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에게 천재라 했다. 그러나 그 말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곤 힘주어 말한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배트를 휘둘렀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보인다. 손 마디 사이로 남아있는 굳은살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에게 딱딱해지고 두툼해진 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의 훈장이다. 사람들은 또 말한다. “김건우는 비운의 천재다” 김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팔꿈치를 움직여 보인다. ‘우두둑’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말한다. “수술의 휴우증이에요” 기억할 사람은 많지 않지만 김건우는 고등학교 시절 이른바 ‘스타’였다. 박노준과 더불어 김건우는 선린상고의 ‘별’이었다. 많은 여학생들은 별들을 흠모했다.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았다. 김건우는 웃는다. 그들도 지금은 나와 같이 늙었을 거라고, 그리고 아직도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MBC 청룡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새 시대가 시작되고 서울의 푸른 용은 하늘로 승천했다. 그리고 그 유산을 LG 트윈스가 이어받았다. 그 속에서 김건우는 청룡과 쌍둥이를 함께 품었다. “힘들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짤막한 김건우의 말이다. "81년 선린상고-경북고 봉황대기 결승전 아쉬웠다" "투수는 고등학교 때 1년, 그리고 대학 때 1년 정도 했을 뿐" "타자로 MBC 입단. 훈련때 방망이가 없어 개막 한달 앞두고 투수 전향" "한가운데만 보고 던졌더니 제구 잡히고 18승에 신인왕 차지" "홈런타자 김봉연 선배 상대로 처음 던진 포크볼 시험" "87년 교통사고로 두 팔 골절. 재활 후 복귀했지만 결국 투수는 은퇴" "92년 타자 변신해 잘 나갔지만 계속 된 부상으로 결국 선수 은퇴" "97년 2군 코치로 있다가 20대 선수보다 볼 좋아 다시 선수로 컴백" "첫 등판때 관중들 기립박수, 145km 나왔다는 소리에 울었다" "97년 옛 친구 박노준 상대로 마지막 투구 던지고 최종 은퇴" “야구를 하면서 힘들었다. 하지만 행복했다” <사진=이닝>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하겠다. 당시 고등학교 때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웃음) 운동 끝나고 집에 가면 수위아저씨가 배달이 온 팬레터를 준다. 많이 올 때는 50통이 넘게 온 적도 있고, 보통 2-30 통씩 왔다. ▶상상이 안 된다. 그때는 프로야구가 없었으니까. 쉽게 생각해서 지금의 프로야구의 인기가 고교 야구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례로, 교복을 입고 전철을 타면 김건우를 알아볼 정도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이돌스타정도 될까(웃음) ▶1980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광주일고 선동렬과 대결을 했다. 그 때 나와 (박)노준이가 고 2였다. 그 경기에서 (박)노준이가 선동렬을 상대로 역전 투런 홈런을 쳐 이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결승전에서는 잘 못했지만, 예선전과 8강, 4강에서 잘 쳤었다. ▶그리고 이 해에 ‘이영민 타격상’을 같이 수상했다. 내 생에 있어서 타격에 눈을 떴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같다. 기억으로는 선린상고가 그 해 전국 4개 대회에 결승에 올라가서 우승 2번, 준우승 2번을 했다. 그리고 나는 69타수 29안타 0.446을 기록해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 상을 받는데 있어 윤학길 선배 덕이 크다.(웃음) ▶윤학길 덕이라니?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대통령배 결승에서 부산상고와 붙었다. 부산상고 선발은 윤학길 선배였다. 나도 나름 타격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윤학길 선배의 공은 손도 댈 수 없었다. 그때 선배는 좌우로 찌르는 빠른 직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를 던졌다. 그 공은 고교 1학년이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자극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물론. 자극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정말 그해 겨울에 손이 부르트도록 타이어를 셀 수 없이 많이 쳤다. 그 결과가 고 2때 이영민 타격상을 받게 한 것 같다. 그러니 윤학길 선배의 덕이라 할 수밖에.(웃음) ▶한 해가 지난 1981년, 당시 고교야구는 선린상고, 경북고, 광주일고가 빅 3을 형성했다. 