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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를 구경하고 그 인근에 있는 조정래 문학관에 들렀다. 문학관의 외관은 평범한 벽돌 2층집이었
는데 내부는 깔끔하게 大河小說 '아리랑' 문학에 관한 모든 자료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선 건물 현관에 있는 소설 '아리랑' 의 친필 원고에 압도당했다.
그 원고의 높이가 한 3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나는 '아리랑'을 읽어보지 못했다. 우리를 김제 여관에까지 경찰 순찰차로 태워다 주신 죽산면의
그 친절하신 파출소장이 '아리랑'을 읽었는데 전 12권이라고 한다. 소설의 내용이 좀 암울하지만
그 당시 민초들의 심경을 잘 대변하고 있고. 자기는 현재 10권까지 읽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조정래는 그의 문학관에 '아리랑' 집필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 진열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배려한 노력이 여기저기 돋보였다.
상기 사진은 '아리랑' 문학관 내에있는 '징게맹갱외에밋들'의 커다란 포스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에밋들은 '너른 들' 평야를 일걷는 말이니 곧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이라는 뜻이다.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그 뜰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 넓은 들녁을 어느 누가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표현되었다.
또한 '징게맹갱외에밋들'과 '나락'들은 조선을 침해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첫번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조정래 문학관 관람을 마치고 우린 택시를 불러 다시금 죽산면으로 갔다. 가는 도중의 그 광활한 평야는
一望無際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너르고도 너른 푸른 들녁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해 주었다.
손님들이 지나가고 있는 이 들녁은 옛날엔 바다였다고......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이었다.
죽산면에 내려 우리의 도보여행은 다시 시작됐다. 아직까지 바다가 보이진 않지만 푸른 들녁을
가로지르는 2차선 국도를 걷는다는 일은 분명 상쾌하고도 삽상한 일이었다.
국도를 걷다보니 국도변의 밭에는 보리가 여물어가고 있었다. 국도변 인도에도 여기저기 보리가
피어 있다. 분명 밭에서 자라야 할 보리가 인도에 흩어져 알맹이가 여물어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보리 모가지를 꺽어 솔가지불에 구워먹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달콤하고도 흰 풋보리 육즙의
향기가 새록새록 연상되었다.
보리 모가지 몇개를 꺽어 풋풋한 보리의 곡향을 맡으며 옛고향 동심원의 세계에 젖어보는 낭만을 잠시
가져 본다. 마음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길을 두 나그네는 이처럼 정처없이 걷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가다 보니 농부들이 모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모판 바닥에 먼저 흙을 얇게 뿌리고, 그 흙위에 이제 마악 눈이 나기 시작한 볍씨를 뿌리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는 이 모든 작업이 기계로 자동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이 순박하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농부님이 KBS에서 나왔느냐고 먼저 농을
거신다. 난 그의 어깨를 감싸고 웃으며 흥겹게 포즈를 취했다.
김제를 겨우 벗어났지만 가도 가도 만경평야는 끝이 없었다. 보리보다 훨씬 웃자란 이상한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가는 도중에 농부들을 만나 물어보니 Italian grass라고 말해 주었다. 3개월이면 충분히
사료가 될만큼 잘 자라서 경제성이 높은 수입종자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2014년까지는 가축사료의 90퍼센트 이상을 자급목표로 농민들은 정부와 계약재배를 하여 납품
한다는 것이다. 1950-60년대 춘궁기의 그 보릿고개를 난 선연히 기억하고 있건만 지금은 보리도 거의
가축사료용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많다는 것이다.
