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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합회 (三合會)
18세기 후반 이후 타이완[臺灣(대만)]을 포함한 화난[華南(화남)] 각지 및 동남아시아의 화교(華僑) 간의 민간비밀결사인 천지회(天地會)의 별칭. 삼점회(三點會)·첨제회(添弟會)·소도회(小刀會) 등과 함께 홍문(洪門)으로 총칭되었으며, 통일적인 조직이 아니고 지방마다 많은 조직이 있었다. 교통·운수관계의 노동자나 광산노동자·유민층을 구성원으로 하고 청(淸)나라 말에는 일부 재야인물과 농민도 포함되었다. 그 기원에 관해서는 1760년대에 푸젠[福建(복건성)]의 장저우에서 창립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성(異姓)인 사람들이 피로써 의형제를 맺어 평상시에는 상호부조의 기능을 하였지만, 1786년 임상문(林爽文)의 난 이후 타부제빈(打富濟貧)·순천행도(順天行道) 등의 구호를 내걸고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며, 19세기 이후에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주장이 등장하였고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출처: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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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현대문헌에서 나타나는 삼합회의 기원은 1760년대로 당시 중국의 복건성으로,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정조(正祖 1752∼1800) 8년 이후가 되겠네요... 다시말하면, 문헌대로 따르면, 삼합회의 기원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인 정조시대에 생겨난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1786년 난을 일으킨, 임상문이라는 인물이 삼합회의 성격을 알기위하여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시 같은 문헌을 참고하겠습니다.
---------------------------------------------------------------------------------------------------------- 임상문의 난 (林爽文-亂)
중국 청(淸)나라 때 타이완[臺灣(대만)]에서 일어난 반란. 수령 임상문은 푸젠성[福建省(복건성)] 핑허현[平和縣(평화현)] 출신으로 타이완의 장화현으로 이주하여 북로(北路)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三合會)의 지도자가 되었고, 남로(南路)의 장대전(莊大田)과 협력해서 조직을 확대했다. 당시 타이완의 청나라 관리들은 극악무도하여 인민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임상문은 1786년 조정에서 천지회를 탄압하는 것을 계기로 봉기했으며, 신화(新化)와 주뤄[諸羅(제라);嘉義(가의)]를 점령하고 농민정권을 수립, 연호를 순천(順天)이라 정하고 대맹주(大盟主)에 추대되었다. <탐관을 정벌하고 민생을 안정시키자>는 강령을 내걸고 군기도 엄정히 했다. 다음해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반란군 내부 향당(鄕堂)간의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한족(漢族)의 총병(總兵) 시대기(柴大紀)와 협감총독(陝甘總督) 복강안(福康安)의 활약에 힘입어 진압에 성공하였다. 임상문은 잡혀서 베이징[北京(북경)]으로 압송, 처형되었다. 평정을 위해서 처음으로 향용(地主自衛軍)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뒤에 일어난 백련교도(白蓮敎徒)의 저항과 태평천국운동의 탄압방식에 본보기가 되었다.