그런데 그 중 강력한 우승후보로 뽑힌 선린상고는 무관의 제왕이었다. 좀 아쉽긴 했다. 특히 봉황대기는 아쉬웠다. 그 대회 4강전에서 천안북일고를 상대로 내가 완봉승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이상하게 팔이 구부러지지가 않았다. 병원에 가보진 않았지만, 팔꿈치 뼛조각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승에서 경북고를 만났다. 상대투수는 경북고의 에이스 성준이었다. 내가 던질 수 없는 상태였지만 크게 걱정은 들지 않았다. 우리 팀엔 나 말고도 (박)노준이가 있었으니까. 박노준과 김건우. 이 둘은 고교야구의 별이었다. <사진=이닝> ▶박노준과 성준의 대결이라. 물론 실력은 박빙이지만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헌데 1회 초 공격에서 우리가 3점을 먼저 득점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노준이가 슬라이딩을 잘못해 발목이 접질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게 됐다. 생각해보면, 정말 꾸역꾸역 막았다. 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으니 정상적인 공을 던질 수는 없었고 롱토스 하듯이 던졌는데, 결국 4회에 가서는 더 이상 던질 수가 없었다. ▶들어보니 두 명의 에이스를 잃은 셈이다. 결국 다른 투수로 교체됐고, 우리 팀은 6회인가 내야수들의 연속 실책으로 역전을 허용하고 지고 말았다. 아쉬웠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통령배 4강에서 경북고와 붙었다. 그리고 7회에 2 대 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1사 1,3루에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역전 찬스에다가 그전 타석에서 삼진, 땅볼로 물러났기 때문에 한 번 쳐야겠다는 오기가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서 딱 하나만 노렸다. ‘바깥쪽 직구’ ▶그 공을 노린 이유가 있었나. 그때 나는 1학년이었고, 상대투수는 3학년 진동환 선배였다. 한참 어린 후배를 상대로 직구를 던질 거라 생각하고 직구만 노렸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낮은 직구를 받아쳐 우중간을 가르는 역전 2루타를 쳤다. 그때의 공이랑 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타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는데, 투수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인가. 고 2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노준이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실상 투수 경험은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1년, 그리고 대학 때 1년 정도 했을 뿐이다. 학교를 다닐 때는 투수보다 타격이 재미있어서 타자로 나아가게 되었다. ▶재밌는 자료가 있다. 제 1회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했다. 그게 아마, 국가대표 투수가 국제 대회에 나가서 노히트 노런을 한 것이 최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선린상고 3학년이었고, 선동렬 선배는 고려대학교 1학년이었다. 재밌는 점은 대회 규정이 63년생까지만 참가할 수 있어서 나와 동기지만 한 살 많았던 노준이, 성준은 그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대회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진학했다. 한양대에 가게 된 이유가 있는가? 사실 연세대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 아버지 직장 문제가 걸려있어서 한양대에 가게 되었다. ▶진학 조건이 더 좋았었나보다. 그랬다. 그 때 아버지가 운전을 하셨는데, 취직도 알선해주는 조건도 있었고, 타 대학보다 여러모로 지원이 좋았다. 백넘버 28. 김건우는 18승 6패로 1986년 신인상을 차지했다. <사진=이닝> ▶1986년 MBC 1차 지명을 받았다. 그런데 프로에서는 타자 김건우가 아닌 투수 김건우였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사실 맨 처음에는 타자로 입단을 하고 진해로 전지훈련을 갔다. 훈련을 가기 전 배트 10자루를 사서 갔는데 일주일 만에 다 부러뜨려 버렸다. 그걸 본 이광환 선배, 김재박 선배가 배트를 각각 1자루 씩 줬는데 그것마저도 부러뜨려 버렸다. 막막하던 찰나에, 당시 청룡의 감독님이었던 김동엽 감독님이 부르시더라. “전에 봤는데 어깨가 무척 강하더라, 투수 한번 해봐라” 그렇게 투수를 하게 됐는데, 그때가 1월 말이었다. 개막 한 달 여를 앞두고 투수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투수를 하게 되었는데 어려움이 없었나. 학창 시절 투수를 잠깐 하긴 했지만 프로와 똑같을 수가 없었다. 스피드는 자신 있었는데, 제구가 엉망이었다. 코너웍이 전혀 안됐다. 그래서 마음먹은 게 그냥 맞더라도 ‘한 가운데 던지자’였다. 그렇게 던지다 보니 제구가 점점 잡히더라. 