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잊으랴! 어찌 6·25를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날 때는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6·25전쟁 중이던 1953년 발표됐다.
예쁘게 핀 꽃과 꽃밭을 만든 자상한 아빠와 딸아이를 상상하던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알고 나면 목이 메는 노래다.
6·25전쟁의 시작과 끝이 모두 여름이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나팔꽃도 활짝 피는 계절이다.
아주 단순한 동요, 하지만 전쟁의 슬픔을 형상화한 무거운 노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6·25를 모른 체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전쟁 중에 발생한 국군과 미군의 잘못만 부각되는 야만의 시대다.
소포클레스가 그랬다. 전쟁은 언제나 악한 자보다 선한 사람부터 먼저 죽게 된다고.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6·25가 가까워져 오면 지금의 장년 세대는 이 노래를 배우고 불렀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작사했다. 6·25가 내일모레, 평화는 결코 힘과 분리될 수 없다.
노병 홍종수님의 고백
해병 7기로 6·25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홍종수(94) 옹의 눈시울은
70여년 전 그때를 회상하자 금세 붉어졌다.
휴전 때까지 776명의 전우를 가슴에 묻으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괴롭습니다."
붉은색 해병대 모자를 쓴 노병은 18살이 되던 해인 1951년 4월 2일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8남매 중 막내인 그는 전남 해남군 화원면 성산리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경찰이었던 형님을 찾으러 집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가족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며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던 까닭이다.
당시 나이가 어려 입대를 위해선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었고,
구국의 열망으로 가득 찬 그는 부친의 도장을 훔쳐 동의서를 제출했다.
두달가량 신병 훈련을 받고 투입된 전장은 양구 도솔산(해발 1천148m)이었다.
당시 해병대 1연대는 미 해병 제5연대로부터 임무를 넘겨받고 도솔산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군 제5군단 12사단, 32사단과 혈투를 벌였다.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험준한 지형의 도솔산은 주변에
가칠봉(1천142m)·대암산(1천314m) 등이 연결된 요충지였다.
북한군 12사단과 32사단이 이곳을 방어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다.
이곳에서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17일간 치열한 고지전이 이어졌다.
신병이었던 홍 일병은 도솔산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맨몸으로 겪어냈다.
당시 도솔산 일대에는 북한군 4천200여명이 중무장한 채 진지를 구축하고
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지뢰를 중턱부터 매설하고 많은 수류탄과 박격포,
자동화기를 사용해 우리 군의 진격에 완강하게 맞섰다.
이에 해병대 제1연대는 6월 11일 조명탄과 화력의 지원이 없는 암흑상태에서
야간 기습공격을 개시해 먼저 대암산을 차지했다.
최종 목표인 도솔산 수복은 6월 18일에 시작했다.
해병대는 항공·포사격 지원을 받고 오전 9시께 공격을 시작해 이튿날 자정께
동쪽 능선을 따라 야간 공격을 실시, 오전 5시 30분 도솔산 정상을 점령했다.
이어 이미 점령한 도솔산 정상에 집결한 해병대는 적들을 추월 공격하면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17일간의 전투에서 해병대는 적 2천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군 피해는 전사 123명, 부상 582명, 행방불명 11명 등이었다.
홍 옹은 "전투에 이겼지만, 당시 기억은 참혹하다"
"적 총탄에 바로 옆 전우가 쓰러져 죽어가면서 '나 좀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저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입대 전에는 닭도 잡지 못했는데 쓰러진 전우를 보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혈전 끝에 24개 고지를 탈환하고 '해병대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13번 목표 지점을 악전고투 끝에 점령할 때 2소대장이었던 김문성 소위가
머리에 총을 맞고 전사한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목표 지점을 향해 피땀을 뒤집어쓰고 돌진한 선후배,
동기 전우들을 잊을 수 없다"
도솔산은 '무적 해병'의 신화가 시작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8월 25일 해병부대를 순시한 자리에서
일개 연대 병력만으로 적 2개 사단을 물리친 것은 경탄할만한 공헌이라며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친필 휘호를 수여한 까닭이다.
이에 해병대는 양구군과 함께 매년 6월 도솔산 전투 전승 기념식을 이어가고 있다.
주일석 해병대 사령관은
"우리 후배들이 무적 해병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해병대 참전용사 선배님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살 수 있도록 피와 땀을 흘려주신
6·25 참전용사 선배님들,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영웅"이다.
노병들이 목이 메이게 군가를 부른다
전우야 잘자거라
전우에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 자거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아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 팔선 무너진다
피가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 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그리운 금강산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인가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 만 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기괴한 만물상과 묘한 총석정 풀마다 바위마다 변함없는가
구룡폭 안개비와 명경대물도 장안사 자고향도 예대로인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 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