격세지감이었다. 분명 먹고 사는 기본적인 경제문제는 넘어섰지만, 인심은 각박하다 못해 척박해지고
인성이 오간데 없는 도시를 벗어난 이 여행길에 나서니 아무런 잡념이 없어지고, 집에서 운동부족으로
먹는 것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지만 걷다보니 쉬 공복감이 밀려오고, 저녁엔 단잠을 이룰 수 있다는
이 자체가 그리 행복할 수 없었다.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이 없으면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걷기운동이라도
이처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여행길은 아침과 점심은 간단한 백반으로 때웠다. 5-6천원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오전 8시 40분에 시작된 걸음이 오후 1시에 겨우 동네 백반집에서 6천원 짜리 육개장과 맥주
한 잔으로 달게 먹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의 계획엔 내일(5월 10일) 선유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내일 오전 정각까지 군산항에
도착하려면 최소한 오늘은 옥산면까지 걸어야 하는데 어림짐작으로 35키로 이상 걸어야 할 거리이다.
나의 발은 그가 응급처치 해줬다. 먼저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터트리고 그 실을 뽑아내지 않은 채
소독을 해서 거즈를 붙이고 반찬고로 고정시킨 처방이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무리하게 걷다 보니 물집이 터진 바닥밑에 다시 물집이 도지는 것이었다.
갈수록 그와의 거리가 멀어진다. 어제만 해도 그와의 거리가 300미터를 벗어나지 않았건만,
오늘 오후엔 1키로 정도 뒤처진다.
이 거리는 전신주 한 칸의 길이가 50미터이니까 그와 떨어진 거리를 전신주를 세며 짐작해 보건만
나중엔 전신주의 숫자도 가물가물 헤아리기 어렵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옥산면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그가 말한다. 저 제방까지 가면 바다이니 잠간
보고 가잔다.
그를 따라 그 제방위에 서보니 바다가 아니라 새만금 방조제로 바닷물의 유입이 없어 갈대만 무성한
광할한 황무지였다.
현지민들이 그래도 밀물때면 바다물이 갯펄 도랑까지 밀려는 온다는 것이다.
우린 옥산면에 숙박시설이 있느냐고 물었건만 그들은 옥산면엔 숙박시설이 없다는 것이었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옥산면에 들어서면서 우린 숙박사설이 없으면 인근 대야읍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시서 숙박을
해결하고 내일 군산항까지 걸으려면 꼭두새벽부터 다시 걸어야 하니 이 도보여행이 처음으로 약간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 떡인가? 옥산찜질방 유도간판이 보인다. 이리도 반가운 일이 어디 있으랴!
앞으로 1.5키로만 더 가면 찜질방이 있다는 반가운 표지판이다.
드디어 오후 7시경 옥산 찜질방에 여장을 풀었다. 사람들이 모두 우리가 목포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에 대단히 놀랜다.
진쨔냐고 말이다. 모두들 우릴 힐끗힐끗 처다본다. 우리는 샤워시설에서 샤워를 하기 전 열받은
발바닥부터 먼저 식혀야 했다.
도보여행은 한 4키로 정도 걷다 잠간 쉴때 꼭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식혀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시장도 했다. 옥산 찜질방 식당에서 삼겹살 한근을 시켰다. 허브 한증막이어서 그런지 삼겹살
위에 말린 허브를 듬뿍 뿌려줘 숯불에 굽는 삼겹살의 육질이 향기롭게 입안에 가득 고여온다.
맥주 한 병에 소주 3병을 시켜 둘이 다 마셨다.
은근하게 술기운이 오른 나는 그를 팽개치고 여자들의 모임에 끼여 도보여행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죽산면에서 그 할머니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안재워주드라고 했더니 일행중의 한 할머니가
아니 남자들을 어떻게 믿어 당연히 안재워주지 하며 맞장구를 치셨다.
다른 젊은 여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요즘 세상에 순순히 누가 재워주겠느냐며 나더러 통닭찜에
소주나 마시라고 한다.
그녀들이 주는 고기와 술도 받아마시고 다시 그의 자리에 와보니 그는 오늘의 여행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가 모처럼 나를 웃겼다. 자기가 한증막의 바둑판위에서 도보여행일기를 쓰고 있으니까 어떤 여자가
슬금슬금 자기앞으로 다가오더니 아저씨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란다.
그가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그 여자가 얼굴을 붉히면서 자기는 아저씨가 사주 보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하더란다. 나는 껄껄 웃었다.