자신감도 생겼고, 야구도 술술 풀렸다. 그리고 그 해 18승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신인왕을 하게 된 비결이 있었나. 당시 청룡의 내야수비는 프로야구 최고였다. 1루수 김상훈, 2루수 김인식 선배, 유격수 김재박 선배, 3루수 이광은 선배. 정말 수비는 귀신같이 잘하는 멤버들이었다. 내가 배짱 있게 투구를 할 수 있었던 까닭도, 승수를 쌓아 신인왕을 할 수 있던 기별도 탄탄한 내야진 덕분이었다. ▶김건우 하면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시 나의 주무기는 슬라이더였다.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120Km 중반 대를 형성하면서 각이 큰 슬라이더, 요즘 말로 하면 슬러브 형태의 공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130Km 초중반까지 구속이 나오고 릴리스 포인트를 위에서 찍어 눌렀던 슬라이더, 궤적이 컷패스트볼과 비슷하게 갔었다. ▶오래된 기사 중 너클볼을 던졌다는 말이 있었다. 너클볼을 전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너클볼 그립만 책을 보고 배워서 던져봤다. 물론 제구가 잘 되지는 않았다.(웃음) ▶그런데 신인왕을 탄 다음해 부진했다. 프로 첫 해 18승을 했지만, 229이닝을 던졌다. 팔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반기 때 팔을 올리려 해도 올라가지 않았다. 구속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다른 구종을 배워야 겠다고 생각해서 익힌 게 포크볼이었다. ▶당시 포크볼은 지금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종이 아니었는데. 그 때 해태의 차동철이 포크볼을 던질 줄 알았다. 그래서 동철이한테 소주 한 잔 사줄 테니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동철이가 그립이랑 던지는 법을 대충 가르쳐 주었고, 그 날 해태와의 경기에서 바로 시험해 봤다. 제대로 들어갈지 아닐지는 몰랐지만. (잠시 생각하더니)그때 포크볼을 처음 던진 타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다.(웃음) 해태의 4번 타자 김봉연이었다. 겁이 없었지. 홈런 타자에게 당일 처음 익힌 변화구를 던졌으니. 그런데 재밌는 점은 투 스트라이크 노 볼에 포크볼을 던졌는데 기가 막히게 떨어지더라. 김봉연 선배는 예상하지 못한 변화구에 방망이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걸 본 기자들이 다음날 신문 톱면에 기사를 냈다. “김건우, 이제는 머리로 던진다”(웃음) ▶그런데 87년 9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랬다. (팔을 가리키며)당시 교통사고로 팔이 완전히 박살났다. 투수의 생명은 팔인데, 두 팔이 모두 골절이 되고 유리 파편이 온몸에 박혔다. (잠시 생각하더니)사고를 당할 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픔보다는 ‘이제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났으니. ▶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이제 김건우의 야구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재활을 했다. 재활을 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통증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버텼다. 그리고 다시 투수로 복귀를 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어떤 한계를 느꼈길래. 복귀 후 통증을 참아가며 5이닝을 던져서 승리투수가 된 적이 있었다. 스피드는 130km도 안 나왔는데 변화구로 어떻게 상대했는데, 문제가 그 다음날 숟가락을 못들 정도로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을 쉰 다음, 쌍방울 전에 등판했는데 1회부터 포볼, 포볼, 안타를 내리 맞았다. 그 다음 김기태한테 만루홈런을 맞았다. 그리고 강판됐다. 이때 드는 생각이 ‘팬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였고, 결국 투수로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결국 92년도에 타자로 전업했다. 야구를 포기할 순 없었고, 7년 만에 다시 배트를 잡았다. 하지만 경쟁력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당시 팀에 김상훈, 노찬엽 등의 강타자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뭘까에 대해 고심을 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한 게 연습 타격 때 이광환 감독님과 코치들에게 멀리 치는 것만 보여 주자였다. 폼은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멀리치는 것만 보여주니까 이광환 감독님이 4번을 시켜주셨다. ▶타자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그해 5월까지 최다안타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맞다. 