<출처:야후백과>
---------------------------------------------------------------------------------------------------------- 즉, '임상문'의 난은 '대만'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복건성출신인 임상문이 '대만(타이완)'으로 이주하여 천지회의 수장이 되면서 발생한 난으로, 새로운 '연호'를 내세운 것으로, 스스로 황제의 위치에 오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임상문이 주도한 천지회의 난을 현대문헌에서 말하는 삼합회의 기원으로, 일단,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저는 '임상문'이라는 이름을 조선왕조 실록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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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임상문”에 대한 총 검색건수 : 8 건
국역 4건
태조(0) | 정종(0) | 태종(0) | 세종(0) | 문종(0) | 단종(0) | 세조(0) | 예종(0) | 성종(0) | 연산군(0) | 중종(0) | 인종(0) | 명종(0) | 선조(0) | 선조수정(0) | 광해군일기(중초본)(0) | 광해군일기(정초본)(0) | 인조(0) | 효종(0) | 현종(0) | 현종개수(0) | 숙종(0) | 숙종보궐정오(0) | 경종(0) | 경종수정(0) | 영조(0) | 정조(4) | 순조(0) | 헌종(0) | 철종(0) | 고종(0) | 순종(0) | 순종부록(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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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럼 모두 정조시대의 기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4가지 기록(위에 8로 검색된 것은 원문과 번역본을 포함한 내용입니다.)중 첫번째 '정조 24년'의 기록과, 마지막 '정조 27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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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조 24권, 11년(1787 정미 / 청 건륭(乾隆) 52년) 11월 23일(병술) 1번째기사
황력 재자관 이진복이 황제의 만수 경전의 거행 등을 수본으로 보고하다
“ 복건(福建) 백성 임상문(林爽文) 이 무리를 모아 모반(謀叛)하여 지난해 겨울에 밤을 타서 갑자기 복건성(福建省) 대만부(臺灣府) 를 공격하여 빼앗고 잇달아 창화(彰化) · 저라(諸羅) · 봉산(鳳山) 등 현(縣)을 함락시켜 유격(游擊)·지부(知府) 등 관원이 많이 살해되었습니다. 임상문 의 본계(本係)는 복건성 포전현(莆田縣) 의 부호(富戶)입니다. 지방관(地方官)이 침학(侵虐)한다고 인심을 선동하고 재물을 내어 무리를 모아 관리를 살해하고 현성(縣城)을 빼앗아 차지하였는데, 대만부 는 복건성 동남쪽 해도(海島) 가운데에 있어 유구(琉球) 와 멀지 않으며 '동서의 거리는 1백여 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2천 8백 리'(설명: 이 내용을 보면 현재의 말레이시아 반도, 또는 베트남지역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지리적 위치입니다.) 이며 수확이 풍족하여 내지와 다를 것이 없고 산이 서리고 바다가 험하여 간비(奸匪)를 감추기 쉽습니다. 임상문 이 저라현 바다 어귀에 있는 녹항(鹿港) 이라는 곳을 점거하고 배반하고 망명한 자들을 불러들여 무리가 10여 만에 이르렀고 험고(險固)를 의지하여 출몰하며 노략질하므로, 황제가 처음에 민절 총독(閩浙總督)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고 지는 것이 서로 어금지금하여 되찾자 곧 잃으니, 황제가 매우 근심하고 민절 총독 상청(常靑) 이 늙어서 직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특별히 명하여 섬감 총독(陝甘總督) 복강안(福康安) 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행재(行在)에 나오게 하여 면대하여 기의(機宜)에 따라 처리하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2) 정조 27권, 13년(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년) 3월 8일(을축) 1번째기사
동지 정사 이재협 등이 청나라의 사정을 치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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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번(生番) 은 섬 오랑캐의 별명으로 중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남쪽 끝 바다에 있고 대만(臺灣) 에 소속되어 있는데, 작년 봄 임상문(林爽文) 이 패망했을 때 생번 으로 망명하자 생번 사람들이 그를 유인해 사로잡아 대군(大軍)에 바쳤으므로 황제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와서 조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조금 아는 대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그 수가 4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군장(君長)이 따로 없고 단지 두목 4인 만이 있을 뿐이며 얼굴 생김이 모두 어린아이 같고 또 수염도 없었으며 머리는 잘라서 옷깃을 겨우 덮을 정도였으며 더러는 이마 위와 입 밑에 괘(卦) 모양의 문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식성은 생선과 분디를 좋아하며 물재주에 능하여 마치 평지를 다니듯 한다 합니다. 안남국(安南國) 에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변고가 생겨 재작년 겨울에 안남국 사손(嗣孫)인 여유기(黎維祁) 가 자기 어머니와 함께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 광서성(廣西省) 으로 와서 급변을 고하였습니다. 