그래 뭐라고 했나? 그는 그저 웃고만 있다. 나 같으면 어찌 그리 쪽집게처럼 맞추냐고 아줌마 한 번
봐드릴까 라고 말하겠다고 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 다음엔 뭐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아 무조건 아줌마 대운이 터졌다고 하는 거지 하는 나의 엉터리
말에 그가 다시 껄껄 웃는다.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 나왔는데 달밤이다. 밤하늘이 아름답다. 파아란 별이 차가운 꽃처럼 무수히
피워있는 환상적인 밤하늘을 디카에 담았는데 사진이 젬뱅인 내가 찍은 사진치곤 꽤나 예술적인
작품인 것 같다.
이 날 밤은 그냥 골아떨어져 푹 단잠을 이루었다.
옥산 찜질방 식당에선 아침 8시가 돼야 식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군산 선유도행 여객선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6시 30분에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 첫 걸음은 대략 시속 5-6키로 정도의 속도이지만. 그 뒤론 시속 4키로 정도의 속도를 우리는
유지했다. 여기서 군산항까진 적어도 25키로 이상은 된다,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아침도 못먹고 걷자니 꽤나 고달프기만 하다.
집에 있을 땐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걷다 보니 제때 식사를 못하면 허기가 져서
걸음걸이가 용이롭지 못하다.
멀리 군산 시내의 시가지 모습이 눈앞에 있건만 길은 멀다. 그가 지니고 있는 지도의 길을 이탈하여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피하고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연결되기 마련이지 않겠느냐 그리고 이 논둑길을 걷는 것이 더 정서적으로 포근하고 빠를 것 같은
마음에서 였다. 현지 마을 주민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그의 배낭에 꽂아있는 깃발을 보고 대단하다고 여기까지 며칠 걸렸냐고 묻는다.
14일이 걸렸다고 그가 말하면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잘가시라고 그들은 손을 흔들었다.
논둑길을 한참 가다 보니 낮은 담장집에 할머니두 분이 계셨다.
그 할머니들에게 우린 목포서 여기까지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인데 아침밥을 못먹었으니
할머니 드시는대로 한 상만 차려줄 수 없느냐고 말을 건넸다.
할머니들은 모두다 걸작들이다.
"거짓말이지 거기가 어디라도 여기까지 걸어와 말도 안돼. 그건 그란다하고 나도 만사 몸이
귀찮은 사람이요. 아고 못해라 어떻게 밥상을 차려줘." 라고 말했다.
난 다음부턴 잠자리, 밥상 구걸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난 내 능력을 그에게 보이고 싶었건만.......그는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침 9시경 군산 시내에 입성하여 아침밥을 파는 식당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할수없이 슈퍼에서 빵과 우유로 간단히 요기를 하자고 그가 말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난 저 젊은이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물어보고 안되면 그리 하자고 그에게 말했다.
그 젊은이에게 물었더니 있다고 하면서 친절히 우리를 데리고 24시간 운영하는 기사식당으로
안내해 줬다.
그와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목포고를 나온 고향 후배였다.
우리와 같이 걸으며 식당까지 안내해준 것 까지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그는 이 집이 닭곰탕이 맛있다며
고맙게도 식사비까지 내고 가면서 꼭 건강하게 여행을 잘 끝내시라고 말했다.
이런게 고향사람들의 정인가 보다.
그래서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를 만나면 반가운가 보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그런 은혜를 입고도
그와 통성명은 했지만 그의 연락처를 묻지 못했다. 조금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연락처라도 교환했으면 다음에 그가 서울에 오면 그에게 소주라도 한 잔 사줄 수 있었으련만....
밥을 먹고 나니 한결 걷기가 순조로웠다. 드디어 군산연안여객터미날앞 방파제에서 잠시 쉬며 우린
발바닥을 식혀주었다.