그 때 안타를 많이 쳤었다. 하지만 결국 5월 중순에 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도원구장이었나. 청보 핀토스와 경기를 할 때였다. 첫 경기에서 4번 타자로 나왔는데 찬스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계속 남아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첫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 1루에 걸어 나갔다. 1루에 발을 대고 있는데, 계속 어제의 실수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도루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하지만? 슬라이딩을 잘못해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쳤다. 결국 한 달 동안 재활을 하고 7월에 복귀했다. 복귀를 해서 경기에 나왔는데, 대전구장에서.. 1루 수비 도중 장종훈과 부딪혀 손목이 골절되었다. 결국 그 해 시즌을 접어야 했다. ▶무척 아쉬웠을 것 같다. 정말 아쉬웠다. 아쉬웠던 만큼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93년 시즌을 앞두고 개인 연습을 엄청 많이 했다. 독하게 마음먹고, 스윙연습을 하는데 오른쪽 손등에 동그랗게 뭐가 튀어나오더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봤더니 손을 많이 써서 생긴 피로골절이라고. (쓸쓸히 웃으며) 이게 결국 팔꿈치 때문에 생긴 부상이라고 했다. 결국 그 해 최종적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그 때 나이가 32 였다. ▶그런데 97년 다시 투수로 복귀를 했다. 복귀하게 된 동기가 있었는가. 나는 그때 2군 트레이너 코치였었다. 그리고 당시 김영덕 2군 감독이 구단에 “김건우 코치가 재활하는 20대 선수보다 볼이 더 좋다.”며 강력하게 복귀 요청을 했다. 그 때가 7월이었다. 당시 내 체중이 93kg 이었는데, 한 여름에 파카를 입고 운동을 하면서 한 달 만에 12kg을 뺐다. 그렇게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시즌 말미에 1군에 올라갔다. ▶그 때의 감회는 어땠는가. 내가 등판하니까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해주더라.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마운드에서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빠른 볼을 던질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을 떠나 전성기 때의 볼스피드를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전력투구를 했다. 이닝이 끝나고 기록원에게 물었다. “스피드가 얼마 나왔냐”, 기록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145km 나왔는데” 이 소리를 듣고, 화장실에서 울었다. 박노준과 김건우. 어릴 때부터 야구를 같이한 친구였고, 라이벌이었다. 운명적이게도 야구 선수 김건우의 마지막 타자는 박노준이었다. <사진=미디어이닝> ▶운명적으로 97년도 야구 선수의 김건우의 마지막 타자는 박노준이었다. 그리고 둘 다 97년도를 끝으로 은퇴를 했다. 그 때를 추억해본다면. 그 때 사실 난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옛 친구와 마지막 대결이었지만 마음 편하게 던졌다. 기억에 중전안타를 맞아 내가 진 것 같다. [이덕기, leedk21@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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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건우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청룡팬 트윈스팬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
^^
"당시 청룡의 내야수비는 프로야구 최고였다. 1루수 김상훈, 2루수 김인식 선배, 유격수 김재박 선배, 3루수 이광은 선배. 정말 수비는 귀신같이 잘하는 멤버들이었다. 내가 배짱 있게 투구를 할 수 있었던 까닭도, 승수를 쌓아 신인왕을 할 수 있던 기별도 탄탄한 내야진 덕분이었다." --- 우리 LG 투수키우는 비법이 여기 있네요..
김건우 , 박노준 진짜 한시대를 풍미한선수들 ㅎ 김건우선수의 완투능력은 대단했었는데 ...
아~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아마도 90년 94년 우승당시에도 함께하지 하였을 텐데..
난 선린상고때도 박 노준선수보단 김 건우선수가 더 좋았다는^^
어린 나이에도 그때 교통사고 뉴스를 듣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아직도 LG에 몸담고 계시니 정말 좋아요. 앞으로 LG에서 코치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내 둘째 아들이 이름이 김건우라는....
요즘 왠만한 선수를 김건우 박노준 선수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듯...