들의 침묵에는 이러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와.
남성들이 클라리스를 향해 직접적인 대사나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결코 보여주지 않지만
클라리스에게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저런 숨막히는 상황들과 부당함을 관객들이 이해하고도 남을만큼 설득해내.
그리고 이 영화가 클로즈업을 활용해 메일 게이즈, 즉 '남성의 시선'을 어떻게 통찰하고 있는지도 주목해볼만 해.
영화속 클라리스가 남성 캐릭터와 독대할 때, 남성 캐릭터의 시선을 볼까.
이제 클라리스의 시선을 볼까.
남성들은 그들이 그녀의 상사거나, 프로파일링 대상이거나, 하다못해 살인마라고 할지라도
카메라 똑바로 바라보며 클라리스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관찰하는 것처럼 촬영되어있어.
영화상 그 캐릭터들에게 악의가 있든 없든, 남성들은 항상 무의식적으로라도 어김없이 클라리스를 똑바로 응시하도록 촬영되어 있어.
그리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다음 샷에서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며, 약간 불편해하거나 민망한 기색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클라리스를 보게 되지.
권력자의 위치에서 여성을 관음하는 남성의 시선을 영화가 묘사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시점 쇼트일 거야.
말그대로 카메라 렌즈를 남자의 시점과 동기화 해서, 가령 옷을 벗는 여성을 관찰하듯 화면에 보여준다던지 하는 거지.
하지만 양들의 침묵은 전혀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
그 남성의 시선을 오히려 정면으로 보여주고,
관객들에게 남성의 시선을 읽게 해.
즉 남성이 관음하고 있는 순간의 여성을 묘사해 같이 관음하게 하는 게 아니라
관음하는 남성의 시선을 관객들이 관음하며 남성들의 폭력적인 시선을 마주하게 만들어.
그리고 우리는 갈 곳 없는 클라리스의 시선을 이어서 보게 되지.
즉, 이런 장면들로 인해 우리는 남성의 시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남성의 시선에 노출되고 있는 클라리스 감정에 이입되게 돼.
때로는 무의식적인, 또 때로는 정말 노골적인 남성의 시선을 일상적으로 거스르고 뿌리치고, 그럼에도 일에 전념해야 하는 클라리스의 얼굴을 보게 되지.
그런 맥락에서 늘 갈곳을 잃고 방황하던 클라리스의 시선이
가장 당당하게 카메라 렌즈 정면에 고정되어 있는 장면이
클라리스가 혼자서 사건 연구에 오롯이 몰두하는 장면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그녀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그 어떤 방해존재도, 장애물도 없을 때 클라리스는 진정으로 '요원 클라리스' 그 자체로 존재하지.
그리고 자신의 상사가 보안관을 떼낼 작전으로
클라리스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일이 극중에 있어.
상사에겐 악의가 없었지만
클라리스는 그럼에도 그것이 지역경찰관들에게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줬으니 심각한 문제라고 짚고 넘어가.
그리고 상사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인정을 받아내지.
어쨌든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를 쫓는 스릴러 영화이고, 솔직히 저런 대사와 장면을 넣지 않아도 영화 내용을 전개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하지만 저런 건 창작자가 '굳이' 넣은 거란 말이지.
그리고 '굳이' 넣었기에 이 영화가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영화인지 매우 잘 나타내는 장면이기도 해.
연쇄살인마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납치되고 살해당하고 있는데
그런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장르물이 '여성'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반영하고, 아무런 수습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작품은 성공한 작품일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 같지.
그리고 이 영화는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당하는 여성의 끔찍한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피해자 캐서린은
손에 깁스를 한 남성이 힘겹게 쇼파를 차에 싣고 있는 모습을 보게 돼.
그냥 지나치려다 맘에 걸렸던 캐서린은 호의를 베풀지.
남성은 캐서린에게 쇼파를 갖고 안으로 들어가게 유도하고
그대로 차에서 캐서린을 폭행해 기절시켜.
하지만 절대 폭행 당하는 캐서린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지. 차체에 가려져서 우리는 볼 수 없어.
그리고 그렇게 남성이 차문을 닫을 때 공포스럽고 참담한 심정이 되는 거지.
여성을 직접적으로 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도 충분히 끔찍하고 참담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어.
그리고 이 장면은 피해자와 살인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인데,
우리는 이 한 장면을 통해서 피해자 캐서린이 얼마나 온정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반대로 살인마는 얼마나 인간의 감정이 결여된 사람인지, 그 캐릭터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단번에 느끼게 돼.