내 발바닥은 아직도 욱씬거린다. 아침내내 6시간 동안 쉬지않고 걷고 있으니 발바닥인들 힘들다고
말하지만 주인은 들은척도 안하니 내 발바닥은 어디에 하소연을 하랴.
내가 도보여행을 한지 3일만에 첨 접하는 바다는 짭쪼롬한 소금내음을 품은 해풍이 내 가슴을 잔잔히
스밀고 들어왔다. 가슴이 그만 뻥 뚫릴것 같은 시원하고도 푸른 바다였다.
드디어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삽상한 해풍이 전신을 보드랍게 감싸는 봄바다!
이런 봄바다를 배를 타고 여행한다는 것은 열마나 상쾌한 일인가? 그리고 도대체 얼마만에 해보는
바다여행인지 가물가물하기만 한 도시의 삶이 배위에서 바라보이는 육지만큼 저 멀리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갑판위에 올라 다시 발바닥을 식히며 풍광을 구경하기 바뻤다. 한참 있으니 한기가 몰려온다.
그와 나는 2층 이등선실에 올라 푹신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는 곧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그는 참 건강하다. 하루 세끼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또 저녁에 소주 한 잔 할때도 꼭 안주와 밥을 잘 챙겨
먹는다. 난 술 마시면 안주와 밥을 잘 안먹고, 술만 급히 마시다 금방 취해버리는 내 음주습관과
비교하면 그가 더 애주가다운 생각이 든다.
선유도에 도착했다. 먼저 무녀도에서 승객들을 하선시킨 후 다리로 연결돼 있는 지근거리의 선유도에
기항했다. 부두에 내리니 선유도는 군산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부두가 만원이다.
오늘이 일요일이니 그들은 도시로 나가고 우리는 그동안의 무리한 도보여행길의 휴식을 위해 섬을 찾은
것이데 이렇게 사람들은 섬을 오고 간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부두엔 벌써부터 민박유치 경쟁이 치열하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삼십대 사나이가 민박 뿐만 아니라
선유도 관광과 해설까지 친절히 잘해드리겠다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그의 승합차에 올랐다.
민박집은 부두에서 한 4키로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가는 도중에 이 望主峰을 카메라에 담았다.
옛날 옛적에 이 선유도로 귀양온 선비가 임금을 그리워하다 죽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이 망주봉을 지나 우린 그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오후 3시가 가까워졌는데 우린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해 백반을 시켰는데 보아하니 조금 전 손님이
물러갔는지 손님이 먹다 남은 매운탕이 먹음즉스러웠다.
난 민박집 할머니에게 이 매운탕 먹어도 돼느냐고 말했더니 할머니가 드신다면 고맙지요 라고 말한다.
어디가나 한국 음식의 양은 많다. 다 먹지 못한 음식은 버리기 십상인데 우리가 그 매운탕을 먹겠다니
할머니는 반가운 것이다. 자연산 광어 매운탕이라고 말씀하셔서 다시 한 번 덮혀달라고 말했다.
시장하기도 했지만 매운탕 맛이 그만이었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우린 선유도 풍광을 찾아나섰다.
할머니 말씀에 이 곳 산에는 고사리 취나물 곰치등 산나물이 지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대부분 나물을 뜯어간다는 것이다. 길가에는 별로 없지만 산중으로 들어가면
한 두차례 제사지낼 고사리를 꺽는 것은 누워 식은 죽 먹기란다. 아니나 다를까 난 길가에서 고사리
두 개를 발견하였다.신비롭다.산나물이 이렇게 길가에까지 퍼져있다니........
물때는 썰물이었다. 선유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다다르니 물이 거의 빠져 백사장에서 한 3백미터
떨어져 있는 섬이 백사장과 연결되었다.
간만의 차가 심한 이곳은 하루에 두차례씩 어김없이 모세의 기적이 연출되는 바다였다.
다만 백사장과 섬의 길이가 짧은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그 쪽 섬으로 무심코 발을 옮기던 나는 깜찍
놀랐다. 그 섬으로 가는 돌길위에서 난 무언가 퍼덕거리는 생명체의 몸부림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한 30센치 정도 되는 숭어 한 마리가 연유를 알수 없는 사유로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퍼덕거리고 있었다. 난 이게 왠 일이야 하며 그 숭어를 잡았다.