광서 순무(廣西巡撫) 손영청(孫永淸) 이 역마를 달려 급히 황제께 아뢰자 황제가 크게 가엾이 여겨 사손 모자에게 묵을 집과 곡식을 주고, 즉시 총독 손사의(孫士毅) 에게 명하여 명을 받들어 군사를 동원하게 하고 전성(滇省) 등처의 군량을 운반해다가 그 사손을 데리고 수군을 지휘하여 곧장 안남 의 왕성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역적 괴수 완혜(阮惠) 는 패하여 광남(廣南) 으로 달아났고 손사의 가 거기 주둔하여 그 나라를 진무(鎭撫)하면서 승전 소식을 아뢰니 황제는 사의 에게 명하여 여유기 를 그 나라 국왕으로 책립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사의 는 품계 한 등급이 올라 모용공(謀勇公) 에 봉해졌는데 한족 으로서 공(公)에 봉해진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안남 에서 광남 까지의 거리는 2천여 리나 되는데, 황제는 또 사의 에게 명하여 광남 으로 옮겨가서 역적 괴수를 추격 생포하고 적의 잔당들도 모두 섬멸하게 하였습니다. 안남 국왕 은 나라를 다시 찾고 왕위를 이어받게 해준 은혜에 감동하여 그 종실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조회 오기 위해서 운남(雲南) 에 와 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4장 A면 【영인본】 46책 30면 【분류】 *외교(外交) ----------------------------------------------------------------------------------------------------
전체적으로 이시기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동남아시아에서 변란이 발생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대만(말레이시아반도)'에서는 임상문이 해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왕을 자처하고, 안남국의 왕이 피살되는 극심한 혼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조선정조 후기, 1780년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잘 비춰지지 않지만, 동남아시아지역의 '역적'의 소굴로 엄청난 혼란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정조대왕이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배치하여, 일본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던 시기인 것을 모두 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중, 보통, '안남국'을 '베트남'으로 해석합니다만,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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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백과에서 안남국을 검색하니까, '광남국 (廣南國)'에 대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17∼18세기 여(黎)나라 후기, 베트남 남반부에 군림했던 완씨(阮氏) 지배영역에 대해 중국인이 사용한 호칭. 유럽인은 코친 차이나[交趾支那(교지지나)]왕국이라고 불렀다. 한편 북반부에 군림하던 정씨(鄭氏) 지배영역을 중국인은 안남국(安南國)이라 부르고, 유럽인은 통킹[東京(동경)]왕국이라고 불렀다. 중국과의 무역으로 활기를 띠었던 퉈랑과 후이안[會安(회안)]이 광남성(廣南城)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완씨 지배지 전체가 그이름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1777년 정씨와 타이송[西山(서산)]의 완씨(阮氏)에 의해 멸망하였다.
<출처: 야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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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야후백과는 안남국을 베트남으로 규정했습니다만, 유럽인들은 이 지역을 '交趾支那(교지지나)'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일단 보입니다. 여기서, '지나(China)'의 언급이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의 다른 이름이 '통킹[東京(동경)]왕국'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왕이 죽고 변란이 발생한 '안남국'을 유럽에서는 '동경왕국'으로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경은 일본의 주요 핵심지역이 아닌가요?
더욱 놀라운 내용은 '교지지나 왕국'중에, 특히 북반구에 있었던 '정씨(鄭氏)'의 지배영역을 '중국인'들이 특히 '안남국'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대만에 있었던 정씨의 왕국이라?...
'대만'의 영웅 '정성공'이 아닙니까?...
이는 조선후기 유행했던, '정감록', '정도령'등의 예언서와 통하는 바가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즉, 삼합회의 기원을 살펴보기위한 위의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18세기 후반, 변란이 많이 있었던 곳은 '교지지나'지역으로 유럽인들이 '동경왕국'이라고 칭하는 곳이며, 해당지역을 '정씨'들이 다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참으로 귀중한 자료를 찾았습니다 정조대왕의 치역이 지나 남부였군요 그렇다면 서인들은 운남 과 사천 사람들이 되네요
다음글에서 '역사문헌'에서 나타나는 '정성공'과 '임상문'등의 행적을 추적하여 보겠습니다. 명-청-일본-대만 등이 모두 일치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성공'은 '일본'의 나가사키 출신이라고 현대문헌에서는 나타나는 데요, 그렇다면, 대만(류구국)의 위치 비정으로부터 200여년전 일본의 위치에 좀 더 정확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China-Taiwan-Japan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