스릴러 영화에서 묘사할 수 밖에 없는 끔찍한 범죄 현장을 저급하지 않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돕고 있어.
그냥 기능적으로도 얼마나 완벽한 장면인지......
"만약 범인이 그녀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 걸 깨닫는다면, 그녀의 피부를 찢기 힘들어질 거야."
극중 클라리스가 하는 대사인데.
이 영화는 단순히 연쇄살인마 싸이코패스가 나오고, 그걸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걸 통해 여성들이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얼마나 물건처럼 대상화되고 있고, 그것이 갖는 위험성이 얼마나 절박한지
모든 장면, 모든 샷을 통해 논평하고 있어.
여성혐오적 범죄, 상황같은 걸 묘사할 때 똑같이 저급해지거나 공해수준의 대사를 전달하지 않고도
얼마나 그 순간 순간들을 효과적이게 묘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의 작품같아서 글을 쪄봤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봐도 여전히 낡지 않았고,
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영화인지 알 수 있는 작품이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성 범죄를 포르노처럼 연출하는 감독들 너무 많고(그 외에 학폭 이런 주제도) 그걸 보고 현실은 더 하다는 식으로 감싸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듯…..현실이라 괜찮으면 알탕 영화에서 툭하면 룸싸롱 가는거도 냅두지 왜 ㅠ
첫댓글 이 글 정말 공감
자극적인 표현 나올 때 마다 현실은 더 하다며 쉴드치는거 너무 싫었어
허구한 날 나오는 룸싸롱 장면도 리얼리티로 생각하며 넘길기세
너무 좋아하는 영화야. 잘 만들어진.
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인데 되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만든 영화였구나 나에게 한니발은 안소니 홉킨스 뿐....
진짜 예나 지금이나 여성 피해자를 보여줄때 폭력적으로 표현할때 너무 많아서 불쾌했어 심지어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조차도....
세련됐다 정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질 정도
ㅁㅈㅁㅈ 진짜 묘하고 좋은 영화여...
이 영화 보면서 굉장히 불편한데 직접적으로 여성혐오적인 씬은 많지 않아서 왜일까 했거든... 아주 공감되고 제대로 짚은 글이다 잘 읽고가
넘 좋은 글이다
이 글 너무 좋다..
양들의 침묵 진짜 좋은 영화야..
말은 리얼하게 연출하려 했다지만 능력부족에 그거 자극적인걸로 때려박아 감추려는걸 누가 몰라..한남들은 그거 저급하게 소비하는데 혐오스러움.왓챠에 양들의침묵 이후 클라리스와 피해자 모습을 보여주는 미드 클라리스도 좋더라
와 역시 거장..
와 찜만 해놓고 안봤는데 바로 틀었음.
지들 능력부족+여성 대상 범죄를 자극적으로 느껴서 좃같이 표현하는거잖아. 그래놓고선 현실은 더 하다고? 아니지 그냥 니들이 그걸 즐기는거지.
와ㅋㅋ 지렷다ㅋㅋ 하면서
누가 더 자극적으로 ‘현실감’있게 표현하나 경쟁하는거잖아. 그리고 그 ‘현실’에서 더 짜릿한걸 원하고.
그냥 여자들의 불행포르노, 그걸 원하는거지.
기레기들이 항상 여자가해자, 여자피해자에 초점맞춰 글쓰는거랑 같은 맥락이라 생각함
이거 후반에 증거를 찾으러 가는 현장 스튜디오 이름도 myself였나? 그래서 주인공이 내면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현장으로 들어가서 상처입고, 또 결국엔 이겨낸다는 상징적인 연출도 좋았음
와 영화보고싶어진다
오늘 이영화 봤는데 글까지 읽으니 너무 좋다
바로 이런게 세련된 연출이지 한국 남감독들의 저급한 연출만 보다가 저 영화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드디어 좀 작품다운 작품을 보게 됐을 때의 기쁨이란
와 나 이영화 엄청좋아하는데 진짜 영화가 불편하고 뭔가 무섭고 그랬거든 직접적인 표현들이 거의 안 나오는데 왜 그럴까 했더니 이런 이유때문이였네 진짜글 올려줘서 고마워
와...방금 영화보고 연어중인데 보는내내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거든 이거 보니까 내가 찝찝하다고 느낀 장면이 다 이장면들이네 너무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