잡았다기 보담 그냥 맨손으로 건진 것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지 않겠는가.
그가 말했다. "야 ! 너 참 눈도 밝구나 ...." 그렇다. 살림은 눈이 보배이다 라는 말이 헛되지 않았도다.
우린 이 숭어를 건져올린 행운의 스냅사진을을 남기게 되었다.
그에게 숭어를 넘겨주고 난 그 돌밭길을 더 따라 가보았다. 큰 참숭어 한 마리 더 있을 줄 그 누가
아랴 라는 심정으로 가봤으나 더 이상 이런 행운은 없었다.
되돌아 오는데 그는 이 숭어가 불쌍했는지 바다에 방생해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가 보니 그 놈은 배를 뒤집고 어렵사리 아가미로 숨을 쉬긴 하는데 소생하여 바다로
되돌아 갈 그런 에네지는 분명 없어 보였다. 난 한참 망설이다 그 놈을 전리품으로 다시 건져 올렸다.
민박집 젊은이도 참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민박집 바로 뒤에 있는 몽돌해수욕장의 낙조를 보러 갔다.
참 자연은 항상 신비롭기만 하다. 같은 섬인데도 어떤 지역은 백사장이고 어떤 지역은 이처럼
몽돌이다. 이 작은 몽돌이 생성되기까지 그 얼마나 많은 억겁의 세월이 흘렀을까?
지천으로 깔려있는 그 부드러운 몽돌을 만져보니 젊은 여인네의 다리보다 더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환상적인 일몰을 구경하려 했는데 이 날은 구름이 많아 "팬태스틱"을 외치지 못했다.
돌아와 오랫만에 우럭회에 소주를 마셨다. 물론 이 날 맨손으로 건져올린 숭어 이야기가 화제였다.
당연히 이날 뜬 숭어회를 옆자리의 관광객에도 대접했다. 열명이 넘는 대단위의 가족여행이었다.
난 인사를 청했다. 가족관계를 물었더니 장모님과 맏사위, 그리고 맏딸 등 처가집 단합모임이었다.
그런데 그 중 시댁식구가 한 명 끼어있었다. 그래도 이 가족은 시댁 식구라도 한 명이 끼어있어
대단하다고 내가 말했다. 조선 팔도 어디를 가봐도 모계사회로 이미 돌아간 조선은 대부분 처가집
식구들과 놀러다닌데 그래도 이 댁은 모범케이스라고 농을 던져 그들과 금방 웃고 친해졌다.
회를 더 먹으라고 우리에게 권하며 그 맏사위는 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고 나이는 66세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우리도 은행 다니다 그만 두고 친구끼리 이리 여행다닌다며 그와 세상사는 이야기를 했다.
그 집 식구의 매운탕이 그대로 다시 남아 난 우리 우럭회의 서더리를 내일 아침 지리로 끓여 같이 먹고
그 매운탕으로 식사를 하겠다고 했더니 그러시라고 한다.
아파트에선 서로 이름도 모르고 지내기 일쑤인데 이처럼 이 곳에 오니 금방 친해지는 이유는 오붓이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처럼 가져보는 여유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린 민박집에서 2일을 유숙하기로 했다.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하여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가자니
그 유명한 선유도의 풍광을 제대로 구경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교장댁과 작별하는 사이 난 부안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그렇게 찾아봤던 제비를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입추가 넘으면 전깃줄에 새까맣게 앉아 있던 그 많은 제비떼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이것이 내내 화두였는데 아침을 마치고 우리의 옷가지들을 빤후, 그 빨래감을 빨래줄에 널고 있는데
참 신비롭게도 지지배배 제비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농촌은 온갖 화학비료로 오염되어 아마도 제비들은 농촌을 버리고 이처럼 섬이나
바닷가에 그들의 둥지를 마련한게 아니려나 생각하며 주인장한테 물으니 매년 돌아온다는 것이다.
꼭 자기네 처마에 집을 짓고 다른 집 처마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그렇게 못짓게 해도 이 놈은
어김없이 집을 짓고 새끼를 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금년에는 이 놈이 전등위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난 신기하여 제비집을 한참 처다 보았다. 분명 집안에는 제비 한 마리가 부화를 위해 알을 품고 있었다.
어떨때는 꼬리만 보이고 어떨때는 머리만 보이는 그 놈은 수시로 몸을 움직여 알에 산소를 공급해
주며 새끼의 부화를 위해 지극정성 집을 떠날 줄 몰랐다.
아침 식사하기전 민박집 바로 옆집의 풍경이다. 어떤 늙은 할아버지가 우두커니 바다를 내다 보고
있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펐는지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옛시골 풍경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자식들은 다 육지에서 살고 본인은 도시의
아파트 생활이 갑갑하여 이 곳 선유도에서 여생을 홀로 보내시며 가족이 그리울 때 간혹 가다 한 번씩
도시 나들이를 하는 민박집 주인의 오촌 형제였다.
5월11일 10시경 우린 선유도 풍광을 찾아 나섰다. 서울엔 몹시도 비가 온다고 잠시 쉬어가라고
그의 모바일폰에 문자가 오는데도 이곳은 쾌청하기만 하다.
선유도 부근엔 네개의 섬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그 섬 모두가 두개의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었고,
인도교는 사람과 자전거 오토바이만 통행이 허용되어 있었다.
다리가 참 아름다웠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그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넜다.
인도교를 지나니 장유도였다. 장유도는 삼면이 조그마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항구조건를 갖추고 있었다.
먼 옛날 폭풍우를 만나면 어선들이 전부 이곳으로 대피하였고, 장유어화라 하여 밤에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들의 등불이 장관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섬은 조그마했고 어디를 가나 팬션에 민박집들이다.
장유도를 지나 대장도를 건너갔다. 물새 5마리가 편대비행을 하며 끼룩끼룩 우리를 반긴다.
대장도 할매바위가 산의 육부능선에 서있다. 할매바위가 말한다.
아고! 내 새끼야! 언저녁에 그리 비오고 바람불드니
괜찮냐 빨리 돌아온나, 내 늬 줄려고 쑥떡 개놨다.
고기잡이를 떠난 손주녀석을 애타게 기다리며 걱정하는 모습이었고, 가까이 기보니 영낙없이 치마를
두른 할매바위의 형상이었다.
대장도 어느 민박집 구경을 했다.,. 수석과 분재의 대가다운 모습으로 늙은 두 부부가 오손도손
살고 있는 그 집의 뜰을 바라보며 잠시 나그네의 여심을 달랬다.
대장도 구경을 마치고 우린 무녀도로 향했다. 다리를 건너니 무녀도의 역사표시판이 우리를 반긴다.
옛 무녀도의 명칭이 [서드이]였다는 데서 난 감회가 새로웠다.
이미 고려시대 초부터 사람들은 이 무녀도에서 삶을 영위했으니, 이 섬의 역사는 천년도 넘었건만,
그 당시 생존조건이 얼마나 척박했으면 이처럼 [서드이]라고 했을까? [서드이]는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살수 있다.]라는 뜻이니 이 얼마나 심오한 사상인가, 잠시 고려시대 선조들의 그 강인한 삶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세한 무녀도의 역사는 위 사진을 참조하기 바란다.
초분과 모감주나무의 군락지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모감주 나무의 군락지는 찾았지만 초분은 찾을 수가 없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초분 장례풍습을 지키고 있었다니...
초분은 이중장례이다. 초상이 나면 시신을 돌무더기위에 눕히고 풀을 덮어
初葬을 지내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그 시신의 뼈만 간추려 정식장례를
지내는 풍습인데
지금은 그 풍습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한다.
나그네의 여심은 그 초분 돌무더기 묘곽이라도 찾아보려 했건만
관광객을 위한 표지판 배려가 없었고,
그 초분이 있을 만한 지역엔 폐그물과 플라스틱 약품통만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초분의 석곽묘를 찾지못하고 선유도로 다시 돌아오니 점심때였다. 선유도의 조그만 횟집을 찾아
5월의 별미인 갑오징어회와 라면을 시켰는데 별미였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관광객은 우리뿐이었다,.. 마침 횟집에서는 낮 열두시에 종업원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소라를 삶고 있었다.
이처럼 횟집에서 12시에 점심을 먹는다는 건 평일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난 넉살좋게 소라를
좀 얻어먹고 싶다고 말해 소라 한 접시를 서비스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보건소에 들러 그와 나는 치료를 받았다. 그는 팔에 붉은 돌기물과 같은 염증이
나있어 약물처방을 받았고, 난 발바닥을 소독받았다.
그에게는 9백원의 치료비가 나왔고 난 공짜였다.,치료를 마치고 민박집으로 향하는데
우체국앞에 선유도수영 표지판이 서있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선유도에 수군절도사가 근무하는 수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랑대첩에서 尙有十二의 전선을 이끌고 왜군의 전선 155척을 전멸시킨 대승리를
이끈 후 곧 바로 이곳 선유도 수영으로 회군하여 12일간 푹 쉬셨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그후 다시 전선에 진군하셨고 마지막 옥포해전에서 단 한 놈도 왜놈들을 살려주지 말라는
명령을 부하 수병들에게 내린다. 이순신장군의 죽음은 여러 설이 있지만, 마지막 해전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다 갑자기 그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었다,
새처럼 가벼운 몸으로 그는 판옥선의 간판을 누비며 전투를 독려하다 왜군의 조총에 맞았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그의 죽음이라는 해설문이 써있었다. 향년 54세였다.
그의 우국충정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선유도수영자리가 지금의 우체국자리이고 그 당시
수군절도사들의 선정비가 남아있다고 해서 그 자리를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못했다.
오후 3시경 민박집에 돌아왔다. 시간도 남고하여 나와 그는 낚시를 즐겼는데 이 날 몹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불면 대개 낚시는 꽝이다.
그렇지만 그와 나는 사이좋게 놀래미 한마리씩을 낚아 방생해 주었다. 씨알이 너무 작은 어린
고기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밤 부터 이곳에도 바람이 몹시 거칠게 불고 비도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다.
내일 군산으로 가야하는데 폭풍이 불어 배가 출항하지 못하면 어떠나 걱정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끝으로 민박집 젊은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39세의 노총각이었다. 늙은 부모님을 봉양하며
민박업을 하는 친구로 참으로 효자였다.
단 결혼을 아직까지 하지 못해 그의 늙으신 어머니가 관광객을 상대로 밥과 찬을 만드니 그 얼마나
고생이랴.
선유도 으뜸민박집의 그가 좋은 색시감을 얻어 알뜰살뜰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를 기원해 본다.
첫댓글 여름 휴가철이 되기 전에 무녀도에 가서 일도 보고 쉬다 오고 싶은데 골드 님의 글을 보니 서둘러 가봐야 겠네.
으뜸 민박집에서 머무르소서. 시설은 좀 그렇지만 민박집 젊은이가 서글서글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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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을 할려면 기본적인 돈이 있어야 하겠구만, 숙박비 식비 약값 등 만만히 않겠는데......
1인 기준으로 하루 약 5만원 예산잡으시면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숙박비 2~3만원, 식대 끼니당 5~6천원.둘이가면 숙박비가 절약되어 조금 적게 들지만 그만큼 한잔 하게 되서 그게 그겁디다. ㅋㅋ
자네의 푸짐한 넉살(?)과 섬광처럼 스치는 직관이 두고두고 생각날것이네.
이런 여행을 할때는 비위살이라도 있어야 살수 있다는 생각이었네![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5.gif)
다른 뜻은 없었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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